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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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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우승집》은 당(唐)나라 왕유(王維)의 문집이다. 왕유는 성당(盛唐)의 관료로서, 시인이자 화가, 서가(書家), 음악가였다. 이백(李白)·두보(杜甫)와 같은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이 시선(詩仙), 두보가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데 대하여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일컬어졌다. 전아(典雅)하고 정밀(静謐)한 시풍을 이루었으며, 남조(南朝) 이래의 자연시(自然詩)를 대성시켰다. 위응물(韋應物)·맹호연(孟浩然)·유종원(柳宗元)과 함께 당나라의 대표적 자연시인이다. 회화에서도 남화(南画)의 조(祖)로 숭앙되고 있다. 문집은 《왕우승집》이 아니라 《왕마힐집(王摩詰集)》이라는 제목을 붙인 텍스트로도 전한다.

2. 저자

(1)성명:왕유(王維)(699?~759). 왕유의 생졸년은 《구당서(舊唐書)》(권190 〈열전〉 제140하 문원 하(文苑下)에 의하면 699년 생, 759년 몰이지만, 《신당서(新唐書)》(권202 〈열전〉 제127 문예 중(文藝中)에 의하면 701년 생, 761년 몰이다. 대개 《신당서》에 근거하여 생몰년을 추정한다.
(2)자(字)·별호(別號):자(字)는 마힐(摩詰)이다. 불교를 존신하였고, 자가 마힐이라서 왕마힐이라고 불렸으며, 만년의 관직이 상서우승(尚書右丞)이었으므로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렸다.
(3)출생지역:하동(河東)(현 산서성(山西省) 영제시(永濟市))
(4)주요활동 및 생애
부친 왕처렴(王處廉)은 분주(汾州)(현 산서성 분양시(汾陽市))의 사마(司馬)가 되어 하동으로 이주하였다. 모친 최씨(崔氏)는 승려 대조보적(大照寶寂) 선사를 30년간 사사했다. 왕유의 이름 ‘유(維)’와 자(字)의 ‘마힐(摩詰)’은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거사 유마힐(維摩詰)의 이름을 분리한 것이다.
15세 무렵 장안에 유학하였는데, 개원(開元) 연간부터 문학으로 이름이 높아서 왕족이나 귀현의 초대를 받았다. 현종(玄宗)의 형 영왕(寧王) 이헌(李憲)이나 현종의 아우 설왕(薛王) 이업(李業), 기왕(岐王) 이범(李範)의 궁에 출입하였다. 《집이기(集異記)》의 일화에 의하면 장안의 부시(府試)(과거 예비시험)에서 장구령(張九齢)의 아우 장구고(張九皐)와 겨루게 되었는데, 왕유가 기왕(岐王)의 악인(樂人)으로 변장을 하고서 공주(公主)의 처소에 가서 비파를 연주하고 시를 읊으며 해학을 잘하자, 기왕의 청탁으로 부시의 해두(解頭)[一等]가 되었다고 한다. 개원(開元) 7년(719) 진사에 급제하고 대악승(大樂丞)이 되었으나, 개원 8년(720) 죄를 지어 제주(濟州) 사창참군(司倉參軍)에 좌천되었다. 《집이기》에 의하면, 왕유의 악인이 황제의 춤인 황사자(黄師子)를 추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개원 14년(726) 관직을 그만두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갔다. 개원 19년(731) 부인을 잃고 남전(藍田)(현 섬서성(陝西省) 남전현(藍田縣))의 망천(輞川)에 땅을 구입하여 별장을 짓고 은둔하였다. 얼마 후 장구령(張九齢)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 우습유(右拾遺)에 취임하였다. 개원 24년(736)에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임보(李林甫)와의 정쟁에서 패하여 실각하자, 개원 25년(737) 왕유도 양주(涼州)의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에 임명되었다가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장안으로 돌아왔으며, 천보(天寶) 연간에 좌보궐(左補闕), 원외랑(員外郎), 고부낭중(庫部郎中)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망천 별장에 칩거하기도 하였다. 천보 9년(749) 모친 최씨가 죽어 복상(服喪)하여 망천에 있었고, 천보 11년(752)에 조정으로 복귀하였다. 이 해 이임보가 죽은 후, 양국충(楊國忠)에게 발탁되어 이부낭중(吏部郎中)이 되었다. 천보 14년(755)에는 급사중(給事中)에 이르렀다. 이때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현종이 파천하자, 지덕(至徳) 원년(756)에 현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다가 안록산(安祿山) 군사에게 붙잡혀 낙양(洛陽)으로 이주당하고, 안록산 정권의 급사중이 되었다. 지덕 2년(757)에 낙양이 탈환되자 귀순하였으나, 현종 대신 황제가 된 숙종은 왕유를 엄하게 문책하였다. 단 아우 왕진(王縉) 등의 노력으로,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강등되는데 그쳤다. 건원(乾元) 원년(758) 집현학사(集賢學士)에 승진하고, 중서사인(中書舎人), 급사중으로 승진하였다. 상원(上元) 2년(762)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있으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는 아우 왕진을 중앙에 복귀시켜줄 것을 청하는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를 올렸다. 왕진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복귀하게 되었는데, 이해 왕유는 졸하였다. 왕진은 왕유의 시를 편집하여 대종(代宗)에게 헌상하였다.
왕유는 수묵화(水墨畵)에 뛰어났다. 그는 먹만 사용하여 백묘화(白描畵)를 그리고 화공들이 채색을 하였다고 한다. 화풍은 오도현(呉道玄)과 비슷하였다. 정건(鄭虔)·필굉(畢宏)과 함께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어졌으며, 같은 시대의 이사훈(李思訓)보다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북송의 소식(蘇軾)은 왕유를 두고,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라고 논평하였다. 명대에 들어와 이사훈은 북종화의 조(祖)로 일컬어지고, 이에 대하여 왕유는 남종화(남화, 문인화)의 조(祖)라고 일컬어졌다.
(5)주요저작:《왕우승집(王右丞集)》

3. 서지사항

왕유가 죽은 후 그의 동생 왕진은 보응(寶應) 2년(763)에 왕유의 시를 정리하여 대종 황제에게 헌정하였다. 〈진왕마힐집표(進王摩詰集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왕유의 문집으로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판본은 일본 세이카도문고(靜嘉堂文庫)에 소장된 송나라 마사본(麻沙本)의 10권본 《왕우승집》이다. 명나라에 들어와 가정(嘉靖) 38년(1559)에는 고기경(顧起經)이 《당왕우승시집주설(唐王右丞詩集注說)》을 간행하여, 이전의 시집 6권을 10권으로 나누고 부록으로 문집 4권을 덧붙여 총 14권으로 간행하였다. 한편 청나라 조전성(趙殿成)(1683~1743)이 전주(箋注)한 《왕우승집전주(王右丞詩集箋注)》는 10책 28권이다.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 따르면 강소순무(江蘇巡撫) 채집본 《왕우승집》은 건륭(乾隆) 원년(1736)에 간행된 조전성전주본으로, 본문 28권과 부록 2권이며, 본문은 고체시(古體詩) 6권‚ 근체시(近體詩) 8권‚ 외편(外編) 1권‚ 잡문(雜文) 13권이다.
한편 왕유의 시만을 모은 《왕마힐집(王摩詰集)》이 별도로 유통되었다. 명나라 때는 원나라 유진옹(劉辰翁)이 평점(評點)을 붙인 것을 능몽초(凌蒙初)(1580~1644)가 간행한 7권본이 나왔다. 청나라 때 영가(永嘉)(현 절강성(浙江省) 온주시(溫州市))의 장손업(張遜業)이 교감하고 강도(江都)(현 강소성(江蘇省) 양주시(揚州市))의 황돈(黃埻)이 출판한 판본과, 그것을 저본으로 광서(光緖) 10년(1884)에 상해(上海) 동문서국(同文書局)에서 2차로 석인(石印)한 판본이 있다. 시집 《왕마힐집》을 보면, 전체적으로 왕유의 시 448수(타인의 詠詩 42수)와 부(賦) 1수가 실려 있다.

4. 내용

조전성 전주본 《왕우승집전주》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권1부터 권15는 시, 권16부터 권29까지는 산문이다.
서(序)(왕유(王維)), 권1 고시(古詩) 10수, 권2 고시 30수, 권3 고시 23수, 권4 고시 29수, 권5 고시 32수, 권6 고시 26수, 권7 근체시(近體詩) 39수, 권8 근체시 33수, 권9 근체시 35수, 권10 근체시 29수, 권11 근체시 29수, 권12 근체시 16수, 권13 근체시 73수, 권14 근체시 33수, 권15 외편(外編) 47수, 권16 부표(賦表) 8수, 권17 표(表) 9수, 권18 장문서기(狀文書記) 8수, 권19 서(序) 10수, 권20 문찬(文贊) 7수, 권21 비(碑) 2수, 권22 비 1수, 권23 비 2수, 권24 비명(碑銘) 1수, 권25 비명 2수, 권26 지명(志銘) 4수, 권27 애사제문련주판(哀辭祭文連珠判) 15수, 권28 논화(論畵) 3수, 권말 부록(附錄).
왕유의 시 가운데 초기의 〈소년행(少年行)〉‚ 〈농서행(隴西行)〉‚ 〈종군행(從軍行)〉 등은 변새(邊塞)의 일을 읊어 기상이 호매하다. 또한 송별과 일상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 〈송별(送別)〉‚ 〈구월구일억산동형제(九月九日憶山東兄弟)〉와 같은 절창이 많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하지만 왕유의 시에서 주목받는 것은 자연을 묘사하고 한적한 생활을 노래한 작품들이다. 왕유는 불교를 신봉하였다. 특히 안녹산의 난 때 향수전(香水錢)이라는 수계(授戒)로 군비를 조달하여 숙종의 신임을 얻은 하택신회(荷澤神會)를 지지하였다. 또한 아내의 죽음 이후 재혼하지 않고 30년간 독신으로 있었다.
왕유의 자연시는 정적이며 관조하는 듯하며 불교의 이치를 담아 ‘이선입시(以禪入詩)’의 경향을 띤 작품들이 많다. 〈산거추명(山居秋暝)〉·〈청계(靑溪)〉·〈종남산(終南山)〉·〈위천전가(渭川田家)〉·〈과향적사(過香積寺)〉 등과 〈망천집(輞川集)〉에 수록된 〈녹채(鹿柴)〉·〈죽리관(竹里館)〉·〈신이화(辛夷塢)〉 등의 오언절구는 왕유의 대표작들이다. 왕유는 그리움의 애잔한 정서를 노래한 시도 남겼고, 자연을 속세와 대립하는 청정한 세계로 묘사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왕유 시의 본령은 역시 자연을 신성한 것의 현성(現成)이라고 보고, 그 자연 속에 몰입하는 의식을 담아낸 데 있다. 자연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인간을 하나의 점경(點景)으로 처리한 것이 그의 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왕유의 산문으로는 《왕우승집전주》 권18의 장(狀)은 〈사제진신수좌산기상시장(謝弟縉新授左散騎常侍狀)〉 등 3편, 문(文)은 〈병부기청노포문(兵部起請露布文)〉 1편‚ 서(書)는 〈여공부이시랑서(與工部李侍郞書)〉 등 3편(이준(李遵)‚ 배적(裴迪)‚ 위거사(魏居士)에게 발송), 기(記)는 〈동순기(冬笋記)〉 1편이다. 권19의 서(序)는 〈송고판관종군부하서사(送高判官從軍赴河西序)〉 등 10수이다. 권20의 문찬(文讚)은 〈찬불문(讚佛文)〉‚ 〈서방변화찬(西方變畵讚)〉 등 불화와 회화에 대해 논한 7편이다. 권20~23의 비(碑)는 배요경(裴耀卿)‚ 묘진경(苗晉卿)‚ 위빈(韋斌) 등을 묘주(墓主)하는 글이고, 권24의 비명(碑銘)은 승려들을 묘주로 하는 글들이며, 권26의 지명(誌銘)은 관리 부인(夫人)들을 묘주로 하는 묘지명(墓誌銘)이다. 권27의 애사(哀辭)는 〈송진마애사(宋進馬哀辭)〉 1편, 제문(祭文)은 〈제병부방낭중문(祭兵部房郞中文)〉 등 8편, 연주(連珠)는 〈봉화성제성차사재신연주사오수응제(奉和聖製聖箚賜宰臣連珠詞五首應制)〉 5수, 판(判)은 〈궁문오불하건판(宮門誤不下鍵判)〉 1편이다. 권28의 논화(論畵)는 〈화학비결(畵學祕訣)〉‚ 〈석각이칙(石刻二則)〉이다.

5. 가치와 영향

왕유의 초기시는 풍격이 웅혼(雄渾)하였으나, 중년 이후의 시들은 충담(沖淡)의 풍격을 지니고 있다. 왕유는 도연명(陶淵明)의 전원시(田園詩)‚ 사령운(謝靈運)의 산수시(山水詩)를 계승하여 자연시를 개화시켰다고 평가된다. 왕유의 시는 위응물(韋應物)(735~789)‚ 유장경(劉長卿)(709~780) 등 중당(中唐)의 자연시인에게 전범이 되었다. 또한 당나라 사공도(司空圖)(837~908)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최근에는 사공도저작설을 부정하기도 한다), 송나라 엄우(嚴羽)(1180?~1264)의 〈묘오설(妙悟說)〉‚ 청나라 초 왕사정(王士禎)(1634~1711)의 〈신운설(神韻說)〉 등에 영향을 끼쳤다.
왕유는 개원(開元) 연간부터 천보(天寶) 9년(749)까지 망천에 별장을 완성하고, 전기(錢起)와 교류하였고, 배적(裴迪)과 주고받은 시는 〈망천집(輞川集)〉으로 엮었다. 〈망천집〉에는 망천 별장의 곳곳을 노래한 20수가 남아 있다. 왕유는 망천 별장의 곳곳을 그림으로 그려 그것이 〈망천도(輞川圖)〉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또한 후대인들에 의해 시의도(詩意圖)가 많이 제작되었다.
남송 말, 원나라 때에는 유진옹(劉辰翁)이 평점법을 예술비평의 방식으로 이용해서 《노자》·《장자》·《세설신어》·《왕마힐시집(王摩詰詩集)》·《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맹호연집(孟浩然集)》·《육방옹집(陸方翁集)》·《도연명시집(陶淵明詩集)》·《위소주집(韋蘇州集)》·《간재시집(簡齋詩集)》 등에 평점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들을 수계비점본(須溪批點本)이라고 하는데, 원나라 때 간행되어 문인들의 시문 연마에 널리 이용되었다. 수계비점본에 《왕마힐시집》이 들어 있을 만큼, 남송 말 이후 일반 문인들 사이에 널리 왕유의 시가 널리 애송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참고사항

(1)명언
• “홀로 그윽한 대숲 속에 앉아, 현을 튕기다가 다시 길게 휘파람 부나니, 깊은 숲을 사람은 알지 못하고, 밝은 달만 와서 비춘다.[獨坐幽篁里 彈琴復長嘯 深林人不知 明月來相照]” 〈죽리관(竹里館)〉
• “향적사가 어디 있는지 모르고, 서너 리를 구름 뫼에 들어가니, 고목 사이 오솔길 없거늘, 깊은 산 어디선가 종소리. 샘 소리는 아스라한 바위에 오열하고, 태양 빛은 푸른 솔에 차갑구나. 저녁 어스름의 빈 연못 굽이에서, 참선하여 독룡을 제압하노라.[不知香積寺 數里入雲峰 古木無人徑 深山何處鐘 泉聲咽危石 日色冷靑松 薄暮空潭曲 安禪制毒龍]” 〈과향적사(過香積寺)〉
(2)색인어:왕유(王維), 왕우승(王右丞), 왕마힐(王摩詰), 시불(詩佛), 왕우승집(王右丞集), 왕우승집전주(王右丞集箋注), 조전성(趙殿成), 망천집(輞川集), 망천도(輞川圖), 시의도(詩意圖), 엄우(嚴羽), 왕사정(王士禎)
(3)참고문헌
• 王右丞集箋注(趙殿成(清) 箋注, 上海古籍出版社)
• 中華再造善本-王摩詰文集(北京圖書館出版社)
• 王維集校注(中國古典文學基本叢書, 中華書局)
• 王維詩集(小川環樹·都留春雄·入谷仙介, 岩波文庫)
• 王維(都留春雄, 中國詩人選集 6, 岩波書店)
• 王維の生涯と藝術(小林太市郎, 全國書房)
【심경호】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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