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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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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학집(有學集)》은 명말청초(明末淸初)의 학자이자 문인인 전겸익(錢謙益(1582~1664))의 시문집이다. 1645년부터 1663년까지의 소작(所作)을 주로 수록하고 있다. 작자가 청나라에 출사한 뒤의 작품으로서, 시 13권, 문 37권으로 나뉜다.

2. 저자

(1) 성명:전겸익(錢謙益(1582~1664))
(2) 자(字)·별호(別號):전겸익의 자는 수지(受之), 호는 목재(牧齋)이다. 만년의 호는 몽수(蒙叟)·동간노인(東澗老人)이다. 학자들은 우산선생(虞山先生)이라 칭했다. 오위업(吳偉業), 공정자(龔鼎孶)와 더불어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로 일컬어진다.
(3) 출생지역:소주(蘇州) 상숙현(常熟縣(현 중국 강소성(江蘇省) 상숙시(常熟市)))
(4) 주요활동과 생애
명(明) 만력(萬曆) 26년(1598) 17세에 부학(府學)의 생원(生員)이 되었고, 만력 38년(1610)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림원 편수(翰林院編修)에 임명되었으며, 천계(天啓) 연간에 《신종실록(神宗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숭정(崇禎) 연간에 관직이 이부시랑(吏部侍郎) 겸 한림원시독학사(翰林院侍讀學士)에 이르렀다. 명이 멸망한 1644년, 남명(南明) 정부에서 태자태보(太子太保) 겸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고, 1646년 청(淸)에 의해 남경(南京)이 함락되자 투항하여 5개월간 내비서원학사(內祕書院學士) 겸 예부우시랑(禮部右侍郞), 명사부총재(明史副總裁)의 자리에 있었다. 곧 사직한 후 귀향하였고 이후 구식사(瞿式耜) 등과 연계하여 반청복명(反淸復明)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출옥한 뒤로는 강운루(絳雲樓)에서 저술활동을 하고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데 주력했다. 59세에 여성 시인 유여시(柳如是)를 아내로 맞아 함께 작품 활동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시인이자 비평가, 역사가, 편찬자로서 상당한 업적을 남겼으나 명청교체기에 한결같지 않은 처신을 보인바, 그에 대한 평가에는 논란이 분분하다. 전겸익의 사후에 청 정부는 그의 저술을 금서禁書로 지정했고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전 왕조의 실절失節한 신하로서 비루하게 여겼다. 이와 같은 평가는 대체로 20세기 초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쳐, 동아시아의 학자들이 그의 업적에 균형 있게 접근하는 데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5) 주요저작: 문집으로 《초학집(初學集)》과 《투필집(投筆集)》, 《고해집(苦海集)》이, 편저로 《열조시집(列朝詩集)》이 있으며, 장서(藏書) 목록집인 《강운루서목(絳雲樓書目)》도 유명하다.

3. 서지사항

《유학집(有學集)》은 강희(康熙) 갑진년(甲辰年(1664))에 추자(鄒鎡)가 편집하고 서문을 붙여 목판본으로 초간(初刊)했다. 그 이전 시기에 해당하는 문집인 《초학집(初學集)》과 마찬가지로 전겸익이 스스로 교정과 검토를 한 뒤에 출간한 것이다. 청나라 초에 금서(禁書)의 목록에 들어간 바 있으며, 그 이후에 간인된 판본에는 자구를 도려내어 고친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일부를 뽑아내어 바꾼 곳이 있다. 따라서 간혹 본문과 목록이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1685년 금궤산방(金匱山房)에서 다시 목판으로 간행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51권 16책본이 금궤산방본에 해당된다.

4. 내용

권1~13에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1~2 추괴시집(秋槐詩集)은 1645년부터 1650년까지의 작품을, 권3 하오시집(夏五詩集)은 1650년 5월부터 1년간 쓴 작품을 싣고 있다. 권4~5 강운여신시(絳雲餘燼詩)는 1651년부터 1655년까지의 작품을, 권6 추괴시별집(秋槐詩別集)은 1655년 겨울부터 1656년 봄까지의 작품을 싣고 있다. 권7 고회당시집(高會堂詩集)과 권8 장간탑광집(長幹塔光集)에는 1656년부터 1657년까지의 소작이 실려 있다. 권9~11은 홍두시집(紅豆詩集)으로 1658년부터 1661년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고, 권 12~13은 동간시집(東澗詩集)으로 1662년부터 1663년까지 쓴 작품을 수록했다.
권14~50에는 산문을 싣고 있다. 권14~21에는 〈열조시집서(列朝詩集序)〉, 〈신각진천선생문집서(新刻震川先生文集序)〉, 〈매촌선생시집서(梅村先生詩集序)〉, 〈호치과시서(胡致果詩序)〉, 〈감산대사몽유전집서(憨山大師夢游全集序)〉 등 제가(諸家)의 문집 서문(序文)을 수록했다. 권22~25에는 〈증각랑화상서(贈覺浪和尚序)〉와 〈두대장군칠십수서(杜大將軍七十壽序)〉 등 증서(贈序)와 수서(壽序)가 실려 있다. 권26~27에는 〈술고당기(述古堂記)〉, 〈황씨천경재장서기(黃氏千頃齋藏書記)〉, 〈전씨의장기(錢氏義莊記)〉 등 기문(記文)이 실려 있다.
권28~33에는 명나라의 충신 이응승(李應昇)을 위해 쓴 〈명복건도감찰어사증통의대부태복시경시충의이공묘지명(明福建道監察御史贈通議大夫太僕寺卿謚忠毅李公墓志銘)〉을 비롯하여 〈탁거병선생묘지명(卓去病先生墓志銘)〉, 〈고봉안인웅모피부인묘지명(誥封安人熊母皮夫人墓志銘)〉 등 묘지명(墓志銘)이 실려 있다. 권34~36에는 〈화주노씨선영신도비명(和州魯氏先塋神道碑銘)〉, 〈전모조태유인묘표(錢母趙太孺人墓表)〉, 〈감산대사조계육신탑원비(憨山大師曹溪肉身塔院碑)〉 등 신도비명(神道碑銘)과 묘표(墓表), 탑명(塔銘)이 수록되어 있다. 권37에는 〈연예거사전(蓮蕊居士傳)〉, 〈심절부전(沈節婦傳)〉 등 전(傳)과 〈제소백옥문(祭蕭伯玉文)〉 등 제문(祭文), 〈서거원애사(徐巨源哀詞)〉 등 애사(哀詞)가 수록되어 있다.
권38~40에는 〈답두창략논문서(答杜蒼略論文書)〉, 〈답각랑화상(答覺浪和尚)〉 등 서(書)가 실려 있는데 시문(詩文)에 대해 논한 내용이 많다. 권41에는 〈대보은사수보남장법보모연소(大報恩寺修補南藏法寶募緣疏)〉 등 소(疏)가 실려 있고, 권42에는 〈관세음보살상찬(觀世音菩薩像贊)〉 등 찬(贊)이 실려 있다. 권 43~45에는 〈신포서론(申包胥論)〉, 〈사호론(四皓論)〉, 〈감산대사탁생변(憨山大師托生辯)〉, 〈경교고(景教考)〉, 〈원휘(原諱)〉, 〈고사담원적록후기(古史談菀摘錄後記)〉, 〈서사기제태공세가후(書史記齊太公世家後)〉 등의 산문이 잡문(雜文)으로 분류되어 수록되었다. 권46~50은 제발(題跋)로 〈발방언(跋方言)〉, 〈발열녀전(跋列女傳)〉, 〈제서호죽지사(題西湖竹枝詞)〉, 〈제여지가(題輿地歌)〉, 〈제엄무백시권(題嚴武伯詩卷)〉, 〈제관매기유시(題觀梅紀游詩)〉, 〈서대비심다라니경비본후(書大悲心陀羅尼經秘本後)〉 등이 수록되었다.

5. 가치와 영향

추자(鄒鎡)는 《유학집》 서문에서 “선생은 ……삼사(三史)를 참고하여 그 재주를 단련했고, 팔대가(八大家)를 섭렵하며 그 기운을 통했으며 제자백가와 패관소설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을 다하였다. ……조화공이 만물을 그려내듯 종횡무진 변화하면서도 근본을 벗어나지 않았고, 또한 경성(景星)과 경운(卿雲)처럼 광괴(光怪)가 찬란하여 참으로 세상에 드문 바이고 그 이르는 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니 참으로 예원의 종공(宗工)이요 사림(詞林)의 절품(絶品)이다.[先生……參之三史 以鍊其才 游之八大家 以通其氣 極之諸子百氏稗官小說 以窮其用……如化工之肖物 縱橫變化 而不出乎宗 又如景星卿雲 光怪陸離 世所希見 而不自知其所至 信藝苑之宗工詞林之絶品也]”라고 전겸익의 문장을 평가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전겸익의 문장을 접한 조선의 지식인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명(明)나라 문장의 폐단은 이몽양(李夢陽), 하경명(何景明)에게서 시작되어 왕세정(王世貞), 이반룡(李攀龍)에게서 깊어지고 종성(鍾惺), 담원춘(譚元春)에게서 전환 개변되어 극도에 달하였다. 근래에 전겸익의 문장을 보니 이에 대해 논한 것이 매우 상세하였는데, 그 본말을 미루어 밝히고 폐단의 핵심을 지적한 말이 대부분 절실하고 엄격하여 다른 사람들이 보아도 수긍할 만하였다.[明之文弊 始於李何 深於王李 轉變於鍾譚而極矣 近看錢牧齋文字 論此最詳 其推究源委 鍼砭膏肓 語多切覈 諸人見之 亦當首肯]”라고 하여 전후칠자(前後七子)의 의고적(擬古的) 문학론을 비판한 전겸익의 입장에 동의했다. 그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인 이희지(李喜之(1681~1722))는 《유학집》을 읽고 《전목재문초錢牧齋文抄》를 엮은 후 붙인 자서에서 “시문을 논할 적에 귀유광을 추숭하고, 왕세정과 이반룡은 하찮게 여겼다. 원나라 말의 기풍을 칭찬할지언정 성당(盛唐)의 꼭두각시를 취하고자 하지 않았다. 특별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 폐단을 바로잡고 사람의 안목을 열어준다.[其論詩文 壇墠震川 輿儓王李 寧奬元季之猪肉 不取盛唐之木偶 別具手眼 亦可以矯弊而開人]”고 비슷한 견해를 보이며 높이 평가했다.
한편 이희지의 후배 격인 유만주(兪晩柱(1755~1788))는 《초학집》과 《유학집》을 모두 읽고 나서 “전겸익의 글은 왕세정과 이반룡이 진한(秦漢)의 글을 답습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 입언(立言)과 저술은 완곡하고 두터우며 깊고 절실하여, 읽는 이의 마음을 찌르고 뼛속깊이 와 닿아 어쩔 줄 모르게 한다. 그리고 명나라의 유문(遺文)과 고사에 대해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여러 번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其文與王李之撫襲秦漢者絶異 蓋其立言纂辭 婉篤深切 使讀之者 劄心着骨 不自聊賴 而天朝遺文故事 亦多有可徵者 故不厭其屢取]”라고 역시 긍정적으로 평가했고, 아울러 이희지의 시 〈경복궁관기(景福宮觀棋)〉가 《유학집》에 수록된 〈관기(觀棋)〉 연작시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적막한 바둑판 위엔 텅 빈 소리 울리고 寂莫枯枰響泬遼
진회(秦淮)에 가을 깊어 찬 밀물 흐느낀다 秦淮秋老咽寒潮
서늘하고 깊은 밤 등잔 아래 백발의 그림자 白頭鐙影涼宵裏
두다 만 바둑 한 판에 육조(六朝) 흥망을 본다 一局殘棋見六朝
《유학집(有學集)》 권1 〈후관기(後觀棋)〉
• “《시(詩)》가 없어진 뒤에 《춘추(春秋)》가 지어졌다. 《춘추》가 지어지기 이전의 시는 모두 국사(國史)였다. 사람들은 공자가 《시》를 산정한 것은 알지만 그 일이 역사를 편정한 것인 줄은 모른다. 사람들은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은 알지만 그것이 《시》를 계승한 것인 줄은 모른다. ……시의 의의는 역사에 근본을 두지 않을 수 없다.[詩亡然後春秋作 春秋未作以前之詩 皆國史也 人知夫子之刪詩 不知其爲定史 人知夫子之作春秋 不知其爲續詩……而詩之義 不能不本於史]” 《유학집》 권17 〈호치과시서(胡致果詩序)〉
• “대저 시라는 것은 ……천지간의 향기다. 눈은 색깔을 밥으로 삼고 코는 향기를 밥으로 삼는다. ……나는 눈을 버리고 코를 쓰노니, 보지 않고 냄새를 맡는다. 시를 비평하는 것은 향기를 품평하는 것과 대략 같다.[夫詩也者……天地間之香氣也 目以色爲食 鼻以香爲食……吾廢目而用鼻 不以視而以嗅 詩之品第 略與香等]” 《유학집》 권47 〈향관설서서원탄시후(香觀說書徐元嘆詩後)〉
• “천지가 우리 사람에게 재주를 내려, 신령한 마음과 오묘한 지혜를 부여하니, 생겨나고 생겨남은 다함이 없고 새로움과 새로움은 서로 이어진다. 《시경》이 있은 뒤에는 반드시 《초사》가 있었고, 한위 건안이 있은 뒤엔 반드시 육조가 있었다.[天地之降才與吾人之靈心妙智 生生不窮 新新相續 有三百篇 則必有楚騷 有漢魏建安 則必有六朝]” 《유학집》 권47 〈제서계백시권후(題徐季白詩卷後)〉
• “명(銘)이라는 것은 이름이다. 그 사람됨에 이름을 붙여 그 사람의 정신과 얼굴 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천백 세 뒤로도 그 글을 읽으면 담소하고 부탁하는 모습이 눈에 보이도록 해야 한다.[銘者 名也 所以名其爲人 使其人精神顏面 有傳於後世也……千百世而下 讀其文者 談笑諈諉 如或見之]” 《유학집》 권30 〈요동왕부군묘지명(遼東王府君墓志銘)〉
(2) 색인어:전겸익(錢謙益), 유학집(有學集), 초학집(初學集), 명청교체기, 강좌삼대가(江左三大家)
(3) 참고문헌
• 中國詩史(송용준,명문당, 2017)
• 錢謙益의 反前後七子論考(강정만,《중국문학연구》 9, 1991)
• 錢謙益의 詩 本質論考(강정만,《중국문학연구》 10, 1992)
• 錢謙益의 主情詩論과 創作實際考(강정만, 《중국문학연구》 11, 1993)
• 兪晩柱의 錢謙益 수용: 조선후기 지식인이 명청 교체기 문학을 읽는다는 것(김하라, 《한국문화》 65, 2014)
• 朝鮮後期文人들의 錢謙益 批評(윤지훈, 《대동문화연구》 69, 2010)
• 兪晩柱의 〈錢牧齋 年譜〉 연구(김하라, 《한국한문학연구》 57, 2015)

【김하라】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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