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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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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은 송대(宋代) 호안국(胡安國)이 저술한 《춘추》 해석서이다. 이 책은 소흥(紹興) 5년(1135)에 고종(高宗)의 명에 의해 편찬되었다. 호안국은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지금 전(傳)을 지으면서 역사적 사실은 《좌씨전》을 참고하였고, 의리는 《공양전》과 《곡량전》의 정수를 채택하였다. 큰 핵심은 맹자孟子에 근본하고, 은미한 말은 대부분 정자(程子)의 이론으로 증명하였다.”(《춘추호씨전》 〈서전수(敍傳授)〉)고 했다. 이 말에 따르면 《춘추호씨전》은 춘추삼전(春秋三傳)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그 장점을 받아들였고, 거기에 성리학 이론으로 《춘추》의 미언대의(微言大義)를 풀이한 새로운 형태의 《춘추》 해석서이다. 이 책의 해석에 보이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춘추》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견해나 당대의 시사적인 사건 등 호안국의 정치적 입장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둘째, 당시의 철학 사조였던 성리학(性理學)의 학문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호안국은 성리학의 주요 개념이나 철학 사상에 기반한 《춘추》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기존의 해석과는 차별화되는 성리학적 《춘추》 해석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2. 저자

(1) 성명:호안국(胡安國)(1074~1138)
(2) 자(字)‧시호(諡號):자는 강후(康侯), 시호는 문정(文定)
(3) 출생지역:건영(建甯) 숭안(崇安)(현 중국 복건성(福建省))
(4) 주요활동과 생애
호안국은 젊은 시절에 태학(太學)에 들어가서 정이(程頤)의 친구인 주장문(朱長文) 및 근재지(靳裁之)를 스승으로 삼았다. 철종(哲宗) 소성(紹聖) 4년(1097),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에 제수되었고, 형호남로학사(荊湖南路學事)에 발탁되었다. 숭녕(崇寧) 4년(1105), 채경(蔡京)의 무고로 제명된 이후 병을 핑계로 출사하지 않고, 형산(衡山) 자개봉(紫蓋峰) 아래에서 독서하면서 《춘추》 연구에 몰두하였다. 흠종(欽宗) 때 호안국은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제수되었는데, “밝은 임금은 학문에 힘쓰는 것을 급선무로 삼고, 성인의 학문은 마음을 바로잡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마음은 모든 일의 종주이니, 마음을 바로잡는 것은 사물을 관장하고 주재하는 저울이다.”(호인(胡寅), 〈선공행장(先公行狀)〉)라고 상소하였다. 이 일로 경남중(耿南仲)에게 미움을 받아서 지통주(知通州)로 전출되었다. 고종(高宗) 건염(建炎) 3년(1129), 장준(張浚)이 호안국을 추천하여 급사중(給事中)으로 임명되었지만, 조정으로 나가지 않았다. 소흥(紹興) 연간에 주승비(朱勝非)의 등용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주승비가 재상이 되자 호안국은 사직하고 돌아왔다. 그 후에 조칙에 의해 제거강주태평관(提擧江州太平觀)에 제수되었고, 고종(高宗)은 그가 지은 《춘추전》을 엮어서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책이 완성되자 고종은 이 책이 성인의 뜻을 깊이 터득함으로써 다른 학자들이 미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누차 칭찬하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 중에서 호안국의 학술이 너무 편벽되었다고 비판하는 자들도 많았지만, 황제는 그의 관직을 한 등급 올려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제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호안국이 관직에 있었던 것은 40년이지만, 실제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6년이 되지 않는다. 그는 사람됨이 강직하면서도 정직했기 때문에 권세가 있고 존귀한 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다. 흠종(欽宗)이 중승(中丞) 허한(許翰)에게 호안국에 대해 물었을 때 “채경(蔡京)이 정사를 맡은 이후, 사대부 중에 그에게 농락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호안국과 같이 초연하게 멀리 거리를 두고서 부패에 물들지 않은 자는 실로 드뭅니다.”라고 대답했다. 따라서 《송사(宋史)》에서는 “중흥(中興) 이래로 진퇴가 의리에 부합하는 학자는 호안국과 윤돈(尹焞)을 최고로 꼽는다.”고 평가했다. 호안국은 원대 지정(至正) 22년(1362)에 태사(太師)로 추증되었고, 초국공(楚國公)으로 추봉(追封)되었다. 명대 정통(正統) 2년(1437)에는 공자의 묘정(廟庭)에 종사(從祀)되었고, 성화(成化) 3년(1467)에는 건영백(建寧伯)으로 추봉되었으며, 가정(嘉靖) 9년(1530)에는 선유호자(先儒胡子)로 개칭되었다.
(5) 주요저작:《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자치통감거요보유(資治通鑑擧要補遺)》

3. 서지사항

《춘추호씨전》은 《춘추호전(春秋胡傳)》 또는 《호씨춘추전(胡氏春秋傳)》이라고도 불리며, 《사고전서》에는 ‘《춘추전(春秋傳)》 30권’으로 수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호안국전(胡安國傳)〉에 의하면, 소흥(紹興) 5년(1135) 4월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호안국이 지은 《춘추전》을 엮어서 편찬하라고 명하였다. 호안국의 〈진춘추전표(進春秋傳表)〉에 의하면, 책의 끝부분에 ‘소흥(紹興) 6년(1136) 1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2년이 되지 않아서 책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또 《옥해(玉海)》의 기록에 의하면, 소흥 5년(1135) 4월에 “휘유각대제(徽猷閣待制) 호안국은 옛 신하들에게 경연하고, 그가 지은 《춘추전》을 엮어서 책을 만들어 바치도록 명한다.”는 조칙이 내려졌다. 10년(1140) 3월에 책이 완성되어 상주하자, 그를 표창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에 제수하고, 조칙을 내려 은폐(銀幣)를 하사하였다. 따라서 《서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호안국의 책이 오래 전에 이미 초고가 만들어졌는데, 칙령을 받들어 5년 동안 다시 수정하여 완성된 것이라고 하였다. 책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초고에 있던 본래 글자가 한 글자도 남아 있지 않았을 정도로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한다.
현재 통행되고 있는 《춘추호씨전》의 정리본은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항주(杭州):절강고적출판사(浙江古籍出版社), 2010)이 있다.

4. 내용

《송사》 〈호안국전〉에 의하면, 고종이 호안국에게 《춘추》 강론을 부탁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춘추》는 경세(經世)의 대전(大典)이니, 실제 일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추상적인 말로 기재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지금 어려움을 구제하려고 생각하는데, 《좌씨전》은 번잡하기 때문에 공연히 시간을 허비하면서 문채를 즐기기에는 마땅하지 않으며, 성인의 경전을 깊이 생각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 내용을 통해 호안국 《춘추》 해석의 목적과 방향을 엿볼 수 있다. 호안국이 《춘추》를 경세의 대전이라고 규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춘추호씨전》은 삼전(三傳)이나 다른 해석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시대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호안국의 《춘추》 해석에는 그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서는 “이 책이 송나라가 남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에 지어졌기 때문에 당시의 일에 대해 감정을 가지고 종종 《춘추》를 빌어서 자신의 뜻을 집어넣었다.”고 평가하였다. 《춘추》 해석 속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나 시사적인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특징은 경전 해석서로는 오히려 단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명나라 때의 학자 원인(袁仁)이 《춘추호전고오(春秋胡傳考誤)》 〈자서(自序)〉에서 “《춘추전》을 지은 뜻은 당시 사회를 바로잡으려는 데 있었는데, 경문을 많이 차용하여 그의 주장을 펼쳤다. 그 뜻은 충실하나 모두가 경(經)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고 평가한 것이 그것이다. 이 책이 정치적 색채를 강하는 띠는 배경에는 왕안석(王安石)(1021~1086)과의 정치적 대립도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 책의 《서문》에서 왕안석이 학관이나 경연에서 《춘추》를 배제함으로써 심각한 국론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강력하게 비판한 점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따라서 원인(袁仁)은 호안국이 《춘추》를 국자감에 세우지 않은 왕안석의 조치에 발분하여, 임금의 명을 받아서 《춘추전》을 지었다고까지 말했다. 이처럼 호안국의 시대적 의론이 책 속에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경전 해석을 시정(時政)과 최대한 결합한 것”이 다른 《춘추》 해석서와 차별화되는 이 책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둘째, 당시의 철학 사조였던 이학(理學)의 주요 개념과 범주를 동원하여 《춘추》의 이학적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기존의 해석과는 다른 새로운 《춘추》의 대의를 제시하였다. 사실 이학적 관점에서 《춘추》 해석을 시도한 것은 정이천(程伊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춘추》를 궁리(窮理)의 요체(要諦)이자 경세(經世)의 대법(大法)으로 규정하고,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을 관통하는 《춘추》의 대의를 밝히려고 하였다. 그 후 이학적 시각에 기반한 다양한 해석이 출현했는데, “학자는 마땅히 《춘추》를 깊이 고찰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변별을 살펴야 한다.”(여조겸(呂祖謙), 《춘추강의(春秋講義)》)는 관점이 송대 춘추학 전체를 관통하는 공통의 인식이었다. 이러한 천리와 인욕이라는 이학적 개념을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춘추》의 이학적 이론화를 시도한 인물이 바로 호안국이다. “《춘추》라는 책은 인욕이 제멋대로 흐르는 데에서 인욕을 막고, 천리가 이미 사라진 데에서 천리를 보존한다.”(《춘추호씨전》 〈서(序)〉), “이 책은 마음을 전하는 핵심 경전이다. 자신의 사욕을 극복하고 덕을 닦는 방법을 미루어 밝힘으로써 군부君父를 존중하고 난신적자(亂臣賊子)를 토벌하며, 천리를 보존하고 인심을 바로잡는 내용은 반드시 다시 쓰고 재차 기록하여 간절하게 자세함을 다했다. 이에 성인의 웅대하고 훌륭한 대용(大用)이 환하게 밝혀지고 드러날 것이다.”(호인(胡寅), 〈선공행장(先公行狀)〉)
이로써 알 수 있듯이, 호안국은 천리와 인욕의 대립이라는 구도 속에서 《춘추》 전체를 관통하는 《춘추》의 대의를 밝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 세계의 올바른 윤리를 정립하려고 했다. 그는 《춘추》 속에 기록된 인간 세계의 혼란을 인욕에 의한 천리의 몰락으로 규정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즉 인욕의 억제를 통해서 천리를 보존하는 것이 《춘추》가 지향하는 최고의 이상이라고 파악하였다. 이를 통해 군신관계로 대표되는 인간세계의 다양한 관계 양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륜의 법칙을 확립하려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호안국의 《춘추》 해석은 춘추학의 이학화(理學化)를 촉진시킴으로써 송대의 《춘추》 관련 저술들이 농후한 이학적 색채를 띠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5. 가치와 영향

이 책은 송대 장흡(張洽)의 《춘추집주(春秋集注)》와 함께 송대의 표준 《춘추》 해석서로 통용되었는데, 이후에도 그러한 풍조는 지속되었다. 《원사(元史)》 〈선거지(選擧志)〉에 의하면, 연우(延祐) 2년 경의(經義)·경의(經疑) 부분에서 선비를 선발하는 법규를 정할 때 《춘추》에서는 삼전 및 《춘추호씨전》을 채용했으며, 《춘추호씨전》이 학관에 세워진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두 책은 명나라 초기까지 학관에 세워져서, 과거 시험의 정식 교과서로 채택되었다. 《사고전서총목제요》에 의하면 “명나라 초기에 과거제도를 정할 때 대체로 원나라의 옛 방식을 계승하여 정주(程朱)를 종법으로 삼았지만, 정이천(程伊川)의 《춘추전(春秋傳)》은 단지 2권으로 빠지고 생략된 것이 너무 심했으며, 주자朱子에게도 역시 완성된 책이 없었다. 호안국의 학문은 정이천으로부터 나왔고, 장흡의 학문은 주자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춘추》는 두 사람의 책으로 결정하여 채용하였다.” 그리고 명대 영락(永樂) 연간에 호광(胡廣)(1098~1156)이 《춘추대전(春秋大全)》을 편찬하면서 호안국의 책을 위주로 하였고, 과거 시험에서도 호안국의 책만을 사용함으로써 장흡의 책은 결국 폐기되었고, 호안국의 책만이 《춘추》의 표준 해설서로 통행되었다. 원대 오징(吳澄)(1249~1333)은 호안국의 책을 《춘추》 삼전과 함께 묶어서 ‘사전(四傳)’이라고 불렀는데, 이 명칭은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이 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주자가 “호안국의 《춘추전》에는 견강부회한 부분이 많지만 그 의론에는 포용 정신이 있으니, 또한 천고(千古)의 정평(定評)이다”(《주자어류·춘추》)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호안국의 책은 기존의 해석서와는 차별화되는 독창적인 해석과 이론이 담겨 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저술로 평가받는다.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의 경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조선의 학자들에게 필독서로 읽히면서 이 책과 관련된 다수의 저술을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강희맹(姜希孟)의 《춘추사전발(春秋四傳跋)》, 권벌(權橃)의 《춘추호전차의(春秋胡傳箚義)》, 정문부(鄭文孚)의 《호안국진춘추집전전(胡安國進春秋集傳箋)》, 신흠(申欽)의 《진춘추좌씨정씨호씨삼가전주차(進春秋左氏程氏胡氏三家傳註箚)》 등이 대표적이다.

6. 참고사항

(1) 명언
• “옛날 열국에는 각 국마다 사관(史官)이 있어서 당시의 일을 맡아서 기록했다. 《춘추》는 노나라의 역사일 뿐인데, 공자가 거기에 필삭을 가하니 이에 역사기록 밖의 마음을 전하는 핵심 경전이 되었다. 맹자가 핵심 요지를 드러내 밝혀 천자의 일이라고 지목하였다. 주나라의 도가 쇠미해지고 천하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난신적자들이 연이어 세상을 다스리니, 인욕(人欲)이 제멋대로 행사되어 천리(天理)가 사라져 버렸다. 공자는 천리가 보존되어 있는 존재이니,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은 것을〉 공자가 자신의 임무로 여기지 않으면 누가 가능하겠는가?[古者列國各有史官 掌記時事 春秋魯史爾 仲尼就加筆削 乃史外傳心之要典也 而孟氏發明宗旨 目爲天子之事者 周道衰微 乾綱解紐 亂臣賊子接迹當世 人欲肆而天理滅矣 仲尼天理之所在 不以爲己任而誰可]”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서(序)〉
• “《춘추》에서 호오(好惡)를 공평하게 표출했으니 《시(詩)》의 감정을 드러낸 것이며, 고금古今을 헤아렸으니 《서(書)》의 정사를 관통한 것이다. 떳떳한 법도를 흥기했으니 《예(禮)》의 규범을 체득한 것이며, 충서(忠恕)를 근본으로 삼았으니 《악(樂)》의 조화를 이끌어낸 것이며, 임의로 정한 권도(權道)의 제도를 드러냈으니 《역(易)》의 변화를 다한 것이다. 백왕百王의 법도와 만세(萬世)의 표준이 모두 이 책에 있다. 따라서 군자는 오경(五經)에 《춘추》가 있는 것은 법률에 판결 조례가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 경전을 배우는 자들은 궁리(窮理)의 요체를 믿을 것이며, 이 경전을 배우지 않고서 큰일을 처리하거나 큰 사건을 판결하면서 의혹이 없을 수 있는 자는 드물 것이다.[公好惡 則發乎詩之情 酌古今 則貫乎書之事 興常典 則體乎禮詩之經 本忠恕 則導乎樂之和 著權制 則盡乎易之變 百王之法度 萬世之繩準 皆在此書 故君子以謂五經之有春秋 猶法律之有斷例也 學是經者 信窮理之要矣 不學是經 而處大事 決大疑能不惑者 鮮矣]” 《춘추호씨전》 〈서(序)〉
• “《춘추》는 본 것을 미루어 은미한 것에 이르는데, 가장 먼저 그 사람의 의도를 필주함으로써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으니, 공평함을 행해야지 사사로움으로 난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하에 보여주었다. 가르침을 드리운 뜻이 크다.[春秋推見至隱 首誅其意 以正人心 示天下爲公不可以私亂也 垂訓之義大矣]” 《춘추호씨전》 은공(隱公) 원년
• “《춘추》는 난신(亂臣)을 주살하고 적자(賊子)를 토벌하기 위해 그 법을 만들었다. 난신적자와 함께 한 무리들에게는 더욱 엄격하니, 사람들로 하여금 난신적자가 대악(大惡)이 됨을 알아서 그들과 함께 하지 않도록 하면 난신적자가 세상에 설 방법이 없을 것이다. 세상에 설 방법이 없으면 악을 저지르는 것을 감히 권면할 수가 없어서 찬탈과 시해의 화가 그칠 것이다.[春秋爲誅亂臣討賊子而作其法 尤嚴於亂賊之黨 使人人知亂臣賊子之爲大惡 而莫之與 則無以立於世 無以立於世 則莫敢勸於爲惡 而篡弑之禍止矣]” 《춘추호씨전》 환공(桓公) 2년
(2) 색인어:호안국(胡安國),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 호씨춘추전(胡氏春秋傳),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춘추학(春秋學), 삼전(三傳), 사전(四傳), 이학(理學)
(3) 참고문헌
• 《春秋胡氏傳》(胡安國, 杭州:浙江古籍出版社, 2010)
• 《春秋公羊學史》(曾亦·郭曉東, 上海:華東師範大學, 2017)
• 《春秋學史》(趙伯雄, 濟南:山東敎育出版社, 2004)
• 《春秋學史》(戴維, 長沙:湖南敎育出版社, 2004)
• 〈송대 사대부의 《춘추》관에 대한 연구〉(이원석,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규장각》30, 2007)
• 〈《春秋》 三傳과의 비교로 본 胡安國 《春秋》 해석의 특징〉(김동민, 한국양명학회, 《양명학》37, 2014)
• 〈胡安國의 《春秋》 해석을 통해 본 宋代 春秋學의 특징〉(김동민, 한국동양철학회, 《동양철학》43, 2015)

【김동민】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3.10.3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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