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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解題集

동양고전해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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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대흔(錢大昕)은 청대(淸代) 건가(乾嘉) 연간 관료이자 오파(吳派) 출신으로 당대 고증학(考證學)을 대표하는 학자이다.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을 모방한 본서는 전대흔이 젊어서부터 독서하다 터득한 것(수필(隨筆)·찰기(札記) 등)을 모아 가경(嘉慶) 4년(1799) 20권으로 완성하였으며 고증적 측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2. 저자


(1) 성명:전대흔(錢大昕)(1728~1804)
(2) 자(字)·별호(別號):자(字)는 효징(曉徵), 호(號)는 신미(辛楣), 죽정(竹汀), 별호(別號)는 죽정거사(竹汀居士), 잠연노인(潛硏老人)
(3) 출생지역:강소성(江蘇省) 가정현(嘉定縣)(現 중국 상해시(上海市) 가정현(嘉定縣))
(4) 주요활동과 생애
전대흔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수재(秀才)인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학적(古學的) 가학을 익히면서 신동으로 알려졌고, 소주(蘇州)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서 수학하며 왕명성(王鳴盛)·왕창(王昶) 등과 교제하였으며, 15세에 제생(諸生)이 되어 시부(詩賦)에 뛰어나 ‘오중칠자(吳中七子)’로 거론되었다. 건륭(乾隆) 16년(1751) 황제가 남순(南巡)하자 부(賦)를 바쳤고, 이어진 향시(鄕試)에서 뛰어난 성적으로 거인(擧人)을 하사받아 바로 내각중서(內閣中書)에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북경으로 올라가 본격적인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건륭 19년(1754)에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翰林院)과 첨사부(詹事府)에서 서길사(庶吉士) 편수(編修), 시강학사(侍講學士), 소첨사(少詹事) 등을 역임하였고, 상서방(上書房) 행도(行徒)와 일강(日講) 기거주(起居注)에 충원되었다. 이 무렵 기윤(紀昀)·대진(戴震)·주균(朱筠) 등 일류 학자들과 절차탁마하면서 중서(中西) 천산학(天算學)을 연구하였고, 황명을 받들어 《열하지(熱河志)》, 《속문헌통고(續文獻通考)》, 《속통지(續通志)》,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등의 편찬에 참가하였으며, 산동·하남·절강·호남의 향시(鄕試) 정부고관(正副考官)을 지냈다.
건륭 39년(1774) 광동학정(廣東學政)으로 나아갔으나 이듬해 부친상으로 귀향하였다. 이후 남경(南京)의 종산(鍾山)·소주(蘇州)의 자양·송강(松江)의 누동(婁東) 서원(書院)의 주강(主講)이 되어 소진함(邵晉涵)·이문조(李文藻)·이예(李銳)·주준성(周駿聲)·손성연(孫星衍) 등을 비롯하여 2,000여 명의 제자를 양성하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사후(死後)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오파(吳派) 출신으로 한학(漢學)과 고학(古學)을 중시하면서도 초월하여 전문(專門) 학술을 널리 섭렵하는 가운데 경학(經學)·소학(小學)·천산(天算)·전장제도(典章制度)·씨족(氏族)·금석(金石)·지리(地理)·교감(校勘)에 밝았고, 특히 사학과 고증에 뛰어났다.
(5) 주요 저작
《경전문자고이(經典文字考異)》, 《성류(聲類)》,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항언록(恒言錄)》, 《삼사습유(三史拾遺)》, 《제사습유(諸史拾遺)》, 《원사씨족표(元史氏族表)》, 《원사예문지(元史藝文志)》, 《의년록(疑年錄)》, 《항언록(恒言錄)》, 《사사삭윤고(四史朔閏考)》, 《삼통술연(三通術衍)》, 《금석발미(金石文跋尾)》, 《금석문자목록(金石文字目錄)》, 《잠연당시문집(潛硏堂詩文集)》, 《죽정일기초(竹汀日記鈔)》 등이 있다. 이상은 모두 《가정전대흔전집(嘉定錢大昕全集)》에 수록되어 있다.

3. 서지사항


전대흔이 젊어서부터 필기한 독서록을 모아 본서를 완성한 것은 가경(嘉慶) 4년(1799)이고, 출판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나던 해인 가경 9년이다. 이것이 초간본이다. 이후 가경 11년에 《여록(餘錄)》 3권도 출판되었다. 1876년에 절강서국(浙江書局)에서 중간(重刊)되었다. 본서는 광서(光緖) 10년(1884) 호남 장사(長沙)의 용씨가숙(龍氏家塾)에서 다른 저술과 함께 《가정전씨잠연당전서(嘉定錢氏潛硏堂全書)》에 포함되어 출판되었다. 본서는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중간본(重刊本)이 소장되어 있다. 1997년 남경(南京)의 강소고적출판사(江蘇古籍出版社)에서 간행된 《가정전대흔전집(嘉定錢大昕全集)》 10권본에는 《가정전씨잠연당전서》가 수록되었고, 2016년에는 일문(佚文)과 부록을 더한 11권의 증정본(增訂本)이, 그 후신인 봉황출판사(鳳凰出版社)에서 발행되었다. 진문화(陳文和) 등이 표점(標點)한 《가정전대흔전집》은 간자체(簡字體)로 이루어져 있다. 2015년 본서에 주석을 단 《십가재양신록전주(十駕齋養新錄箋注)》가 정우흑(程羽黑)에 의해 상해서점(上海書店)에서 출판되었다. 아래의 명언은 《가정전대흔전집》의 간자체를 정자체(번자체(繁字體))로 기술한 것이다.

4. 내용


‘십가재(十駕齋)’는 전대흔의 서재(書齋) 명칭으로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의 “노둔한 말도 열흘을 달리면 또한 거기에 이를 수 있다. 사공(事功)은 멈추지 않는 데에 있다. [駑馬十駕, 則亦及之. 功在不舍.]”에서 나온 ‘노력’을 의미한다. ‘양신(養新)’은 송대(宋代) 장재(張載)의 《장자전서(張子全書)》 권13 〈잡시(雜詩) 파초(芭蕉)〉에서 따온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의미한다. “파초 심 다 자라자 새 가지 나오는데, 새로 말린 새 심이 몰래 뒤따르네. 배우고자 하노니 새 심에서 새 덕의 배양을, 말아 나온 새 잎은 새 앎을 깨우쳐주네. [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본서는 전대흔이 젊어서부터 수많은 책을 독서하면서 견득(見得)한 것을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을 모방하여 조례(條例)에 따라 기록하였다. 그 가운데 전저(專著)에 이용된 것은 제외하고 문장을 다듬고 모아 20권을 완성하였다. 그 뒤에도 계속 찰기를 모아 《여록(餘錄)》 3권을 완성하였으니, 합하여 모두 23권이다.
내용은 《일지록》처럼 별도로 장별의 구분 없이 비슷한 내용으로 묶었다. 1~3권이 경학, 4~5권이 소학, 6~9권은 사학, 10권은 관제(官制), 11권은 지리, 12권은 성씨(姓氏), 13~14권은 고서(古書), 15권은 금석, 16권은 사장(詞章), 17권은 술수(術數), 18권은 유술(儒術), 19~20권은 고증(考證)이다. 특히 13~10권은 평론이나 논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구성과 달리 내용적 측면에서 경세(經世)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일지록》과 크게 다르다. 이는 아마도 그의 관료생활이 건륭 연간 문자옥(文字獄)이 빈번하였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5. 가치와 영향


본서는 규모의 측면에서 고염무의 《일지록》에 미치지 못하지만, 엄밀하며 정통한 고거(考據)의 측면에서 《일지록》보다 높이 평가된다. 이는 완원(阮元)이 찬집(纂輯)한 《황청경해(皇淸經解)》의 권439~442에 《십가재양신록》 가운데 경학, 소학 등과 관련된 179조목이 수록된 점에도 확인된다. 특히 《소학》에서는 고어(古語)뿐만 아니라 몽골어에도 뛰어났다. 아울러 본서는 전대흔 생애의 마지막 저술이라는 측면에서 일생의 역작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6. 참고사항


(1) 명언
‧“고서(古書)에서 천도(天道)를 말한 것은 모두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위주로 말한 것이다.……모두 길흉의 운수를 논한 것이니 천명(天命)의 성(性)과는 자연히 다른 두 가지의 일이다.[古書言天道者, 皆主吉凶禍福而言.……皆論吉凶之數, 與天命之性, 自是兩事.]“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권3, 〈천도(天道)〉〉
‧ “대학(大學)의 도(道)는 친민(親民)에 있다.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를 싫어하는 것, 이것을 일러 백성의 부모’라는 것은 바로 친민의 실제이다. 송유(宋儒)가 ‘親’자를 고쳐 ‘新’자로 삼고, 특별히 《시경(詩經)》 〈강고(康誥)〉의 ‘작신민(作新民)’ 한 마디를 인용하였으나, ‘如保赤子’도 〈강고〉의 글임을 알지 못하였다. 보민(保民)은 보적(保赤)과 같으니, 친민의 뜻에 더욱 간절하다. 그러므로 성인이 보민하는 도는 부(富)와 교(敎)의 두 가지 대단(大端)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친’자는 이를 갖추기에 충분하니, ‘친’자를 ‘신’자로 고친 것은 교(敎)에 편중된 것이다. ‘친’자의 뜻이 ‘신’자의 뜻보다 크니, ‘친’은 타인과 나 사이에 간격이 없는 것을 말한다. ‘신’은 바로 귀한 자가 천한 자를 다스리고 현자(賢者)가 불초(不肖)한 기상을 다스리는 것이지만, 백성을 다친 자처럼 보살피는 자는 이와 같지 않다. 후세에 도를 다스리는 방법이 삼대(三代)만 같지 못한 까닭은 바로 백성의 안녕을 추구하지 않고 백성의 불선(不善)을 힘써 방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덕을 버리고 형벌을 사용하면서도 스스로 옛날에 오염된 것을 바꾼다고 말하면서 본원이 날마다 박한 데로 달려갔다. 삼가 말하건대, 《대학》의 ‘친민(親民)’은 마땅히 그 고본(古本)을 따르는 것이 낫다.[大學之道在親民. 民之所好好之, 民之所惡惡止, 此之謂民之父母, 此親民之實也. 宋儒改親爲新, 特因引康誥作新民一語, 而不知如保赤子, 亦康誥文. 保民同于保赤, 于親民義尤切. 故聖人保民之道, 不外富敎二大端, 而親字足以該之. 改親爲新, 未免偏重敎矣. 親之意大于新, 言親則物我無間, 言新便有以貴治賤, 以賢治不肖氣象, 視民如傷者, 似不若此. 後世治道所以不與三代, 正爲不求民之安而務防民之不善. 于是舍德而用刑, 自謂革其舊雜, 而本原一趨于薄矣. 竊謂大學親民, 當仍舊文爲長.]” 〈《십가재양신록》 권6, 〈삼사(三史)〉〉
‧ “삼사(三史)는 《사기(史記)》, 《한서(漢書)》 및 《동관기(東觀記)》를 말한다.……당(唐)나라 이후로 《동관기》가 실전(失傳)되자 이에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를 삼사의 하나로 해당시켰다.[三史謂史記漢書及東觀記也……自唐以來 東觀記失傳 乃以范蔚宗書當三史之一]” 〈《십가재양신록》 권6, 〈삼사(三史)〉〉
‧ “정사맹은 이미 〈열전(列傳)〉 제90권에 보이는데 〈순리전(循吏傳)〉에도 정사맹이 있다. 두 편은 모두 한 글자의 차이도 없다. 또한 이광전(李光傳)의 끝에 그의 아들 이맹전(李孟傳)의 일이 115자 서술되어 있는데 다시 별도로 이맹전을 입전하였다. 이희정(李熙靜)은 이미 〈열전〉 제116권에 보이는데, 제220권 〈충의부전(忠義附傳)〉에 이희정이 있다. ‘정(靜)’과 ‘정(靖)’은 동음이니 실제로는 한 사람이다.[程師孟已見列傳第九十卷, 而循吏傳又有程師孟. 兩篇無一字異. 又李光傳末附其子孟傳事百十五言, 而又別爲孟傳立傳. 李熙靜已現列傳第百十六, 而第二百二十忠義附傳又有李熙靖. 靜靖同音, 實一人也.]” 〈《십가재양신록》 권7, 〈일인중복입전(一人重複立傳)〉〉
‧ “당송(唐宋)대의 좌우복야(僕射)·좌우승상(丞相)·좌우승(丞)은 모두 좌(左)를 높음으로 삼는다. 원(元)대의 좌우승상·좌우부승(副丞)은 우(右)를 높음으로 삼는다. 과거에서 몽골과 색목인(色目人)은 우방(右榜)이라고 하고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을 좌방(左榜)이라고 하니, 또한 우(右)를 높음으로 삼는 것이다. 명(明)대 육부(六部)의 좌우시랑(侍郞)·좌우부도어사(副都御史)·좌우급사중(給事中)·좌우포정사(布政使)는 좌(左)를 높음으로 삼는다.[唐宋左右僕射·左右丞相·左右丞, 皆以左爲上. 元左右丞相·左右丞, 則以右爲上. 科場蒙古色目人稱右榜, 漢人南人稱左榜, 亦右爲上也. 明六部左右侍郞·左右都御史·左右給事中·左右布政使, 仍以左爲上]” 〈《십가재양신록》 권10, 〈좌우(左右)〉〉
‧ “옛날에 하늘을 말하는 학설은 개천(蓋天)·선야(宣夜)·혼천(渾天)의 삼가(三家)가 있었다. 선야의 학술은 실전된 지가 오래되었다. 《주비산경(周髀算經)》은 개천의 학술이다. 그 책은 주공(周公)에게서 나왔고, 상고(商高)가 전수 받았으니, 바로 산술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양웅(揚雄)이 저술하여 논의하면서부터 개천설이 억제되고 혼천설이 펼쳐졌으며, 그 뒤에 채옹(蔡邕)·갈홍(葛洪)의 무리들이 모두 그 설을 종주로 삼자, 개천의 뜻은 오래 동안 버려져 강술(講述)되지 않았다. 근세 유럽인들이 중국에 들어와 천문기구를 만들어 혼개통헌(渾蓋通憲)의 명칭이 있고 나서야 천문가[步天家]들은 개천설이 혼천설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고, 평의(平儀)의 사용도 혼의(渾儀)에 비해 더욱 간결하면서도 쉽고 분명하였다. 그러나 살펴보건대, 옛 양대(梁代) 최영은(崔靈恩)은 이미 혼천과 개천을 합일하여 논의하였다. 북제(北齊)의 신도방(新都芳)도 이르기를 ‘혼천은 복관(覆觀)으로 〈장형(張衡)의〉 《영헌(靈憲)》을 문장으로 삼고, 개천은 앙관(仰觀)으로 《주비산경》을 법도로 삼는다. 복(覆)과 앙(仰)은 비록 다르지만, 대요(大要)는 동일하다.’고 언급하였다. 그렇다면 고인 가운데 일찍이 선각자가 있었다. [古之言天者, 有蓋天宣夜渾天三家. 宣夜之學, 久失其傳. 周髀則蓋天之術也. 其書出於周公, 商高所授, 乃算術之最古者. 自揚子雲著論, 抑蓋申渾, 其後蔡邕葛洪之徒, 咸宗其說, 而蓋天之義, 久置不講. 近世歐羅巴人入中國製器, 有渾蓋通憲之名, 而後步天家知蓋之不殊於渾, 而平儀之用, 視渾儀又簡而易曉. 然古之梁代崔靈恩, 已有渾蓋合一之論. 北齊申都芳亦云, 渾天覆觀以靈憲爲文, 蓋天仰觀以周髀爲法. 覆仰雖殊, 大歸是一. 則古之人早有先覺者矣.]” 〈《십가재양신록》 권17, 〈개천(蓋天)〉〉
‧ “위진(魏晉)의 사람들은 노장(老莊)을 청담(淸淡)이라고 하였고, 송명(宋明)의 사람들은 심성(心性)을 또한 청담이라고 하였다. 공자(孔子)가 ‘나의 도(道)는 하나로 관통되어 있다.’〈라고 하자 증삼(曾參)이 ‘夫子의 道는〉 충서(忠恕)일 뿐이다.’라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양지(良知)·양능(良能)은 효제(孝弟)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용(中庸)》에서 공자가〉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고 하였다. 후세에 도를 말하는 자는 효제와 충신(忠信)을 천근한 것으로 삼고 마음으로 공허하고 요원(窈遠)한 경지로 치달았으니, 진 사람들이 말한 청담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고염무(顧炎武)가 ‘옛날의 청담은 노장을 말하였지만 지금의 청담은 공자와 맹자를 말한다.’고 하였다.- 왕안석(王安石)의 《오경신의(五經新義)》도 청담이다. 경사(京師)가 함락되니, 그 화가 진(晉)의 경우와 같다.[魏晉人言老莊淸談也, 宋明人言心性亦淸談也. 孔子言吾道一以貫之, 忠恕而已矣. 孟子言良知良能, 孝弟而已矣. 故曰道不遠人. 後之言道者, 以孝弟忠信爲淺近, 而馳心於空虛窮遠之地, 與晉人淸談, 奚以異哉? -顧寧人云, 昔之淸談談老莊, 今之淸談談孔孟.- 王安石之新經義, 亦淸談, 神京陸沈, 其禍與晉等.]” 〈《십가재양신록》 권18, 〈청담(淸談)〉〉
‧ “육조(六朝) 시대에 도인(道人)은 승려[沙門]를 말하는 것으로 사인(士人)의 풍기와 통하지 않는다.……이는 도인이 도사(道士)와 확실히 구별된다는 것이다. 《남사(南史)》 〈송종실전(宋宗室傳)〉에는 앞에서 ‘혜림도인(慧琳道人)’이라고 기술하고 뒤에서 ‘사문혜림(沙門慧琳)’이라고 서술하였으니, 이는 도인이 바로 승려이다.[六朝以道人爲沙門之稱, 不通於習士.……是道人與道士較然有別矣. 南史宋宗室傳, 前稱慧琳道人, 後稱沙門慧琳, 是道人卽沙門.]” 〈《십가재양신록》 권19, 〈도인도사지별(道人道士之別)〉〉
(2) 색인어:전대흔(錢大昕), 십가재양신록(十駕齋養新錄), 오파(吳派), 고증(考證), 찰기(札記), 일지록(日知錄), 통유(通儒), 치학(治學)
(3) 참고문헌
‧ 嘉定錢大昕全集(錢大昕, 江蘇古籍出版社)
‧ 嘉定錢大昕全集(錢大昕, 鳳凰出版社)
‧ 十駕齋養新錄(錢大昕, 浙江書局)
‧ 十駕齋養新錄(錢大昕, 臺灣商務印書館)
‧ 十駕齋養新錄箋注(錢大昕, 程羽黑, 上海書店)
‧ 〈錢大昕及其十駕齋養新錄硏究〉(廖秀珠, 臺灣國立政治大學碩士學位論文, 1987)



【이원석】

동양고전해제집 책은 2020.08.2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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