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가 말하였다. “공자도 옛것을
전술傳述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 않았는데, 선생은 어찌하여 《태현경》을 창작하였습니까?”
注+송함宋咸이 말하였다. “양자揚子가 《태현경太玄經》을 지었으니 이른바 현玄은 1이다. 천지天地와 음양陰陽이 참비參比하여 1이 3을 낳으니 3의 수數를 취하였기 때문에 3방方이 있고, 3이 9를 낳기 때문에 9주州가 있고, 9가 27을 낳기 때문에 27부部가 있고, 27이 81을 낳기 때문에 81가家가 있다. 마침내 81수首를 지었기 때문에 243표表와 729찬贊이 있다. 매번 2찬贊인데, 하루가 729찬贊이어서 주천周天의 도수度數(365)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1년의 절후節候와 종률鍾律(황종률黃鍾律)과 북두성北斗星과 오행五行이 모두 드러난다. 지금 혹자는 공자孔子도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였을 뿐 창작하지 않았는데, 양웅이 《태현경太玄經》을 창작해서는 안 된다고 의심하였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공자孔子도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였을 뿐 창작하지는 않았는데, 어째서 《태현경》을 창작하였느냐는 말이다.” 양자揚子가 말하였다. “〈《태현경》은〉 그 일(내용)은 〈《역경》을〉 전술한 것이고, 그 글(
체례體例)은 창작한 것이다.”
注+옛날에 노팽老彭이 옛일을 전술傳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자孔子는 자신을 그에게 견주면서 다만 전술傳述하기만 할 뿐 창작創作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태현경》은 옛일을 전술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가一家의 책을 이루었으므로 창작한 것이라는 말이다. 혹자는 “공자孔子가 일을 전술한 경우는 있지만 어찌 창작한 적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송함宋咸이 말하였다. “공자孔子의 세대를 당하여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낮아지고 쇠퇴하여 시서詩書가 뒤섞여 어지럽고 예악禮樂이 무너져서 선왕先王의 제도가 하나도 바른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도道에 연연하여 옛일을 전술하였다. 그리하여 시서詩書를 산삭刪削하고 예악禮樂을 정하며, 노나라 역사책을 요약하여 《춘추春秋》를 편수하고, 다시 제후諸侯와 문인門人과 더불어 다시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를 의논한 연후에야 각각 제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도를 밝히고 가르침을 세우는 것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어찌 다시 창작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가〉 옛것을 전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니, 마땅히 창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양자운揚子雲의 시대를 당해서는 이와 같지 않아서 육경六經이 모두 성인聖人의 산정을 거쳤으나, 한漢나라가 일어난 지 이미 오래되어 점점 제유諸儒들에 의해 토의하고 정정되었기 때문에 옛일 중에 전술할 만한 것이 없었고, 자신이 몸을 굽혀 왕망王莽의 조정을 섬겼으니, 스스로 책을 저술하여 일가를 이루지 않으면 무엇으로 자기의 도를 밝힐 수 있었겠는가.”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경은 《주역》보다 더 훌륭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태현경太玄經》을 지은 것이다. 자子에서 진辰에 이르고, 진辰에서 신申에 이르고, 신申에서 자子에 이르는데, 앞에 갑甲을 놓아서 27장章을 나누어 1회會라 하고 81장章을 1통統이라 하였다. 자子에서 진辰에 이르고, 진辰에서 신申에 이르고, 신申에서 자子에 이르기까지 무릇 4617세歲를 1원元이라 하여 태초력泰初曆과 서로 응하였고, 또한 전욱력顓頊曆이 있으니 이것이 ‘기사즉술其事則述’이요, 243표表 729찬贊 11편을 지었으니 이것이 ‘기서즉작其書則作’이다.” ○사마광司馬光이 말하였다. “인의仁義는 선왕先王의 일이고, 삼방三方‧구주九州‧이십칠부二十七部‧팔십일가八十一家는 양자揚子가 창작한 것이다. 양자揚子가 창작한 것은 《태현경太玄經》이고, 전술한 것은 또한 옛 성인聖人의 도道일 뿐이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