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본성에는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어서
注+혼混은 섞여 있는 것이다. 순자荀子는 사람의 본성이 악惡하다고 하였고, 맹자孟子는 사람의 본성이 선善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양자揚子는 사람의 본성은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다고 하였다. 세 사람이 비유를 취한 것은 비록 다르지만 크게는 같은 유학儒學의 가르침이니, 입언立言한 뜻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뜻이 모두 통한다. 성인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狂人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聖人이 된다. 양자揚子의 말은 두 대가大家(순자荀子와 맹자孟子)의 의론을 갖추어 고심하였으므로 여기에 함께 진술하였다.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천명天命을 성性이라 하니, 성명性命의 시초에는 선善과 악惡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적자赤子가 태어나 아직 칠정七情이 드러나기 이전에 먼저 울고 웃고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있으니, 기쁨과 노여움은 선악善惡의 단서이다. 이것이 바로 성性과 선악善惡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이다.”, 선을 닦으면 선한 사람이 되고 악을 닦으면 악한 사람이 된다.
注+이른바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다는 것이다. ○송함宋咸이 말하였다. “공자孔子께서 ‘중등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만, 중등 이하의 사람에게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해줄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또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변화시킬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말씀을 살펴보면 사람에게는 상上‧중中‧하下의 3품品이 있다. 상품인 자는 선하고, 하품인 자는 악하고, 중품인 자는 올라가 상품이 될 수도 있고 내려가 하품이 될 수도 있으니, 선과 악이 섞여 있다. 그러므로 가의賈誼의 《신서新書》에도 군주에 대해 3등等으로 나누어서 ‘상주上主가 있고 중주中主가 있고 하주下主가 있다. 상주上主는 이끌어서 올라가게 할 수는 있지만 이끌어서 내려가게 할 수는 없고, 하주下主는 이끌어서 내려가게 할 수는 있지만 이끌어서 올라가게 할 수는 없으며, 중주中主는 이끌어서 올라가게 할 수도 있고 이끌어서 내려가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상주上主는 요堯‧순舜이 바로 이러한 군주이다. 하우夏禹와 후직后稷이 요堯‧순舜과 함께 선을 행하려고 하면 선을 행하였고, 곤鯀과 환도驩兜가 요‧순을 이끌어서 악을 하려고 하면 그들을 주벌하였다. 그러므로 요‧순과 함께 선을 행할 수는 있고 함께 악을 행할 수는 없다. 하주下主는 걸桀‧주紂가 바로 이러한 군주이다. 비렴飛廉과 악래惡來가 걸桀‧주紂와 함께 악을 행하려고 하면 악을 행하였고, 비간比干과 용봉龍逢이 걸‧주를 이끌어서 선을 행하려고 하면 그들을 주벌하였다. 그러므로 걸‧주와 함께 악을 행할 수는 있고 함께 선을 행할 수는 없다. 중주中主는 제 환공齊 桓公이 바로 이러한 군주이다.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을 얻었을 때에는 패자霸者가 되었고 수초竪貂와 자아子牙를 등용했을 때에는 어지러워졌다.’라고 하였다. 지금 양자揚子의 생각에는, 맹자孟子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말한 것은 상품上品을 논한 것이고, 순자荀子가 이미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말한 것은 하품下品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중품中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사람의 본성은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다고 말한 것이다. 양자揚子가 또 ‘선을 닦으면 선인善人이 되고 악을 닦으면 악인惡人이 된다.’고 하였으니, 그 글을 보면 이는 다만 중품中品의 성性에 대해서 말한 것이 분명하고, 사람들이 모두 다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찌 부자夫子의 이른바 ‘중등 이상의 사람에게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만, 중등 이하의 사람에게는 높은 차원의 이야기를 해줄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으며, 어찌 가의賈誼의 이른바 ‘이끌어서 올라가게 할 수 있고 또한 이끌어서 내려오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세 사람(양웅揚雄, 공자孔子, 가의賈誼)이 성性에 대해 말할 적에 각각 그 품등을 들었으니, 가르침이 또한 구비되었다.” ○오비吳祕가 말하였다. “습관이 천성天性처럼 되는 것이다.” ○사마광司馬光이 말하였다. “맹자孟子가 ‘사람의 본성은 선하니, 불선한 것은 외물外物이 유혹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고, 순자荀子가 ‘사람의 본성은 악하니, 선한 것은 성인聖人이 가르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그 한쪽만 얻고 그 본질은 빠뜨린 것이다. 성性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아서 태어난 것이다. 선善과 악惡을 반드시 겸하여 가지고 있음은 음陰과 양陽의 관계와 같다. 이 때문에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악惡이 없을 수 없고 비록 우인愚人이라도 선善이 없을 수 없으나 받은 양量은 다르다. 선善이 지극히 많고 악惡이 지극히 적으면 성인聖人이 되고, 악惡이 지극히 많고 선善이 지극히 적으면 우인愚人이 되고, 선善과 악惡이 서로 반반이면 중인中人이 된다. 성인聖人의 악惡은 그 선善을 이길 수 없고 우인愚人의 선善은 그 악惡을 이길 수 없으니, 이기지 못하면 이로 말미암아 없어진다. 그러므로 ‘오직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한 것이다. 비록 그렇지만 배우지 않으면 선善이 날로 사라지고 악惡이 날로 불어나며, 배우면 악이 날로 사라지고 선이 날로 불어난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인狂人이 되고 광인이라도 능히 생각하면 성인이 된다.’고 한 것이다. 그러면 반드시 ‘성인聖人은 악이 없다.’고 한다면 배움을 어디에 쓰겠으며, 반드시 ‘우인愚人은 선이 없다.’고 한다면 가르침을 어디에 쓰겠는가. 이를 밭에 비유하면 도량稻粱(벼와 기장)과 여유藜莠(질려蒺藜와 가라지)가 서로 함께 나란히 자라는데, 밭을 잘 가꾸는 자는 여유藜莠를 뽑아버리고 도량稻粱을 기르며, 밭을 잘 가꾸지 못하는 자는 이와 반대로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성을 잘 다스리는 자는 선善을 기르고 악惡을 제거하며, 본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이와 반대로 한다. 맹자孟子가 인仁‧의義‧예禮‧지智는 모두 성性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포만暴慢(사납고 거만함)과 탐혹貪惑(탐욕과 미혹)도 성性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니, 이는 도량稻粱이 밭에서 자란다는 사실만 믿고 여유藜莠도 밭에서 자란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순자荀子가 쟁탈爭奪하고 잔적殘賊한 마음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니, 사법師法과 예의禮義로써 바로잡지 않으면 패란悖亂하여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자애慈愛로운 마음과 수오羞惡하는 마음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니, 이는 여유藜莠가 밭에서 자란다는 사실만 믿고 도량稻粱도 밭에서 자란다는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揚子가 ‘사람의 본성은 선善과 악惡이 섞여 있다.’고 한 것이다. 섞여 있다는 것은 선善과 악惡이 마음에 한데 섞여 있음을 이르니, 다만 사람이 택하여 닦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이다. 선을 닦으면 선인善人이 되고 악을 닦으면 악인惡人이 되니, 이 이치가 어찌 효연曉然히 명백하지 않겠는가. 맹자孟子의 말 같은 것은 이른바 선을 기르는 것이고, 순자荀子의 말 같은 것은 이른바 악을 제거하는 것인데, 양자揚子는 이를 겸하였다. 한문공韓文公(한유韓愈)이 양자揚子의 말을 풀이하여 ‘처음에는 선과 악이 섞여 있었는데 지금은 아예 선해졌다거나 악해졌다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또한 양자揚子를 안 자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