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時人事가 理必相扶라 人旣好謙하면 天亦助順하리니 陛下가 誠能斷自宸鑑하사 渙發德音하사 引咎降名하여 深自剋責하시면 惟謙與順이 一擧而二美가 從之하리니
外可以收物情이요 內可以應玄運이요 上可以高德於敻古요 下可以垂法於無窮이니
興廢典하며 矯舊失은 至明也요 損虛飾하며 收美利는 大智也니 前聖之所以永保鴻名하여 常爲稱首者가 達於玆義而已矣라
陛下가 何恡而不革하시고 反欲加冗號하사 以受實患哉아
玄元
道德經
에 曰 王侯
가 自謂孤寡不穀
注+① 老子 “王侯自稱孤․寡․不穀.”이라하나니 以賤爲本也
요
周襄王
이 遭亂
하여 出居于鄭
하여 告於諸侯曰 不穀
이 不德
하여 鄙在鄭地
라 春秋
에 之
하니 以其能降名也
注+② 左僖二十四年 “冬, 襄王使來告難曰 ‘不穀不德, 得罪于母弟之寵 書曰 ‘天王出居于鄭.’ 避母弟之難也. 天子凶服降名, 禮也.”요
漢光武
가 詔令上書者
로 不得言聖
注+③ 後光武詔, 上書者不得言聖.이어늘 史冊稱之
하니 以其能損己也
라
臣顧以賤微로 獲承訪議호니 伊尹이 恥其君不如堯舜을 臣亦恥之일새
是以誠發於中
하여 不復防慮忌諱
하노니 赦其愚而鑑其理
는 惟明主
가 行焉
注+④ 此奏旣上, 帝納其言, 於奉天赦文中倂舊號去.하소서 謹奏
라
3-3-4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는 이치상 반드시 서로 돕습니다. 사람이 먼저 겸손을 좋아하면 하늘 또한 순조롭도록 도우니, 폐하께서 진실로 능히 결단하여 스스로 헤아리셔서 덕음德音을 널리 선포하시어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고 존명을 낮추어 깊이 스스로 질책하신다면 겸손함과 순조로움 두 가지 아름다움이 한 번에 따르게 될 것입니다.
바깥으로는 여론을 수렴할 수 있고 안으로는 하늘의 운행에 응할 수 있으며, 위로는 상고의 시대만큼 덕을 높일 수 있고 아래로는 무궁하게 덕을 드리울 수 있습니다.
버려진 법도를 다시 일으키고 묵은 과실을 바로잡는 것이 지극히 명철한 것이고, 헛된 꾸밈을 덜어내며 아름답고 이로운 결과를 거두어들이는 것이 큰 지혜이니, 전대의 성군들께서 큰 이름을 영구히 보전해서 늘 으뜸으로 일컬어졌던 것은 이러한 뜻에 통달하였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무엇이 아까워서 고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쓸데없는 존호를 덧붙여 실제로 환란을 받으려 하십니까.
≪
에 이르기를 “
왕후王侯는 스스로를 ‘
고孤’, ‘
과寡’, ‘
불곡不穀’이라 칭한다.”라 하였으니,
注+① 王侯自謂孤寡不穀: 이는 낮춤을 근본으로 삼은 것입니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변란을 만나
정鄭나라로 나가 머물면서 제후들에게 알려 말하기를 “
불곡不穀이 부덕하여 비루한
정鄭 땅에 있게 되었다.”라 하였는데, ≪
춘추春秋≫에서 이를 예에 맞다고 한 것은 이름을 낮출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注+② 周襄王……以其能降名也:≪春秋左氏傳≫ 僖公 24년에 “겨울에 周 襄王이 사신을 보내어 제후들에게 난을 알리기를 ‘不穀이 부덕하여 同母弟로 어머니가 총애하는 아들 帶에게 죄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를 기록하기를 ‘天王이 鄭에 나가 머물렀다.’고 하였으니, 실은 동모제가 일으킨 난을 피한 것이다. 천자가 흉복을 입고 이름을 낮추었으니, 예에 맞다.”고 하였다.
한漢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상서上書하는 자에게 조서를 내려 ‘
성聖’이라 언급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注+③ 漢光武……不得言聖: 사서史書에서 그것을 칭송하였으니 이는 능히 자신을 낮출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돌아보건대 미천한 신분으로 성상의 하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윤伊尹이 자신의 군주가 요순堯舜만 못한 것을 부끄러워한 것처럼 신도 부끄럽게 여겨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심誠心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와 다시 염려하여 꺼리거나 피하지 않는 것이니, 그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이치를 살피는 것은 부디 현명한 군주께서 행하소서.
注+④ 惟明主 行焉:이 奏章이 올라가고 난 뒤 황제가 그 말을 받아들여 奉天에서 내린 赦文에 담긴 옛 존호를 모두 없앴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존호尊號를 가자하고자 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 덕종德宗이 재차 비지批旨를 내린 데 대해 쓴 주장奏狀이다. 그러나 육지陸贄는 앞서 〈봉천논존호가자장奉天論尊號加字狀〉에서 이미 존호의 가자加字를 반대하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존호 자체를 폐지하기를 원했다. 이 주장奏狀에 ‘가자加字’ 두 글자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옛 존호에 다시 한두 글자를 더한[舊號之中 更加一兩字]’ 사례는 덕종 이전에도 있었다. 앞서 현종玄宗도 ‘개원신무開元神武’였던 존호를 ‘개원천지대보성문신무응도開元天地大寶聖文神武應道’ 12자로 늘렸으니, 덕종 입장에서는 선례를 따르고자 한 것일 뿐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때문에 육지도 〈봉천논존호가자장奉天論尊號加字狀〉에서 단지 ‘마땅한지 모르겠다.[未見其宜]’고 하며 ‘미명美名을 거듭 더함[重益美名]’을 반대하였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덕종이 끝내 시운時運의 변화를 운운하며 가자加字할 뜻을 굽히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존호를 폐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건의를 올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육지의 청을 받아들여 연호年號만 고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는데, 이는 덕종이 육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번진藩鎭의 발호로 피신한 처지에 존호를 더하고자 한 덕종의 태도는 임진란壬辰亂 발발 후 소장疏章에 존호를 쓰지 말라고 유시한 선조宣祖와 극명하게 대비된다.(≪후광세첩厚光世牒≫ 권3 〈임진일록壬辰日錄〉) 〈중론존호장重論尊號狀〉는 존호에 관한 논의에 자주 환기된 글이기도 하다. 조태구趙泰耉가 숙종肅宗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을 반대할 때 이 글을 전적으로 인용한 것도 그 가운데 한 사례이다.(≪숙종실록肅宗實錄≫ 39년 1월 6일) 또 1740년 영조英祖와 인원왕후仁元王后,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존호가 정해진 후 이제李濟가 ‘휘칭徽稱과 미명美名이 성덕에 무슨 이익이 있겠으며, 미문彌文과 성절盛節은 실정實政에 방해만 끼칠 뿐[徽稱美名 何益聖德 彌文盛節 徒妨實政]’이라고 상소한 것도 〈중론존호장重論尊號狀〉에 근거한 것이다.(≪영조실록英祖實錄≫ 16년 윤6월 8일) 이에 대해 영조는 일이 이루어진 뒤에 조신朝臣들을 아첨한다고 공격하는 행태라고 불쾌감을 표했으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正祖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이는 ≪역대행표歷代行表≫를 편찬할 때 친찬親撰한 서문序文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조는 “호號는 행적行蹟의 표상이다. 시호諡號니 묘호廟號니 존호尊號니 능호陵號니 연호年號니 하는 것들은 다 옛 제도가 아니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요순堯舜의 시대에 무슨 호號라는 것이 있었던가.”라고 하고 “후세의 임금들이 그대로 따라서 쓰게 되면서 잠시 임금을 참칭僭稱한 이들과 변방의 흉폭하고 오만한 추장들까지도 모두들 같이 썼기 때문에 고금을 통하여 호가 같은 이들이 수없이 많다. 그리하여 명明나라 역대 황제의 연호 중에서 영락永樂과 천순天順 같은 경우도 이전의 참칭한 왕 중에 같은 호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쓴 것을 보면, 재상은 반드시 글 읽은 선비로 임용해야 한다는 말이 옳지 않은가.”라고 한 후 육지가 ‘인주人主의 무게는 호칭에 있지 않다.[人主輕重 不在名稱]’고 한 것과 ‘사람이 먼저 겸손을 좋아하면 하늘도 순조롭도록 돕는다.[人旣好謙 天亦助順]’고 한 부분을 특별히 써서 경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