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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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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曩者 羯胡亂華하여 染汚士吏어늘 肅宗興復하사 累降赦書하사 罪止渠魁하고 餘所不問하니
河朔遺孽 旣聞德澤之弘被하고 且幸脅汚之見原하여 人人 皆自怨尤하여 各悔歸國之晩이러니
及乎三司按罪하여 繼用嚴科하니 未降之流 復喜得計하여 慶緒 將消而再結하고 思明 已附而重攜하여
浸長厲階하여 至今爲梗注+① 唐酷吏傳 “崔器, 深州人. 肅宗至鳳翔, 器兼禮儀使. 二京平, 爲三司使. 器旣殘忍, 希帝旨, 欲深文繩下, 乃建議 陳希烈․達奚珣等數百人, 皆抵死. 李峴執奏, 遂以六等定罪, 多所原貸. 後蕭華自賊中來, 因言 ‘王官重爲安慶緖驅脅, 至相州, 聞廣平王宣詔釋希烈等, 皆相顧愧悔. 及聞崔器議刑, 衆心復搖.’ 帝曰 ‘朕幾爲器所誤.’”하니 豈不以任法吏而虧權道하며 小不忍而亂大謀者乎


6-7-5 지난날 안녹산安祿山이 중화를 어지럽혀서 장사壯士관리官吏를 오염시켰는데, 숙종肅宗께서 흥복興復하시어 거듭 사면赦免의 칙서를 내리시어, 죄는 괴수에만 그치고 나머지는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하삭河朔에 남은 잔당들은 이미 황제의 은택이 온 세상에 덮였다는 소식을 듣고, 또 위협을 따른 자들이 용서를 받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 사람마다 스스로를 원망하고 허물하여 각각 나라에 귀의함이 늦은 것을 후회했습니다.
그러다가 삼사三司를 심리하고 이어서 엄한 형벌을 사용하자, 아직 항복하지 않은 부류들이 다시 자신의 뜻을 이룬 것을 기뻐하여, 안경서安慶緒의 무리는 소멸되다가 다시 결집하였고 사사명史思明의 무리는 이미 귀부했다가 다시 이반하고 말았습니다.
차츰
재앙의 단초가 이루어져 지금까지도 재앙이 되었습니다.注+① ≪新唐書≫ 〈酷吏傳〉에 “崔器는 深州 사람이다.
최기는 禮儀使를 겸하였다. 西京(長安)과 東京(洛陽)이 평정되자 三司使가 되었다. 최기는 원래 잔인한데다가 황제의 뜻에 영합하여, 법조문을 각박하게 적용하여 아랫사람들을 옥죄려고 하여, 마침내 조정의 관리로서 적의 꾐에 빠졌던 陳希烈과 達奚珣 등 수백 명을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李峴이 奏文을 올려 반대하여 마침내 여섯 등급으로 정죄하니, 면죄 받은 자가 많았다. 뒤에 蕭華가 적의 소굴에서 돌아와 진언하기를 ‘조정의 관리들이 거듭 安慶緖에게 위협을 받고 내몰리게 되었는데, 相州에 이르러 이 진희열 등을 석방한다는 조서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두들 서로 돌아보며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습니다. 그 뒤 崔器가 議刑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리들이 다시 동요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짐이 하마터면 崔器 때문에 그르칠 뻔했다.’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어찌 법리法吏에 맡겨 권도權道를 망가뜨리고 작은 것을 참지 못하여 큰 모책을 어지럽힌 것이 아니겠습니까.


역주
역주1 재앙의……되었습니다 : ≪詩經≫ 〈大雅 桑柔〉에 “누가 화의 계제를 만들어 지금에 이르도록 병들게 하였는가.[誰生厲階 至今爲梗]”라고 하였다.
역주2 肅宗이……때 : 天寶 15년(756), 肅宗이 郭子儀․李光弼 그리고 回紇의 지원을 받아 安祿山의 반군을 공격한 일을 말한다. 숙종은 靈武로 가서 스스로 皇位에 오르고 같은 해 가을 군을 규합하여 반군을 공격하였다.
역주3 廣平王 : 皇子 시절 代宗의 봉호이다. 본명은 李俶으로, 安史의 난 때 天下兵馬元帥로서 長安과 洛陽을 수복하였으며, 乾元 원년(758) 皇太子에 봉해진 후 李豫로 개명하였다.
역주4 王官陷賊者 : ≪新唐書≫에는 ‘王官陷賊者’의 다섯 글자가 없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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