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今懷光 別保蒲絳注+① 本傳云 “懷光與朱泚稍稍攜貳, 益不自安, 乃引兵如河中. 旣至, 復取同․絳二州, 按兵觀望.”하고 吐蕃 遠避封疆하여 形勢旣分 腹背無患하니 瑊晟諸帥 才力得伸하고
又各士馬非多하며 資糧向竭하니 若不降賊 卽須建功이라
此輩寵任已崇하고 貴位已極하니 建功則寵增而位固하고 降賊則名辱而身危하며
況賊之兇愚 滅亡可必이요 賊之孤劣 翦撲非難이니
孰肯捨固而就危하며 違寵而從辱하여 棄垂成之業하고 臣將滅之虜哉리오
旣牽於利害之情하여 理不同惡이요 又迫於單乏之急하여 勢難久居 勢理相驅어늘 安能無戰이리오
渾瑊 統戴休顔․韓遊하여 乘其西北하고 李晟 率駱元光․尙可孤하여 攻其東南하면 同病相資하여 自當合力이니
但願陛下 愼於撫接하사 以奮起忠勇之心하시고 勤於砥礪하사 以昭蘇遠近之望하시면 中興大業 旬月可期 不宜尙眷眷於犬羊之群하여 以失將士之情也니이다


6-1-9 그런데 지금 이회광이 별도로 포주蒲州강주絳州를 보존하고注+① 今懷光 別保蒲絳:≪新唐書≫ 〈李懷光傳〉에 “李懷光이 朱泚와 점점 틈이 벌어져 더욱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자 마침내 군병을 이끌고 河中으로 갔다. 그곳에 이른 뒤에는 同州와 絳州 두 고을을 취한 후에 군병을 주둔시키고 사태를 관망하였다.”고 하였다. 토번의 군대가 변경에서 멀리 벗어나서, 형세상 이미 분산되어 앞뒤로 우환이 없어졌으니, 이성李晟혼감渾瑊 등 여러 장수들이 재주와 능력을 펼 수 있습니다.
또 〈이성 등은〉 각각 군사들과 군마들이 많지 않고 물자와 식량이 고갈되어 가는데, 그들이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 경우에 즉시 공을 세워야 합니다.
이들은 은총과 신임이 이미 높고 신분과 지위가 이미 극에 달하였으니, 공적을 세우면 은총이 증대하고 지위가 견고해질 것이며, 적에게 항복하면 명예가 모욕당하고 몸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역적은 흉악하고 우둔하여 멸망을 기필할 수 있으며, 고립되고 약해진 역적을 베어 없애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누가 견고함을 버리고 위태함에 나아가고 은총을 져버리고 모욕을 따라, 거의 이루어진 공업을 버리고 장차 멸망할 역적의 신하가 되고자 하겠습니까.
이미 이해利害의 실정에 끌려서 이치상 악인과 함께할 수 없고, 게다가 고립되고 궁핍한 처지에 내몰려서 형세상 오래 머물 수가 없습니다. 형세상 이치상 서로 내몰리는데, 어찌 싸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혼감渾瑊를 통솔하여 그 서북 방면을 틈타고 이성李晟를 인솔하여 그 동남 방면을 공격하게 하면 같은 병이 있는 사람끼리 의지하듯이 스스로 힘을 합하게 될 것입니다.
다만 원컨대 폐하께서는 위무慰撫접대接待를 신중하게 하셔서 충용忠勇의 마음을 분기奮起하게 하고 격려하는 데 힘쓰시어 원근遠近의 기대에 부응하소서. 그렇게 하면 중흥의 대업은 가까운 날에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견양犬羊의 무리(토번)를 잊지 못하여 장수와 군사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역주
역주1 戴休顔 : 夏州(지금의 陝西省 橫山) 사람으로, 郭子儀의 부장으로 黨項羌族을 평정하였다. 涇原兵變 때에는 군을 이끌고 勤王하였으며, 반란을 일으킨 朔方節度使 李懷光의 유혹을 거절하였다. 이후 檢校工部尙書 奉天行營節度使에 올랐으며, 渾瑊과 연합하여 朱泚의 반군을 공격했다. 貞元 원년(785) 병사 후 揚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舊唐書≫ 〈戴休顏傳〉)
역주2 韓遊瓌 : 靈州 靈武(지금의 寧夏自治區 靈武) 사람이다. 원래 朔方節度使 郭子儀의 部將이었으며, 朱泚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邠寧節度使 檢校尙書左僕射에 올랐으며, 許昌郡王에 봉해졌다. 貞元 4년(788), 入朝하여 右龍武統軍이 되었으며, 죽은 뒤 靈州大都督에 추증되었다.(≪舊唐書≫ 〈韓遊瓌傳〉)
역주3 駱元光 : 李元諒의 예전 이름이다. 조상은 이란인으로, 본성은 安이었는데, 宦官 駱奉先에게 양육된 까닭에 駱으로 고치고 元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從軍하여 鎮國軍副使에 올랐으며, 涇原兵變 때 華州를 수복하고 병사를 모아 여러 차례 반군을 격퇴했다. 興元 원년(784) 長安을 수복하는 데 공헌하여 檢校尙書右僕射에 올랐으며, 토번과의 협상 도중 습격을 당한 渾瑊을 구원한 공으로 李氏姓을 하사받았으며 元諒으로 개명했다. 貞元 4년(788) 隴右節度使를 겸임했으며, 사후 司空에 추증되었다. 諡號는 莊威이다.(≪舊唐書≫ 〈李元諒傳〉)
역주4 尙可孤 : 鮮卑族으로, 天寶 말년(741)에 唐나라에 귀순하여 范陽節度使 安祿山과 平盧節度使 史思明의 휘하에 예속되었다. 처음에는 安史의 난에 가담하였다가 배반하고 조정에 귀순하여 右威衛大將軍․神策大將 등을 역임했다. 宦官 魚朝恩이 禁軍을 지휘할 때 신임을 얻어 양자가 되었으며 魚智德으로 개명하였다. 神策軍을 이끌고 扶風․武功을 10여 년간 지키는 동안 기율을 엄격하고 분명히 적용하여 민심을 얻었다. 魚朝恩 사후에 朝廷에서 李嘉勳이라 賜名하였으나 李希烈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原名을 회복하고 荊襄應援淮西使에 임명되어 이희열을 토벌하였다. 建中 4년(783) 朱泚의 난이 일어나자 여러 차례 반군을 격파하고 藍田을 수복하였으며, 興元 원년(784) 李晟․駱元光 등과 長安을 수복, 이 공으로 檢校尙書右僕射에 오르고 馮翊郡王에 봉해졌다. 얼마 뒤 李懷光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던 길에 병사하였으며, 司徒에 추증되었다.(≪舊唐書≫ 〈尙可孤傳〉)
역주5 : 環으로도 쓴다. ≪翰苑集≫․≪舊唐書≫․≪新唐書≫․≪資治通鑑≫ 등에는 韓遊瓌라 하였으며, ≪大唐詔令集≫에는 韓遊環이라 하였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