陛下가 誠能過聽愚計하사 先聚軍儲하시고 愼擇良圖하사 更貞師律하시면 蠢爾兇醜가 自當畏威하여 縱迷款塞之心이나 必無猾夏之慮니
其所停減運脚을 臣이 已與本司로 審細計料하고 并邊鎭分配和糴數와 及米粟估價等數를 各得別狀에 條件分析하여 謹同封進하노이다 聽進止이니이다
8-4-23 폐하께서 진실로 어리석은 계책을 들어주시어 우선 군량을 모으고 훌륭한 방책을 신중히 선택하시어 다시 군사의 기율을 올곧게 하신다면, 저 무지한 흉수들이 위엄을 스스로 두려워하여, 비록 변방의 관문을 두드려 귀의하는 마음에는 어둡다 하더라도 필시 중국을 어지럽힐 생각은 없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다소 유념하시어 상세히 살펴서 명단明斷을 내려주십시오.
그 정감停減할 조운비를 신臣은 이미 본사本司와 함께 자세히 헤아리고, 아울러 변진邊鎭에 분배할 화적和糴의 수량과 미속米粟의 가격 등의 수량도 각각 별상別狀에 조목조목 나누어 진술하여 삼가 동봉하여 올립니다. 분부를 기다립니다.
【평설評說】 정조正祖는 육지陸贄의 주의奏議 가운데서도 이 글이 특히 대경륜大經綸을 담고 있으며 조선에 시행하더라도 적절하리라고 언급하였다. 즉, 〈일득록日得錄〉 가운데 검교대교 심상규沈象奎의 1797년(정조 20년, 정사) 기록을 보면 정조는 “〈경동의 수운에 대한 운송비를 줄이기를 청한 글[請減京東水運收脚價狀]〉과 〈부세를 균등하게 조절하여 백성을 구휼하는 데 대한 여섯 조항[均稅恤百姓六條]〉은 바로 선공宣公의 대경륜인데, 지금 시행하더라도 매우 절실하고 적절한 방안이 될 것이다.” 하였다. 정약용丁若鏞도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둔전을 논하며, 둔전의 기원을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조조晁錯가 상언上言한 안변책安邊策에서 찾았고, 선제宣帝 때 조충국趙充國이 선령강先零羌을 공격하면서 둔전조례屯田條例를 크게 정비했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의 조선에서 둔전법을 실시하지만 명목만 둔전이지 실상과 다르다고 하면서 그 폐해를 신랄하게 논했다. 정약용이 상정한 둔전의 이상적인 형태는 육지가 이 글에서 논한 내용과 상응한다. 예로부터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폐해를 입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라는 말이 있다. 당唐나라 천성天成 4년(929) 당주唐主가 풍도馮道에게 “금년에 비록 풍년이 들었으나 백성들이 풍족한가?”라고 물었을 때 풍도는 이렇게 말했다. “농가는 흉년이 들면 유리하여 굶어죽고 풍년이 들면 곡식 값이 싸서 손해를 보니, 풍년이든 흉년이든 모두 폐해를 입는 것은 오직 농가만이 그렇습니다. 신이 기억하건대 진사進士 섭이중聶夷中의 시詩에 이르기를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고 오월에 새 곡식을 미리 판다오. 당장 눈앞의 상처는 치료할 수 있으나 심장의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구나.[二月賣新絲 五月糶新穀 醫得眼前瘡 剜却心頭肉]’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비록 비루하나 농가의 실정을 곡진히 다하였습니다. 농부는 사민四民(사士, 농農, 공工, 상商) 중에 가장 고생하니, 인주人主가 이를 알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육지는 둔전법의 철저한 실시와 화적법和糴法의 시행을 건의했으나, 화적법은 결국 농민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