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本傳 “陸贄, 字敬輿, 蘇州嘉興人. 父偘, 溧陽令. 贄少孤, 特立不群. 十八第進士, 中博學弘辭.
德宗在東宮時, 素知贄名, 乃召爲翰林學士, 數問以得失.
會馬燧等討賊河北, 久不決, 請濟師, 李希烈寇襄城.
詔問策安出, 贄以兵窮民困, 恐別生內變, 乃上此奏及論兩河及淮西利害狀, 帝不能用. 後有涇原士卒之變, 贄言皆效.”
2. 관중關中의 대처 방안에 관해 논하는 주장奏狀
≪신당서新唐書≫ 〈육지전陸贄傳〉에 “육지陸贄의 자字는 경여敬輿이니, 소주蘇州 가흥嘉興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육간陸偘은 율양현溧陽縣의 현령縣令을 지냈다. 육지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났다. 18세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박학홍사과博學弘辭科에 합격하였다.
의
현위縣尉로 임명되었고,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로
위남현渭南縣의
주부主簿로 제수되었다가
감찰어사監察御使로 옮겨졌다.
덕종德宗은 동궁 시절부터 육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이에 그를 불러서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임명하여 정사의 득실에 관해 자주 질문하였다.
마침 마수馬燧 등이 하북河北에서 반란군들을 토벌하였지만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이 와중에 이희열李希烈이 양성襄城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안무安撫할 것을 하문하였는데, 육지는 군사들은 지치고 백성들은 곤궁해져서 별도로 내란이 생길까 염려되어 이 주장奏狀과 〈논양하급회서이해장論兩河及淮西利害狀〉을 올렸으나 황제가 채납하지 못했다. 이후 경원涇原 군사들의 내란이 있게 되었으니, 육지의 말이 모두 증명되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