議者가 多謂淮右荐饑는 國家之利라하니 臣等愚見은 以爲不然하노이다
必若興有征之師하여 問不庭之罪라도 因災幸濟가 已爽德政이어든
儻又難於用兵하고 望其艱窘自弊인댄 利害之勢를 或未可知니이다
夫悍獸之情이 窮則攫搏하고 暴人之態가 急則猖狂일새 當其迫阨之時하여 尤資撫馭니
苟得招攜以禮하면 便可底寧이요 備慮乖方하면 亦足生患이니
竊以帝王之道
가 頗與敵國
으로 不同
하여 懷柔萬邦
이 唯德與義
라 寧人負我
언정 無我負人
注+① 曹操有言 “寧我負人, 无人負我.”일새
故能使億兆로 歸心하고 遠邇로 從化호되 猶有兇迷不復이면 必當人鬼同誅니 此其自取覆亡이나 尙亦不足含怒어든
今因供稅有闕하여 遂令施惠不均하면 責帥及人이 恐未爲允이니
伏惟聖鑑은 更審細裁量하소서 其所擇諸道使를 竝未敢宣行하여 伏候進止하노이다
7-3-5 의론하는 자들은 대부분 회서淮西에 거듭 흉년이 든 것은 국가에 이로운 일이라 합니다만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만약 반드시 정벌하는 군대를 일으켜 조회하지 않은 죄를 문책한다 할지라도 재해를 틈타 이를 이루기를 바라는 것은 이미 덕정德政을 손상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또한 용병用兵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여기고 그들이 곤궁한 처지에 몰려 스스로 피폐해지길 바란다면 그 이해利害의 형세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체로 사나운 맹수의 마음은 곤궁하면 달려들고, 포악한 사람의 태도는 급박하면 미친 것같이 사납게 날뛰는 법이니, 어려운 상황에 당할수록 더욱 어루만져서 길들여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이반한 자들을 회유하여 예우한다면 안녕할 수 있을 것이지만, 미리 방비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을 잃게 되면 또한 환란을 낳게 될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제왕帝王의
도道란 적대하는 나라의 방도와 같지 않아서
만방萬邦을 회유하는 데 있어서 오직
덕德과
의義가 있을 따름이니, 차라리 남이 나를 저버릴지언정 내가 남을 저버리는 경우는 없어야 합니다.
注+① 寧人負我 無我負人:
그러므로 백성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고 원근의 사람에게 교화를 따르도록 하되, 오히려 흉악하고 미혹되어 돌아오지 않는 자가 있거든 반드시 사람과 귀신이 함께 벌할 것이니, 이는 복망覆亡을 자초한 것이지만 그렇더라도 노여움을 품기에는 부족합니다.
지금 세금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인하여 마침내 은혜를 고르게 베풀지 않는다면 그 우두머리를 질책하여 인민에 미침이 마땅하지 않을 듯합니다.
【평설評說】 정원貞元 2년(786) 4월, 회녕절도사淮寧節度使 이희열李希烈이 부장 진선기陳仙奇에게 독살되었으나 같은 해 7월 진선기가 이희열의 총장寵將 오소성吳少誠(750~809)의 공격을 받아 죽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부득이 오소성을 신주申州․광주光州․채주蔡州 등의 절도유후節度留侯로 임명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절도사에 정식 제수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오소성이 “치리治理에 밝았으며 근검무사勤儉無私하였는데, 날로 자신의 영지를 온전히 하고 식량을 모으는 것을 일삼을 뿐 조정을 받들지 않았다.[少誠善爲治 근검무사勤儉無私 日事完聚 不奉朝廷]”(〈오소성전吳少誠傳〉)라고 하였는데, 덕종 또한 국정을 안정시키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공부貢賦를 요구하지 않았으므로 오소성이 죽을 때까지 회서淮西 지역은 ‘나라 안의 나라’와 같은 형국이 계속되었다. 정원 8년(792) 여름 하북河北․하남河南․산남山南․강회江淮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2만여 명이 익사하였음에도 덕종은 선위사를 보내는데 미온적이었으며, 육지가 〈청견사신선무제도조수주현장請遣使臣宣撫諸道遭水州縣狀〉을 올린 후에야 마침내 선위사를 파견하도록 윤허하였다. 하지만 회서淮西에만은 선위사를 보내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바로 회서에서 공부貢賦를 계속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육지는 이 주장을 올려 회서에도 선위사를 파견하기를 권했던 것이다. 진재휼민賑災恤民을 논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전에 올린 〈청견사신선무제도조수주현장請遣使臣宣撫諸道遭水州縣狀〉과 다를 바 없으나, 전에 올린 주장이 비교적 일반론에 가깝다면 이 주장은 회서의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덕종은 오소성을 토벌할 힘이 없었으므로 기근을 이용해 스스로 무너지기를 바랬다. 그러므로 선위사를 파견하고자 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 자신은 이를 좋은 계책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기실 민심을 잃어 반란을 부추길 우려가 컸다. 때문에 육지는 이 주장에서 올바른 군도君道를 논하고 이해의 득실을 따지는 한편, 덕종의 사심을 헤아려 허심탄회하게 현명한 선택을 하도록 청하였던 것이다. 이에 덕종은 육지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서사인 해척奚陟(745~799)을 회서를 포함한 제도諸道에 파견하여 선위토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