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에 曰 不貴遠物하면 則遠人格이라하니 今旣徇欲如此인댄 宜其殊俗不歸어늘
況又將蕩上心하여 請降中使하여 示貪風於天下하고 延賄道於朝廷하여 黷汚清時하고 虧損聖化하니 法宜當責이요 事固難依니이다
且嶺南安南이 莫非王土며 中使外使가 悉是王臣이니 若緣軍國所須에 皆有令式恒制하여 人思奉職하면 孰敢闕供이리오 豈必信嶺南而絶安南하고 重中使以輕外使리오
殊失推誠之體요 又傷賤貨之風하니 望押不出하노이다
8-1-2 ≪
서경書經≫에 말하길,
라고 하였으니, 지금 이미 이와 같이 욕심을 좇았다면 습속이 다른 상인들이 귀의하지 않은 것이 마땅한데,
하물며 또한 장차
중사中使를 내려 보내줄 것을 청하여, 탐욕의 풍조를 천하에 드러내고 조정에 뇌물을 뿌리는 길을 끌어들여 맑은 시절을 더럽히고 성상의 교화를 망가뜨리고자 하니, 법에 따라 마땅히 꾸짖어야 할 것이요, 사리로 보아 그대로 따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영남嶺南과 안남安南은 모두 왕의 땅이며 중사中使와 외사外使가 모두 왕의 신하이니, 만약 군국軍國의 필요에 따라 영식令式과 항제恒制를 두어서 사람들이 직분을 받들어 행할 것을 생각하게 한다면 누가 감히 공급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반드시 영남을 믿고 안남을 끊어버리며 중사中使를 중히 여기고 외사外使를 가볍게 여기겠습니까.
정성껏 대우하는
사체事體를 아주 손상시키는데다가, 또한
풍조를 해치게 되니, 부디
한 것을 내보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평설評說】 시박중사市舶中使는 해외무역을 관할하는 기구인 시박사市舶司에 중앙에서 파견된 환관을 말한다. 시박사는 당唐나라 초 해상무역이 발전하면서 생겨났다. 당唐 고종高宗 때 광주廣州에 시박을 설치한 이래, 광주의 페르시아 혹은 대식국大食國(아라비아)의 상인들이 영남嶺南까지 와서 통상하고 거주했다. 이후 결호사結好使․압번박사押蕃舶使․감박사監舶使․시박사市舶使 등의 관제가 출현하여 자사刺史나 절도사節度使가 겸임兼任하게 되었으며, 현종玄宗의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에 시박 체제의 기본이 형성되었다. 시박사는 상인의 출입국 수속․보호․감시, 화물의 조사․징세․금지품 단속, 관가 구매품의 구매, 외국 사절의 접대 등을 맡았다. 송宋나라 태조太祖 개보開寶 4년(971), 태조가 남한南漢을 평정한 직후 반미潘美로 하여금 시박 업무를 재개하도록 하면서 광주에 시박사가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진종眞宗 때 항주와 명주에도 연이어 시박사가 건설되었으며, 철종哲宗 원우元祐 2년(1087) 복건福建의 천주泉州에도 시박을 세웠다. 작은 항구들에도 박무舶務와 박장舶場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지사에 해당된다. 송나라 때는 수출입 무역을 관리하는 법규로 시박조례市舶條例를 제정했다. 송나라 때 시박의 직능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당국에서 발행한 공빙公凭을 소지한 상선만 입항과 출항을 허용해주었다. 둘째는 수입세인 압해押解를 징세해서 중앙의 각역원榷易院으로 송달했다. 셋째는 수출입 업무와 관련하여 금각禁榷과 박역博易을 행했다. 넷째는 호시互市에서 외국 상인이 합법적인 권익과 보호를 받도록 배려하고 그들을 예우했다. 시박사는 원元나라 때 이르러 시박제거사市舶提挙司라 불렀고, 명明나라 때에는 광주廣州․천주泉州․영파寧波에 시박제거사市舶提挙司를 두었다. 청淸나라 때 1685년에 해관海関을 설치하면서 시박사를 폐지했다. 당나라 때 시박사가 설치된 항구는 교주交州와 광주廣州였다. 덕종德宗 때는 조정에서 중사中使를 파견해 교주 시박을 관장하게 되었는데, 재상 육지陸贄는 이 상주문에서 중사의 파견은 탐욕의 마음을 천하에 보이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했다.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시박사에 환관을 임명․파견해서 시박 업무를 관장하기도 했으므로, 시박의 지위는 중요성이 날로 증가되어 8세기 중엽부터 점차 주州의 자사刺史와 대등해졌고, 마침내 자사보다 상위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