夫地力之生物이 有大數며 人力之成物이 有大限하니 取之有度하고 用之有節하면 則常足하며 取之無度하고 用之無節하면 則常不足이라
是以聖王立程
하여 量入爲出
注+① 王制 “以三十年之通, 制國用, 量入以爲出.”이라 雖遇災難
이라도 下無困窮
이러니
理化旣衰에 則乃反是하여 量出爲入하고 不恤所無하니
故魯哀公이 問年饑하여 用不足하니 如之何오하여늘 有若이 對以盍徹하고
桀用天下而不足하며 湯用七十里而有餘하니 是乃用之盈虛가 在節與不節耳라
衛文公
이 承滅國之餘
하여 建新徙之業
호되 革車
가 不過三十乗
이니 豈不甚殆哉
아마는 而能衣大布
하고 冠大帛
하여 約己率下
하고 通商務農
하여 卒以富强
으로 見稱載籍
注+② 左閔二年 “衛文公大布之衣, 大之冠, 務材訓農, 通商惠工, 敬教勸學, 授方任能, 元年革車三十乘, 季年乃三百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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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취하는 데 한도가 있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절도가 있으면 늘 충분하고, 그것을 취하는 데 한도가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 절도가 없다면 늘 부족합니다.
농작물의 산출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은 하늘에서 연유하고, 일상 용품의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은 사람에게서 연유합니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은 원칙을 세워서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계획하기[
양입위출量入爲出] 때문에
注+① 是以聖王……量入爲出:≪禮記≫ 〈王制〉에 “30년간의 수입을 통산한 뒤에 나라의 예산을 정하고 수입을 헤아려서 지출을 정한다.”라고 하였다. 비록 재난을 맞닥뜨려도
하민下民들이 곤궁함이 없었습니다.
다스림과 교화가 쇠퇴해지면 이와는 반대로 되어서 지출을 헤아려서 수입을 계획하고[量出爲入] 백성들이 낼 수 없는 것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노魯 애공哀公이 ”흉년이 들어서 재정이 부족하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고 묻자, 유약有若이 대답하길, “어찌 철법徹法(10분의 1 세稅)을 쓰지 않으십니까?”라고 답하였습니다.
걸桀임금은 천하의 재물을 써도 부족하였고, 탕湯임금은 사방 70리의 재물을 쓰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국용國用의 넉넉함과 부족함이 절용節用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절약하지 않으면 비록 재물이 가득하더라도 반드시 고갈되고, 능히 절약하면 비록 재물이 텅 비더라도 반드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혁거革車가 30
승乗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매우 위태롭지 않았겠습니까마는 헐렁한 베옷[
대포大布]을 입고 거친 삼베[
대백大帛]로 된
관冠을 쓰고서, 스스로 검소하여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고
통상通商을 하고 농업에 힘써서 결국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한 것으로
전적典籍에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注+② 衛文公……見稱載籍:≪春秋左氏傳≫ 閔公 2년에 “衛 文公은 거친 베옷에 거친 명주로 만든 冠을 쓰고서 힘써 인재를 기르고 농사를 가르치며, 물자를 유통시키고 공인을 대우하며, 교육을 중시하고 학문을 권면하며, 관리의 도리를 가르쳐 능력 있는 자를 임용하니, 원년에는 30승이던 병거가 말년에는 300승으로 되었다.漢文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