玄宗
이 躬定大難
注+① 本紀云 “玄宗乃睿宗第三子, 始封楚王, 後爲臨淄郡王. 庶人韋氏已弑中宗, 矯詔稱制, 宗乃與薛崇簡․劉幽求․鍾紹京等定策討亂. 率總監․羽林兵, 會兩儀殿․梓宮宿衛兵皆起應之, 遂誅韋氏.”하시고 手振宏綱
하사 開懷納忠
하시고 剋己從諫
하시며
尊用舊老하시고 採拔群才하시니 大臣이 不敢壅下情하고 私昵이 不敢干公議하여
朝淸道泰를 垂三十年하니 謂化已行하며 謂安可保라하여 耳目之娛가 漸廣하고 憂勤之志가 稍衰하사
侈心一萌에 邪道가 竝進하여 貪權竊柄者則曰 德如堯舜矣라 焉用勞神리오하며 承意趣媚者則曰 時已太平矣라 胡不爲樂이리오하여
有深謀遠慮者를 謂之迂誕驚衆이라하고 有讜言切諫者를 謂之誹謗邀名이리오하여
至尊이 收視於穆淸하시고 上宰가 養威於廊廟하며 議曹는 以頌美爲奉職하고
法吏
는 以識旨爲當官
하며 司府
는 以厚斂爲公忠
하고 權門
은 以多賂爲
하니
外寵
은 持竊國之勢
注+② 本傳, 當時外寵竊國, 如安祿山兼制三道之類是也. 攷之公八年 “周公欲背莊王而立王子克. 辛伯告王, 遂與王殺周公黑肩. 王子克奔燕. 初, 子儀有寵於(威)[桓]王, (威)[桓]王屬諸周公. 辛伯諫曰 ‘竝后, 匹嫡, 兩政, 國, 亂之本也.’ 周公弗從. 故及.” 子儀卽子克.하고 內寵
은 擅迴天之謠
注+③ 當時內寵回天, 如高力士用事, 事多專決, 權傾中外之類是也. 後漢宦者傳 “(威)[桓]帝與單超․徐璜․具瑗․左悺․唐衡定策誅梁冀, 同日受封, 世謂之五侯. 超死, 四侯轉橫. 天下爲之語曰 ‘左回天, 具獨坐. 徐臥虎, 唐兩墮.’”하여
禍機熾然하여 燄燄滋甚하여 擧天下가 如居積薪之上하니 人人懼焚而朝廷相蒙하여 曾莫之省하고 日務遊宴하여 方謂有無疆之休라하더니
大盜一興에 至今爲梗하니 豈不以忽於戒備하고 逸於居安하여 憚忠骾之怫心하고 甘諛詐之從欲하여 漸漬不聞其失하여 以至於大失者乎아
2-3-11
현종玄宗께서는 몸소 큰 환난을 평정하시고,
注+① 玄宗躬定大難:≪新唐書≫ 〈玄宗本紀〉에 이르기를 “玄宗은 睿宗의 셋째 아들로, 처음에 楚王에 봉해졌다가 뒤에 臨淄郡王이 되었다. 庶人 韋氏가 이미 中宗을 시해하고는 거짓으로 조칙을 꾸며 稱制하였다. 현종은 마침내 薛崇簡․劉幽求․鍾紹京 등과 함께 모책을 정하여 난적을 토벌하기로 하였다. 현종은 總監․羽林兵을 인솔하였는데, 마침 兩儀殿․梓宮의 宿衛兵들이 모두 일어나 호응하니, 마침내 위씨를 주살하였다.”라고 하였다. 손수 크나큰 기강을 확립하셨습니다. 마음을 열고 충언을 받아들이시고 자기의 욕심을 이기고 간언을 따르셨습니다.
옛 노성인들을 존중하여 등용하고 뭇 재능 있는 이들을 선발하였습니다. 이에 대신들은 아랫사람들의 실정이 올라오는 것을 감히 막지 못하였고, 사사로이 친근한 이들은 공론公論에 감히 간여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맑아지고 정치가 태평해진 것이 30년에 달하자, 교화가 이미 행해졌다고 여기고 편안함을 보장할 만하다 여겨서 이목耳目의 즐거움이 점점 넓어지고 우근憂勤의 뜻이 점점 쇠퇴하였습니다.
사치스런 마음이 한 번 싹이 트자 사악한 도가 함께 나왔습니다. 권세를 탐하고 훔치는 자가 이르기를 “덕이
요순堯舜과 같으시거늘, 어찌
신기神氣를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하고, 군주의 뜻을 헤아려 아부하는 자가 이르기를 “시절이 이미 태평한데, 어찌 즐기지 않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唐 玄宗
그리하여 심모원려深謀遠慮한 자들에 대해서는 우활하고 허탄하여 군중을 놀라게 한다고 이르고, 직언直言을 하고 절실하게 간언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비방을 행하여 명성을 바란다고 이릅니다.
지존께서는 깊은 궁궐에서
시청視聽을 거두시고,
상재上宰는
낭묘廊廟(조정)에서 위엄을 기르고,
는 아름다움을 칭송하는 것을 봉직으로 여기며,
법리法吏는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것을 직무를 감당하는 것이라 여기며, 사부司府는 많이 징수하는 일을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 여기며, 권문權門은 뇌물을 많이 받는 것을 높은 명망이라 여겼습니다.
외총外寵은 나라를 훔칠 위세를 지녔고,
注+② 外寵持竊國之勢:〈本傳〉에 보면 당시에 外寵이 나라를 훔칠 기세라는 것은 安祿山이 三道를 兼制한 따위가 이것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18년에 “周公이 周 莊王을 배반하고 王子 克을 세우려고 했다. 辛伯이 장왕에게 고하여 마침내 왕과 함께 周公黑肩을 죽이니, 왕자 극은 燕나라로 도망하였다. 처음에 子儀가 桓王에게 총애를 입을 때 환왕은 주공에게 그를 맡겼다. 신백이 諫하여 ‘妾이 王后와 나란히 하고 庶子가 嫡子와 대등하고 큰 읍이 國都의 규모와 같은 것은 혼란의 근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공이 이 말을 듣지 않아서 이런 일에 이르게 되었다.” 하였다. 子儀는 곧 子克이다. 내총內寵은
불리었습니다.
注+③ 內寵擅迴天之謠:당시 內寵이 천심을 돌린 일은 高力士가 用事하여 국사를 대부분 專決하여 권세가 온 나라를 기울인 부류가 이것이다. ≪後漢書≫ 〈宦者傳〉에 보면 “桓帝가 單超(선초)․徐璜․具瑗․左悺․唐衡 등과 함께 모책을 정하여 梁冀를 주살하여, 그 다섯 명은 같은 날 봉작을 받아서 세상에서 그들을 五侯라고 하였다. 선초가 죽은 후 四侯가 돌아가면서 전횡하였으므로, 천하에서 그 일을 두고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하였다.
그리하여
화기禍機가 치성하여, 활활 타오르자 온 천하 사람이 쌓아둔
하니, 사람들마다 불에 타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로 덮어두고서 결코 이것을 살피지 않고 날마다 연회에 힘쓰면서 바야흐로 ‘끝없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대도大盜(안녹산安祿山)가 한 번 일어나자 지금까지도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경계와 대비에 소홀히 하고 편안한 때에 안일하여, 골경지신骨鯁之臣이 군주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을 꺼리고 아첨하는 자들이 군주의 욕망에 따라 영합하는 것을 달게 여겨, 차츰차츰 젖어들어 그 실책을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아서 큰 잘못에 이른 것이 어찌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