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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陸宣公奏議(1)

당육선공주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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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육선공주의(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昔衛獻出奔이라가 久而復國할새 大夫 迎於境者 執其手而與之言하고 迎於門者 頷之而已注+① 左襄公年 “衛侯衎入, 大夫逆於境者, 執其手而與之言, 道逆者, 自車揖之, 迎於門者, 頷之而巳.”하니 言其驕怠之易生也
齊桓 將圖霸功할새 管仲 戒之以無忘在莒注+② 管子短語 “公․管仲․鮑叔牙․甯戚四人飮. 飮酣, (威)[桓]公謂鮑叔牙曰 ‘闔不起爲寡人壽乎.’ 鮑叔牙奉杯而起曰 ‘使公無忘出如莒時也, 使管子無忘束縛在魯也, 使甯戚無忘飯牛車下也.’ (威)[桓]公辟席再拜曰 ‘寡人與二大夫無忘夫子之言, 則國之社稷必不危矣.’”하니 懼其情志之易變也
今臣 亦願陛下 企思危固國 如不及하시고 懲忘亂喪國 如探湯하사 以在莒爲書紳之規하시고 以衰衛爲覆車之鑑하시면
則德爲帝範하시고 理致하시리니 與夫貪逸欲而踐禍機 其利害亦云遠矣
所令撰賜渾瑊詔 未敢承旨하고 伏惟聖裁注+③ 此奏旣上德宗, 雖不降詔, 竟遣使搜訪焉.하노이다 謹奏


6-5-8 옛날에 헌공獻公출분出奔하여 오랜 뒤에 귀국할 적에 대부로서 국경에서 영접하는 자는 그의 손을 잡고 함께 말하였으나, 성문에서 영접하는 자는 고개만 끄덕였을 따름입니다.注+① 衛獻出奔……頷之而已:≪春秋左氏傳≫ 襄公 26년에 “衛侯 衎이 귀국하자 大夫로서 국경에서 영접하는 사람은 그의 손을 잡고 말을 하였고, 길에서 맞이하는 자는 수레에서 읍례를 하였으며, 성문에서 맞이하는 자는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교태驕怠가 생겨나기 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환공桓公이 장차 패업霸業을 도모하려고 할 적에 관중管仲이 그를 경계하기를 땅에 있었을 때를 잊지 말라고 하였습니다.注+② 齊桓……無忘在莒:≪管子≫ 〈短語〉에 “桓公․管仲․鮑叔牙․甯戚 네 사람이 술을 마셨다. 술이 얼근하게 되자, 환공이 포숙아에게 말하기를 ‘어찌하여 일어나서 과인을 위해 祝壽하지를 않는가?’라고 하였다. 포숙아는 술잔을 받들고 일어나서 말하기를 ‘公으로 하여금 出奔하여 莒로 가던 때를 잊지 않게 하소서. 管子로 하여금 魯나라에서 束縛되었던 일을 잊지 않도록 하소서. 영척으로 하여금 소가 끄는 수레 아래에서 밥을 먹었던 일을 잊지 않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환공은 자리를 고쳐 않고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과인과 두 대부가 능히 夫子의 말을 잊지 않는다면 나라의 사직은 필시 위태롭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하였다. 이것은 뜻이 변하기 쉬울까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도 원컨대, 폐하께서 위태로웠던 때를 생각하여 국가를 굳건히 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하듯이 도모하시고, 난리를 잊어서 국가를 잃는 것을 뜨거운 물이 손에 닿듯이 징계하셔서, 땅에 있을 때를 잊지 말라는 말을 허리띠에 쓰는 규계規戒로 삼고 나라가 쇠망하게 되었던 일을 전복된 수레의 바퀴 자국을 따르는 감계鑑戒로 삼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은 제왕의 규범이 되고 정치는 태평성세를 이루게 될 것이니, 안일과 욕심을 탐하여 화기禍機를 초래하게 되는 것과는 그 이해利害가 역시 현격하다고 하겠습니다.
혼감渾瑊에게 조서詔書를 제술하라고 명하신 뜻을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바랍니다.注+③ 伏惟聖裁:이 奏狀이 德宗에게 올라간 뒤에 비록 詔書가 내려오지는 않았으나, 결국 사신을 파견하여 수색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덕종德宗봉천奉天의 포위가 풀리고 경사京師를 평정한 뒤에 혼감渾瑊에게 조서를 내려 예전에 데리고 있던 궁녀들을 불러들이려고 하여 “잃어버린 나인의 이름을 기록한 명단을 주고 알리기를 ‘에게 조서詔書를 지어 혼감渾瑊에게 내려고 봉천奉天에 파견하여 이들을 찾는 것을 목표로 삼고, 이어서 찾은 나인에게 물자物資와 행장을 마련해주어 속히 행재소로 보내라.’라고 하셨습니다.” 하였다. 이에 육지陸贄가 그렇게 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간언하니, 덕종은 다시 조서를 내리지 않았다. 육지는 이 주장奏狀에서 나인은 중궁中宮의 말단이거늘 부리는 데 부족할까 부인을 찾게 하고 또 물자와 행장을 주어 속히 행재로 달려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일에 선후가 있고 의리에 경중이 있다.’라는 전제에서 나인을 찾는 일은 결코 급선무도 아니고 중히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덕종은 이후에 다시 중사中使를 보내어 궁녀들을 찾게 했다. 조선시대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1597~1673)은 인조仁祖 말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할 때 ≪시경詩經≫의 시편을 해설하면서 국정에 대해 논한 ≪시풍詩諷≫을 엮어두었다가 인조가 승하한 뒤 왕위에 오른 효종孝宗에게 바쳤다. 그 가운데 〈징편懲篇〉 제5에서 나라 덕종德宗이 장안 수복 이후에 중사中使를 시켜 흩어진 궁녀들을 찾게 한 실정失政을 예로 들어, 아래와 같이 여색을 경계하였다. “덕종은 큰 역적이 비로소 평정된 날에 상처를 입은 전사戰士들을 어루만져주지는 않으면서 오직 궁녀만을 구하였습니다. 이미 육지의 말을 옳게 여겼으면 구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에 다시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구하게 하였습니다. 중사에게 명한 것이 혼감渾瑊에게 명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이것은 나라 무제武帝동언董偃선실宣室이 아닌 북궁北宮에서 만나본 것과 서로 비슷합니다. 아, 예로부터 어진 사람을 좋아하면 반드시 다스려졌고, 여색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였습니다. 덕종이 좋아하는 바는 여색에 있었으니, 이 때문에 봉천의 난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혹시라도 덕종이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어진 이를 좋아하였더라면 태평시대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니, 어찌 단지 봉천의 난리가 없을 뿐이었겠습니까. 용렬한 임금도 다스림은 어진 이를 좋아하는 데 달려 있고, 어지러움은 여색을 좋아하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바에 이르러서는, 제아무리 현명한 임금이라도 멀리하지를 못합니다. 치세가 적고 난세가 많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또한 정두경은 사람의 마음은 아주 빼어난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경우가 없다고 하여, 나라 부차夫差서시西施에게 빠졌던 일, 나라에서 15개의 화씨벽和氏璧과 바꾸려고 하였던 일, 나라에서 수만 명의 군사를 죽이면서까지 한혈마汗血馬를 구하였던 일, 나라에서 여진女眞해동청海東靑을 구하였던 일들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임금은 여색이나 재물이나 새매나 말을 구할 것이 아니라 인재를 구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시경詩經≫ 〈소아小雅 백구白駒〉의 “싱싱한 풀 한 줌을 주노니, 그 사람 마치 옥과 같이 아름답도다.[生芻一束 其人如玉]”라고 한 구절을 인증하였다. 이에 비하여 육지는 덕종이 난리 후에 사신을 보내 궁녀를 찾게 하는 일은 편안함에 거처하여 교만하고 잘 다스려짐을 믿고서 게으르게 되는 조짐이라고 하여 경계하였다. 육지는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 〉의 “위태로울까 함은 그 지위를 편안히 하는 것이요, 어지러울까 함은 그 다스림을 두게 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끌어와서, 교만하면 그 사치의 욕망을 멋대로 하게 되고, 게으르면 충성의 간언을 싫어하고 미워하게 되니, 사치의 욕망이 나날이 행하고 충성의 간언이 나날이 막히게 된다면, 나라를 상실하게 되리라고 경고하였다.


역주
역주1 時雍 : ≪書經≫ 〈堯典〉에 “만방을 화합해서 융화하게 하시니, 백성들이 아, 변하여 이에 화목해졌다.[協和萬邦 黎民於變時雍]”라고 하였다.
역주2 (五)[二十六] : 저본에는 ‘五’로 되어 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二十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威)[桓] : 저본에는 ‘威’로 되어 있다. 宋나라 欽宗의 이름인 ‘桓’을 피휘하여 ‘威’로 고친 것이다. 이에 ‘桓’으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당육선공주의(1) 책은 2023.01.1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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