田承嗣
가 阻兵犯命
하여 靡惡不爲
라가 竟逭天誅
하여 全歸土壤
注+① 藩鎭傳 “田承嗣, 平州盧龍人, 隷安祿山麾下. 自天寶以來, 叛服不常, 盜有貝․博․魏․衛․相․磁․洛七州, 而未嘗北面天子. 凡再興師, 會國威中奪, 窮而復縱, 故承嗣得肆其姦. 年七十五死, 贈太保. 緒乃承嗣第六子, 殺田悅以自立.”하니 此乃先朝所愧恨
이요 義士所惋嗟
어늘
今田緒가 尙干宸嚴하여 請頌遺愛하니 微臣隘跼은 實憤于心이라
謬承恩光하여 備位台輔어늘 旣未能滌除姦慝하여 裨益大猷하고
而又飾其愧詞하여 以贊兇德하며 納彼重賄하여 以襲貪風은 情所未安이요 事固難强이라
是以屢嘗執翰하나 不能措詞하고 輒投所操하여 太息而止하니
緣承聖誨하여 姑務懷柔라 昨見田緒使人하고 臣亦婉爲報答하여 但告云 所爲碑頌은 皆奉德音이라 旣異私情하니 難承厚貺이어니와 候稍休暇하여 續當撰成이라하니
其來書는 謹封進하고 所送馬及絹等은 令劉瞻으로 便領却迴訖하니 不敢不奏하노이다 謹奏라
10-1-3
가 군대를 믿고 천자의 명을 어기고서 자행하지 못하는 악행이 없다가 끝내 천벌을 면하여 온전히 자신의 땅으로 돌아갔으니,
注+① 田承嗣……全歸土壤:≪新唐書≫ 〈藩鎭傳〉에 “田承嗣는 平州 盧龍 사람인데, 安祿山의 麾下에 예속되어 있었다. 天寶 연간 이래로 반란하고 복종하길 자주 번복하여서, 貝․博․魏․衛․相․磁․洛 등 7州를 도적질하여 차지하고 있으면서, 天子에게 北面한 적이 없었다. 이에 모두 두 번에 걸쳐 군사를 일으켰으나 마침 국가의 위엄이 중간에 탈취되어 그가 곤궁한 처지가 있다가 다시 방종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승사가 간악한 짓을 마음대로 자행할 수가 있었다. 나이 75살에 죽었고 太保에 추증되었다. 田緒는 바로 전승사의 여섯 번째 아들인데, 田悅을 살해하고서 스스로 즉위하였다.” 하였다. 이는 바로
선조先朝에서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긴 바이고, 의로운 선비들이 한탄하고 탄식한 바입니다.
그런데도 이제 전서田緒가 오히려 천자의 위엄을 범하여 부친의 유애遺愛를 칭송하는 글을 청하니, 미천한 신臣의 도량이 좁아 실로 마음속으로 분해하는 것입니다.
외람되이 은택을 받아서 태보台輔(재상)의 자리만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간특姦慝한 무리를 없애서 천자의 크나큰 계책을 돕지 못하고 있는데,
게다가 그 부끄러운 말을 지어서 전승사의 흉덕兇德을 찬양하고 저들의 후한 뇌물을 받아서 탐람한 풍조를 따르는 것은 마음에 편안하지 못한 바이고 일에 있어서 정말로 억지로 하기 어렵습니다.
이 때문에 누차 붓을 잡아보았으나, 글을 짓을 수 없어서 번번이 손에 들었던 붓을 그냥 던져버리면서 크게 한숨을 쉬고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성상의 가르침을 받들어 잠시 마음을 누그러뜨리려고 애쓰던 차에, 어제 전서의 사인使人을 보고 신이 또한 완곡하게 답변을 하여 “비문을 짓는 것은 모두 덕음德音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므로 사사로운 정리情理와 다르니, 후한 선물을 받기 어렵다. 잠시 휴가를 기다려 이어서 마땅히 글을 완성하겠다.”라고 하였으니,
거절拒絶하는 말도 없었을 뿐 아니라 계책 또한 의심하여 막히는 것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보내온 서찰은 삼가 봉하여 올리고 보내온 말과 비단 등은 유첨으로 하여금 즉시 가지고 가서 되돌려주게 하였으니, 감히 상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평설評說】 이 주장奏狀은,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승사田承嗣의 일곱째 아들 전서田緖가 자신의 부친 전승사를 위한 유애비遺愛碑를 작성하여 달라고 육지陸贄에게 부탁하고 뇌물을 보내자 육지가 글을 작성할 수가 없고 뇌물은 돌려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덕종德宗에게 아뢰는 글이다. 전승사는 원래 안녹산安祿山의 부장部將으로 공을 세워 무위장군武衛將軍에 올랐으며 반란에 가담하여 낙양洛陽을 함락시켰으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실패한 후 조정에 항복하여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에 봉해진 인물이다. 안문군왕雁門郡王으로 있던 대력大曆 10년(775)에는 상주相州와 위주衛州를 점거했다가 관군에 핍박당하자 이보신李寶臣과 주도朱滔를 이간하고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표문을 올림으로써 사면받았다. 하지만 이듬해 이령요李靈曜의 반란을 지원하였으며, 위주魏州․박주博州 등 7주州를 점거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력大曆 14년(779) 병사한 후 조카 전열田悅이 절도사節度使의 지위를 이어받았으나, 전승사의 일곱째 아들 전서가 당형堂兄 전열을 살해하고 스스로 절도사가 되었다. 조정은 그를 제압하지 못하고 가성공주嘉誠公主를 하가下嫁시켜 부마駙馬로 삼아야 하였다. 전서가 전승사의 유애비 건립을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고 더구나 그 비문도 조정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의 승계를 인정한다는 뜻을 명문화해달라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육지는 “선을 권하고 악을 경계하는 방도는 충의忠義에서 우선시하는 것이고 옳고 그름[포폄褒貶]을 판단하는 말은 ≪춘추春秋≫에서 중하게 여긴 것이다.”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작위爵位는 요행으로 얻을 수 있지만 명칭名稱은 속임수와 힘으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유애비의 글을 지을 수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하였다. 다만 거절하는 뜻을 명확히 보이지 않고 저쪽의 분노를 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잠시 휴가를 기다려 이어서 마땅히 글을 완성하겠다.”라고 알리고, 보내온 뇌물은 “비문을 짓는 것이 사사로운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자의 명을 받들고 행하는 것이다.”라는 이유에서 돌려보내자고 하였다. 명분을 지키면서 상대를 다독이는 계책을 사용하자고 한 것이다. 유애비는 본래 지방관이 백성들에게 선정善政을 베푼 것을 칭송하여 세우는 비석을 말한다. 선정비善政碑를 유애비라고도 칭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20년에 보면 춘추시대 정鄭나라 공손교公孫僑, 곧 정자산鄭子産이 죽자 공자孔子가 눈물을 흘리며 “옛날 사랑을 남긴 분이다.[古之遺愛]”라고 칭송한 말이 ‘유애遺愛’란 말의 기원이다. 유애비에 대해서는 당나라 봉연封演의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 〈송덕頌德〉에, “관직에 있으면서 특출하게 뛰어난 정치를 하여 근무 평가가 이루어져 임기가 이미 끝나게 된 후 하급관리와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는 것은 모두 모름지기 사실을 자세히 살펴서 천자가 은혜로운 칙서를 내려 허락한 연후에 세울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송덕비頌德碑라고 하고 또 유애비라고 한다.[在官有異政 考秩已终 吏人立碑颂德者 皆须审详事实 州司以状闻奏 恩勅聽许 然后得建之 故谓之颂德碑 亦曰遗爱碑]”라고 하였다. 유애비의 글로 당나라 진자앙陈子昂이 쓴 〈임공현령봉군유애비臨邛縣令封君遺愛碑〉 비문이 있다. 송덕비와 유애비는 같은 말로, 지방관의 임기가 끝난 이후에 하급관리와 백성들이 요청하여 주사州司가 문서로 상주하여 천자의 칙령에 의하여 세울 수 있다. ≪구당서舊唐書≫ 〈최원전崔圓傳〉에 보면,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현종玄宗이 최원崔圓에게 명하여 방관房琯․위견소韋見素와 함께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로 가게 하였는데, 현종玄宗이 친히 촉蜀에서 유애비遺愛碑를 지어 총애하였다.[肃宗即位 玄宗命圆 同房琯韦见素 并赴肃宗行在所 玄宗亲制遗爱碑于蜀以宠之]”라고 하였다. 아마도 현종이 최원을 위해 유애비를 세워준 이래로 천자에게 유애비 수립을 요청하는 풍조가 생겨난 듯하다. 육지가 유애비를 ‘권계勸戒의 도道’와 ‘포폄褒貶의 언사’와 연관시켜 건립에 신중히 할 것을 주장한 논리는 조선 중기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신도비神道碑를 공기公器로 보아 그 건립을 신중히 할 것을 주장한 발언에 계승 발전되었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