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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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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장방평張方平을 대신해서 용병用兵에 대해 간한 글
予嘗謂 自古 論用兵 惟漢淮南王安 諫伐閩越書爲最러니 而此書 法度 似又勝之하니 此等文章 與天地 竝傳者니라
내 일찍이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용병用兵을 논한 것 중에는 오직 나라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민월閩越을 정벌하는 것을 간한 글이 최고라고 여겼는데, 이 글의 법도는 그보다도 더 나은 듯하니, 이러한 문장은 천지天地와 함께 전해질 만한 것이다.
臣聞 好兵 猶好色也
은 들으니 “전쟁을 좋아함은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傷生之事非一이로되 而好色者必死하고 賊民之事非一이로되 而好兵者必亡이라하니 理之必然者也니이다
생명을 손상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여색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죽고, 백성을 해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이치에 반드시 그러한 것입니다.
夫惟聖人之兵 皆出於不得已
성인聖人이 군대를 출동한 것은 모두 부득이한 데서 나왔습니다.
其勝也 享安全之福하고 其不勝也 必無意外之患이니이다
그러므로 이겼을 경우에는 안전한 을 누리고, 이기지 못했을 경우에도 반드시 뜻밖의 환란患亂이 없었습니다.
後世用兵 皆得已而不已
그런데 후세의 용병用兵은 모두 그만둘 수 있는데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其勝也 則變遲而禍大하고 其不勝也 則變速而禍小
그러므로 이기면 변란變亂이 더디나 가 크고, 이기지 못하면 변란變亂이 빠르나 가 적습니다.
是以 聖人 不計勝負之功하고 而深戒用兵之禍하니이다
이 때문에 성인聖人은 승부의 을 따지지 않고 용병用兵를 깊이 경계했던 것입니다.
何者
어째서이겠습니까?
興師十萬이면 日費千金하고 內外騷動하야 七十萬家
10만 명의 군대를 일으키면 날마다 천금千金을 허비하고 내외內外가 소동해서 도로에서 위태로운 자가 70만 가호家戶나 됩니다.
內則府庫空虛하고 外則百姓窮匱하야 饑寒逼迫하야
안으로는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밖으로는 백성들이 곤궁해서 굶주림과 추위에 내몰립니다.
其後 必有盜賊之憂하고 死傷愁怨하야 其終 必致水旱之報하며 上則將帥擁衆하야 有跋扈之心하고 下則士衆久役하야 有潰叛之志하야 變故百出하니 皆由用兵하니이다
그런 뒤에는 반드시 도적의 우려가 있고 또 죽거나 부상함에 근심하고 원망하여, 종말에는 반드시 홍수와 한해의 응보가 있으며, 위로는 장수가 병력을 보유하여 발호하는 마음이 있게 되고, 아래로는 군사들이 오랫동안 부역하여 반란하고 궤멸하려는 마음이 있어서 온갖 변고가 다 나오니, 이는 모두 용병用兵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至於興事首議之人하야는 尤重하니 蓋以平民無故緣兵而死하야 怨氣充積하야 必有任其咎者
앞장서서 사단事端을 일으켜 전쟁을 의논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귀신의 견책이 더욱 무거우니, 이는 평민平民들이 까닭 없이 전쟁 때문에 죽어 원망하는 기운이 가득히 쌓여서 반드시 그 허물을 책임져야 할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是以 聖人 畏之重之하야 非不得已 不敢用也하시니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전쟁을 두려워하고 신중히 여겨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감히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自古 人主好動干戈라가 由敗而亡者 不可勝數하니 臣今不敢復言이요 請爲陛下言其勝者호리이다
예로부터 군주가 창과 방패를 동원하기 좋아하다가 패전으로 말미암아 망한 자를 이루 다 셀 수가 없으니, 은 지금 감히 이들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지 않고, 청컨대 폐하를 위해서 승리한 자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秦始皇 旣平六國하고 하야 戍役之患 被於四海하니 雖拓地千里하야 遠過三代 而墳土未乾 天下怨叛하야 二世被害하고 하야 滅亡之酷 自古所未嘗有也니이다
나라 시황始皇은 이미 6을 평정하고 다시 북호北胡남월南越을 정벌하여 수자리 사는 부역의 근심이 사해四海에 가득하니, 비록 국경을 천리千里나 개척하여 삼대시대三代時代를 크게 뛰어넘었으나 시황始皇이 죽어서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천하 사람들이 원망하고 배반하여 아들인 이세황제二世皇帝가 시해를 당하였고 자영子嬰이 사로잡혀서 참혹하게 멸망하였으니, 이는 예로부터 일찍이 그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漢武帝 承文景富溢之餘하야 首挑匈奴하야 兵連不解하고 遂使侵尋 及於諸國하야 歲歲調發하야 所向成功하니이다
나라 무제武帝는 국가가 부유하여 재물이 넘쳐나던 문제文帝경제景帝의 뒤를 이어받고 먼저 흉노匈奴에게 도전하여 전쟁이 이어져 그치지 않았으며, 마침내 침략이 점차 여러 나라에까지 미치게 되어 해마다 군대를 징발해서 향하는 곳마다 을 세웠습니다.
之間 兵禍始作하니 是時 이러니
건원建元 연간에 병란兵亂가 처음 시작되었는데, 이때 하늘에는 치우기蚩尤旗가 나와 길이가 하늘 끝까지 이어질 정도로 길었습니다.
其春 이라 自是 師行三十餘年 死者無數러니 京師流血하야 僵尸數萬하고 太子父子皆敗하니이다
이해 봄에 여태자戾太子가 출생하였는데, 이로부터 군대를 출동한 지 30여 년에 죽은 자가 무수히 많았으며, 무고巫蠱옥사獄事가 일어나자 경사京師에 피가 흘러서 쓰러진 시신이 수만 명이었고, 태자太子 부자父子가 모두 패망하였습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이르기를 “태자太子병란兵亂 중에 태어나고 성장해서 전화戰禍와 시종을 같이하였으니, 무제武帝가 비록 뉘우치고 깨달아 스스로 극복하였으나 평생의 한은 이미 어쩔 수 없었다.”라고 하였습니다.
隋文帝 하고 繼事夷狄이러니 煬帝嗣位하야 此志不衰
나라 문제文帝강남江南을 함락하자 이어서 오랑캐 정벌을 일삼았는데, 양제煬帝가 뒤를 이어서도 이 마음이 쇠퇴하지 않았습니다.
皆能誅滅强國하야 威(鎭)[震]萬里
그리하여 모든 강성한 나라들을 주멸誅滅하여 위업이 만리에 진동하였습니다.
然而民怨盜起하야 亡不旋踵하니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원망하고 도둑떼가 일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唐太宗 神武無敵하고 尤喜用兵이라
나라 태종太宗신무神武가 대적할 자가 없었고 또 용병用兵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旣已破滅突厥, 高昌, 吐谷渾等이로되 猶且未厭하야 하니 皆志在立功이요 非不得已而用이니이다
이미 돌궐突厥, 고창高昌, 토욕혼吐谷渾 등을 격파하여 멸망시키고도 만족하지 못해서 친히 요동遼東을 정벌하였으니, 이는 모두 뜻이 을 세우는 데에 있었고 부득이하여 용병用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其後하니 蓋用兵之禍 物理難逃니이다
그 후에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난리에 나라 황실이 점점 쇠퇴하여 국통國統이 한 가닥의 실오라기처럼 이어져 겨우 끊어지지 않았으니, 용병用兵는 사물의 이치상 피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不然이면 太宗 仁聖寬厚하고 克己裕人하야 幾至刑措어늘 而一傳之後 子孫塗炭하니 此豈爲善之報也哉잇가
그렇지 않다면 태종太宗은 인자하고 스럽고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남을 여유롭게 해서 거의 형벌을 쓰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위帝位가 한번 전해진 뒤에 자손이 도탄에 빠졌으니, 이것이 어찌 선행을 한 보답이겠습니까?
由此觀之컨대 漢唐 用兵於寬仁之後 其勝而僅存하고 秦隋 用兵於殘暴之餘 其勝而遂滅하니이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나라와 나라는 너그럽고 인자한 뒤에 용병用兵하였기 때문에 승리하였으나 겨우 보존하였고, 나라와 나라는 잔인하고 포악한 뒤에 용병用兵하였기 때문에 승리하고도 마침내 멸망한 것입니다.
臣每讀書至此 未嘗不掩卷流涕하야 傷其計之過也니이다
은 매번 책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계책計策의 잘못됨을 서글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若使此四君者 方其用兵之初 隨卽敗하고 惕然戒懼하야 知用兵之難이런들 則禍敗之興 當不至此어늘
만약 이 네 군주君主들이 용병用兵하던 초기에 곧바로 패전하여 척연惕然히 경계하고 두려워해서 용병用兵의 어려움을 알았던들 화패禍敗의 일어남이 마땅히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不幸每擧輒勝이라 使狃於功利하야 慮患不深하니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매번 전쟁할 때마다 승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공리功利에 길들여져서 후환을 깊이 염려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曰 勝則變遲而禍大하고 不勝則變速而禍小라하니 不可不察也니이다
은 그러므로 말하기를 “이기면 변란變亂이 더디나 가 크고, 이기지 못하면 변란變亂이 빠르나 가 적다.”라고 하는 것이니,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昔仁宗皇帝 育天下하야 無意於兵하시니 將士惰偸하고 이라
옛날 우리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는 천하를 감싸 길러주시고 전쟁에 뜻이 없으셨으니, 장병將兵들이 나태해지고 병기와 갑옷이 해지고 무뎌졌습니다.
乘間하야 竊發西鄙하니 延安, 涇原, 獜, 府之間 敗者三四 所喪 動以萬計 而海內晏然하고 兵休事已 而民無怨言하고 國無遺患하니 何者
원호元昊가 이 틈을 타서 서쪽 변방에서 몰래 뛰쳐나오니, 연안延安경원涇原인주獜州부주府州의 사이에서 패전한 것이 서너 차례였고 병사를 잃은 것이 걸핏하면 만 명으로 헤아려졌으나 그래도 천하가 편안하였으며, 전쟁이 끝나자 백성들이 원망하는 말이 없고 나라에 뒤탈이 없었으니, 어째서이겠습니까?
天下臣庶 知其無好兵之心하고 天地鬼神 諒其有不得已之實故也니이다
천하의 신민臣民들이 인종황제仁宗皇帝께서 전쟁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심을 알았고, 천지天地신명神明이 그 부득이한 실제가 있음을 양찰諒察하였기 때문입니다.
今陛下天錫勇智 意在富强이라
지금 폐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용맹과 지혜로, 뜻이 부국강병富國强兵에 있으십니다.
卽位以來 繕甲治兵하야 伺候隣國하시니 群臣百寮 窺見此指하고 多言用兵하니이다
그래서 즉위한 이래로 갑옷을 수선하고 병기를 단련하여 이웃나라를 엿보고 계시니, 군신群臣백관百官들이 이런 뜻을 살피고는 대부분 용병用兵을 말하고 있습니다.
其始也 弼臣執國命者 無憂深思遠之心하고 樞臣當國論者 無慮害持難之識하며 在臺諫之職者 無納忠之議하야
그래서 맨 처음에 보필하는 신하로서 나라의 운명을 쥐고 있는 자가 깊이 근심하고 멀리 생각하는 마음이 없었고, 추밀원樞密院의 신하로 국론을 담당한 자들이 해로움을 우려하고 신중함을 유지하는 식견이 없었으며, 대간臺諫의 직책에 있는 자들이 헌가체부獻可替否하여 충성을 바치는 의논이 없었습니다.
從微至著하야 遂成厲階하니이다
그리하여 작은 것으로부터 드러남에 이르러서 마침내 의 단서를 이루었습니다.
旣而 하고 하며 陳升之, 呂公弼等 陰與之協力이라가 師徒喪敗하고 財用耗屈하니
이윽고 설향薛向횡산橫山의 계책을 내고 한강韓絳은 적지에 깊이 쳐들어갈 계책을 바쳤으며, 진승지陳升之여공필呂公弼 등은 은밀히 이들과 함께 협력하다가 군대가 패망을 당하고 재용財用이 다 탕진되었습니다.
較之하면 不及十一이나 然而天怒人怨하야 邊兵背叛하고 京師騷然하야
이는 보원寶元경력慶曆 연간의 패전에 비교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하늘이 노여워하고 백성들이 원망해서 변경의 병사들이 배반하고 경사京師가 소란해졌습니다.
陛下爲之者累月하니 何者
폐하께서는 이 때문에 정무政務를 밤늦도록 보시느라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하신 지가 여러 달이 되었으니, 이는 어째서이겠습니까?
用兵之端 陛下作之일새니이다
용병用兵하는 단서를 폐하께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是以 吏士無怨敵之意하고 而不直陛下也니이다
그러므로 관리와 군사들은 적을 원망하는 뜻이 없고 폐하의 일을 옳다고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尙賴祖宗積累之厚 皇天保祐之深이라 使兵出無功하야 感悟聖意하니이다
그래도 다행히 조종祖宗께서 두터이 쌓으신 공덕과 황천皇天의 깊은 보우保佑에 힘입어 군대가 출동함에 이 없게 만들어서 성상聖上의 뜻을 감동시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나 淺見之士 方且以敗爲恥하고 力欲求勝하야 以稱上心이라
그러나 식견이 얕은 인사人士들은 지금 막 패전을 수치로 여기고 힘써 승리하기를 구하여 성상聖上의 마음을 맞추고자 합니다.
이에 왕소王韶희하熙河 지방에서 를 만들어 내고 장돈章惇횡산橫山 지방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웅본熊本유주渝州노주瀘州에서 전란을 일으켰습니다.
然此等 皆戕賊已降하고 俘纍老弱하야 困弊腹心하야 而取空虛無用之地하야 以爲武功이라
그러나 이들은 모두 이미 항복한 자들을 살해하고 노약자들을 포로로 잡으면서 우리의 도성지역을 피폐하게 만들고 텅 비어 쓸모없는 땅을 점령하여 무공武功으로 삼았습니다.
使陛下受此虛名하고 而忽於實禍하야 勉强砥礪하야 奮於功名이라
그리하여 폐하로 하여금 이 헛된 명예를 얻고 실제의 를 소홀하게 여겨서 억지로 힘써 갈고 닦아 공명功名에 분발하게 하였습니다.
하야 使十餘萬人으로 暴露瘴毒하야 死者十而五六이요 道路之人 斃於輸送하야 貲糧器械 不見敵而盡이라
그리하여 심기沈起유이劉彝가 다시 안남安南으로 출동하여 10여 만의 대군大軍으로 하여금 장독瘴毒이 있는 지역에서 낮에는 햇볕을 쪼이고 밤에는 이슬을 맞게 하여 죽은 자가 10에 5, 6명에 이르렀고, 도로에서 식량을 운반하는 자들은 수송하다가 죽어서 군수물자와 식량과 병기가 적을 만나기도 전에 다 없어졌습니다.
以爲用兵之意 必且少衰러니니이다
이에 용병用兵하려는 뜻이 반드시 장차 조금 수그러질 것이라 여겼는데, 이헌李憲의 군대가 다시 조주洮州로 출동하였습니다.
하니 陛下喜於一勝하사 必有輕視四夷하고 陵侮敵國之意하시리니 天意難測하야 臣實畏之하노이다
지금 이 군대가 승리하여 예기銳氣가 한창 강성하니, 폐하께서는 한 번의 승리에 도취되어 반드시 사이四夷를 깔보고 적국을 업신여기시는 뜻이 있으실 것이니, 하늘의 뜻을 측량하기가 어려워서 은 실로 두려워합니다.
且夫戰勝之後 陛下可得而知者 凱旋捷奏하고 拜表稱賀하야 赫然耳目之觀耳니이다
또 싸워서 승리한 뒤에 폐하께서 알 수 있는 것은, 개선하여 승리를 아뢰고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해서, 혁연히 이목耳目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至於遠方之民 肝腦塗於白刃하고 筋骨絶於餽餉하야 流離破産하야 賣男女하고 之狀하야는 陛下必不得而見也 慈父孝子孤臣寡婦之哭聲 陛下必不得而聞也시리이다
그러나 먼 지방 백성들의 간뇌肝腦가 적의 시퍼런 칼날에 찢겨지고 힘줄과 뼈가 군량을 수송하다가 끊어져서 유리하고 파산하여 아들딸을 팔아먹으며 스스로 눈을 멀게 하고 팔을 부러뜨리고 목매 죽는 참상에 이르러서는 폐하께서 반드시 보지 못하셨을 것이요, 자애로운 부모와 효도하는 자식과 외로운 신하와 과부들이 통곡하는 소리를 폐하께서 반드시 듣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譬猶屠殺牛羊하고 魚鼈하야 以爲膳羞하면 食者 甚美 死者 甚苦하니 使陛下見其號呼於梃刃之下하고 宛轉於刀几之間하시면 雖八珍之美라도 必將投箸而不忍食이어든 而況用人之命하야 以爲耳目之觀乎잇가
비유하면 소와 양을 도살하고 물고기와 자라를 잡아다가 배를 갈라 살점을 도려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면 먹는 사람은 매우 맛있지만 죽는 것들은 매우 괴로운 것과 같으니, 만일 폐하께서 소와 양이 몽둥이와 칼날 아래에서 울부짖고 물고기와 자라가 칼과 도마 사이에서 펄떡거리는 것을 보신다면 비록 아름다운 팔진미八珍味라도 반드시 장차 젓가락을 던지고 차마 드시지 못할 터인데, 하물며 사람의 생명을 사용하여 이목耳目의 구경거리로 삼으신단 말입니까?
且使陛下將卒精强하고 府庫充實하야 如秦, 漢, 隋, 唐之君이라도 旣勝之後 禍亂方興이면 尙不可救어든 而況所在將吏 罷軟凡庸하야 較之古人하면 萬萬不逮하고 而數年以來 公私窘乏하야 內府累世之積 掃地無餘하고 州郡征稅之儲 上供殆盡하야 百官俸廩 僅而能繼하고 南郊賞給 久而未辦하니 以此擧動으론 雖有智者 無以善其後矣니이다
또 폐하께서 의 군주와 같이 장병將兵이 정예롭고 강하며 부고府庫가 충실하다 할지라도 승리한 뒤에 화란禍亂이 막 일어나면 오히려 구원할 수가 없을 텐데, 하물며 지금은 소재지所在地마다 장수와 관리들이 피폐하고 연약하고 용렬해서 옛사람에 비교하면 결코 미치지 못하며, 또 몇 년 이래로 공사公私간에 재정財政이 궁핍해서 내부內府에 몇 동안 축적한 것이 땅을 쓸어낸 듯 남은 것이 없고 주군州郡에서 징수하여 저축한 세금이 상공上供으로 거의 없어져서, 백관百官녹봉祿俸을 근근이 이어가며 남교南郊에서 교사郊祀 지내고 하사하던 을 오랫동안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거동擧動으로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다 할지라도 그 뒤를 잘 수습할 방법이 없습니다.
且饑疫之後 所在盜賊蜂起하니 京東, 河北 尤不可言이니이다
또 기근과 전염병이 있은 뒤에는 곳곳마다 도적이 봉기하니, 그중에서도 경동京東하북河北 지방은 더더욱 말할 수가 없습니다.
若軍事一興이면 橫斂隨作하야 民窮而無告하리니 其勢不爲大盜 無以自全이라
만일 군사軍事(전쟁)를 한 번 일으키게 되면 뒤따라 가렴주구苛斂誅求가 자행되어 백성들이 곤궁하여도 하소연할 데가 없을 것이니, 그 형세가 큰 도둑(반란군)이 되지 않으면 스스로 온전히 살 길이 없습니다.
邊事方深 內患復起 將在於此하리니 此老臣所以終夜不寐하고 臨食而歎하야 至於慟哭而不能自止也니이다
변경에 전쟁이 한창인데 내란內亂이 다시 일어난다면 진승陳勝오광吳廣과 같은 형국이 장차 여기에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노신老臣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밥상을 대하고도 탄식하다가 통곡함에 이르러 스스로 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且臣聞之호니 凡擧大事 必順天心이니 天之所向 以之擧事 必成이요 天之所背 以之擧事 必敗라하니이다
이 들으니 무릇 대사大事를 일으킬 적에는 반드시 천심天心에 순응해야 하니, 하늘이 향하는 바에 따라 그대로 거사擧事하면 반드시 성공하고, 하늘이 저버리는 바에 따라 그대로 거사擧事하면 반드시 패한다고 하였습니다.
蓋天心向背之迹 見於災祥豊之間하니이다
천심天心이 향하느냐 저버리느냐는 자취는 재앙災殃상서祥瑞, 풍년과 흉년의 사이에 나타납니다.
今自近歲 日食星變 地震山崩 水旱癘疫 連年不解하야 民死將半하니 天心之向背 可以見矣어늘
그런데 지금 근년近年 이래로 일식日食과 별의 변고, 지진과 산사태, 수해水害한해旱害와 전염병이 해마다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백성들이 장차 절반이 죽게 되었으니, 천심天心이 향하느냐 저버리느냐를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而陛下方且斷然不顧하야 興事不已하시니 譬如人子得過於父母 惟有恭順靜思하고 引咎自責이면 庶幾可解어늘 今乃紛然詰責奴婢하고 恣行箠楚하니 以此事親이면 未有見赦於父母者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단호히 돌아보지 않고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키시니, 비유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적에 오직 공손하고 화순하며 조용히 생각하고 허물을 자신에게 돌려 자책하면 거의 부모의 노여움을 풀 수 있는데, 도리어 분분하게 노비들을 나무라고 멋대로 종아리와 볼기를 치는 것과 같으니, 이런 방법으로 어버이를 섬긴다면 부모에게 용서받을 자가 있지 않습니다.
臣願陛下遠覽前世興亡之迹하고 深察天心向背之理하사 絶意兵革之事하시고 保疆睦隣하야 安靜無爲 固社稷長久之計니이다
그러므로 은 폐하께서 전대前代의 흥하고 망한 자취를 멀리 살펴보시고 천심天心이 향하고 저버리는 이치를 깊이 살피셔서, 전쟁하는 일을 단념하시고는 오직 강토疆土를 보존하고 이웃나라와 화친해서 안정安靜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기를 바라오니, 이것이 진실로 사직社稷을 장구하게 하는 계책입니다.
上以安朝夕之養하고 下以濟四方億兆之命하시면 則臣雖老死溝壑이나 瞑目於地下矣리이다
그리하여 위로는 두 의 봉양을 조석으로 편안히 받들고 아래로는 사방 억조億兆 백성들의 목숨을 구제하신다면, 이 비록 늙어 죽어서 시신이 도랑에 뒹굴더라도 지하에서 편안히 눈을 감겠습니다.
昔漢祖破滅群雄하야 遂有天下하고 光武百戰百勝하야 祀漢配天하나이다
옛날 나라 고조高祖군웅群雄을 격파하고 멸망시켜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였고, 광무제光武帝는 백전백승하여 나라 종묘宗廟에 다시 제사를 지내어 천제天帝에 배향하였습니다.
이나하고 하니 此二帝者 非不知兵也
그러나 고조高祖백등白登에서 포위를 당하게 되자 화친의 의논을 강구하였고, 광무제光武帝서역西域에서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자 사절하는 말을 내었으니, 이 두 황제가 용병用兵하는 법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蓋經變旣多하면 則慮患深遠이니이다
이는 변고를 많이 겪으면 환란을 우려함이 깊고 멀기 때문이었습니다.
今陛下深居九重하사 而輕議討伐하시니 老臣庸懦하야 私竊以爲過矣라하노이다
지금 폐하께서는 깊이 구중궁궐에 거처하시면서 가볍게 토벌을 의논하시니, 용렬하고 나약한 노신老臣은 적이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나 人臣納說於君 因其旣厭而止之하면 則易爲力이요 迎其方銳而折之하면 則難爲功이니이다
그러나 신하가 군주에게 말씀을 올릴 적에, 군주가 이미 싫어하는 것을 가지고 만류하면 힘(효과)이 되기가 쉽고, 의욕이 아주 강성할 때를 맞아 꺾으면 (효과)이 되기가 어렵습니다.
凡有血氣之倫 皆有好勝之意하니 方其氣之盛也 雖布衣賤士라도 有不可奪이니
무릇 혈기를 가지고 있는 종류들은 다 이기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기기를 좋아하는 기운이 막 성할 때에는 비록 포의布衣의 천한 선비라도 그 뜻을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自非智識特達하고 度量過人이면 未有能勇於奮發之中하야 舍己從人하야 惟義是聽者也니이다
만일 지식이 특출하고 도량이 보통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자가 아니면, 분발하는 도중에 용기 있게 자기 의견을 버리고 남의 말을 따라서 오직 의로움만을 따르는 자는 있지 않습니다.
今陛下盛氣於用武하시니 勢不可回 臣非不知로되
지금 폐하께서 무력武力을 쓰는 데 기운을 다하고 계시니, 그 형세를 돌릴 수 없음을 이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而獻言不已者 誠見陛下聖德寬大하사 聽納不疑
그런데도 이런 말씀을 끊임없이 올리는 까닭은, 진실로 폐하의 성덕聖德이 관대하셔서 남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不敢以衆人好勝之常心으로 望於陛下니이다
이에 감히 이기기를 좋아하는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폐하께 바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且意陛下他日 親見用兵之害하시면 必將哀痛悔恨하사 而追究左右大臣未嘗一言이요
또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후일에 용병用兵의 폐해를 직접 보시면, 반드시 장차 애통하고 후회하고 스러워하시면서 좌우左右에 있는 대신大臣들이 일찍이 한마디도 만류하지 않은 것을 추궁하실 것입니다.
臣亦將老且死하야 見先帝於地下하면 亦有以藉口矣리이다
그리고 또한 장차 늙어 죽어 선제先帝를 지하에서 뵙게 되면 입에 올릴 말[口實]이 있을 것입니다.
惟陛下哀而察之하소서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살펴주소서.
역주
역주1 代張方平諫用兵書 : 이 글은 작성 연도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 글 가운데 ‘李憲의 군대가 다시 洮州로 출동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元豐 4년(1081)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때 蘇軾은 좌천되어 黃州에 있었으며 張方平은 致仕하고 南京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글은 元豐 4년에 蘇軾이 南京에 가서 張方平을 방문하고 그를 위하여 代作한 듯하다. 張方平(1007~1091)은 字가 安道이며 應天 宋城 사람이다. 仁宗 景祐 元年(1034)에 進士로 출사하여 神宗 때에 벼슬이 參知政事에 이르렀다. 蘇軾의 부친인 蘇洵의 知己로 蘇洵의 묘갈명을 지었는데, 이 내용이 본서 권10 〈謝張太保撰先人墓碣書〉에 보인다.
역주2 殆(怠)於道路者 : 本集과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殆’가 ‘怠’로 되어 있으나 뜻이 그리 분명하지 않으므로 底本을 그대로 따랐다. 혹 ‘怨’字의 誤記가 아닌가 생각된다.
역주3 冥謫 : 冥은 冥府로 저승에서 귀신이 내리는 벌을 이른다.
역주4 復事胡越 : 胡越은 북쪽의 匈奴와 남쪽의 越 지방을 이른다. 始皇 32년(B.C. 215)에 始皇이 북쪽 변경을 순행하였는데, 이때 盧生이 海島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예언서의 일종인 《籙圖書》를 지어 바치며 아뢰기를, “秦나라를 멸망하게 할 자는 胡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始皇은 군대 30만 명을 징발하고 장군 蒙恬을 보내어 북쪽으로 匈奴를 정벌하고 河南 땅을 거두어 44개 縣을 만들고 長城을 쌓았다. 始皇은 또다시 32년에 요역을 피해 도망한 자와 집이 가난하여 남의 노예가 된 자들을 붙잡아 군대를 만들고 南越을 공격하여 점령한 다음, 그 땅에 桂林, 象郡, 南海 등의 郡을 설치하였다. 《史記 秦始皇本紀》
역주5 子嬰被擒 : 子嬰은 二世皇帝의 형의 아들(조카)로, 始皇의 長子 扶蘇의 아들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당시 정권을 專斷하던 승상 趙高가 二世皇帝를 시해하고 子嬰을 임금으로 세웠는데, 子嬰이 趙高를 죽이고 三族을 멸하였다. 劉邦의 군대가 도성인 咸陽으로 쳐들어오자, 子嬰은 흰 수레를 타고 나와 항복하고 천자의 옥새를 바쳐 생명을 부지하였으나 뒤에 다시 咸陽을 점령한 項羽에게 살해되었다. 《史記 漢高祖本紀》
역주6 建元 : 漢나라 武帝 때의 年號(B.C. 140~B.C. 135)이다.
역주7 蚩尤旗出하야 長與天等 : 蚩尤旗는 彗星의 일종으로 꼬리 부분이 구부러져 있어서 깃발같이 보이므로 旗라 하였다. 옛날 《天文志》에 兵亂이 일어나게 되면 나타나는데 길이가 길수록 병란이 길고 참혹하다고 하였다. 《漢書 天文志》
역주8 戾太子生 : 戾太子는 漢나라 武帝의 正妃인 衛皇后의 소생으로 태자로 봉해졌던 劉據의 諡號이다. 元光 元年(B.C. 134)에 태어났는데, 武帝 征和 2년(B.C. 91)에 江充에 의하여 巫蠱의 禍가 일어나 誣陷을 입게 되자, 군대를 일으켜 江充을 죽였으나 결국 패하여 도망갔다가 자살하였다.
역주9 巫蠱事 : 巫蠱의 獄事를 이른다. 巫蠱는 일종의 저주인데, 당시 武帝를 저주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자 武帝가 江充에게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江充이 武帝의 총애를 믿고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戾太子를 압박하고자 저주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木人(나무로 만든 인형)이 太子宮에서 많이 나왔다고 무고하였다. 이에 戾太子는 황제가 도성에 있지 않은 틈을 타 궁중 수비병을 동원하여 江充을 살해하였다. 이를 太子의 반란이라고 여긴 武帝가 군대를 보내 체포하려 하자 戾太子는 虢州로 도망갔으나 죄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자결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그의 처자식과 수많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역주10 班固以爲……已無及矣 : 이 내용은 《漢書》 〈武五子傳贊〉에 보인다.
역주11 旣下江南 : 江南은 南朝인 陳나라를 가리킨다. 隋나라 文帝인 楊堅은 陳나라를 평정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나, 뒤를 이은 煬帝가 高句麗 정벌에 실패한 다음 도적떼가 봉기하여 곧 멸망하였다.
역주12 親駕遼東 : 唐나라 太宗은 貞觀 18년(644) 11월에 萊州와 遼東 두 방면으로 출병하여 高句麗 정벌에 직접 나섰다가 패하여 다음해에 長安으로 회군하였다.
역주13 武氏之難……不絶如綫 : 武氏는 唐나라 高宗의 황후인 則天武后로, 高宗이 죽은 뒤 정권을 잡은 다음 아들인 中宗과 睿宗을 차례로 폐위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神聖皇帝라 칭하고 국호를 周나라로 개명하였다. 또한 제후왕에 봉한 여러 왕자들을 무수히 살해하여 皇族인 李氏를 거의 없애 친정 조카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만년에 張柬之, 狄仁傑 등 대신들이 폐위되었던 中宗을 다시 황제로 추대하여 唐나라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中宗의 황후인 韋氏가 武三思와 간통하여 中宗을 시해하고 殤帝를 세운 다음 계속 정권을 농단하였는데, 뒤에 玄宗이 된 李隆基에게 축출됨으로써 唐나라는 비로소 안정되었다. 蘇軾이 唐나라의 國統이 한 가닥의 실오라기처럼 이어졌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곡절을 말한 것이다.
역주14 : 뉵
역주15 : 부
역주16 兵革朽鈍 : 兵은 병기이고, 革은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며, 朽鈍은 병기와 갑옷을 수리하지 않아 갑옷이 썩고 병기가 무뎌짐을 이른다.
역주17 元昊 : 西夏의 군주로 원래는 姓이 李氏였는데, 뒤에 趙氏 姓을 하사받았다. 아버지 德明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다음 西夏의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西夏는 몇 번에 걸친 宋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仁宗 慶曆 4년(1044) 宋나라가 매년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講和하여 그 전성기를 열었다. 世系를 보면 元昊, 諒祚(亮祚), 秉常, 乾順의 순으로 이어졌다.
역주18 獻替 : ‘獻可替否’의 준말로, 임금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은 과감히 건의하고 행하면 안 될 일은 그만두도록 간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19 薛向은 爲橫山之謀 : 治平 4년(1067)에 淸澗城의 种諤이 ‘西夏의 2대 임금인 諒祚의 失政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橫山 일대의 백성들이 그 수령 嵬名山을 중심으로 宋나라에 귀순할 뜻이 있음’을 보고하자, 宋나라는 이해 10월 군대를 출동시켜 綏州로 진격해서 橫山 일부의 땅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宋나라는 西夏와의 講和가 깨져 西夏軍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熙寧 2년(1069)에 种諤이 西夏를 공격하여 橫山을 수복할 것을 상주하자, 神宗이 轉運使 薛向에게 대책을 물으니, 薛向은 ‘橫山을 지키는 嵬名山 등은 宋나라에 귀순할 뜻이 있으므로 이를 공격하면 橫山의 수복이 가능하다.’는 계책을 올렸다. 이에 种諤이 군대를 내어 嵬名山을 기습공격하여 그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역주20 韓絳은 效深入之計 : 熙寧 3년(1070)에 西夏의 임금 諒祚가 죽고 어린 아들 秉常이 7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머니 梁太后가 섭정하였는데, 西夏는 宋나라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국력을 모아 30만 대군을 일으켜 環慶을 침공하였다. 이때 參知政事 韓絳이 宣撫使가 되어 种諤 등과 함께 西夏軍을 맞아 싸워 다음해 정월에 羅兀城 전투에서 크게 이기고 국경을 넘어 慶州까지 쳐들어갔다. 그러나 군대를 정비한 西夏에게 羅兀城에서 다시 싸워 참패하였고 이후 전쟁은 혼전에 빠졌다. 이에 神宗이 군대를 회군시키고 羅兀城을 포기하였다.
역주21 寶元, 慶曆之敗 : 寶元(1038~1039)과 慶曆(1041~1048)은 모두 宋나라 仁宗 때의 年號이다. 寶元 元年(1038)에 西夏의 元昊가 처음 황제를 칭하자 宋나라가 공격하여 西夏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은 慶曆 4년(1044)에 宋나라가 매년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講和함으로써 종료되었다.
역주22 旰食 : 국가에 어려운 일이 많아 군주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하고 항상 늦게 먹음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昭公 20년조에 이르기를 “伍奢는 아들 伍員(伍子胥)이 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楚나라 임금과 대부들은 아마도 旰食하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라고 보이는데, 杜預의 注에 “楚나라는 장차 吳나라에 대한 근심으로 밥도 제때에 먹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역주23 王韶는 構禍於熙河 : 熙河는 지금의 甘肅省 臨洮 지역이다. 神宗 즉위 초에 文臣 王韶는 西夏와 羌族 등의 外夷들을 평정할 것을 주장하는 平戎策을 올려 神宗의 嘉納을 받고, 熙河에서 오랑캐들을 몇 차례 공격하여 승리한 다음 그 공로로 벼슬이 樞密副使에 이르렀다. 《宋史 王韶傳》
역주24 章惇은 造釁於橫山 : 神宗은 橫山을 수복하고자 하였는데, 熙寧 4년(1071)에는 荊湖北路의 察訪으로 파견된 章惇이 辰州를 함락시키고 이곳에 浣州를 설치하였으며, 승세를 타고 潭州의 梅山을 함락시키고 安化縣을 설치하였다. 《宋史 章惇傳》
역주25 熊本은 發難於渝瀘 : 瀘州는 지금의 四川省 瀘州市 일대이고, 渝州는 지금의 重慶市 일대이다. 熙寧 4년(1071)에 瀘州의 제염업자들이 직업을 잃게 되자 여러 오랑캐들을 선동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 조정에서는 熊本을 파견하여 이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熊本은 군대를 출동시켜 오랑캐의 경계를 침입해서 46개의 오랑캐 촌락을 점령하여 많은 오랑캐를 죽이고 땅 240여 리를 점령하였다. 《宋史 熊本傳》
역주26 沈起, 劉彝 復發於安南 : 安南은 지금의 베트남 북쪽 일대로 옛날 南交의 땅이다. 秦나라 때 점령하여 象郡을 두었고, 漢나라 때에는 交趾, 日南, 九眞 등 세 郡을 두었으며, 唐나라 때에 安南都護府를 두어 다스렸기 때문에 이후 安南이라 칭하였다. 安南은 宋나라에 복종하여 朝貢하였으나 知桂州事로 있던 沈起와 劉彝 등이 자주 국경을 침범하자 이에 반란을 일으켰다. 《宋史 外國傳》
역주27 李憲之師 復出於洮州矣 : 1067년 秉常이 7세에 西夏의 3代 임금으로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母后가 섭정하였다. 元豐 4년(1081)에 친정을 하게 된 秉常이 宋나라에 귀순하고자 하였으나 母后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끝내 왕권을 박탈당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宋나라는 李憲으로 하여금 西夏를 공격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宋史 李憲傳》
역주28 今師徒克捷하야 銳氣方盛 : 이때 宋나라의 劉昌祚가 단독으로 출병하여 西夏의 크고 작은 수령 3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 4백 명의 首級을 얻었으며, 靈州城 아래에서 싸워 대승을 거두고 2천 7백여 명의 首級을 얻었다. 또한 种諤이 西夏의 군대와 無定川에서 싸워 5천 명의 首級을 얻었으므로 말한 것이다. 《宋史 外國傳》
역주29 : 육
역주30 薰眼折臂自經 : 薰眼은 눈에 독한 약의 연기를 쐬게 하여 실명시키는 것이고, 折臂는 팔을 부러뜨리는 것이며, 自經은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 것으로 모두 兵役 등을 피하기 위해 自害하는 행위이다.
역주31 刳臠 : 고련
역주32 勝廣之形 : 勝廣은 陳勝과 吳廣으로, 秦나라의 虐政에 맨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난 인물이다. 이들은 본래 秦나라 戍卒들로 이들이 봉기하자 이곳저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秦나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 끝내 멸망하였다.
역주33 : 겸
역주34 二宮 : 太皇太后 曹氏와 太后 高氏(宣仁高后)를 이른다.
역주35 白登被圍하야는 則講和親之議 : 白登은 白登山으로 山西省 大同 동남쪽에 있다. 漢나라 高祖가 B.C. 200년에 직접 군대를 인솔하고 匈奴의 冒頓單于를 공격했다가 平城 인근의 白登山에서 匈奴의 30만 대군에게 7일 동안 포위당한 일을 말한다. 이때 陳平이 계책을 내어 單于의 왕비 閼氏에게 후한 뇌물을 써서 겨우 포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史記 韓信列傳》
역주36 西域請吏엔 則出謝絶之言 : 後漢 光武帝의 建武 14년(38)에 莎車國과 鄯善國 등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 匈奴를 배반하고 漢나라에 복속되기를 원하며 사신을 보내 와 조공하고 都護府를 다시 설치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光武帝는 이를 거절하였으며, 建武 21년(45)에 車師國과 鄯善國 등 18나라가 다시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며 都護府 설치를 다시 간곡히 청하였으나 光武帝는 인질을 돌려보내며 북쪽 변방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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