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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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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왕군王君보회당寶繪堂에 대한 기문記文
有一種達人風旨
일종의 달인達人풍지風旨가 있다.
이나 地位不如荊公 多矣니라
그러나 경지는 형공荊公(왕안석王安石)만 훨씬 못하다.
君子可以寓意於物이요 而不可以留意於物이니 寓意於物이면 雖微物이라도 足以爲樂이요이라도 不足以爲病이며 留意於物이면 雖微物이라도 足以爲病이요 雖尤物이라도 不足以爲樂이니라
군자君子는 물건에 뜻을 붙여둘 수는 있으나, 물건에 뜻을 머물러두어서는 안 되니, 물건에 뜻을 붙여두면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충분히 즐거움이 될 수 있고 비록 귀한 물건이라도 이 되지 못하며, 물건에 뜻을 머물러두면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충분히 이 될 수 있고 비록 귀한 물건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오색五色은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멀게 하고, 오음五音은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먹게 하고, 오미五味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맛을 잃게 하고,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에 광증狂症을 내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나 聖人 未嘗廢此四者 亦聊以寓意耳
그러나 성인聖人이 일찍이 이 네 가지를 버리지 않은 것은 또한 그런대로 뜻을 붙이려 한 것일 뿐이다.
하고 하고 하니 此豈有聲色臭味也哉리오마는 而樂之終身不厭하니라
유비劉備의 뛰어난 재주로도 소꼬리 털을 엮어 짜는 것을 좋아하였고, 혜강嵇康광달曠達함으로도 쇠를 단련하기를 좋아하였고, 원부阮孚방달放達함으로도 신발에 밀납을 칠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이런 것들이 어찌 아름다운 소리와 색깔과 냄새와 맛이 있겠는가마는, 저들은 이것을 즐거워하여 종신토록 싫어하지 않았다.
凡物之可喜하야 足以悅人而不足以移人者 莫若書與畫
모든 물건 중에 좋아할 만하여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는 것은 글씨와 그림만 한 것이 없다.
이나 至其留意而不釋이면 則其禍有不可勝言者
그러나 여기에다 뜻을 두고 놓지 않게 되면, 그 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하며 皆以兒戱 害其國하고 凶其身하니 留意之禍也니라
종요鍾繇는 이 때문에 피를 토하고 무덤을 파헤치기에 이르렀고, 나라 효무제孝武帝왕승건王僧虔은 이 때문에 서로 시기하기에 이르렀으며, 환현桓玄서화書畫를 배에 싣고 도망하고, 왕애王涯을 이중으로 한 것은 모두 아이들 장난과 같은 것 때문에 자기 나라를 해치고 자기 몸을 죽게 하였으니, 이것은 서화書畫에 뜻을 두어서 생긴 인 것이다.
始吾少時 嘗好此二者하야 家之所有 惟恐其失之하고 人之所有 惟恐其不吾予也러니
처음 내가 젊었을 적에 일찍이 이 글씨와 그림 두 가지를 좋아해서, 집안에 있는 것은 행여 잃을까 염려하고 남이 소유한 것은 행여 나에게 주지 않을까 염려했었는데,
旣而 自笑曰 吾薄富貴而厚於書하고 輕死生而重於畫하니 豈不顚倒錯繆하야 失其本心也哉리오호라
이윽고 스스로 조소하기를 “내가 부귀를 하찮게 여기면서 글씨를 대단하게 여기고, 사생死生을 가볍게 여기면서 그림을 소중하게 여기니, 이 어찌 경중輕重이 뒤바뀌고 착란하여 본심을 잃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自是 不復好하고 見可喜者하면 雖時復蓄之 然爲人取去라도 亦不復惜也
이후로 다시는 좋아하지 않았고, 좋아할 만한 것을 보면 비록 잠시 다시 보관하였으나 남이 가져가더라도 다시 아까워하지 않았다.
譬之煙雲之過眼하고 百鳥之感耳하니 豈不欣然接之리오마는 去而不復念也
비유하면 연기와 구름이 눈앞에 지나가고 온갖 새소리가 귀를 감동시키는 것과 같으니, 어찌 흔연欣然히 이것들을 대하지 않겠는가마는 떠나가면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다.
於是乎二物者 常爲吾樂이요 而不能爲吾病이로라
이에 글씨와 그림 이 두 가지 물건은 항상 나의 즐거움이 되었고, 나의 이 되지 못하였다.
而其하고 學問詩書하야 常與寒士角이라
부마도위 왕군駙馬都尉 王君 진경晉卿은 비록 척리戚里에 있었으나, 예의禮義를 실행하고 를 배우고 물어서 항상 빈한한 선비와 함께 연마하였다.
平居 攘去膏粱하고 屛遠聲色이로되 而從事於書畫하야 作寶繪堂於私第之東하야 以蓄其所有하고 而求文以爲記하니
평소에 고량진미를 물리치고 음악과 여색을 멀리하였으나, 글씨와 그림에 종사하여 사제私第의 동쪽에 보회당寶繪堂을 짓고는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보관하고, 글을 지어서 이것을 기록해줄 것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恐其不幸而類吾少時之所好
나는 불행히도 그가 내가 소싯적에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던 태도와 흡사한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다.
以是告之하노니 庶幾全其樂而遠其病也어다
그러므로 이 말을 고하니, 행여 그 즐거움을 온전히 하고 그 을 멀리할지어다.
熙寧十年七月二十日하노라
희령熙寧 10년 7월 20일에 기록하노라.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墨寶堂 與此二篇 皆小題로되 從大處起議論하야 有箴規之意焉하니라
“〈묵보당기墨寶堂記〉와 이 두 편은 모두 작은 제목인데, 큰 곳으로부터 의논을 일으켜서 경계하는 뜻이 있다.”
역주
역주1 王君寶繪堂記 : 本集에는 제목이 〈寶繪堂記〉로 되어 있으며, 글의 말미에 ‘熙寧十年七月二十日記’라는 10字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이 熙寧 10년(1077) 7월 20일에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寶繪堂은 진귀한 서화를 보관해놓은 堂의 이름이다.
역주2 尤物 : 특이한 물건으로 아름다운 여색이나 진귀한 보물 따위를 이른다.
역주3 老子曰……令人心發狂 : 老子는 老聃으로, 姓이 李이고 이름이 耳이고 字가 伯陽이며 聃은 시호라 한다. 춘추시대 楚나라 사람이며 道家의 창시자로 《道德經》을 지었는바, 이 내용은 《道德經》 12장에 그대로 보인다. 五色은 다섯 가지 색깔로 청색, 황색, 적색, 백색, 흑색이고, 五音은 다섯 가지 소리로 宮, 商, 角, 徵, 羽이고, 五味는 다섯 가지 맛으로 신맛, 짠맛, 매운맛, 단맛, 쓴맛이다.
역주4 劉備之雄才也 而好結髦 : 劉備는 蜀漢을 건국한 昭烈皇帝를 이른다. 일대의 영웅이었으나 소꼬리 털을 엮어 짜는 것을 좋아하였다.
《三國志》 〈諸葛亮傳〉에 裵松之는 《魏略》을 인용하여 “諸葛亮이 劉備를 만나보았다. 劉備는 성품이 소꼬리 털을 엮어 짜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이때 마침 소꼬리 털을 주는 자가 있었으므로 직접 손으로 이것을 짜고 있었다.
諸葛亮이 이에 나아가 말하기를 ‘현명하신 將軍께서는 마땅히 더욱 원대한 뜻을 가지셔야 하는데 다만 소꼬리 털을 짜고 있을 뿐입니까?’라고 하니, 劉備가 즉시 소꼬리 털을 집어던지고, 말하기를 ‘이 무슨 말인가? 나는 애오라지 이것으로 시름을 잊고 있을 뿐이었소.’라고 하였다.[諸葛亮見備 備性好結髦 時適有人以髦牛尾與備者 備因手自結之 亮乃進曰 明將軍當復有遠志 但結髦而已邪 備乃投髦而答曰 是何言與 我聊以忘懮爾]”라고 注하였다.
역주5 嵇康之達也 而好鍛煉 : 嵇康(223~262)은 字가 叔夜로 삼국시대 魏나라 譙郡 사람이다. 曹操의 증손녀와 결혼하여 벼슬이 中散大夫에 이르러 嵇中散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竹林七賢 중 한 명으로 玄學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내용은 《晉書》 〈嵇康傳〉에 “〈嵇康은〉 성품이 몹시 공교로웠는데, 쇠를 달구어 기물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였다. 집안에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어 매우 무성하였는데, 그 밑에 못을 둘러 파고 여름철이면 그 아래에 앉아 풀무질을 하면서 기물을 만들었다.[性絶巧 而好鍜 宅中有一柳樹甚茂 乃激水圜之 每夏月 居其下以鍜]”라고 보인다.
역주6 阮孚之放也 而好蠟屐 : 阮孚(278?~326?)는 晉나라의 문신으로 字가 遙集이며 廣州刺史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竹林七賢 중의 한 명인 阮咸의 아들로 매우 광달하여 禮法을 돌아보지 않고 날마다 淸談을 나누며 술을 몹시 즐겨 胡毋輔之․謝鯤․畢卓․阮放․羊曼․桓彛․光逸과 함께 八達로 일컬어졌다.
이 내용은 《晉書》 〈阮孚傳〉에 “祖約은 성품이 재물을 좋아하고 阮孚는 성품이 나막신을 좋아하여 모두 累가 되었으나, 어느 것이 좋고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혹자가 祖約의 집에 가보니, 祖約은 마침 돈을 세고 있다가 손님이 이르자 이를 숨겼으나 다 숨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남은 두 개의 돈 상자를 등 뒤로 치우고 몸을 기울여 가리면서 편안해하지 못하였다.
혹자가 阮孚의 집에 가보니 그는 마침 나막신에 밀납을 칠하다가 스스로 탄식하며 이르기를 ‘내 일생에 이 나막신을 얼마나 더 신을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기색이 몹시 한가롭고 편안하였으므로, 여기에서 비로소 승부가 판가름났다.[祖約性好財 孚性好屐 同是累而未判其得失 有詣約 見正料財物 客至屛尙不盡 餘兩小簏 以著背後 傾身障之 意未能平 或有詣阮 正見自蠟屐 因自嘆曰 未知一生當着幾量屐 神色甚閑暢 於是勝負始分]”라고 보인다.
祖約(?~330)은 字가 士少이고 范陽 遒縣(지금의 河北省 淶水) 사람으로 晉나라의 名將이었으나 蘇峻과 함께 反亂을 일으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7 鍾繇至以此嘔血發塚 : 鍾繇(151~230)는 삼국시대 魏나라의 대신이자 대서예가로 字가 元常이고 潁川 長社(지금의 河南省 長葛縣) 사람이다. 曹操가 정권을 장악했을 적에 關中 지방을 수비하고 크게 공을 세웠으며, 이후 廷尉와 相國, 太傅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書藝에 뛰어나 후인들이 王羲之와 함께 鍾․王으로 병칭하였다.
이 내용은 唐나라 韋續이 지은 《墨藪》에 “魏나라의 鍾繇는 韋誕에게서 蔡邕의 필법을 보고는 이것을 탐하여 3일 동안 스스로 가슴을 쳐서 온통 퍼렇게 멍이 들고, 이 때문에 피를 토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魏 太祖가 五靈丹을 먹여 생명을 구해주었다. 鍾繇가 蔡邕의 필법을 요구하였으나 韋誕은 끝내 주지 않았다. 마침내 韋誕이 죽자, 鍾繇가 사람을 시켜 韋誕의 무덤을 도굴하여 끝내 이를 얻었다.[魏鍾繇見蔡邕筆法於韋誕 自槌三日 胸盡靑 因嘔血 魏太祖以五靈丹救之得活 繇求之不與 及誕死 繇令人盜掘其墓 而得之]”라고 보인다.
韋誕은 삼국시대 魏나라의 문신으로 字가 仲將이며 京兆 사람이다. 文才가 있어 辭章에 능하고 서예에 뛰어났으며 벼슬이 光祿大夫에 이르렀다. 魏 太祖는 曹操의 廟號로 그의 아들 曹丕가 漢나라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어 武帝로 추존하고 廟號를 太祖라 하였다.
역주8 宋孝武王僧虔至以此相忌 : 宋孝武는 남북조시대 宋나라의 孝武帝 劉駿(재위 452~464)을 이르는데, 성격이 광포하고 음란하였으나 서예에는 뛰어나 일가견이 있었다. 王僧虔(426~485)은 字가 簡穆이고 琅琊 臨沂 사람으로 王羲之의 4世 族孫이며 宋나라와 齊나라 두 왕조에 걸쳐 활약했던 서예가이다.
王僧虔은 孝武帝 때에 御史中丞으로 있었는데, 孝武帝가 자신의 서예 솜씨를 시기할 것을 우려하여 망가진 붓으로 글씨를 쓰는 등 자신의 실력을 숨겨 孝武帝 치하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역주9 桓玄之走舸 : 桓玄(369~404)은 東晉의 권신으로 字가 敬道이며 譙國 龍亢(지금의 安徽省 懷遠) 사람이다. 東晉의 名將 桓溫의 아들로 安帝 때 都督荊江八州軍事로 있다가 군대를 일으켜 수도인 建康을 점령하고 권력을 농단하였다. 그러다가 安帝에게 선양받아 스스로 楚나라를 건국하여 황제라 칭하고 永始로 改元하였다. 뒤에 劉裕(宋 高祖)에게 토벌당하여 죽었는데, 桓玄은 자신이 전쟁에 패배할 것에 대비하여 자신이 모은 書畫와 보물 등을 큰 배에 싣고 다녔다고 한다. 《晉書 桓玄傳》
역주10 王涯之複壁 : 王涯(764~835)는 唐나라 중기의 문신으로 字가 廣津이며 太原 사람이다. 德宗 貞元 연간에 進士로 출사하여 文宗 때 宰相을 역임하였는데, 文宗 太和 9년(835)에 甘露之變으로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文宗은 권력을 전횡하고 있던 환관들을 제거하고자 당시 의사였던 李訓과 점술가였던 鄭注를 등용하여, 이들로 하여금 복병을 배치하고 金吾臺廳 뒤의 석류나무에 甘露가 내렸다고 宦官들을 유인해서 이들을 일거에 척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환관 仇士良에게 역습을 당해 죽임을 당하고, 당시 조정에 있던 600여 명의 관리들도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사변을 일러 ‘甘露之變’이라 한다.
이 내용은 《舊唐書》 〈王涯傳〉에 “王涯의 집안에 책이 수만 권이 있어 秘府(天子의 書庫)와 견줄 만하였다. 前代의 法書와 名畫로 사람들이 아껴 보관하는 것이 있으면 많은 재물을 주어 이를 매입하였고, 재물로 얻지 못할 경우에는 곧바로 관작을 주어 가져오게 하였다. 두터운 담벽에다가 구멍을 뚫고 이것들을 보관한 다음 벽을 이중으로 쌓았다.[涯家書多與秘府侔 前世名書畫 當以厚貨鉤致 或私以官 鑿垣納之 重複秘固 若不可窺者 及甘露之禍 至是爲人破垣剔取奩軸金玉 而棄其書畫於道]”라고 보인다.
역주11 駙馬都尉王君晉卿雖在戚里 : 駙馬都尉는 제왕의 사위를 이른다. 駙馬都尉는 본래 漢 武帝 때에 처음 설치한 관직으로 副車의 말을 관장하였는데, 주로 종실과 외척의 공자들로 임명하였다. 魏․晉 이후의 왕조에서는 황제의 사위에게 으레 駙馬都尉를 제수하되 실제의 직무는 주지 않았다.
王晉卿은 이름이 詵으로 晉卿은 그의 字인데 太原 사람이다. 英宗의 딸 魏國大長公主에게 장가들었으며, 詩․書․畫에 능하였고 東坡와 막역하게 지냈다. 戚里는 제왕의 외척들이 거주하는 곳을 이른다.
역주12 被服禮義 : 禮義를 被服으로 삼았다는 말로 항상 禮義를 행하였음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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