通篇이 將無作有하야 轉輾不窮하야 大略從戰國辯口中來하니 此是東坡議論文中滑稽也니라
曰
라하시고 又曰 三分天下
에 有其二
하야 以服事殷
하시니 周之德
은 其可謂至德也已矣
라하시니라
하시니 其罪武王也甚矣
시니 此
는 孔氏之家法也
니라
世之君子 苟自孔氏로 必守此法이런들 國之存亡과 民之死生이 將於是乎在하리니 其孰敢不嚴이리오
自是로 學者以湯武爲聖人之正하야 若當然者하니 皆孔氏之罪人也니라
이라하사 上不及湯
하고 下不及武王
하니 亦以是哉
인저
라 是以
로 受命稱王
하야 行天子之事
하니 周之王不王
은 不計紂之存亡也
라
使文王在런들 必不伐紂하시리니 紂不見伐하야 而以考終하고 或死於亂이면 殷人이 立君以事周하리니 命爲二王後하야 以祀殷이면 君臣之道 豈不兩全也哉리오
호되 紂若不改過
하면 則殷人改立君
하리니 武王之待殷
은 亦若是而已矣
라
天下無主하야 有聖人者出하야 而天下歸之는 聖人所不得辭也어늘
漢末大亂하야 豪傑竝起하니 荀文若은 聖人之徒也라
所以與操謀者는 皆王者之事니 文若이 豈敎操反者哉리오
以仁義救天下하야 天下旣平에 神器自至면 將不得已而受之요 不至면 不取也니 此는 文王之道요 文若之心也라
故
로 吾嘗以文若爲聖人之徒者
는 以其才似
而道似伯夷也
일새니라
殺其父하고 封其子하니 其子非人也면 則可커니와 使其子而果人也면 則必死之하리라
其徒曰 行乎아 曰 吾與殺吾父하니 行將焉入이리오
然則臣王乎아 曰 棄父事讐를 吾弗忍也라하고 遂縊而死하니라
武王이 親以黃鉞斬紂어늘 使武庚受封而不叛이면 豈復人也哉아
三分天下에 有其二로되 殷不伐周어늘 而周伐之하야 誅其君하고 夷其社稷하니 諸侯必有不悅者라
子瞻之論武王은 雖非天下萬世之公이나 而其援孔子之所與하야 以見其所欲罪하고 援書之所及하야 以見其所不及하며 又以春秋所書趙盾者로 以案武王하니 亦成一家縱橫之言이라
文若佐操는 只是挾天子以令諸侯니 何得稱王者之事리오
操之簒漢은 固其始事本謀니 何得直遲之以謀九錫이리오
전편全篇이 없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만들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무궁무진해서 대략 전국시대 변설가戰國時代 辯舌家에게서 유래하였으니, 이것은 동파東坡가 의논한 글 가운데에 골계滑稽에 해당한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한 다음 은殷나라의 유민들을 가지고 주왕紂王의 아들인 무경 녹보武庚 祿父에게 봉해주고, 아우인 관숙 선管叔 鮮과 채숙 도蔡叔 度로 하여금 녹보祿父를 도와 은殷나라를 다스리게 했었는데, 무왕武王이 붕어함에 녹보祿父가 관숙管叔․채숙蔡叔과 함께 난을 일으키자 성왕成王이 주공周公에게 명하여 이들을 주벌하게 하고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세웠다.
옛날에 공자孔子가 무왕武王과 탕왕湯王을 비판하였으나, 다만 스스로 당신이 은殷나라의 후손이고 주周나라 사람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감히 드러내놓고 비판하지 못하신 것이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여기에 대해서 여러 번 뜻을 다하셨으니, 말씀하시기를 “위대하다.
높고 높은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여.”라고 하셨고, “우禹임금은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대해서 부족하게 여기신 것이 또한 분명하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무왕武王의 음악은 극진히 아름다우나 극진히 선善하지는 못하다.”라고 하셨고, 또 말씀하시기를 “문왕文王은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3분의 2를 소유하고도 은殷나라를 섬기셨으니, 주周나라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라고 하셨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무왕武王에 대하여 군주를 시해했다고 여겨서 이를 부끄러워하여 그 녹봉을 먹지 않기까지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인정해주셨으니, 그렇다면 무왕武王을 비판함이 심한 것이니, 이것이 공씨孔氏의 가법家法인 것이다.
세상의 군자들이 만일 공씨孔氏 이래로 반드시 이 법을 지켰더라면 국가의 존망存亡과 백성의 사생死生이 장차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니, 그 누가 감히 엄격히 지키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맹가孟軻가 처음으로 이것을 어지럽혀서 말씀하기를 “나는 무왕武王이 독부獨夫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고 군주를 시해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배우는 자들이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혁명革命한 것을 성인聖人의 정도正道라고 여겨서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공씨孔氏의 죄인이다.
만일 당시에 동호董狐와 같은 훌륭한 사관史官이 있었더라면, 탕왕湯王이 남소南巢에서 걸왕桀王을 정벌한 일을 반드시 반역이라고 썼을 것이요, 무왕武王이 목야牧野에서 주왕紂王을 정벌한 일을 반드시 시군弑君이라고 썼을 것이며, 만일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이 인인仁人이라면 반드시 장차 법을 위해서 오명惡名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주공周公이 〈무일無逸〉편篇을 지어 말씀하기를 “은왕 중종殷王 中宗과 고종高宗과 조갑祖甲과 우리 주 문왕周 文王 네 분이 명철함을 실천했다.”라고 하여 위로는 탕왕湯王에게 미치지 않고 아래로는 무왕武王에게 미치지 않았으니, 이는 또한 이 때문일 것이다.
문왕文王 때에 구하지 않았는데도 제후諸侯들이 스스로 찾아왔으므로 문왕文王이 천명天命을 받고 왕王을 칭해서 천자天子의 일을 행하였으니, 주周나라가 왕 노릇하고 왕 노릇하지 않는 것은 주왕紂王이 존재하느냐 망하느냐에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약 문왕文王이 살아 계셨더라면 반드시 주왕紂王을 정벌하지 않았을 것이니, 주왕紂王이 정벌을 당하지 않아서 천수를 누렸거나 혹은 내란에 죽었다면 은殷나라 사람들이 새로 군주를 세워서 주周나라를 섬겼을 것이니, 두 분 왕王(문왕文王과 주왕紂王)의 후손에게 명하여 은殷나라를 제사 지내게 했다면 군신君臣의 도리가 어찌 두 가지 모두 온전하지 않았겠는가?
무왕武王이 맹진孟津에서 관병觀兵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주왕紂王이 만약 잘못을 고치지 않았다면 은殷나라 사람들이 군주를 바꿔 세웠을 것이니,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대함은 또한 이와 같이 하여야 했을 뿐이다.
천하에 훌륭한 군주가 없어서 성인聖人이 나와 천하가 그에게 돌아가는 것은 성인聖人이 사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내 군대를 동원해서 점령을 하고 군주를 추방하여 죽이는 것이 옳겠는가?
후한後漢 말기에 천하가 크게 혼란해서 호걸들이 일제히 일어났는데, 순문약荀文若(순욱荀彧)은 성인聖人의 무리였다.
그는 생각하기를 ‘조조曹操가 아니면 함께 해내海內를 안정시킬 사람이 없다.’고 여겼다.
그가 조조曹操와 함께 도모한 것은 모두 왕자王者의 일이었으니, 순문약荀文若이 어찌 조조曹操에게 배반을 가르쳤겠는가?
인의仁義로써 천하를 구제해서 천하가 평정된 다음 신기神器가 저절로 이르면 장차 마지못해 받았을 것이요, 신기神器가 이르지 않으면 취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것이 문왕文王의 도道이고 순문약荀文若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조조曹操가 구석九錫을 도모하자 순문약荀文若이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일찍이 “순문약荀文若은 성인의 무리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 재주가 장자방張子房과 같고 도道가 백이伯夷와 같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를 죽이고 그 자식을 봉해주었으니, 그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면 괜찮지만 만약 그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다가 죽을 것이다.
초楚나라 사람들이 장차 영윤 자남令尹 子南을 죽이려 하였는데, 이때 자남子南의 아들 기질棄疾이 왕의 어사馭士로 있었다.
초왕楚王이 울면서 그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을 그에게 말하고 얼마 후에 자남子南을 살해하였다.
기질棄疾의 무리가 기질棄疾에게 “초楚나라를 떠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기질棄疾이 대답하기를 “내가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에 참여하였으니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왕의 신하 노릇을 계속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아버지를 버리고 원수를 섬기는 일을 내가 차마 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목을 매어 죽었다.
무왕武王이 친히 황월黃鉞을 가지고 주왕紂王을 목 베었는데, 만일 무경武庚이 무왕武王의 봉함을 받고 배반하지 않았다면 어찌 다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무경武庚이 반드시 배반하리라는 것은 지혜로운 자를 기다리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왕武王이 무경武庚을 봉해준 것 또한 아마도 마지못해서였을 것이다.
은殷나라가 천하를 소유한 지 6백 년에 어질고 성聖스러운 군주가 6, 7명이 나왔으니, 주왕紂王이 비록 무도하였으나, 전통이 오래된 대신의 집안과 남은 풍속이 다 없어지지 않았다.
천하를 셋으로 나눔에 3분의 2를 주周나라 문왕文王이 소유하였는데도 은殷나라가 주周나라를 정벌하지 않았는데, 주周나라가 도리어 정벌하여 그 군주를 죽이고 그 사직을 멸망시켰으니, 제후諸侯들 중에 반드시 이것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왕武王이 무경武庚을 봉하여 이로써 제후諸侯들을 위안시킨 것이니, 이것이 어찌 무왕武王의 본뜻이었겠는가?
나는 그러므로 “무왕武王은 성인聖人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소자첨蘇子瞻이 무왕武王을 논한 것은 비록 천하 만세의 공론公論은 아니나, 공자孔子가 허여한 바를 원용하여 비판하고자 한 대상對象을 나타내었고, 《서경書經》에서 언급한 말을 원용하여 언급하지 않은 말을 나타내었으며, 또 《춘추春秋》에서 조돈趙盾에 대해 쓴 말을 가지고 무왕武王의 죄안罪案으로 삼았으니, 또한 종횡가縱橫家의 말로써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다만 순문약荀文若을 칭찬한 한 절節은 우활迂闊하고 편벽된 듯하다.
순문약荀文若이 조조曹操를 보좌한 것은 다만 천자天子를 끼고서 제후諸侯들을 명령했을 뿐이니, 어찌 왕자王者의 일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가?
조조曹操가 한漢나라를 찬탈하려던 것은 진실로 일을 처음 시작할 때에 본래의 계책이었으니, 어찌 곧바로 구석九錫을 도모함을 지체할 수 있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