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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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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춘추春秋》는 천하天下의 간사함과 바름을 결정하였다는
以禮字爲案하니라
라는 글자를 가지고 (주제)을 삼았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해설하는 자가 말하기를 “천하天下의 사업을 이루고 천하天下의 간사함과 바름을 결정하는 것은 《춘추春秋》보다 더한 것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나는 그 설을 따라 지극히 말해보겠다.
夫春秋者 禮之見於事業者也
저 《춘추春秋》는 가 사업에 나타난 것이다.
공자孔子께서 삼대三代함을 논하실 적에는 반드시 가 크게 이루어진 것에 돌리셨고, 쇠함을 논하실 적에는 반드시 가 점점 폐지됨에 근본하셨으며,
君臣, 父子, 上下 莫不由禮而定其位하야
군신간君臣間부자간父子間상하간上下間의 관계가 를 따라 그 자리를 정하지 않음이 없어서, 심지어는 “가 있으면 살고 가 없으면 죽는다.”라고까지 말씀하였다.
하야 而不治其他하야 以之出入周旋하시니 亂臣彊君 莫能加焉이라
그러므로 공자孔子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단 하루도 를 배우지 않은 적이 없으셔서, 다른 것은 다스리지 않고 이 로써 나가고 들어오고 주선하시니, 난신亂臣과 강한 군주들이 능히 를 가하지 못하였다.
知天下莫之能用也하고 退而治其紀綱條目하야 以遺後世之君子하사되 則又以爲不得親見於行事하야 有其具而無其施設措置之方이라하사
천하天下가 자신을 제대로 등용하지 못할 줄을 아시고는 물러나와 기강과 조목을 다스려서 후세의 군자君子에게 물려주셨는데, 또 생각하시기를 ‘내가 행하는 일에 직접 나타낼 수가 없어서 그 도구만 있고 이것을 시행하고 조처하는 방법이 없다.’라고 여기셨다.
於是 하야 一斷於禮하시니 凡春秋之所褒者 禮之所與也 其所貶者 禮之所否也
이에 나라 사서史書를 따라 《춘추春秋》를 만들어서 한결같이 에 결단하셨으니, 무릇 《춘추春秋》에서 칭찬한 것은 가 인정한 바였고, 《춘추春秋》에서 폄하한 것은 가 부정하는 바였다.
라한대 而春秋 一取斷焉이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라는 것은 혐의를 분별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밝히고 이럴까 저럴까 망설여지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춘추春秋》는 한결같이 에서 결단을 취하였다.
凡天下之邪正 君子之所疑而不能決者 皆至於春秋而定하니 非定於春秋 定於禮也
그러므로 모든 천하天下의 간사하고 바른 것으로 군자君子들이 의심하여 결단하지 못한 것들이 모두 《춘추春秋》에 이르러 결정되었으니, 이는 《춘추春秋》에서 결정된 것이 아니요 에서 결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춘추春秋》는 예의禮義대종大宗이다.”라고 한 것이다.
爲人君父而不知春秋者 前有讒而不見하고 後有賊而不知하며 爲人臣子而不知春秋者 守經事而不知其宜하고 遭變事而不知其權하나니라
남의 군부君父가 되어서 《춘추春秋》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앞에 참언讒言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뒤에 자기를 해치는 이 있어도 알지 못하며, 남의 신자臣子가 되어서 《춘추春秋》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정상적인 일을 지키면서도 그 마땅함을 알지 못하고 변고의 일을 만났으면서도 저울질하여 권도權道에 맞출 줄을 알지 못한다.
夫禮義之失 至於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로되
예의禮義를 잃은 것이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함에 이른다.
其意皆以爲善爲之 而不知其義
그런데도 그들 생각에는 모두 잘하는 것이라고 여겼으나 그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是以 이로되 而不敢辭하나니라
이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이것을 빈 말씀에 올렸는데도 감히 그 죄를 사양하지 못한 것이다.
夫邪正之不同也 不啻若黑白이니
간사함과 바름이 똑같지 않은 것은 보다도 더 분명하다.
使天下凡爲君子者 皆如顔淵하고 凡爲小人者 皆如桀跖이면 雖微春秋라도 天下其孰疑之리오
만일 천하天下의 모든 군자君子들이 모두 안연顔淵처럼 하고 모든 소인小人들이 모두 걸왕桀王이나 도척盜跖과 같이 나쁘다면, 비록 《춘추春秋》가 없더라도 천하天下 사람 중에 그 누가 이것을 의심하겠는가?
天下之所疑者 邪正之間也 其情則邪 而其跡若正者 有之矣 其情以爲正이나 而不知其義하야 以陷於邪者 有之矣 春秋之所以丁寧反覆於其間也니라
천하天下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은 간사함과 바름의 중간이니, 그 실정은 간사하나 그 행적은 바른 듯한 자가 있고, 그 실정은 바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를 알지 못하여 간사함에 빠지는 자도 있으니, 이 때문에 《춘추春秋》는 간사함과 바름의 중간에서 정녕하고 반복한 것이다.
송 양공宋 襄公인자仁者인가 의심스러운 자였고, 나라 순식荀息충신忠臣인가 의심스러운 자였다.
襄公 不修德하고 而疲弊其民하야 以求諸侯하니 此其心 豈湯武之心也哉리오마는
양공襄公이 평소 을 닦지 않고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면서 제후諸侯들에게 패자霸者가 되기를 바랐으니, 그 마음이 어찌 탕왕湯王무왕武王인의仁義의 마음이었겠는가.
而獨至於戰하야는 則曰 이라하니
그런데도 유독 전쟁에 이르러서는 말하기를 “이모二毛(노인)를 사로잡지 않고 상대방이 전열을 이루지 않았으면 북을 쳐서 진격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非有仁者之素 而欲一旦竊取其名하야 以欺後世하니 苟春秋不爲正之 則世之爲仁者 相率而爲僞也니라
이는 평소 인자仁者의 마음이 있지 않으면서 하루아침에 인자仁者라는 명칭을 절취하여 후세를 속이고자 한 것이니, 만일 《춘추春秋》에서 이것을 바로잡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을 행하는 자들이 서로 따라서 거짓을 행할 것이다.
이라하니 春秋之書戰 未有若此其詳也하니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겨울 11월 을사삭일乙巳朔日송공宋公(양공襄公)이 나라 사람과 홍수泓水에서 싸워 나라 군대가 크게 패했다.”라고 한 것이니, 《춘추春秋》에 전쟁을 이와 같이 상세하게 쓴 경우가 있지 않다.
君子以爲其敗固宜하야 而無有隱諱不忍之辭焉이라
이는 군자君子(공자孔子)가 나라 군대가 패한 것이 진실로 당연하여 숨기고 차마 말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여기신 것이다.
荀息之事君也 君存 不能正其違하고 歿 又成其邪志而死焉하니 荀息而爲忠이면 則凡忠於盜賊하고 死於私暱者 皆忠也 而可乎
순식荀息이 평소 자기 군주를 섬긴 것은, 군주가 살아 있을 적에는 군주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였고, 군주가 죽었을 적에는 또 군주의 나쁜 뜻을 이루려고 하다가 죽었으니, 순식荀息충신忠臣이라고 한다면 도적에게 충성하고 사사로이 친한 자들을 위해서 죽는 자들도 모두 다 충신忠臣이 될 것이니, 되겠는가?
其書曰 이라하니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죽음이 대부 순식大夫 荀息에게 미쳤다.”라고 한 것이다.
不然이면 則荀息
그렇지 않다면 순식荀息공보孔父의 무리이니, 곧바로 이름을 써서야 되겠는가?
역주
역주1 春秋定天下之邪正 : 이 글은 앞의 글 〈孔子從先進〉과 함께 治平 2년(1065)에 制科에 응시하여 지은 글이다. 本集에는 〈學士院試春秋定天下之邪正論〉으로 되어 있고, 郎曄의 《經進東坡文集史略》에는 〈春秋定天下之邪正〉으로 되어 있다.
역주2 爲穀梁者曰……莫善於春秋 : 穀梁은 《春秋》의 해설서인 《穀梁傳》을 이르는데, 《春秋穀梁傳》이라고도 한다. 子夏의 제자인 魯나라 사람 穀梁子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穀梁子의 이름에 대해서는 赤과 喜, 叔 등 여러 설이 있어 정론이 없다. 이 책에 《春秋公羊傳》과 《春秋左氏傳》을 더하여 ‘春秋三傳’이라고 부르는바, 이 내용은 晉나라 范甯의 《春秋穀梁傳序》에 보인다.
역주3 孔子論三代之盛……其衰必本於禮之漸廢 : 孔子는 《論語》와 《禮記》에서 禮의 중요성을 누차 말씀하였는바, 《禮記》 〈禮運〉에는 “禹王․湯王․文王․武王․成王․周公이 이로 말미암아 뽑히셨으니, 이 여섯 君子들은 禮를 삼가지 않은 자가 있지 않다.[禹湯文武成王周公 由此其選也 此六君子者 未有不謹於禮者也]”라고 보인다.
그리고 아래 내용은 《論語》 〈季氏〉의 “天下에 道가 있으면 禮樂과 征伐이 天子로부터 나오고, 天下에 道가 없으면 禮樂과 征伐이 諸侯로부터 나온다. 諸侯로부터 나오면 10世에 〈정권을〉 잃지 않는 자가 드물고, 大夫로부터 나오면 5世에 잃지 않는 자가 드물고, 陪臣이 國命을 잡으면 3世에 잃지 않는 자가 드물다.[天下有道 則禮樂征伐 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 自諸侯出 自諸侯出 蓋十世 希不失矣 自大夫出 五世 希不失矣 陪臣 執國命 三世 希不失矣]”라고 한 孔子의 말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는 集註에서 “先王의 制度에 諸侯는 禮樂을 변경하고 征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陪臣은 家臣이다. 이치를 거스름이 더욱 심하면 政權을 잃음이 더욱 빠르니, 대략 代數가 이와 같음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였다.
역주4 至以爲有禮則生 無禮則死 : 《禮記》 〈禮運〉에 “言偃이 다시 ‘이와 같이 禮가 급합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禮는 先王이 이것으로써 하늘의 道를 받들고, 이것으로써 사람의 情을 다스렸다. 그러므로 禮를 잃는 자는 죽고, 禮를 얻는 자는 산다.
《詩經》에 이르기를 ‘쥐를 보건대 四體가 있으니, 사람으로서 禮가 없단 말인가? 사람으로서 禮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禮는 반드시 하늘에 根本하고 땅을 본받으며 鬼神에 나열되고, 初喪과 祭祀와 활쏘기와 말 모는 것과 冠禮와 婚禮와 朝會와 聘問에까지 이른다. 그러므로 聖人이 禮로써 天下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禮는 天下와 國家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言偃復問曰 如此乎禮之急也 孔子曰 夫禮 先王以承天之道 以治人之情 故失之者死 得之者生 詩曰 相鼠有體 人而無禮 人而無禮 胡不遄死 是故夫禮必本於天 殽於地 列於鬼神 達於喪祭射御冠昏朝聘 故聖人以禮示之 故天下國家可得而正也]”라고 보인다.
역주5 孔子自少至老 未嘗一日不學禮 : 《史記》 〈孔子世家〉와 《論語》의 내용을 종합하여 이렇게 말한 듯하다.
〈孔子世家〉에 “孔子는 어려서부터 禮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 장난할 적에 俎豆를 늘어놓고 禮를 행하는 容貌를 베풀었으며, 당년 17세에 이미 禮法을 좋아한다는 명성이 나서, 孟僖子가 그의 아들 懿子와 南宮敬叔에게 ‘지금은 孔丘가 비록 나이가 어리나 禮法을 좋아하니, 그는 귀한 신분에 이르게 될 사람이 아니겠는가? 내가 죽거든 너희들은 반드시 그를 스승으로 모셔야 할 것이다.’라고 당부하여, 이들이 와서 禮를 배운 일이 있었다.
또 30세가 되기 전에 魯나라 군주의 후원을 얻어 周나라에 가서 老子를 만나 禮를 배웠고, 60세가 넘어서는 夏․商․周의 禮에 대한 제도를 찾아 《書經》을 편찬하여 위로는 唐堯와 虞舜으로부터 아래로는 秦 穆公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순서에 따라 정리하였으며, 《禮記》를 편찬하여 후대에 전했다.”라고 하였다.
《論語》 〈泰伯〉에는 “공손하되 禮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되 禮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하되 禮가 없으면 난을 일으키고, 강직하되 禮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라고 하셨고, 〈憲問〉에는 “윗사람이 예를 좋아하면 백성을 부리기 쉽다.”라고 하셨으며, 〈季氏〉에는 또 아들 伯魚에게 禮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禮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는 가르침을 내리시기도 하였다.
역주6 因魯史記 爲春秋 :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 되겠다. 군자는 죽어서 이름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하는데, 나의 道가 행해지지 않으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후세에 스스로 드러나겠는가?’라고 하시고, 이에 魯나라의 史書를 따라 《春秋》를 지었다.[弗乎弗乎 君子病沒世而名不稱焉 吾道不行矣 吾何以自見於後世哉 乃因史記 作春秋]”라고 보인다.
《春秋》는 魯 隱公(周 平王 49년(B.C. 722))으로부터 哀公 14년(周 敬王 39년(B.C. 481))까지 魯나라 12명의 公에 걸쳐 24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魯나라를 중심으로 기록하고 周나라 왕실을 정통으로 받들었으며, 夏․商․周 三代의 道를 논하였다. 그 문장은 간략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뜻은 넓고 엄중하여 후대의 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 공자께서 《春秋》를 지으실 적에 홀로 결단하시어, 기록할 것은 기록하고 삭제할 것은 삭제했기 때문에, 子游, 子夏와 같이 文學을 잘한 제자들도 한마디도 거들 수 없었다고 한다.
《孟子》 〈滕文公 下〉에는 “세상이 쇠하고 道가 미미해져서 부정한 학설과 포학한 행실이 또 일어나 신하로서 군주를 시해하는 자가 있으며, 자식으로서 아버지를 시해하는 자가 있었다. 孔子께서 이를 두려워하여 《春秋》를 지으시니, 《春秋》는 天子가 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알아주는 것도 오직 《春秋》이며, 나를 죄주는 것도 오직 《春秋》이다.’라고 하신 것이다.[世衰道微 邪說暴行有作 臣弑其君者有之 子弑其父者有之 孔子懼 作春秋 春秋天子之事也 是故孔子曰 知我者其惟春秋乎 罪我者其惟春秋乎]”라고 하였다.
역주7 記曰 禮者所以別嫌明疑定猶豫也 : 《禮記》 〈禮運〉에 “禮라는 것은 人君의 큰 權柄(칼자루)이니, 혐의를 분별하고 은미함을 밝히며 鬼神을 대접하고 制度를 상고하며 仁義를 구별하는 것으로, 政事를 다스리고 君主를 편안히 하는 方法이다.[禮者 君之大柄也 所以別嫌明微 儐鬼神 考制度 別仁義 所以治政安君也]”라고 한 구절을 원용한 듯하다.
역주8 太史公曰 春秋者 禮義之大宗也 : 太史公은 《史記》를 지은 司馬遷의 존칭이다. 《史記》 〈太史公自序〉에 “무릇 禮義의 요지에 통달하지 못한다면,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함에 이르게 된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면 신하들이 범하게 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면 군주에게 주살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면 무도한 아비가 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행위는 천하의 큰 잘못인데, 이 천하의 큰 잘못을 붙여 책망하면 그대로 받고 감히 사양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春秋》는 禮義의 大宗인 것이다.[夫不通禮義之旨 至于君不君 臣不臣 父不父 子不子 夫君不君則犯 臣不臣則誅 父不父則無道 子不子則不孝 此四行者 天下之大過也 以天下之大過予之 則受而弗敢辭 故春秋者 禮義之大宗]”라고 보인다.
역주9 被之空言 : 《春秋》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면서 단지 옳고 그름을 가려 포폄하였을 뿐이요, 실질적으로 처벌한 것이 아니므로 “빈 말씀에 올렸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0 宋襄公疑於仁者也 : 宋 襄公(B.C. 650~B.C. 637)은 宋 桓公의 아들로 이름은 玆父인데, 史家에 따라서는 춘추시대 五霸의 하나로 꼽기도 한다. 襄公은 평소 仁義를 말하기를 좋아하였으나, 鄫나라 임금을 사로잡아 그를 죽여서 次睢의 社祭에 犧牲으로 사용하는 등 행적에 있어서는 仁義롭지 못하였다.
襄公은 魯 僖公 22년에 楚나라의 군대와 泓水에서 싸울 적에도 仁義를 주장하여 초나라의 불리한 처지를 이용하지 않다가 크게 패하였는데, 이에 세상 사람들이 ‘宋襄之仁’이라 하여 이를 비웃었다. 이 때문에 蘇軾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1 晉荀息疑於忠者也 : 荀息은 춘추시대 晉 獻公의 대부로 이름은 黯이고 息은 그의 字이다. 본래 晉나라의 公族이었는데, 荀邑을 식읍으로 삼았기 때문에 姓이 荀이 되었다. 獻公은 寵姬인 驪姬의 참소를 들어 太子 申生을 자살하게 하고, 또 重耳와 夷吾 두 公子를 핍박하여 다른 나라로 도망하게 한 다음, 驪姬의 아들 奚齊를 후사로 세웠다. 獻公이 임종에 즈음하여 荀息을 불러 어린 아들을 부탁하였는데, 荀息은 죽음으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魯 僖公 10년(B.C. 650), 獻公은 뒤에 大夫 里克이 驪姬의 소행을 미워하여 10월에 奚齊를 시해하자, 荀息이 驪姬의 동생의 아들인 卓子를 세워 보필하였는데, 里克이 11월에 다시 卓子를 시해하자 荀息도 따라 죽었다. 그 후 晉나라는 공자 夷吾가 들어와 즉위하니 이가 바로 惠公이고, 惠公의 아들 懷公 때(魯 僖公 23년)에 공자 重耳가 懷公을 몰아내고 즉위하여 패자가 되니, 이가 바로 文公이다.
荀息의 충성은 獻公과의 사사로운 정에 의한 것으로 나라에 대한 진실한 충성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므로 東坡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春秋左氏傳 僖公 9년》
역주12 不禽(擒)二毛 不鼓不成列 : 禽은 擒과 통하며, 二毛는 머리털이 반은 희고 반은 검은 50대의 斑白을 이른다.
《春秋左氏傳》 僖公 22년에 “宋나라의 군대가 대패하여 襄公은 허벅지에 상처를 입었고 좌우에서 임금을 보호하는 門官들은 모두 죽었다. 國人들이 襄公을 원망하자, 襄公이 말하기를 ‘君子는 부상당한 敵은 거듭 찌르지 않으며, 반백의 노인은 포로로 잡지 않는 것이다. 옛날의 전쟁에는 험한 지형을 이용해 敵을 공격하지 않았으니, 寡人이 비록 亡國의 후손이지만 戰列을 이루지 못한 敵에게 진격을 명하는 북을 치지 않았노라.’고 하였다.[宋師敗積 公傷股 門官殲焉 國人皆咎公 公曰 君子不重傷 不禽二毛 古之爲軍也 不以阻隘也 寡人雖亡國之餘 不鼓不成列]”라고 보인다. 宋나라는 殷나라의 후손인 微子 啓를 봉한 나라이므로 襄公이 ‘亡國의 후손’이라고 칭한 것이다.
역주13 其書曰……宋師敗績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僖公 22년의 經文에 자세히 보인다.
역주14 及其大夫荀息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僖公 10년 經文에 ‘晉里克弑其君卓及其大夫荀息’이라고 보인다. 蘇軾은 이를 “晉나라 里克이 그 임금 卓과 그 대부 荀息을 죽였다.”라고 해석하지 않고, “晉나라 里克이 그 임금 卓을 시해하였는데, 죽임이 大夫 荀息에게 미쳤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僖公 9년의 傳에 “里克이 조정에서 공자 卓을 죽이니, 荀息도 그를 위해 죽었다.[里克弑公子卓于朝 荀息死之]”라는 기사를 보면 荀息이 살해당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죽은 것이다.
역주15 孔父之徒也 而可名哉 : 孔父는 孔父嘉로 孔子의 선조인데, 춘추시대 宋나라의 대부로 宋 殤公 때에 司馬 벼슬을 지냈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충성스러웠으므로 太宰 華督이 殤公을 시해하기 전에 미리 그를 제거하였는데, 《春秋左氏傳》 桓公 2년 經文에는 “春王正月 戊申日에 宋督이 그 군주 與夷와 그의 大夫 孔父를 시해했다.[春王正月 戊申日 宋督弑其君與夷及其大夫孔父]”라고 써서 마치 함께 죽인 것처럼 표기하였다. ‘可名哉’라고 한 것은 《春秋》에 이름을 기록한 경우는 비난의 소지가 있는 경우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10년 經文에 ‘晉里克弑其君卓及其大夫荀息’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杜預는 “荀息의 이름을 칭한 것은 그가 비록 말을 실천하고자 하였으나, 원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혼미한 임금에게 순종하였기 때문이다.”라고 注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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