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之中에 唯周最備하야 而周之興廢가 於詩爲詳이라
蓋其道始于閨門父子之間
하야 而施及乎君臣之際
하야 以被冒乎天下者
는 存乎
하고 后稷, 公劉, 文, 武創業之艱難
과 而幽, 厲失道之漸
은 存乎
하고 成王纂承文, 武之烈
하야 而禮樂文章之備
는 存乎
이요 其愈衰愈削
하야 而至夷于諸侯者
는 在乎
하니 蓋周道之盛衰
를 可以備見於此矣
니라
故로 雖怨刺幷興이나 而未列于國風者는 以爲猶有王政存焉이라
이 觀周樂
할새 歌小雅
에 曰 思而不貳
하고 怨而不言
하니 其周之衰乎
인저하고 曰 小雅烏乎衰
오
季札之所謂衰者는 蓋其當時에 親見周道之衰하고 而不睹乎文, 武, 成, 康之盛也요 文中子之所謂盛者는 言文, 武之餘烈이 歷數百年而未忘하야 雖其子孫之微나 而天下猶或宗周也라
當周之衰하야 雖君子나 不能無怨이요 要在不至於亂而已니 文中子以爲周之全盛은 不已過乎아
05. 〈소아小雅〉는 주周나라의 쇠함을 읊었다는 것에 대한 논 양공論 襄公 29년年
《시경詩經》 가운데 오직 주周나라의 내용이 가장 완비하여, 주周나라의 흥망성쇠가 《시경詩經》에 자세히 나와 있다.
주周나라의 도道가 규문閨門과 부자父子의 사이에서 시작하여 뻗어나가 군신간君臣間에까지 미쳐서 천하天下를 뒤덮은 것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 나와 있고, 후직后稷과 공류公劉,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어렵게 창업하고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점차 도道를 잃은 것은 〈소아小雅〉와 〈대아大雅〉에 나와 있고, 성왕成王이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공렬功烈을 계승하여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을 구비한 것은 〈송頌〉에 나와 있고, 주周나라가 쇠함에 따라 나라가 더욱 잠식되어 제후諸侯와 다름이 없게 된 것은 〈왕풍 서리王風 黍離〉에 나와 있으니, 주周나라의 도道가 성하고 쇠함을 《시경詩經》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소아小雅〉는 왕정王政의 작음을 말하였고, 겸하여 그 성하고 쇠한 즈음을 말한 것이다.
유왕幽王과 여왕厲王이 비록 도道를 잃었으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공업功業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선왕宣王이 뒤를 이어 중흥中興시켰다.
그러므로 비록 원망과 풍자가 함께 일어났으나 〈열국풍列國風〉에 나열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아직 왕정王政이 존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아小雅〉는 주周나라의 성쇠盛衰를 겸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날 이것을 말한 자들은 모두 그 한쪽만 얻어 완비하지 못하였다.
계찰季札이 주周나라의 음악을 관찰할 적에 〈소아小雅〉를 노래하자, 말하기를 “생각하면서도 배반하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말하지 않았으니, 주周나라가 쇠하였구나!”라고 하였고, 문중자文中子는 말하기를 “〈소아小雅〉가 어찌 쇠衰함을 읊었겠는가?
주周나라의 성盛함을 노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계찰季札이 쇠했다고 말한 것은 당시에 주周나라의 도道가 쇠한 것을 직접 보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의 성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문중자文中子가 성盛하다고 말한 것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남은 공렬功烈이 수백 년을 지나도 잊혀지지 않아서 비록 그 자손子孫들이 쇠약하였으나 천하天下가 여전히 혹 주周나라를 높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두 사람은 다 한쪽만 얻어 완비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국풍國風〉은 여색을 좋아하였으나 음탕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였으나 어지럽지 않다.”라고 하였다.
주周나라가 쇠할 때에는 비록 군자君子라도 원망이 없지 못하였고, 요점은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음에 있을 뿐이니, 문중자文中子가 〈소아小雅〉를 일러 주周나라의 전성기를 읊었다고 말한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그러므로 계찰季札과 문중자文中子 이 두 사람의 말을 통합하여야 〈소아小雅〉의 도道가 구비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