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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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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소아小雅〉는 나라의 쇠함을 읊었다는 것에 대한 논 양공論 襄公 29
議論的確하고 而文亦雅하니라
의논이 정확하고 문장 또한 전아하다.
詩之中 唯周最備하야 而周之興廢 於詩爲詳이라
시경詩經》 가운데 오직 나라의 내용이 가장 완비하여, 나라의 흥망성쇠가 《시경詩經》에 자세히 나와 있다.
蓋其道始于閨門父子之間하야 而施及乎君臣之際하야 以被冒乎天下者 存乎하고 后稷, 公劉, 文, 武創業之艱難 而幽, 厲失道之漸 存乎하고 成王纂承文, 武之烈하야 而禮樂文章之備 存乎이요 其愈衰愈削하야 而至夷于諸侯者 在乎하니 蓋周道之盛衰 可以備見於此矣니라
나라의 규문閨門부자父子의 사이에서 시작하여 뻗어나가 군신간君臣間에까지 미쳐서 천하天下를 뒤덮은 것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에 나와 있고, 후직后稷공류公劉, 문왕文王무왕武王이 어렵게 창업하고 유왕幽王여왕厲王이 점차 를 잃은 것은 〈소아小雅〉와 〈대아大雅〉에 나와 있고, 성왕成王문왕文王무왕武王공렬功烈을 계승하여 예악禮樂문장文章을 구비한 것은 〈〉에 나와 있고, 나라가 쇠함에 따라 나라가 더욱 잠식되어 제후諸侯와 다름이 없게 된 것은 〈왕풍 서리王風 黍離〉에 나와 있으니, 나라의 가 성하고 쇠함을 《시경詩經》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小雅者 言王政之小 而兼陳乎其盛衰之際者也
소아小雅〉는 왕정王政의 작음을 말하였고, 겸하여 그 성하고 쇠한 즈음을 말한 것이다.
雖失道 文, 武之業 未墜하고
유왕幽王여왕厲王이 비록 를 잃었으나 문왕文王무왕武王공업功業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았고, 게다가 선왕宣王이 뒤를 이어 중흥中興시켰다.
雖怨刺幷興이나 而未列于國風者 以爲猶有王政存焉이라
그러므로 비록 원망과 풍자가 함께 일어났으나 〈열국풍列國風〉에 나열되지 않은 것은 그래도 아직 왕정王政이 존재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曰 小雅者 兼乎周之盛衰者也라하노라
그러므로 “〈소아小雅〉는 나라의 성쇠盛衰를 겸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昔之言者 皆得其偏而未備也
옛날 이것을 말한 자들은 모두 그 한쪽만 얻어 완비하지 못하였다.
觀周樂할새 歌小雅 曰 思而不貳하고 怨而不言하니 其周之衰乎인저하고 曰 小雅烏乎衰
계찰季札나라의 음악을 관찰할 적에 〈소아小雅〉를 노래하자, 말하기를 “생각하면서도 배반하지 않고 원망하면서도 말하지 않았으니, 나라가 쇠하였구나!”라고 하였고, 문중자文中子는 말하기를 “〈소아小雅〉가 어찌 함을 읊었겠는가?
其周之盛乎인저하니라
나라의 함을 노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季札之所謂衰者 蓋其當時 親見周道之衰하고 而不睹乎文, 武, 成, 康之盛也 文中子之所謂盛者 言文, 武之餘烈 歷數百年而未忘하야 雖其子孫之微 而天下猶或宗周也
계찰季札이 쇠했다고 말한 것은 당시에 나라의 가 쇠한 것을 직접 보고 문왕文王무왕武王, 성왕成王강왕康王의 성함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요, 문중자文中子하다고 말한 것은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남은 공렬功烈이 수백 년을 지나도 잊혀지지 않아서 비록 그 자손子孫들이 쇠약하였으나 천하天下가 여전히 혹 나라를 높임을 말한 것이다.
曰 二子者 皆得其偏而未備也라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두 사람은 다 한쪽만 얻어 완비하지 못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태사공太史公이 말하기를 “〈국풍國風〉은 여색을 좋아하였으나 음탕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였으나 어지럽지 않다.”라고 하였다.
當周之衰하야 雖君子 不能無怨이요 要在不至於亂而已 文中子以爲周之全盛 不已過乎
나라가 쇠할 때에는 비록 군자君子라도 원망이 없지 못하였고, 요점은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음에 있을 뿐이니, 문중자文中子가 〈소아小雅〉를 일러 나라의 전성기를 읊었다고 말한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通乎二子之說이라야 而小雅之道備矣니라
그러므로 계찰季札문중자文中子 이 두 사람의 말을 통합하여야 〈소아小雅〉의 가 구비될 수 있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小雅周之衰 襄二十九年 : 本集에는 제목이 〈問小雅周之衰〉로 되어 있다. 《春秋》 襄公 29년(B.C. 544)에 “吳나라 임금이 季札을 魯나라에 보내와서 빙문하였다.[吳子使札來聘]”라고 보이는데, 《春秋左氏傳》에 季札이 聘問와서 周나라 樂舞를 두루 보고 듣고 평론한 내용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蘇軾은 이 글에서 季札의 평론에 대해 논하고 있으므로 제목의 아래에 襄公 29년이라고 단 것이다.
역주2 二南 : 《詩經》의 〈周南〉과 〈召南〉으로 〈周南〉은 11편, 〈召南〉은 14편인데, 〈國風〉 중의 正風이다.
朱子의 《詩經集傳》에 “周는 國名이고 南은 남방의 제후국이다.……武王이 별세하고 아들인 成王 誦이 즉위하자, 周公이 成王을 보필하여 禮樂을 제정하였는데, 마침내 文王의 세대에 風化가 미쳤던 民俗의 詩를 채집하여 이것을 관악기와 현악기에 올려서 房中의 음악으로 삼았고, 또 미루어 鄕黨과 邦國에까지 미쳤으니, 이는 先王의 훌륭한 風俗을 드러내어 밝혀서 天下와 後世에 修身․齊家․治國․平天下 하는 자들로 하여금 모두 법을 취하게 한 것이다.
國中에서 얻은 것은 南國의 詩를 섞어 〈周南〉이라 일렀으니, 天子의 나라로부터 諸侯國에 입혀졌고, 단지 國中뿐만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南國에서 얻은 것은 다만 〈召南〉이라고 일렀으니, 方伯의 나라로부터 南方에 입혀져서 감히 天子國에 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周國名 南南方諸侯之國也……武王崩 子成王誦立 周公相之 制作禮樂 乃采文王之世 風化所及民俗之詩 被之管弦 以爲房中之樂 而又推之 以及於鄕黨邦國 所以著明先王風俗之盛 而使天下後世之修身齊家治國平天下者 皆得以取法焉 蓋其得之國中者 雜以南國之詩 而謂之周南 言自天子之國而被於諸侯 不但國中而已也 其得之南國者 則直謂之召南 言自方伯之國 被於南方 而不敢以繫于天子也]”라고 하였다.
그리고 《詩經集傳》 序에는 “〈周南〉과 〈召南〉은 친히 文王의 교화를 입어 德을 이루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 性情의 올바름을 얻었다. 그러므로 그 말에 나타난 것이 즐거워하되 너무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되 傷함에 미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周南〉과 〈召南〉 두 편만이 風詩의 正經이 된 것이다.[唯周南召南 親被文王之化以成德 而人皆有以得其性情之正 故其發於言者 樂而不過於淫 哀而不及於傷 是以 二篇獨爲風詩之正經]”라고 하였다.
《毛詩》의 大序에는 “〈關雎〉와 〈麟趾〉의 敎化는 王者의 風이기 때문에 周公에게 달았으니, 南은 敎化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퍼져나감을 말한 것이다. 〈鵲巢〉와 〈騶虞〉의 德은 諸侯의 風이니, 先王이 가르친 것이다. 그러므로 召公에게 단 것이다. 〈周南〉과 〈召南〉은 시작을 바루는 道요 王化의 基本이다.[關雎麟趾之化 王者之風 故繫之周公 南言化自北而南也 鵲巢騶虞之德 諸侯之風也 先王之所以敎 故繫之召公 周南召南 正始之道 王化之基]”라고 하였다.
〈關雎〉는 〈周南〉의 첫 번째 편이고 〈麟趾〉는 〈周南〉의 마지막 편이며, 〈鵲巢〉는 〈召南〉의 첫 번째 편이고 〈騶虞〉는 〈召南〉의 마지막 편이다.
역주3 二雅 : 《詩經》의 〈大雅〉와 〈小雅〉를 이른다.
《毛詩》의 大序에 “天下의 일을 말하여 四方의 風을 나타냄을 雅라 이른다. 雅는 正의 뜻이니, 王政이 이로 말미암아 폐하고 興하게 된다. 政事에 小․大가 있기 때문에 〈小雅〉가 있고 〈大雅〉가 있는 것이다.[言天下之事 形四方之風 謂之雅 雅者正也 言王政之所由廢興也 政有小大 故有小雅焉 有大雅焉]”라고 하였다.
‘雅’는 周나라 王畿의 樂調이다. 〈小雅〉에 속한 작품들은 대체로 周나라가 쇠퇴하여 점차 정치적 암흑기로 들어가면서 사회적 모순들이 첨예해지는 때인 西周 후기와 東周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작품 가운데에 조정의 잘못을 질책하는 작품과 사회의 혼란을 반영하는 작품과 周나라 왕실과 西北의 戎狄들과의 갈등을 표현한 작품들이 비교적 많으며, 통치계급의 연회에 쓰인 악가들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王畿의 樂調이다
역주4 : 《詩經》의 〈周頌〉, 〈商頌〉, 〈魯頌〉을 이른다.
《毛詩》의 大序에 “頌은 盛德의 모습을 찬미하여 그 成功을 神明에게 告한 것이다.[頌者 美盛德之形容 以其成功告於神明者也]”라고 하였다.
朱子는 《詩經集傳》의 序에서 “雅․頌의 篇으로 말하면 모두 成周의 세대에 朝廷과 郊廟에 쓰는 樂歌의 내용이다. 그 말이 溫和하면서도 장엄하고 그 義가 너그러우면서도 치밀하여 作者가 왕왕 聖人의 무리였으니, 진실로 萬世의 法程이 되어 변할 수 없는 것이다.[若夫雅頌之篇 則皆成周之世 朝廷郊廟樂歌之詞 其語和而莊 其義寬而密 其作者往往聖人之徒 固所以爲萬世法程而不可易者也]”라고 하였다.
頌은 모두 宗廟의 제사에 쓰는 樂曲의 가사들로 이 가운데에 周나라의 典章과 制度가 잘 나타나 있다.
역주5 王黍離 : 王은 《詩經》 〈王風〉이고, 〈黍離〉는 〈王風〉의 篇名이다.
朱子의 《詩經集傳》에 “王은 周나라의 東都인 洛邑을 이르니, 王城의 畿內 넓이[方] 6백 리의 땅이다. 이 지역은 《書經》 〈夏書 禹貢〉의 豫州로 太華山과 外方山의 사이에 있었으니, 북으로는 河陽을 차지하고 冀州의 남쪽 경계까지 걸쳐 있었다.
周나라 초기에 文王은 豊 땅에 거주하고 武王은 鎬京에 거주하였는데, 成王 때에 이르러 周公이 처음으로 洛邑을 경영하여 때로 諸侯들을 만나는 장소로 삼으셨으니, 이는 지역의 한 중앙이어서 사방에서 오는 자들의 道里(길의 里數)가 균등하기 때문이었다. 이로부터 豊․鎬를 일러 西都라 하고, 洛邑을 일러 東都라 하였다.
幽王에 이르러 褒姒(포사)를 총애하여 褒姒가 伯服을 낳자 申后와 太子 宜臼를 폐출하니, 宜臼가 申나라로 도망하였다. 이에 申侯가 노하여 犬戎과 함께 宗周를 쳐서 幽王을 戲 땅에서 시해하였다. 晉 文侯와 鄭 武公이 宜臼를 申나라에서 맞이하여 세우니, 이가 平王이다.
平王이 東都의 王城으로 옮겨 居하니, 이에 王室이 마침내 낮아져 諸侯와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詩를 雅라 하지 않고 風이라 한 것이다. 그러나 王의 칭호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周라고 말하지 않고 王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河南府와 懷州․孟州 등지가 이곳이다.[王 謂周東都洛邑 王城畿內方六百里之地 在禹貢豫州太華外方之間 北得河陽 漸冀州之南也 周室之初 文王居豊 武王居鎬 至成王 周公始營洛邑 爲時會諸侯之所 以其土中 四方來者道里均故也 自是 謂豊鎬爲西都 而洛邑爲東都 至幽王 嬖褒姒 生伯服 廢申后及太子宜臼 宜臼奔申 申侯怒 與犬戎攻宗周 弑幽王于戲 晉文侯 鄭武公 迎宜臼于申而立之 是爲平王 徙居東都王城 於是王室遂卑 與諸侯無異 故其詩不爲雅而爲風 然其王號未替也 故不曰周而曰王 其地則今河南府及懷孟等州是也]”라고 보인다.
周나라가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周나라 大夫가 일이 있어 鎬京에 이르었는데, 옛 宗廟와 宮室이 모두 무너져 기장밭이 되어 있었다. 이에 周나라의 쇠퇴함을 슬퍼하여 차마 떠날 수가 없었다. 이에 이 〈黍離〉를 지어 서글픈 심정을 읊은 것이다.
역주6 幽厲 : 幽는 昏愚하다는 뜻으로 幽王을 가리키고, 厲는 포악하다는 뜻으로 厲王을 가리킨다. 厲王은 이름이 胡로 周나라의 제10대 왕이고, 幽王은 이름이 宮涅로 厲王의 손자인데 褒姒라는 女子에게 미혹되어 결국 犬戎에게 시해당하였다. 그리하여 周나라는 洛邑으로 천도하게 되었으며, 이후로 유명무실한 왕실이 되었다.
역주7 宣王又從而中興之 : 宣王(재위 B.C. 827~B.C. 781)은 주나라 제11대 왕으로 이름은 靖이며 厲王의 아들이다. 厲王이 학정을 자행하여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大臣 召公이 王子를 자신의 집에 숨겨주어 무사할 수 있었다. 厲王이 유배지에서 죽자, 대신들이 그를 세워 宣王이 되었다. 宣王은 즉위하자 조정을 정돈하고 여러 제도와 군대를 정비하였으며, 북방을 침공한 獫狁(험윤)을 尹吉甫를 시켜 격퇴하게 하여 周나라의 중흥을 이끌었다. 獫狁은 玁狁으로도 표기하였는데, 뒤에는 匈奴라 칭하였다.
역주8 季札 : 春秋時代 吳나라 公子인데 吳王 壽夢의 막내아들로 어진 德이 있어 壽夢이 후계자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延陵에 封해져 延陵季子로 일컬어졌다. 魯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列國의 음악을 들어보고 이를 비평하였는데, 음악을 통해 列國의 치란과 흥망을 정확히 짚어내었다. 《春秋左氏傳 襄公 29年》
역주9 文中子 : 隋나라 때 경학가인 王通(?~617)으로 文中子는 그의 弟子들이 올린 시호이다. 字가 仲淹이며 絳州 龍門 사람으로 蜀郡의 司戶書佐와 蜀王의 侍讀 등을 역임하였다. 隋 文帝 仁壽 연간에 《太平十二策》을 상주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河汾으로 돌아와 1천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이른바 河汾學派를 형성하였는데, 唐나라 초기의 명신인 房玄齡, 魏徵, 李靖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다. 六經에 정통하였으며, 그 체제를 본떠 여러 저술을 남겼으나 모두 전해지지 않고, 《論語》를 모방하여 지은 《中說》만이 남아 있다.
역주10 太史公曰……小雅怨誹而不亂 : 이 내용은 《史記》 〈屈原列傳〉에 그대로 보이는바, 〈國風〉은 13列國의 風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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