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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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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行文 似從 寖淫之以自家本色이라
多嫋娜綽約處하니라
世之所謂智者 知天下之利害하고 而審乎計之得失이니 如斯而已矣 此其爲智 猶有所窮이라
唯見天下之利而爲之하고 唯其害而不爲 則是有時而窮焉하야 亦不能盡天下之利하나니라
古之所謂大智者 知天下利害得失之計하고 而權之以人이라
是故 有所犯天下之至危로되 而卒以成大功者하니 以其人權之일새니라
輕敵者하고 重敵者 無成功하나니
何者
天下未嘗有百全之利也 擧事而待其百全이면 則必有所格이라
是故 知吾之所以勝人하고 而人不知其所以勝我者 天下莫能敵之니라
此三者 皆危道也어늘 而直犯之하니 彼不知用其所長하고 又不知出吾之所忌
是故 (不)可以冒害而就利하니라
自三代之亡으로 天下以詐力相幷하야 其道術政敎 無以相過하야 而能者得之
當漢氏之衰하야 豪傑竝起하야 而圖天下하야
爭爲彊暴하고하니 其用兵制勝 固不足以敵曹氏
이나 天下終於分裂하야訖魏之世토록 而不能一하니라
蓋嘗試論之컨대
魏武 長於料事 而不長於料人이라
是故 有所重發而喪其功하고 有所輕爲而至於敗하니라
劉備 有蓋世之才 而無應卒之機하니
孫權 勇而有謀하니 此不可以聲勢恐喝取也어늘
是以 喪師於赤壁하야 以成吳之强하니라
且夫劉備 可以急取 而不可以緩圖 方其危疑之間하야 卷甲而趨之
孫權者 可以計取 而不可以勢破也어늘 而欲以 乘勝而取之하니
彼非不知其難이요 特欲僥倖於權之不敢抗也 用之於이라야 乃可以逞이라
夫魏武重發於劉備而喪其功하고 輕爲於孫權而至於敗하니 此不亦長於料事하고 而不長於料人之過歟
嗟夫
事之利害 計之得失 天下之能者擧知之로되 而不能權之以人이면 則亦紛紛焉或勝或負하야 爭爲雄彊하야 而未見其能一也니라
古之起自匹夫하야 而取天下者 蓋必其身 有定天下之略이요 而非沾沾以割據四方爲謀者 漢, 唐, 宋 是也
魏武帝雖稱奸雄이나 其始也 輒以傾漢室而代之爲謀
其劫天子하고 誅强國하야 竝創心割據하니 而二袁呂布 非其敵者 爲其所屛耳
宗之雄如備하고 藩之傑起如權 其能爲之下乎
使魏武力獎王室하야 以身下備與權이면 則漢之桓靈之業 未必不復振이요 而魏武且爲元勳也리니 其去三分天下하야 僅三世而亡하면 相去豈特尺寸哉리오


06. 나라 무제武帝에 대한
행문行文한 것이 《전국책戰國策》으로부터 온 듯하나, 자신의 본색으로 한껏 담갔다.
그러므로 여운이 길고 유려한 부분이 많은 것이다.
세상에 이른바 ‘지혜로운 자’라는 것은 천하의 이해利害를 알고 계책의 득실得失을 살핌을 말하니, 이와 같을 뿐이라면 이는 그 지혜로움이 오히려 부족한 바가 있는 것이다.
오직 천하에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보아 이것만을 행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때로 지혜가 부족한 경우가 있어서 이 또한 천하의 이로움을 다하지 못한다.
옛날의 이른바 ‘크게 지혜로운 자’라는 것은 천하의 이해利害와 계책의 득실得失을 알고 또 사람으로써 저울질을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지극한 위태로움을 범하면서도 끝내 큰 공을 이룬 자가 있었으니, 이는 사람을 가지고 저울질을 했기 때문이다.
적을 가볍게 여기는 자는 패망하고 적을 두려워해서 너무 신중히 하는 행동은 성공하지 못한다.
어째서인가?
천하에 빈틈없이 완전한 이익은 있지 않으니, 거사擧事를 하면서 빈틈없이 완전하기를 기다린다면 반드시 막히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은 상대방을 이기는 방법을 알고 상대방은 자신을 이기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에는, 천하가 능히 자신을 대적하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에 나라 순식荀息우공虞公이 반드시 궁지기宮之奇의 계책을 쓰지 못할 것을 알았고, 나라 포숙鮑叔나라 군주가 반드시 시백施伯의 말을 따르지 못할 것을 알았고, 설공薛公경포黥布가 반드시 상책上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상대방이 자신의 예측대로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는데도 곧바로 이를 범하고 실행하였으니, 저들은 자신의 장점을 쓸 줄 모르고 또 상대방이 자신이 꺼리는 바로 나올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모험을 하면서 이로운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삼대시대三代時代가 망함으로부터 천하가 속임수와 무력을 가지고 서로 겸병하여, 도술道術정교政敎가 서로간에 나을 것이 없어서 재능이 있는 자가 천하를 얻었다.
나라가 쇠망할 때를 당하여 호걸들이 함께 일어나 천하를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원소袁紹원술袁術동탁董卓여포呂布가 다투어 강포한 짓을 자행하였고, 손권孫權유비劉備가 또 한 구석에서 구구하게 있었는데, 군대를 운용하여 승리하는 것은 진실로 조씨曹氏(조조曹操)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천하는 끝내 분열되어 나라의 세상이 끝나도록 통일되지 못하였다.
내가 한번 이것을 논해보겠다.
위 무제魏 武帝는 일을 헤아리는 데에는 뛰어났으나, 사람을 헤아리는 데는 뛰어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너무 신중하게 행동하여 뒤늦게 발동해서 을 잃은 경우가 있었고, 너무 가볍게 행동하여 패전함에 이른 경우가 있었다.
유비劉備는 세상을 뒤덮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응하는 기지機智는 없었다.
그가 새로이 유장劉璋을 격파하자 지방 사람들이 따르지 아니하여 하루에도 너덧 차례 소란이 일어나서, 소란을 일으킨 자들을 목 베어도 금지하지 못하였는데, 위 무제魏 武帝가 이때를 버려두고 유비를 취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자신이 죽을 때까지 무력을 가하지 못하였다.
손권孫權은 용맹하고 지모가 있었으니, 이것은 성세聲勢와 공갈로 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위 무제魏 武帝중원中原장기長技기병騎兵을 쓰지 않고 배와 노의 사이에서 〈수전水戰으로〉 손권孫權과 싸우고, 하루 동안에 3백 리를 행군하여 이익을 다투었으니, 이는 두 가지 패착을 범한 채 손권孫權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적벽강赤壁江에서 패전하여 군대를 잃고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유비劉備는 급히 공격하여 점령해야 하고 느슨히 도모해서는 안 되니, 유비劉備가 한창 위태롭고 의심스런 처지에 처했을 적에, 비록 병법에서 꺼리는 바이지만 위 무제魏 武帝가 갑옷을 벗어던지고 급히 행군하여 달려갔으면 뜻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손권孫權은 계략으로써 취할 수는 있으나 형세形勢로는 격파할 수가 없었는데, 위 무제魏 武帝형주荊州에서 새로 거둔 병졸을 거느리고 승세를 타 나라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위 무제魏 武帝는 그 어려움을 모른 것이 아니요, 다만 손권孫權이 감히 항거하지 못하고 항복하는 요행을 바란 것이었으니, 이것은 새로이 나라를 세운 에서나 써야 비로소 뜻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위 무제魏 武帝유비劉備에게는 너무 신중하게 행동하다가 지체하여 그 공을 상실하였고, 손권孫權에게는 가볍게 행동하여 패전함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일을 헤아리는 데에는 뛰어났으나 사람을 헤아리는 데에는 그렇지 못한 잘못이 아니겠는가?
슬프다!
천하의 유능한 자가 일의 이해利害와 계책의 득실得失을 모두 알면서도 사람으로써 저울질하지 못한다면, 또한 분분紛紛하게 승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하면서 자웅雌雄강약强弱을 다툴 뿐 천하를 통일하는 것은 보지 못한다.
옛날 항오行伍에서 필부匹夫의 신분으로 발신發身하여 천하를 취한 자들은 반드시 그 몸에 천하를 평정할 수 있는 지략智略을 가진 자들로 구구하게 사방에 할거하는 것을 도모한 자가 아니었으니, 나라와 나라와 나라가 이 경우이다.
위 무제魏 武帝는 비록 간웅奸雄이라 일컬어졌으나, 그는 처음부터 곧바로 나라 황실을 쓰러뜨리고 자신이 대신할 계책을 세웠다.
그러므로 천자天子를 협박하고 강력한 제후諸侯들을 주벌誅罰하여, 한 지방을 할거割據하려는 마음을 갖는 것을 모두 징계하였으니, 원소袁紹원술袁術, 여포呂布는 그의 적수가 아니어서 그에게 물리침을 당하였다.

그리고 종실宗室 중에 영웅스럽기가 유비劉備와 같고 번신藩臣 중에 영걸로 일어나기를 손권孫權과 같이 한 자를 어찌 자신의 아래가 되게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위 무제魏 武帝가 힘써 황실을 도와 자신을 유비劉備손권孫權에게 낮추었더라면, 나라의 환제桓帝영제靈帝의 기업이 다시 떨쳐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요, 위 무제魏 武帝도 나라의 원훈元勳(큰 공신功臣)이 되었을 것이니,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하나를 차지하다가 겨우 삼대三代에 망한 것에 비한다면 그 거리가 어찌 다만 한 자 한 치뿐이겠는가?


역주
역주1 魏武帝論 : 이 글 또한 앞의 〈始皇論 二〉와 함께 올린 50편의 글 가운데 하나인 듯한데, 저작 연도는 역시 미상이다. 魏 武帝는 曹操를 이른다. 曹操는 원래 漢나라 獻帝로부터 魏王에 봉해졌는데, 아들 曹丕가 獻帝에게 선양받아 帝位에 오른 다음 武帝로 추존되었다.
역주2 戰國策 : 前漢時代 劉向이 戰國時代 12개 나라에서 遊說客들이 설파한 智略을 모아 엮어 編纂한 책으로 모두 33권이다. 周나라 元王에서부터 秦나라의 始皇帝에 이르기까지 240년간의 것으로, 당대의 策士였던 蘇秦, 張儀, 范睢 등이 각국을 방문하여 자신의 정책을 제후에게 설파한 내용을 각 나라별로 기록하고 있다. 司馬遷이 저술한 《史記》의 중요 史料이기도 하다.
역주3 晉荀息知虞公必不能用宮之奇 : 荀息은 晉나라의 大夫이고 虞公은 虞나라 임금이며 宮之奇는 虞公의 신하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0년조에 의하면 晉나라 荀息이 虞나라에게 길을 빌려 虢나라를 정벌하는 동시에 虞나라마저 점령하는 계책을 내자, 晉나라 임금은 虞나라에 宮之奇가 있어서 계책이 간파당할 것을 걱정하였다. 荀息이 아뢰기를 “宮之奇는 사람됨이 나약하여 적극적으로 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虞公보다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임금이 허물없이 지내므로 설령 간한다 하더라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荀息이 虞公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고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宮之奇가 극력 간쟁하였으나 虞公은 끝내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晉나라는 결국 길을 빌려 虢나라를 멸망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虞나라도 멸망시켰다.
역주4 齊鮑叔知魯君必不能用施伯 : 鮑叔은 이름이 牙로 齊나라 신하이며 施伯은 魯나라의 신하이다. 齊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鮑叔은 公子 小白(뒷날의 齊 桓公)을 모시고 莒나라로 망명하였고 管仲은 公子 糾를 모시고 魯나라로 망명하였다. 뒤에 내란이 종식되자, 小白과 糾가 각각 莒나라와 魯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齊나라로 들어오다가 싸움을 벌여 糾가 패전하였다. 魯나라에서는 부득이 糾를 죽이고 管仲을 가두었다. 鮑叔이 桓公에게 魯나라에 잡혀 있는 管仲을 데려와 재상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桓公은 “魯나라에는 명신 施伯이 있으니, 우리가 管仲을 등용하려는 뜻을 알고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鮑叔이 “사신을 보내어 ‘管仲을 데려다가 우리의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살하려고 하니, 보내달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자, 桓公이 魯나라에 管仲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魯나라 莊公이 施伯과 의논하였는데, 施伯이 “이는 주륙하려는 것이 아니라 管仲을 등용하려는 것이니, 管仲이 등용되면 인접국인 우리 魯나라가 피폐해질 것입니다. 그를 죽여 시신으로 보내십시오.”라고 하였으나, 莊公은 齊나라와 갈등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管仲을 살려 보냈다. 결국 齊나라는 管仲을 얻어 천하의 패자가 되었다. 《史記 齊世家》
역주5 薛公知黥布必不出於上策 : 黥布는 英布인데 죄를 짓고 얼굴에 墨刑을 가하였으므로 黥布라 하였다. 원래 楚나라 項羽의 용장이었는데 劉邦에게 귀의하여 큰 공을 세우고 九江王에 봉해졌으나, 같은 功臣인 韓信과 彭越이 차례로 주륙을 당하자 불안한 마음을 품고 반란하였다. 高祖가 黥布를 토벌하기 위해 일찍이 楚나라의 令尹을 지낸 薛公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薛公은 黥布에게 세 가지 계책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高祖가 그 계책들이 무엇인가를 묻자, 대답하기를 “만일 黥布가 上計에서 나온다면 山東은 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고, 中計에서 나온다면 勝敗의 數를 알 수 없으며, 下計에서 나온다면 폐하가 베개를 편안히 베고 누워 계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高祖가 또다시 묻기를 “黥布가 장차 어떤 계책으로 나오겠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下計로 나올 것입니다. 黥布는 옛날 驪山에서 노역하던 무리입니다. 萬乘의 군주가 되었으나 모두 자신만을 위할 뿐 뒤를 돌아보아 백성과 만세를 위하여 생각할 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下計로 나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黥布가 과연 薛公의 말과 같이 행동하였으므로 高祖가 그를 쉽게 토벌할 수 있었다. 《史記 黥布傳》 上計는 上策과 같은 말로 제일 좋은 계책이고, 下計는 下策과 같은 말로 가장 나쁜 계책이다. 驪山은 秦나라의 도성인 咸陽(現 西安)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 秦始皇帝의 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부역을 시켰다.
역주6 二袁董呂 : 後漢 말기 봉기한 軍閥인 袁紹, 袁術, 董卓, 呂布를 가리킨다.
역주7 孫權劉備 又以區區於一隅 : 당시 孫權은 江左(揚子江의 동쪽)를, 劉備는 益州(四川)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8 方其新破劉璋……終其身 : 曹操가 대군을 내어 漢中의 張魯를 정벌하자 蜀漢의 劉備도 군사를 漢中으로 보내서 이에 맞섰는데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졌다. 曹操가 군량이 부족하여 군대를 철수하려 하자, 모사 劉曄이 아뢰기를 “劉備는 인걸이지만 판단력이 더디고 蜀 땅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蜀 땅 사람들이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漢中을 점령하면 蜀 땅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公의 신명함으로 무너지는 틈을 타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曹操는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철군을 결정한 지 며칠 후에 항복한 蜀 땅 사람들이 ‘蜀 땅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소란이 일어나 劉備가 소란을 일으킨 자들의 목을 베어도 안정되지 않는다.’고 말하자, 曹操가 劉曄에게 “지금 공격해도 되겠는가?”라고 물으니, 劉曄은 “지금은 이미 다소 안정되어 공격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결국 회군하였다. 그리하여 曹操 생전에는 蜀을 정벌하지 못하였다. 《三國志 劉曄傳》 劉璋은 원래 益州太守였는데 劉備에게 항복하고 益州를 내주었다.
역주9 魏武不用中原之長……以成吳之强 : 建安 13년(208) 曹操는 대군을 이끌고 荊州의 劉表와 이곳에 의탁하고 있는 劉備 및 江東의 孫權을 정벌하기 위해 남하하였다. 曹操는 대규모의 군수창고가 있는 江陵을 劉備가 먼저 차지할 것을 염려하여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襄陽에 이르렀는데, 劉備가 이미 도망갔다는 말을 듣고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하루에 3백 리를 달려 추격하였다. 그리하여 長坂의 싸움에서 劉備를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끝내 섬멸하지 못하였다. 曹操는 荊州를 점령하고 있던 劉表가 죽고 그의 아들 劉琮이 항복하자, 水陸軍 수십 만을 거느리고 江東의 孫權에게 항복을 요구하고 항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曹操의 추격을 뿌리치고 무사히 夏口에 도착한 劉備는 諸葛亮을 孫權에게 보내어 결맹을 도모하였다. 이를 승낙한 孫權이 周瑜, 程普 등에게 水軍 수만 명을 주어 赤壁江에서 曹操의 군대와 싸우게 하였는데, 曹操가 대패하여 큰 손실을 입고 도망하였다. 이때 曹操는 군대를 8십만 대군이라고 선전하였으나, 실지로는 20만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蘇軾이 聲勢와 공갈로 孫權을 취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曹操軍의 주력은 모두 中原의 육군들로 騎兵에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도 曹操가 무리한 행군으로 피로한 군대를 거느리고 적의 장점인 水戰으로 승부를 결정하려 한 것은 패착이었다고 蘇軾은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赤壁大戰은 劉備와 孫權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이로부터 魏․蜀․吳 三國이 鼎立하게 되었다.
역주10 雖兵法之所忌 可以得志 : 《孫子兵法》 〈軍爭〉에 “하루에 백 리 길을 쉬지 않고 달려가서 적과 다투면 三軍의 장수가 적에게 사로잡히고, 50리를 달려가서 적과 다투면 그 主將이 꺾이고 만다.[百里而爭利 則擒三將軍 五十里而爭利 則蹶上將軍]”라고 하였다. 曹操의 군대가 하루에 3백 리를 달려 蜀의 劉備를 공격하는 것은 兵法으로 보면 몹시 위태로운 작전이지만, 당시 劉備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이므로 만일 曹操가 계속 강행군하여 공격하였더라면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역주11 荊州新附之卒 : 新附之卒은 이제 갓 歸附한 병졸을 이른다. 曹操의 대군이 도착하기 전에 劉表가 죽자, 그의 아들 劉琮이 싸우지 않고 무리를 이끌고 曹操에게 항복하였는데, 曹操가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2 新造之蜀 : 劉備가 비로소 劉璋을 항복시키고 蜀 지방을 차지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3 行伍 : 본래 군대의 대열을 이르는데, 인신하여 가장 낮은 일반 병졸을 이르기도 한다. 고대 군대의 編制는 병사 5명을 伍라 하고, 5伍를 行이라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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