伏蒙再示先人墓表
에 特載
一篇
하시니 恭覽涕泗
하야 不知所云
하노이다
雖當時學者 知師尊之나 然於其言語文章에도 猶不能盡이어든 而況其中之不可形者乎잇가
所謂知之盡而信其然者
는 擧世
에 惟公一人
이니 雖若不幸
이나 然
니이다
辨姦之始作也에 自軾與舍弟도 皆有嘻其甚矣之諫하니 不論他人이어늘 獨明公一見하고 以爲與我意合이라하시니이다
公固已論之先朝하고 載之史冊하시니 今雖容有不知나 後世決不可沒이어니와
信不信
을 何足深計
리오마는 然使斯人用區區小數
하야 以欺天下
어늘 天下莫覺莫知
면 恐
하리니 此墓表之所以作
이요 而軾之所以流涕再拜而謝也
니이다
林宗은 於人材에 小大畢取하야 所賢非一人이요 而叔度之賢은 無一見於外者로되 而後世猶信은 徒以林宗之重也니이다
今公之重이 不減林宗이어늘 所賢惟先人하야 而其心迹을 粗若可見하니 其信於後世 必矣니이다
06. 장태보張太保가 선인先人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어준 것에 사례한 편지
두 번째 보여주신 선인先人의 묘표墓表에 특별히 〈변간론辨姦論〉 한 편을 기재하셨으니, 공손히 보고 눈물이 흘러 말씀드릴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선인先人께서는 소년시절에는 명성이 없이 그대로 몰골沒汨하다가 말년에야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당시에 배우는 학자들이 스승으로 높일 줄 알았으나 선인先人의 언어와 문장도 오히려 다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마음속에 형용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른바 극진히 알고 그 옳음을 믿어주시는 분은 온 세상에 오직 공公 한 분이시니, 비록 불행한 것 같으나, 자신을 알아주는 자가 드문 것을 바로 노씨老氏(노자老子)는 귀하게 여겼습니다.
〈변간론辨姦論〉을 처음 지을 적에 저와 사제舍弟도 모두 너무 심함을 간諫하였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것이 없는데, 명공明公께서는 한 번 보시고 “나와 뜻이 부합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공公께서는 진실로 이것을 이미 선왕조에서 논하셨고 역사책에 기재하셨으니, 지금은 비록 혹 알지 못하는 자가 있으나 후세에 결코 선인先人의 업적이 매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인先人의 말씀을 표창해서 드러내신 공公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이것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를 어찌 굳이 깊이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사람(왕안석王安石)이 구구하게 작은 술수를 써서 천하 사람들을 속였는데 천하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천하 사람들이 알지 못하면 후세에 반드시 진秦나라에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있게 될까 염려되니, 이것이 공公께서 묘표를 짓게 된 이유이고 제가 눈물을 흘리고 재배하면서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황숙도黃叔度는 인품이 담담하여 크게 한 일이 없으나 곽림종郭林宗의 한마디 말 때문에 지금까지 당대의 안자顔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곽림종郭林宗은 인재에 있어서 크고 작은 인물을 모두 취하여 어질게 여긴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고, 또 황숙도黃叔度의 어짊은 한 가지도 외면에 드러난 것이 없었는데도, 후세 사람들이 황숙도黃叔度를 당대의 안자顔子라고 믿고 있는 것은 오직 곽림종郭林宗의 명망이 중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公의 명망의 중함은 곽림종郭林宗보다 덜하지 않은데 어질게 여기신 분이 오직 선인先人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선인先人의 심적心迹을 대략 볼 수 있을 듯하니, 후세 사람들이 믿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말을 많이 한들 어찌 충분히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