功烈不見於世
나 然英偉豪傑之氣 自爲一時所宗
하니 其論
書
에 慨然有烈丈夫之風
이라
常恨二人之文이 不見其全이러니 今吾樂全先生張公安道 其庶幾乎인저
然이나 至於臨大事하야는 鮮不忘其故, 失其守者는 其器小也일새라
自少出仕하야 至老而歸히 未嘗以言徇物하고 以色假人하야 雖對人主나 必審而後言이라
世遠道散
하야 雖志士仁人
이라도 或少貶以求用
이어늘 公獨以邁往之氣
로 行正大之言
하야 曰
이라하야
上不求合於人主라 故로 雖貴而不用하고 用而不盡하며 下不求合於士大夫라 故로 悅公者寡하고 不悅公者衆이라
公은 盡性知命하야 體乎自然하야 而行乎不得已요 非蘄以文字名世者也라
然
이나 에 所與人主論天下事
하야 見于章疏者 多矣
라
或用, 或不用이나 而皆本於禮義하고 合於人情하며 是非有考於前하고 而成敗有驗於後요 及其他詩文하야도 皆淸遠雄麗하야 讀者可以想見其爲人하니 信乎라 其有似於孔北海, 諸葛孔明也여
한대 公一見
에 待以
라 今三十餘年
에 所以開發成就之者至矣
로되 而軾終無所效尺寸於公者
요
獨求其文集하야 手校而家藏之하고 且論其大略하야 以待後世之君子하노라
公在人主前에 論大事하면 他人은 終日反覆호되 不能盡者를 公必數言而決하고
言雖不盡用이나 然慶曆以來로 名臣爲人主所敬이 莫如公者라하니라
公
은 今年八十一
이라 杜門却掃
하고 終日危坐
하야 하야
그러므로 그의 문집에 서문을 쓴 것도 서로 알아줌이 깊은 가운데 문장이 온갖 이치에 합당한 것이다.
공북해孔北海(공융孔融)는 뜻이 크고 의논이 고상하였다.
그의 공렬功烈은 세상에 나타나지 못했으나 영위英偉하고 호걸豪傑스러운 기운은 저절로 한때에 높이는 바가 되었으니, 그가 성효장盛孝章과 치홍예郗鴻豫를 논한 글에 개연慨然히 의렬 장부義烈 丈夫의 풍모가 나와 있다.
제갈공명諸葛孔明은 문장가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사물事物을 열어주고 인사人事를 이룬 자질과 명名․실實을 널리 종합한 뜻이 저절로 언어言語(문자文字)에 드러났으며, 〈출사표出師表〉에 이르러서는 간결하면서도 곡진하고 정직하면서도 늘어놓지 않았으니, 훌륭하다.
《서경書經》의 〈이훈伊訓〉․〈열명說命〉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니, 진秦․한漢 이래에 ‘임금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자’가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는 항상 두 분의 문장을 그 온전히 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는데, 지금 우리 악전선생 장공樂全先生 張公 안도安道가 아마도 여기에 가까울 것이다.
선비가 천하의 중책을 자임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언어가 공교하지 않은 것이 아니요, 정사政事와 문학文學이 민첩하고 또 해박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게 되면 옛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지킴(지조)을 잃지 않는 자가 적은 것은 기국器局이 작기 때문이다.
공公은 포의布衣로 있을 적에 이미 우뚝하게 공보公輔의 명망이 있었다.
젊어서 세상에 나와 벼슬할 때로부터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갈 때까지 일찍이 아첨하는 말로 남의 비위를 따르고 유순한 얼굴빛으로 남을 용서하지 않아서, 비록 인주人主를 상대하더라도 반드시 자세히 살핀 뒤에야 말씀하였다.
공公은 남의 훼방과 칭찬에 동요되지 않고, 벼슬을 얻고 잃는 것을 똑같이 여겼으니, 참으로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신 ‘도道로써 인군을 섬기는 대신大臣’이란 것이다.
성인聖人의 세상이 멀어지고 도道가 이산되어서 비록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이라도 혹 다소 자신의 자세를 낮추어 등용되기를 바라는데, 공公은 홀로 매진하여 나아가는 기개로 정대正大한 말씀을 행하여, 이르시기를 ‘나를 써주면 나가서 도道를 행하고 나를 버리면 은둔한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위로는 인주人主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신분이 귀하였으나 말씀이 쓰이지 못하고 쓰여도 다하지 못하였으며, 아래로는 사대부士大夫들에게 영합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공公을 좋아하는 자가 적고 공公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천하天下의 위인偉人을 말하게 되면 반드시 공公을 으뜸으로 여긴다.
공公은 본성本性을 다하고 천명天命을 알아서 자연을 체행體行하여 부득이함을 행行하였고, 문자文字로써 세상에 이름나기를 바란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경력慶曆 연간으로부터 원풍元豐 연간에 이르기까지 40여 년 동안에 인주人主와 함께 천하天下의 일을 논하여 장소章疏에 나타난 것이 매우 많다.
그 말씀이 혹 쓰여지기도 하고 혹 쓰여지지 못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예의禮義에 근본하고 인정人情에 부합하며, 옳고 그른 것이 예전에 고찰함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뒤에 징험함이 있었으며, 기타 시문詩文에 이르러도 모두 깨끗하고 원대하고 웅장하고 화려하여 읽는 자가 이로써 그 인품을 상상해볼 수 있으니, 진실로 공북해孔北海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유사하다.
나는 나이 20세 때에 제생諸生의 신분으로 공公을 성도成都에서 뵈었는데, 공公은 한 번 보자 나를 국사國士로 대우해서 지금까지 30여 년 동안 나를 개발하여 성취시킨 것이 지극하였으나, 나는 끝내 한 자나 한 치도 공公에게 바친 바가 없다.
오직 공公의 문집文集을 구하여 내가 손수 교정해서 집에 보관하고, 또 그 대략大略을 논하여 후세의 군자君子를 기다릴 뿐이다.
옛날에 증로공曾魯公이 일찍이 나에게 말씀하기를
“공公이 인주人主의 앞에서 대사大事를 논하게 되면, 타인은 종일토록 반복하여도 다하지 못하는 것을 공公은 반드시 몇 마디 말씀으로 결단하였고,
말씀한 것이 찬란하게 문장을 이루어서 모두 글로 써서 외울 만하였다.
공公의 말씀이 비록 다 쓰이지는 못했으나 경력慶曆 이래로 명신名臣 중에 공公만큼 인주人主의 존경을 받은 분이 없다.”라고 하였다.
공公은 지금 나이가 81세이니, 문을 닫고 사람을 물리치고는 종일토록 무릎 꿇고 앉아서 거의 조물주와 무하유無何有의 세계에서 노닌다.
그리하여 그 말씀도 얻어들을 수 없는데, 하물며 문장에 있어서이겠는가?
공公의 문집文集은 무릇 문文이 몇 권이고 시詩가 몇 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