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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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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4. 한태위韓太尉에게 올린 글
生二十有二年矣
저는 태어난 지 22년이 되었습니다.
自七八歲 知讀書호되 及壯大하야 不能曉習時事하고 獨好觀前世盛衰之迹 與其一時風俗之變하야 自三代以來 頗能論著하니이다
7, 8세 때부터 독서할 줄을 알았으나 장성해서는 세상일을 밝게 익히지 못하고, 다만 전대前代성쇠盛衰의 자취와 한 시대의 풍속의 변화를 살펴보기를 좋아해서 삼대三代 이래로 자못 약간의 을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以爲西漢之衰 其大臣 守尋常而不務大略하고 東漢之末 士大夫多奇節而不循正道
생각하건대 서한西漢(전한前漢)이 쇠퇴할 때에는 대신들이 평상시 늘 하던 일만을 지키고 대체大體를 힘쓰지 않았으며, 동한東漢(후한後漢)의 말기에는 사대부들이 기이한 절개를 훌륭하게 여기고 정도正道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天下無事하니 公卿將相 安其祿位하고 顧其子孫하야 各欲樹私恩하고 買田宅하야 爲不可動之計하야
서한西漢원제元帝성제成帝 때에는 천하가 무사하니, 공경公卿장상將相들이 녹봉과 지위를 편안히 여기고 자기 자손들을 돌아보아서 각각 사사로운 은혜를 심어놓고 전택田宅을 구입하여 동요할 수 없는 생활대책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低回畏避하야 以苟歲月호되 而皆依放儒術六經之言하야 而取其近似者하야 以爲口實하니이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세월을 구차히 보내되 모두 유학과 육경六經의 말에 근거하고 모방하며 이와 비슷한 내용을 취하여 구실로 삼았습니다.
이라하시니之徒 又相與彌縫其闕而緣飾之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류下流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함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한다.”라고 하셨으니, 유흠劉歆곡영谷永의 무리들이 또 서로 부족한 것을 미봉하여 잘 꾸몄습니다.
其衰也 靡然如蛟龍釋其風雲之勢하고 而安於豢畜之樂하야 終以不悟하야 使其肩披股裂하야 登於匹夫之俎하니 豈不悲哉잇가
그러므로 나라가 쇠약할 때에 기운이 약해져서 마치 교룡이 풍운의 형세를 버리고 사람이 길러주는 즐거움을 편안히 여기다가 끝내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그 어깨가 찢기고 다리가 찢어져서 필부의 도마에 오르게 된 것과 같이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其後 懲往昔之弊하야 而欲樹人主之威權이라
그 후 동한東漢환제桓帝영제靈帝와 같은 군주들은 옛날의 병폐를 교훈 삼아 군주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頗用嚴刑하야 以督責臣下하니 忠臣義士不容於朝廷이라
그러므로 자못 엄한 형벌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독책해서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이 조정에 용납되지 못했습니다.
群起於草野하야 相與力爲險怪驚世之行하야 使天下豪傑 奔走於其門하야 得爲之執鞭하고 而其自喜 不啻若卿相之榮하니이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초야에서 떼 지어 일어나 서로 함께 세상을 놀라게 하는 험하고 괴이한 행실을 힘써, 천하의 호걸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달려와 자신을 위해 채찍을 잡게 하고, 스스로 경상卿相의 영화보다도 더 기뻐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於是 天下之士 囂然皆有無用之虛名하야 而不適於實效
이에 천하의 선비들이 분분하게 모두 쓸모없는 빈 명성만 소유하여 실효에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其亡也 如人之病狂하야 不知堂宇宮室之爲安하고 而號呼奔走以自顛仆하니이다
그러므로 망할 적에 사람이 미친 병을 앓는 것과 같아서 당우堂宇궁실宮室이 편안한 것을 알지 못하고, 고함 치고 달려 나가다가 스스로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태공太公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진 이를 등용하고 공로가 있는 사람을 높이자,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후대에 반드시 찬시簒弑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공周公나라를 다스릴 적에 친척을 친애하고 높은 사람을 높이자, 태공太公이 말하기를 “후세가 점점 미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漢之事迹 誠大類此
나라의 사적이 진실로 이와 크게 유사합니다.
豈其當時公卿士大夫之行 與其風俗之剛柔 各有以致之耶잇가
어찌 당시 공경公卿과 사대부의 행실과 풍속의 강유剛柔가 각각 이런 일을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古之君子 剛毅正直而守之以寬하고 忠恕仁厚而發之以義
옛날 군자들은 굳세고 정직하면서도 너그러움으로써 지키고, 충서忠恕하고 인후하면서도 로써 드러내었습니다.
其在朝廷이면 則士大夫皆知洗濯磨淬하야 戮力於王事하야 而不敢爲非常可怪之行하니 此三代王政之所由興也니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조정에 있으면 사대부들이 모두 심신을 깨끗이 닦고 분발할 줄 알아서 국가의 일에 힘을 다하여 감히 비상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삼대三代왕도정치王道政治가 말미암아 일어난 이유입니다.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서 백성들이 이반한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天下之人 幸而有不爲阿附苟容之事者 則務爲倜儻矯異하야 求如東漢之君子하야 惟恐不及하니 可悲也已니이다
천하 사람들 중에 다행히 아첨하여 구차히 용납되고자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힘써 세속의 예법을 무시하고 특이한 행동을 해서 동한東漢의 군자와 같기를 구하여 오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自幼時 聞富公與太尉 皆號爲寬厚長者 然終不可犯以非義러니
제가 어릴 때부터 들으니, “부공富公께서는 태위太尉와 함께 모두 관후한 장자長者로 이름났으나 끝내 가 아닌 것으로는 범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及來京師하시니이다
그런데 경사京師에 오니, 두 분이 동시에 양부兩府에 계셨습니다.
愚不能知其心이나 竊於道塗 望其容貌하니 寬然如有容하야 見惡不怒하고 見善不喜하시니 豈古所謂大臣者歟인저
제가 그 속마음은 알지 못하나 적이 길거리에서 그 용모를 바라보니, 너그러워 널리 포용해서 악을 보고도 성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듯하니, 어찌 옛날의 이른바 대신大臣이란 자가 아니겠습니까?
夫循循者 固不能有所爲 而翹翹者 又非聖人之中道
고분고분 따르는 자는 진실로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고, 높고 높은 자는 또 성인의 중도中道가 아닙니다.
是以 願見太尉하야 得聞一言이면 足矣니이다
이 때문에 태위太尉를 뵙고서 중도中道에 맞는 한마디 말씀을 얻어듣고자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만족합니다.
太尉與大人最厚하시고 而又嘗辱問其姓名하시니
태위太尉께서는 대인大人(가친家親)과 매우 친하시고 또 일찍이 외람되이 저의 성명을 물어주셨습니다.
此尤不可以不見이니 今已後矣니이다
이에 더욱 찾아뵙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 뵈어도 너무 늦었습니다.
不宣하노이다
이만 줄입니다.
역주
역주1 上韓太尉書 : 이 글은 仁宗 嘉祐 2년(1057)에 쓰여졌는데, 당시 蘇軾은 22세로 19세인 아우 蘇轍과 함께 禮部試 進士科에 급제하였다. 韓太尉는 韓琦(1008~1075)를 이르는데, 字가 稚圭이고 號가 贛叟이며 安陽 사람이다. 天聖 5년(1027) 약관의 나이에 進士科에 甲科로 급제하여 右司諫, 樞密院直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康定 元年(1040)에 陝西安撫使로 范仲淹과 함께 西夏를 방어하여 명성을 떨쳤다. 仁宗 嘉祐 4년(1059)부터 英宗 治平 4년(1067)까지 재상으로 있었으며, 范仲淹, 富弼과 함께 慶曆新政을 주도하였다. 이 당시 韓琦는 樞密使로 있었는데 樞密使는 군대의 최고위직으로 漢나라 때의 太尉와 같으므로 韓太尉라고 칭한 것이다.
역주2 元成之間 : 漢나라 元帝와 成帝의 재위기간을 이른다. 元帝는 B.C. 49년에서 B.C. 33년까지 재위하였고, 成帝는 B.C. 33년부터 B.C. 7년까지 재위하였는데, 이때 두 군주는 안일과 향락에 빠져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
역주3 孔子曰……惡訐以爲直 : 이 내용은 《論語》 〈陽貨〉에 보인다.
역주4 劉歆谷永 : 劉歆(B.C. 53~A.D. 23)은 前漢의 古文經學家로 字가 子駿인데, 뒤에 이름을 秀, 字를 潁叔으로 고쳤다. 楚元王 交의 5세손이며 劉向의 아들이다. 젊은 시절부터 《詩經》, 《書經》, 《春秋左氏傳》 등의 經書에 통달하였고 문장이 뛰어나 成帝에게 발탁되어 黃門郞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王莽도 黃門郞의 직책을 맡고 있어 친분을 쌓았다. 王莽이 집정한 후에 京兆尹에 제수되고 紅休侯에 봉해졌으며 뒤에는 國師가 되었으나 地皇 3년(22)에 王莽을 제거하려는 거사에 가담하였다가 일이 누설되자 자살하였다. 谷永(?~B.C. 9)은 成帝 때의 문신으로 字는 子雲이며 長安 사람이다. 經書에 해박하고 특히 天文에 정통하여 元帝 때에 太常丞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글을 올려 천재지변의 현상을 가지고 조정의 득실을 논하였다. 成帝 때에는 당시 집권하고 있던 외척 王鳳과 가깝게 지내어 光祿大夫로 발탁되고 벼슬이 大司農에 이르렀다.
역주5 桓靈之君 : 桓靈은 後漢의 桓帝와 靈帝를 이른다. 桓帝는 後漢의 제11대 皇帝(재위 146~167)인 劉志인데, 河間王 劉開의 孫子로 외척 梁冀에 의해 質帝가 독살된 후에 梁太后에 의해 15세의 나이로 擁立되었다. 梁冀의 횡포가 더욱 심해져 정사를 독단하자 桓帝는 延熹 2년(159)에 환관들의 도움을 얻어 梁冀를 주살하였다. 桓帝는 梁冀를 숙청한 후에 친정하였으나 환관들의 농간에 빠져 정권이 환관들의 수중에 넘어갔다. 환관들에 의한 정치적 폐단이 심해지자, 司隷校尉 李膺과 太傅 陳蕃 등이 太學生들과 함께 연합하여 스스로 淸流라 칭하며 환관들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이에 환관들이 주동하여 延熹 9년(166) 詔令을 내려 淸流의 黨人 2백여 명을 체포하고, 다음해에 黨人에게 禁錮詔令을 내려 이들이 종신토록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니, 이것이 제1차 黨錮의 禍이다. 靈帝(168~189)는 後漢의 제12대 皇帝인 劉宏이다. 桓帝가 후사 없이 죽자 河間孝王의 曾孫으로 즉위하였는데,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당시 외척인 竇武가 정권을 장악하고 陳蕃과 함께 환관들을 모두 죽이려 하다가 도리어 반역죄로 몰려 멸족의 화를 당하였다. 환관들이 다시 득세하여 李膺, 杜密 등을 주륙하고 黨人과 太學生들을 대거 체포하였으며 이들과 관련이 있는 자들을 모두 폐출하거나 禁錮하니, 이것이 제2차 黨錮의 禍이다.
역주6 太公治齊……後世寖微矣 : 姜太公이 齊나라에 봉해진 뒤에 周公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것인지를 물었다. 太公이 “현능한 자를 높이고 功 있는 자를 숭상하겠다.”고 대답하자, 周公이 “후세에 반드시 찬탈하고 시역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太公이 周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자 周公은 “친한 이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높이겠다.”라고 하니, 太公은 “후세에 점차 쇠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周公과 太公의 예상대로 齊나라는 田氏에 의해 나라를 찬탈당했고, 魯나라는 三桓에 의해 군주의 권한이 쇠약해졌다. 周公은 文王의 아들로 이름이 旦이고, 太公은 姓이 姜이고 이름이 尙이다. 《十八史略 卷1》
역주7 曾子曰……民散久矣 : 이 내용은 《論語》 〈子張〉에 보인다.
역주8 二公同時在兩府 : 二公은 韓琦와 富弼을 가리키고, 兩府는 中書省과 樞密院을 이르는데, 中書省은 政務를 관장하고 樞密院은 軍務를 관장하였다. 당시에 富弼은 재상으로 中書省을 맡고, 韓琦는 樞密使로 樞密院을 맡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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