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七八歲로 知讀書호되 及壯大하야 不能曉習時事하고 獨好觀前世盛衰之迹과 與其一時風俗之變하야 自三代以來로 頗能論著하니이다
以爲西漢之衰엔 其大臣이 守尋常而不務大略하고 東漢之末엔 士大夫多奇節而不循正道라
에 天下無事
하니 公卿將相
이 安其祿位
하고 顧其子孫
하야 各欲樹私恩
하고 買田宅
하야 爲不可動之計
하야
低回畏避하야 以苟歲月호되 而皆依放儒術六經之言하야 而取其近似者하야 以爲口實하니이다
故로 其衰也에 靡然如蛟龍釋其風雲之勢하고 而安於豢畜之樂하야 終以不悟하야 使其肩披股裂하야 登於匹夫之俎하니 豈不悲哉잇가
故로 頗用嚴刑하야 以督責臣下하니 忠臣義士不容於朝廷이라
故로 群起於草野하야 相與力爲險怪驚世之行하야 使天下豪傑로 奔走於其門하야 得爲之執鞭하고 而其自喜를 不啻若卿相之榮하니이다
於是에 天下之士 囂然皆有無用之虛名하야 而不適於實效라
故로 其亡也에 如人之病狂하야 不知堂宇宮室之爲安하고 而號呼奔走以自顛仆하니이다
豈其當時公卿士大夫之行과 與其風俗之剛柔 各有以致之耶잇가
古之君子는 剛毅正直而守之以寬하고 忠恕仁厚而發之以義라
故로 其在朝廷이면 則士大夫皆知洗濯磨淬하야 戮力於王事하야 而不敢爲非常可怪之行하니 此三代王政之所由興也니이다
天下之人이 幸而有不爲阿附苟容之事者면 則務爲倜儻矯異하야 求如東漢之君子하야 惟恐不及하니 可悲也已니이다
軾은 自幼時로 聞富公與太尉 皆號爲寬厚長者나 然終不可犯以非義러니
愚不能知其心이나 竊於道塗에 望其容貌하니 寬然如有容하야 見惡不怒하고 見善不喜하시니 豈古所謂大臣者歟인저
夫循循者는 固不能有所爲요 而翹翹者는 又非聖人之中道라
7, 8세 때부터 독서할 줄을 알았으나 장성해서는 세상일을 밝게 익히지 못하고, 다만 전대前代의 성쇠盛衰의 자취와 한 시대의 풍속의 변화를 살펴보기를 좋아해서 삼대三代 이래로 자못 약간의 논論을 저술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서한西漢(전한前漢)이 쇠퇴할 때에는 대신들이 평상시 늘 하던 일만을 지키고 대체大體를 힘쓰지 않았으며, 동한東漢(후한後漢)의 말기에는 사대부들이 기이한 절개를 훌륭하게 여기고 정도正道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서한西漢의 원제元帝와 성제成帝 때에는 천하가 무사하니, 공경公卿과 장상將相들이 녹봉과 지위를 편안히 여기고 자기 자손들을 돌아보아서 각각 사사로운 은혜를 심어놓고 전택田宅을 구입하여 동요할 수 없는 생활대책을 세우고자 했습니다.
이에 고개를 숙이고 두려워하고 피하면서 세월을 구차히 보내되 모두 유학과 육경六經의 말에 근거하고 모방하며 이와 비슷한 내용을 취하여 구실로 삼았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류下流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함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한다.”라고 하셨으니, 유흠劉歆과 곡영谷永의 무리들이 또 서로 부족한 것을 미봉하여 잘 꾸몄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쇠약할 때에 기운이 약해져서 마치 교룡이 풍운의 형세를 버리고 사람이 길러주는 즐거움을 편안히 여기다가 끝내 이것을 깨닫지 못하여 그 어깨가 찢기고 다리가 찢어져서 필부의 도마에 오르게 된 것과 같이 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그 후 동한東漢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와 같은 군주들은 옛날의 병폐를 교훈 삼아 군주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자못 엄한 형벌을 사용하여 신하들을 독책해서 충신忠臣과 의사義士들이 조정에 용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선비들이 초야에서 떼 지어 일어나 서로 함께 세상을 놀라게 하는 험하고 괴이한 행실을 힘써, 천하의 호걸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달려와 자신을 위해 채찍을 잡게 하고, 스스로 경상卿相의 영화보다도 더 기뻐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에 천하의 선비들이 분분하게 모두 쓸모없는 빈 명성만 소유하여 실효에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망할 적에 사람이 미친 병을 앓는 것과 같아서 당우堂宇와 궁실宮室이 편안한 것을 알지 못하고, 고함 치고 달려 나가다가 스스로 엎어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태공太公이 제齊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진 이를 등용하고 공로가 있는 사람을 높이자, 주공周公이 말씀하기를 “후대에 반드시 찬시簒弑하는 신하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공周公이 노魯나라를 다스릴 적에 친척을 친애하고 높은 사람을 높이자, 태공太公이 말하기를 “후세가 점점 미약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한漢나라의 사적이 진실로 이와 크게 유사합니다.
어찌 당시 공경公卿과 사대부의 행실과 풍속의 강유剛柔가 각각 이런 일을 초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군자들은 굳세고 정직하면서도 너그러움으로써 지키고, 충서忠恕하고 인후하면서도 의義로써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조정에 있으면 사대부들이 모두 심신을 깨끗이 닦고 분발할 줄 알아서 국가의 일에 힘을 다하여 감히 비상하고 괴이한 행실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삼대三代의 왕도정치王道政治가 말미암아 일어난 이유입니다.
증자曾子가 말씀하기를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서 백성들이 이반한 지가 오래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천하 사람들 중에 다행히 아첨하여 구차히 용납되고자 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힘써 세속의 예법을 무시하고 특이한 행동을 해서 동한東漢의 군자와 같기를 구하여 오직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니, 참으로 가련합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들으니, “부공富公께서는 태위太尉와 함께 모두 관후한 장자長者로 이름났으나 끝내 의義가 아닌 것으로는 범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사京師에 오니, 두 분이 동시에 양부兩府에 계셨습니다.
제가 그 속마음은 알지 못하나 적이 길거리에서 그 용모를 바라보니, 너그러워 널리 포용해서 악을 보고도 성내지 않고 선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으시는 듯하니, 어찌 옛날의 이른바 대신大臣이란 자가 아니겠습니까?
고분고분 따르는 자는 진실로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고, 높고 높은 자는 또 성인의 중도中道가 아닙니다.
이 때문에 태위太尉를 뵙고서 중도中道에 맞는 한마디 말씀을 얻어듣고자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만족합니다.
태위太尉께서는 대인大人(가친家親)과 매우 친하시고 또 일찍이 외람되이 저의 성명을 물어주셨습니다.
이에 더욱 찾아뵙지 않을 수 없으니, 지금 뵈어도 너무 늦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