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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1)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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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7. 관직館職을 시험한 책문策問을 변명한 첫 번째 차자箚子
以下二箚 蘇子瞻忠義明辯하여 雖九死而不懼하니 亦子瞻供狀이니라
이하의 두 차자箚子소자첨蘇子瞻(蘇軾)이 충의롭고 밝게 분별해서 비록 아홉 번 죽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은 내용이니, 또한 자첨子瞻 자신에 대한 진술서이다.
臣竊聞호니 諫官言 臣近所撰 有涉諷議先朝之語라하니이다
이 엎드려 들으니, 간관諫官들은 이 근래 지은 ‘관직館職에 임용할 사람을 시험한 책문策問’에 “선조先朝를 풍자하는 내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臣退伏思念호니 其略曰
이 물러나와 엎드려 생각해보니, 그 대략에 이르기를
今朝廷 欲師仁祖之忠厚인댄 而患百官有司不擧其職하야 或至於婾하고
“지금 조정朝廷에서 인조仁祖(仁宗)의 충후忠厚함을 따르고자 할진댄 백관百官유사有司들이 제대로 직책을 거행하지 않아서 혹 나태함에 이르게 될까 염려되고,
欲法神考之勵精인댄 而恐監司守令不識其意하야 流入於刻이라하니
신고神考(神宗)의 정신을 가다듬어 전력을 다해 다스리신 것을 본받고자 할진댄 감사監司수령守令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각박함에 흘러 들어갈까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臣之所謂婾與刻者 專指今之百官有司及監司守令 不能奉行하야 恐致此病이니 於二帝 何與焉이리잇고
이 말한 나태함과 각박함은, 오직 오늘날의 백관百官유사有司감사監司수령守令들이 이것을 제대로 받들어 시행하지 못해서 이 병통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리킨 것이니, 두 분 황제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至於하야는 皆是爲文引證之常이니 亦無比擬二帝之意니이다
앞에서는 나라의 주공周公태공太公을 논하고 뒤에서는 나라의 문제文帝선제宣帝를 논함에 있어서는 이것은 모두 글을 지을 적에 인증引證하는 상례常例이니, 또한 두 분 황제에게 비유하려는 뜻이 있지 않았습니다.
況此策問第一第二首 之詞 末篇 乃臣所撰이어늘 三首 皆臣親書進入하야 蒙御筆點하야 用第三首하니이다
더구나 이 책문策問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은 등온백鄧溫伯이 지은 것이고, 마지막 편은 이 지은 것인데, 세 를 모두 이 직접 써서 올려 어필御筆의 낙점을 받아 세 번째 글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臣之愚意 豈逃聖鑒이리오
의 어리석은 뜻이 어찌 성상聖上의 살피심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若有毫髮諷議先朝 則臣死有餘罪리이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선조先朝를 풍자하는 뜻이 있다면 은 죽어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伏願少回天日之照하사 使臣孤忠으로 不爲하소서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의 태양과 같으신 성상聖上의 살피심을 다소 돌리시어, 의 외로운 충성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녹여지는 바가 되지 않게 하소서.
臣無任伏地待罪戰恐之至로소이다
은 땅에 엎드려 죄가 내리기를 기다리며 지극히 두려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取進止하소서
재량裁量하소서.
역주
역주1 辯試館職策問箚子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祐元年十二月十八日 翰林學士 朝奉郞 知制誥 兼侍讀 蘇軾札子奏’라는 28字가 있다. 이로써 이 글이 元祐 元年(1086)에 쓰여졌으며, 이때 蘇軾이 翰林學士 知制誥 兼侍讀으로 在任 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역주2 試館職人策問 : 館職에 임용할 사람에게 시험 보이는 策問을 이른다. 元祐 元年(1086) 12월 翰林學士 知制誥로 있던 蘇軾은 이 策問을 지어 올려 畢仲游, 黃庭堅, 張耒, 晁補之 등의 名士들을 선발하여 보임하였는데, 左司諫으로 있던 朱光庭이 策問 가운데 뒤에 나오는 부분을 트집 잡아 不忠한 죄로 蘇軾을 탄핵하였다. 宋나라는 進士科에 급제한 다음 다시 策問試에 뽑혀야만 館職에 보임될 수 있었는데, 史館과 昭文館, 集賢殿을 三館이라 하고 이곳에 소속된 벼슬을 館職이라 하였다.
역주3 前論周公太公하고 後論文帝宣帝 : 策問을 살펴보면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에서는 논하기를 “秦나라는 너무 강함에 잘못되었고 周나라는 너무 약함에 잘못되었다. 옛날 周公이 魯나라를 다스릴 적에 친한 사람을 친애하고 높은 사람을 높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점점 쇠약해지는 근심이 있었다. 太公이 齊나라를 다스릴 적에 어진 사람을 중용하고 功이 있는 사람을 높였는데, 말류에는 또한 다투고 찬탈하는 화가 있었다.[秦失其强 周失其弱 昔周公治魯 親親而尊尊 至其後也 有寖微之憂 太公治齊 擧賢而上功 而其末流 亦有爭奪之禍]”라고 하였고, 뒷부분에서는 논하기를 “옛날 漢나라 文帝는 너그럽고 인자한 長者로서 조정에서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까지 하였으나 신하들이 태만하여 직책을 거행하지 않는 병폐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宣帝는 名과 實을 따져, 法條文으로 다스리는 선비들이 모두 그 재능을 다하였으나 신하들이 지나치게 독촉하고 책망하는 잘못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昔漢文寬仁長者 至於朝廷之上 恥言人過 而不聞其有怠廢不擧之病 宣帝綜核名實 至於文理之士 咸精其能 而不聞其有督責過甚之失]”라고 하였다.
역주4 鄧溫伯 :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역주5 衆口所鑠 : 사람들의 비방하는 말을 변명할 길이 없음을 이르는바, 《國語》 〈周語〉에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비방하는 말은 단단한 쇠도 녹여버린다.[衆口鑠金]”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1)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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