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이 作堂於私第之
지상池上하고 名之曰 醉
백낙천白이라하야 하니 意若有羨於
백낙천樂天而不及者
라
백낙천天下之士 聞而疑之
하야 以爲
주공公旣已無愧於
矣
어늘 而猶有羨於
백낙천樂天은 何哉
오하니라
天之生是人也에 將使任天下之重이면 則寒者求衣하고 饑者求食하야 凡不獲者求得하나니 苟有以與之면 將不勝其求라
是以로 終身處乎憂患之域하고 而行乎利害之塗하나니 豈其所欲哉리오
浩然將歸老於家로되 而백낙천天下共挽而留之하야 莫釋也하니 當是時하야 其有羨於백낙천樂天이 無足怪者라
然이나 以백낙천樂天之平生으로 而求之於公하야 較其所得之厚薄淺深이 孰有孰無하면 則後世之論을 有不可欺者矣리라
文致太平
하고 武定亂略
하야 謀安
종묘宗廟로되 而不自以爲功
하며 急賢才
하고 輕爵祿
이로되 而士不知其恩
하며 殺伐果敢
하야 而
安之
하고 이 想聞其風采
하야 而
백낙천天下以其身爲安危
는 此
위공公之所有而
백낙천樂天之所無也
요
乞身於强健之時하야 退居十有五年에 日與其朋友로 賦詩飮酒하야 盡山水園池之백낙천樂하며 府有餘帛하고 廩有餘粟하고 而家有聲伎之奉은 此백낙천樂天之所有而公之所無也며
忠言嘉謀 效於當時하고 而文采表於後世하며 死生窮達에 不易其操하고 而道德高於古人은 此公與백낙천樂天之所同也니라
公旣不以其所有自多하고 亦不以其所無自少하고 將推其同者而自託焉이라
方其寓形於一醉也에 齊得喪하고 忘禍福하며 混貴賤하고 等賢愚하야 同乎萬物하야 而與造物者遊하니 非獨自比於백낙천樂天而已라
是以
로 하야 而世誦其美不厭
하니 以
공자孔子之聖
으로 而
하고 하고 하시니라
하고 하고 하고 양웅揚雄은 自以爲
맹가孟軻하고 이라
昔에 公嘗告其子충언忠彦하야 將求文於軾以爲記로되 而未果러니 旣葬에 충언忠彦以告하니 軾以爲 義不得辭也하야 乃泣而書之하노라
위공魏公의 공훈과 명성이 본래 백낙천白樂天(백거이白居易)보다 더하였다.
그러므로 글에서는 위공魏公을 칭찬하지 않았으나, 문장 속 생각은 특별히 깊고 원대한 것이다.
고 위국故 魏國 충헌 한공忠獻 韓公이 사제私第의 못가에 당堂을 짓고 이름을 ‘취백당醉白堂’이라 하고는, 백낙천白樂天의 〈지상池上〉이라는 시詩를 취해서 〈취백당醉白堂〉이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뜻이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하며 백낙천白樂天에게 미치지 못함이 있는 듯하였다.
천하의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의심하여 이르기를 “공公은 이미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데도,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公이 어찌 다만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할 뿐이겠는가?
장차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분이다.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장차 그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중임重任을 맡기려 하면, 추운 자는 그에게 옷을 요구하고 굶주린 자는 그에게 밥을 요구하여 얻지 못한 모든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니, 만일 이들에게 이것을 주면 장차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종신토록 걱정하는 자리에 처하고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이 공公이 원하는 바이겠는가?
저 충헌공忠獻公은 이미 세 황제皇帝를 보필하여 천하를 편안히 하였다.
호연浩然히 장차 돌아가 집에서 늙고자 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함께 만류해서 놓아주지 않으니, 이때를 당하여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백낙천白樂天의 평생을 가지고 공公에게서 찾아보아, 그 얻은 바의 후박厚薄과 천심淺深이 누구에게 있고 누구에게 없는가를 비교해보면 후세의 의논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문교文敎로 태평성세를 이룩하고 무략武略으로 혼란을 평정해서, 종묘宗廟(국가國家)를 위해 계모計謀해서 편안하게 하였으나 스스로 공功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어진 사람과 재주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을 급히 여기고 작록爵祿을 가벼이 여겼으나 선비들이 그 은혜를 알지 못하며, 적을 죽이고 정벌함에 과감하여 육군六軍이 편안히 여기고, 사이四夷와 팔만八蠻이 그 풍채風采를 상상하여 듣고 굴복해서, 천하 사람들이 위공魏公의 몸을 가지고 안위安危를 삼았으니, 이는 공公에게는 있는 것이나 백낙천白樂天에게는 없는 것이다.
강건할 때에 치사致仕하여 물러난 지 15년 동안에 날마다 친구들과 함께 시詩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산수山水와 동산과 못의 즐거움을 만끽하였으며, 창고에는 남은 비단이 있고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고 집에는 소리하는 기생의 받듦이 있었으니, 이는 백낙천白樂天에게는 있는 것이나 공公에게는 없는 것이다.
충성스러운 말씀과 훌륭한 계책이 당시에 효험을 드러내고 문채文采가 후세에 표출되며, 죽고 살고 곤궁하고 영달함에 지조를 바꾸지 않고 도덕道德이 고인古人보다 높았으니, 이는 공公과 백낙천白樂天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공公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또한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지 않고, 장차 동일하게 여기는 것을 미루어 스스로 의탁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몸을 한 번 취醉함에 맡길 적에는 얻고 잃음을 똑같이 여기고 화禍와 복福을 잊으며, 귀貴와 천賤을 가리지 않고 어질고 어리석음을 동일하게 여겨서 만물에 동화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놀았으니, 이는 비단 스스로 백낙천白樂天에게 견줄 뿐만이 아니었다.
옛날 군자君子들은 자기 몸을 단속하는 것에는 철저하고 명예를 취하는 것에는 간략하였다.
이 때문에 〈군자는〉 실實이 명名보다 더하여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니,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聖人으로도 자신을 노팽老彭에게 견주시고 자신을 좌구명左丘明과 똑같이 여기시고 자신을 안연顔淵만 못하다고 여기셨다.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실實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모두 건방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무중臧武仲은 자신을 성인聖人이라 여겼고, 백규白圭는 자신을 우禹임금이라 여겼고, 사마장경司馬長卿은 자기 이름을 상여相如라 하였고, 양웅揚雄은 자신을 맹가孟軻라 하였고, 최호崔浩는 자신을 자방子房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끝내 그들에게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충헌공忠獻公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분인 것이다.
예전에 공公은 일찍이 아들 충언忠彦에게 말씀해서 장차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이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으나 미처 실행하지 못했는데, 공公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친 다음 충언忠彦이 이 일을 나에게 말하니, 나는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다고 여겨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글을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