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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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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3. 취백당醉白堂에 대한 기문記文
魏公勳名 本勝樂天이라
위공魏公의 공훈과 명성이 본래 백낙천白樂天(백거이白居易)보다 더하였다.
文不譽而思特遠하니라
그러므로 글에서는 위공魏公을 칭찬하지 않았으나, 문장 속 생각은 특별히 깊고 원대한 것이다.
作堂於私第之池上하고 名之曰 醉白이라하야 하니 意若有羨於樂天而不及者
고 위국故 魏國 충헌 한공忠獻 韓公사제私第의 못가에 을 짓고 이름을 ‘취백당醉白堂’이라 하고는, 백낙천白樂天의 〈지상池上〉이라는 를 취해서 〈취백당醉白堂〉이라는 노래를 지었는데, 뜻이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하며 백낙천白樂天에게 미치지 못함이 있는 듯하였다.
天下之士 聞而疑之하야 以爲公旣已無愧於어늘 而猶有羨於樂天 何哉오하니라
천하의 선비들이 이 말을 듣고 의심하여 이르기를 “은 이미 이윤伊尹주공周公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는데도,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하는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聞而笑曰
나는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公豈獨有羨於樂天而已乎
이 어찌 다만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할 뿐이겠는가?
方且願爲尋常無聞之人이로되 而不可得者리라
장차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 되려고 해도 될 수 없는 분이다.
天之生是人也 將使任天下之重이면 則寒者求衣하고 饑者求食하야 凡不獲者求得하나니 苟有以與之 將不勝其求
하늘이 사람을 낼 적에 장차 그로 하여금 천하天下중임重任을 맡기려 하면, 추운 자는 그에게 옷을 요구하고 굶주린 자는 그에게 밥을 요구하여 얻지 못한 모든 것을 얻으려 할 것이니, 만일 이들에게 이것을 주면 장차 그 요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是以 終身處乎憂患之域하고 而行乎利害之塗하나니 豈其所欲哉리오
이 때문에 종신토록 걱정하는 자리에 처하고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니, 어찌 이것이 이 원하는 바이겠는가?
夫忠獻公 旣已하야 安天下矣
충헌공忠獻公은 이미 세 황제皇帝를 보필하여 천하를 편안히 하였다.
浩然將歸老於家로되 而天下共挽而留之하야 莫釋也하니 當是時하야 其有羨於樂天 無足怪者
호연浩然히 장차 돌아가 집에서 늙고자 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이 함께 만류해서 놓아주지 않으니, 이때를 당하여 백낙천白樂天을 부러워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나 以樂天之平生으로 而求之於公하야 較其所得之厚薄淺深 孰有孰無하면 則後世之論 有不可欺者矣리라
그러나 백낙천白樂天의 평생을 가지고 에게서 찾아보아, 그 얻은 바의 후박厚薄천심淺深이 누구에게 있고 누구에게 없는가를 비교해보면 후세의 의논을 속일 수 없을 것이다.
文致太平하고 武定亂略하야 謀安宗廟로되 而不自以爲功하며 急賢才하고 輕爵祿이로되 而士不知其恩하며 殺伐果敢하야安之하고 想聞其風采하야 而天下以其身爲安危 此公之所有而樂天之所無也
문교文敎로 태평성세를 이룩하고 무략武略으로 혼란을 평정해서, 종묘宗廟(국가國家)를 위해 계모計謀해서 편안하게 하였으나 스스로 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어진 사람과 재주 있는 사람을 얻는 것을 급히 여기고 작록爵祿을 가벼이 여겼으나 선비들이 그 은혜를 알지 못하며, 적을 죽이고 정벌함에 과감하여 육군六軍이 편안히 여기고, 사이四夷팔만八蠻이 그 풍채風采를 상상하여 듣고 굴복해서, 천하 사람들이 위공魏公의 몸을 가지고 안위安危를 삼았으니, 이는 에게는 있는 것이나 백낙천白樂天에게는 없는 것이다.
乞身於强健之時하야 退居十有五年 日與其朋友 賦詩飮酒하야 盡山水園池之樂하며 府有餘帛하고 廩有餘粟하고 而家有聲伎之奉 此樂天之所有而公之所無也
강건할 때에 치사致仕하여 물러난 지 15년 동안에 날마다 친구들과 함께 를 짓고 술을 마시면서 산수山水와 동산과 못의 즐거움을 만끽하였으며, 창고에는 남은 비단이 있고 곳간에는 남은 곡식이 있고 집에는 소리하는 기생의 받듦이 있었으니, 이는 백낙천白樂天에게는 있는 것이나 에게는 없는 것이다.
忠言嘉謀 效於當時하고 而文采表於後世하며 死生窮達 不易其操하고 而道德高於古人 此公與樂天之所同也니라
충성스러운 말씀과 훌륭한 계책이 당시에 효험을 드러내고 문채文采가 후세에 표출되며, 죽고 살고 곤궁하고 영달함에 지조를 바꾸지 않고 도덕道德고인古人보다 높았으니, 이는 백낙천白樂天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公旣不以其所有自多하고 亦不以其所無自少하고 將推其同者而自託焉이라
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랑하지 않고, 또한 자신에게 없는 것 때문에 스스로 부족하게 여기지 않고, 장차 동일하게 여기는 것을 미루어 스스로 의탁하려 하였다.
方其寓形於一醉也 齊得喪하고 忘禍福하며 混貴賤하고 等賢愚하야 同乎萬物하야 而與造物者遊하니 非獨自比於樂天而已
그리하여 몸을 한 번 함에 맡길 적에는 얻고 잃음을 똑같이 여기고 을 잊으며, 을 가리지 않고 어질고 어리석음을 동일하게 여겨서 만물에 동화하여 조물주와 더불어 놀았으니, 이는 비단 스스로 백낙천白樂天에게 견줄 뿐만이 아니었다.
古之君子 其處己也厚하고 其取名也廉이라
옛날 군자君子들은 자기 몸을 단속하는 것에는 철저하고 명예를 취하는 것에는 간략하였다.
是以 하야 而世誦其美不厭하니 以孔子之聖으로하고 하고 하시니라
이 때문에 〈군자는〉 보다 더하여 세상에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기를 싫어하지 않는 것이니, 공자孔子와 같은 성인聖人으로도 자신을 노팽老彭에게 견주시고 자신을 좌구명左丘明과 똑같이 여기시고 자신을 안연顔淵만 못하다고 여기셨다.
後之君子 實則不至하고 而皆有侈心焉하야
후세의 군자君子들은 이 지극하지 못하면서 모두 건방진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장무중臧武仲은 자신을 성인聖人이라 여겼고, 백규白圭는 자신을 임금이라 여겼고, 사마장경司馬長卿은 자기 이름을 상여相如라 하였고, 양웅揚雄은 자신을 맹가孟軻라 하였고, 최호崔浩는 자신을 자방子房이라 하였다.
이나 世終莫之許也
그러나 세상에서는 끝내 그들에게 이것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由此觀之하면 忠獻公之賢於人也 遠矣니라
이것을 가지고 살펴보면 충헌공忠獻公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훌륭한 분인 것이다.
公嘗告其子忠彦하야 將求文於軾以爲記로되 而未果러니 旣葬 忠彦以告하니 軾以爲 義不得辭也하야 乃泣而書之하노라
예전에 은 일찍이 아들 충언忠彦에게 말씀해서 장차 나에게 글을 부탁하여 이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으나 미처 실행하지 못했는데, 이 돌아가시고 장례를 마친 다음 충언忠彦이 이 일을 나에게 말하니, 나는 의리상 사양할 수가 없다고 여겨져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 글을 쓰노라.
역주
역주1 醉白堂記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의하면, 이 글은 東坡가 熙寧 9년(1076) 11월 1일에 韓魏公(韓琦)의 아들 忠彦을 위하여 지었다.
역주2 魏國忠獻韓公 : 韓琦(1008~1075)를 가리킨 것으로 魏國은 그의 封號이고 忠獻은 그의 諡號인데, 字가 稚圭이고 號는 贛叟이며 安陽 사람이다. 天聖 5년(1027) 약관의 나이에 진사가 되어 右司諫, 樞密院直學士 등을 역임하였고, 仁宗 嘉祐 4년(1059)부터 英宗 治平 4년(1067)까지 재상으로 있었는데, 名相으로 알려졌다.
역주3 取樂天池上之詩 以爲醉白堂之歌 : 白樂天의 〈池上〉 詩는 그의 《長廣集》에 “못 위에 떠 있는 작은 배, 배 안에 胡牀이 있네. 胡牀 앞에 새 술상 차려놓고 홀로 따라 홀로 술 마시네.……언덕이 굽어 배가 느리게 가니 한 구비마다 한 잔씩 마시네. 모를세라 몇 구비에 취했는가. 취하여 無何鄕에 들었네.[池上有小舟 舟中有胡牀 牀前有新酒 獨酌還獨嘗……岸曲舟行遲 一曲進一觴 未知幾曲醉 醉入無何鄕]”라고 보인다.
韓琦의 〈醉白堂〉 詩는 그의 《安養集》에 “어리석은 늙은이 못가에 새집 짓고 白樂天의 〈池上〉 詩 떠올리누나. 白樂天은 먼저 용감히 물러날 줄 알아서 늠름하게 깨끗한 풍모 만대에 전하였네. 古人 중에 본받기 어려운 분이니, 어리석은 자신 돌아보건대 어찌 견줄 수 있을까? 술기운이 도도하여 자리 위에 잠드니, 醉鄕이 어찌 호탕하기만 할까? 인생은 어디 가나 自適함이 귀한데, 이 어찌 白樂天과 다르랴.[贛老新成池上堂 因憶樂天池上篇 樂天先識勇退早 凜凜萬世淸風傳 古人中求尙難擬 自顧愚者孰可肩……酒酣陶陶睡席上 醉鄕何有但浩然 人生所適貴自適 斯適豈異白樂天]”라고 보인다.
樂天은 白居易의 字이다. 白居易는 唐 憲宗 때의 명신으로 문장과 풍류가 모두 뛰어났으며, 말년에 洛陽에 은거하면서 香山社를 결성하여 詩와 술을 즐기고 香山居士라고 自號하였다.
역주4 伊周 : 伊尹과 周公의 병칭인데, 모두 명재상이다.
역주5 相三帝 : 韓琦는 仁宗 嘉祐 연간에 재상이 된 이래 10년 동안 仁宗, 英宗, 神宗 세 황제를 보필하였다.
역주6 六軍 : 1軍은 1만 2,500명으로, 6軍은 天子國의 군대를 총괄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周나라 때에 天子는 6軍을 두었고 제후들은 나라의 크기에 따라 1軍에서 3軍까지 둘 수 있었으므로, 후대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역주7 四夷八蠻 : 四夷는 사방의 오랑캐란 말로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며, 八蠻은 고대 중국의 남쪽에 있던 여덟 종족의 이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爾雅》의 李巡의 注에 “八蠻은 天竺, 咳首, 僬僥, 跛踵, 穿胸, 儋耳, 狗軹, 旁脊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중국 주변의 이민족 모두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역주8 實浮於名 : 實은 실제의 德行이나 功業이고, 名은 名譽 또는 名聲이며, 浮는 過의 뜻으로 더함을 이른다.
역주9 自比於老彭 : 老彭은 商나라의 어진 大夫로 《大戴禮》에 보인다. 이 내용은 《論語》 〈述而〉에 孔子께서 “傳述하기만 하고 創作하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함을 내가 속으로 우리 老彭에게 견주노라.[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라고 말씀하신 것이 보인다.
역주10 自同於丘明 : 丘明은 左丘明으로, 《春秋左氏傳》을 지은 左丘明이 있으나 同名異人으로 보인다. 이 내용은 《論語》 〈公冶長〉에 孔子께서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고 공손을 지나치게 함을 옛날 左丘明이 부끄러워 하였는데, 나 또한 이것을 부끄러워하노라. 원망을 감추고 그 사람과 친한 체하며 사귀는 것을 左丘明이 부끄러워하였는데, 나 또한 이것을 부끄러워하노라.[巧言令色足恭 左丘明恥之 丘亦恥之 匿怨而友其人 左丘明恥之 丘亦恥之]”라고 말씀하신 것이 보인다.
역주11 自以爲不如顔淵 : 顔淵(B.C. 521~B.C. 490)은 이름이 回이고 字가 子淵이며 魯나라 사람으로 孔子보다 30세 어린데, 德行이 뛰어났다. 安貧樂道하여 孔子께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꼽았으며, 후대 사람들은 ‘復聖’으로 칭하였다.
본문의 내용은 東坡가 《論語》 〈公冶長〉의 ‘子謂子貢曰 女與回也 孰愈 對曰 賜也何敢望回 回也聞一以知十 賜也聞一以知二 子曰 弗如也 吾與女弗如也’라는 말에 대하여, “孔子께서 子貢에게 ‘너는 顔回와 더불어 누가 나으냐?’라고 물으시자, 子貢이 ‘제가 어찌 감히 顔回를 바라겠습니까. 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고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孔子께서 ‘네가 顔回만 못하다. 나와 네가 모두 顔回만 못하다.’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해석하여,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朱子의 《論語集註》에 “與는 허여함이다.”라고 注하여, ‘弗如也 吾與女弗如也’를 ‘네가 顔回만 못하다. 나는 네가 그만 못함을 허여(인정)한다.’라고 해석하여, 견해를 달리하였다.
역주12 臧武仲自以爲聖 : 臧武仲은 춘추시대 魯나라의 대부로 襄公 때 司寇 벼슬을 하였으며, 이름은 孫紇이고 武仲은 그의 시호이다.
당대에 지혜가 가장 뛰어나, 《論語》 〈憲問〉에 “子路가 成人(완성된 사람)을 묻자, 孔子께서 ‘만일 臧武仲의 지혜와 公綽의 탐욕하지 않음과 卞莊子의 용맹과 冉求의 才藝에 禮樂으로 문채를 낸다면, 이 또한 成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子路問成人 子曰 若臧武仲之知 公綽之不欲 卞莊子之勇 冉求之藝 文之以禮樂 亦可以爲成人矣]”라고 칭찬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德行은 有餘하지 않아, 《論語》 〈憲問〉에 孔子께서 “臧武仲이 防邑을 가지고 魯나라에게 후계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였으니, 비록 임금에게 강요하지 않았다고 말하나 나는 믿지 않노라.[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라고 비판한 내용이 보인다.
臧武仲은 襄公 23년에 孟孫氏의 무고로 季孫氏의 공격을 받고 邾나라로 망명하였다.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2년에 “臧武仲이 晉나라에 使臣갈 적에 비를 만나 비를 피하기 위해 御叔의 집에 들어가니, 이때 御叔은 자기의 封邑에 있으면서 술을 마시려다가 臧武仲이 오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聖人이 무슨 소용인가? 나는 술을 마시려 하는데 저 사람은 빗속에 길을 가니, 어찌 聖人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臧武仲如晉 雨 過御叔 御叔在其邑 將飮酒 曰 焉用聖人 我將飮酒而已 雨行 何以聖爲]”라고 보이는데, 杜預는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臧武仲이 지혜가 많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聖人이라 하였다.[武仲多知 人謂之聖]”라고 注하였다.
臧武仲이 스스로를 聖人이라 여긴 것은 분명한 典據가 있지 않으나, 아마도 東坡가 臧武仲의 사람됨으로 보아 世人들의 평가를 그가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여겨 이렇게 말한 듯하다.
역주13 白圭自以爲禹 : 白圭는 이름이 丹으로 孟子와 같은 전국시대 사람이다. 治水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스스로 자신이 禹임금보다 낫다고 여겼다.
《孟子》 〈告子 下〉에 “白圭가 ‘제(丹)가 물을 다스림이 禹王보다 낫습니다.’라고 하자, 孟子께서 ‘그대는 지나치다. 禹王께서 물을 다스림은 물의 길을 따르신 것이다. 이 때문에 禹王은 四海를 壑(물을 받는 곳)으로 삼으셨는데, 지금 그대는 이웃나라를 壑으로 삼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白圭曰 丹之治水也 愈於禹 孟子曰 子過矣 禹之治水 水之道也 是故禹以四海爲壑 今吾子以隣國爲壑]”라고 보인다.
역주14 司馬長卿自以爲相如 : 司馬長卿은 前漢 武帝 때의 문장가인 司馬相如(B.C. 179~B.C. 117)로 長卿은 그의 字이며 成都 사람이다. 辭賦의 大家로 〈子虛賦〉와 〈上林賦〉 등을 지었다.
이 내용은 《史記》 〈司馬相如列傳〉에 “그의 아버지가 犬子라 이름 지었는데, 相如가 배움을 마친 뒤에 藺相如의 사람됨을 사모하여 이름을 相如로 고쳤다.[其親名之曰犬子 相如旣學 慕藺相如之爲人也 更名相如]”라고 보인다.
藺相如는 전국시대 趙나라의 名相이다. 藺相如가 아직 미천하여 환관의 舍人이었던 시절, 趙 惠文王이 奇寶인 和氏의 璧玉을 얻자, 이를 탐낸 秦 昭王이 15개의 城과 바꾸는 조건으로 璧을 바치게 하였다. 이때 사신으로 갔던 藺相如는 昭王이 城을 주려는 뜻이 없음을 간파하고는 목숨을 걸고 和氏의 璧玉을 지켜내어 이 功으로 上大夫가 되었다.
뒤에 趙 惠文王이 澠池에서 秦 昭王과 회동하였는데, 昭王의 강요로 惠文王이 비파를 타자, 藺相如가 昭王에게 惠文王에 대한 예우로 장구[缶]를 칠 것을 청하였다. 昭王이 거절하자, 藺相如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신의 피로 昭王에게 뿌리겠다고 협박하니, 昭王이 어쩔 수 없이 장구를 쳐서 惠文王의 체면을 지킬 수 있었다. 藺相如는 이 功으로 上卿이 되어 廉頗와 함께 趙나라의 기둥이 되었다. 《史記 廉頗藺相如列傳》
역주15 崔浩自以爲子房 : 崔浩(381~450)는 字가 伯淵으로 淸河郡 武城 사람이다. 남북조시대 北魏에서 벼슬하여 道武, 明元, 太武帝의 三朝에 걸쳐 중용되고 벼슬이 司徒에 이르렀다. 智謀가 뛰어나 제반 軍國大事에 참여하여 北魏의 국세를 크게 떨치게 하였으므로, 후세의 사가들이 남북조시대에 가장 뛰어난 전략가로 꼽으며, 학문에도 뛰어나 《國書》 30권을 지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子房에 비견하곤 하였다.
子房은 張良으로, 子房은 그의 字이고 시호는 文成이다. 秦나라 말기에 뛰어난 전략으로 漢 高祖(劉邦)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蕭何, 韓信과 함께 開國 三傑로 불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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