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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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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자첨子瞻本色능허대기凌虛臺記 竝本之장생莊生하니라
凡物 皆有可觀하니
苟有可觀이면 皆有可樂하니 非必怪奇偉麗者也
餔糟啜漓라도 皆可以醉 果蔬草木 皆可以飽 推此類也 吾安往而不樂이리오
夫所謂求福而辭禍者 以福可喜而禍可悲也
人之所欲 無窮이요 而物之可以足吾欲者 有盡이라
美惡之辨 戰乎中하고 而去取之擇 交乎前이면 則可樂者常少하고 而可悲者常多하니 是謂求禍而辭福이라
夫求禍而辭福 豈人之情也哉리오
物有以蓋之矣
物非有大小 自其內而觀之 未有不高且大者也
彼挾其高大以臨我 則我常眩亂反覆하야 如隙中之觀鬪하니 又烏知勝負之所在리오
是以 美惡橫生하야 而憂樂出焉하니 可不大哀乎
하야 釋舟楫之安하고 而服車馬之勞하며 去雕牆之美하고 而蔽采(棌)椽之居하며 背湖山之觀하고 而行桑麻之野
始至之日 歲比不登하야 盜賊滿野하고 獄訟充斥하며 而齋廚索然하야 日食杞菊하니 人固疑余之不樂也
處之朞年 而貌加豐하고 髮之白者 日以反黑하니 余旣樂其風俗之淳하고 而其吏民 亦安余之拙也
於是 治其園圃하고 潔其庭宇하며之木하야 以修補破敗하야 爲苟完之計하고 而園之北 因城以爲臺者 舊矣 稍葺而新之하고
時相與登覽하야 放意肆志焉호라
南望하면 出沒隱見하야 若近若遠하니 庶幾有隱君子乎인저
臺高而安하고 深而明하며 夏涼而冬溫이라
雨雪之朝 風月之夕 余未嘗不在하고 客未嘗不從이라
擷園蔬하고 取池魚하며 釀秫酒하고瀹脫粟하야 而食之하고 曰 樂哉 游乎
方是時 이라하야 以見余之無所往而不樂者 蓋遊於物之外也하니라
당형천唐荊川
前發超然之意하고 後段敍事하니 解意 兼敍事格하니라


07. 초연대超然臺에 대한 기문記文
자첨子瞻의 본색은 〈능허대기凌虛臺記〉와 함께 모두 장생莊生(장주莊周)에게서 근본하였다.
모든 물건이 다 볼 만한 것이 있다.
진실로 볼 만한 것이 있으면 모두 다 즐거워할 만한 것이 있는 것이니, 반드시 괴이하고 장엄하고 화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지게미를 마시고 탁주를 마셔도 취할 수 있고, 과실과 채소와 풀과 나무를 먹어도 배부를 수 있으니, 이것을 미루어 유추해본다면 내 어디 간들 즐겁지 않겠는가?
이른바 을 구하고 를 사양한다는 것은 은 기쁘고 는 슬프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는 무궁무진하고, 물건이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에 아름답게 여기고 싫어하는 분별이 마음속에서 싸우고, 버리고 취하는 선택이 목전에서 사귀게 되면, 즐거워할 만한 것이 항상 적고 슬퍼할 만한 것이 항상 많으니, 이것을 일러 ‘를 구하고 을 사양한다.’고 하는 것이다.
를 구하고 을 사양하는 것이 어찌 인지상정人之常情이겠는가?
이는 물건에 가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저들은 물건의 안에서만 노닐고 물건의 밖에서는 노닐지 못한다.
물건에게 크고 작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 내면에서 관찰하면 높고 또 크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저들이 높고 큰 물건을 가지고서 나에게 임하면, 나는 항상 어지럽고 혼란스러워서 마치 좁은 틈 사이로 싸움을 구경하는 것과 같으니, 또 어찌 승부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겠는가?
이 때문에 아름답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멋대로 생겨서 근심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니, 크게 슬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전당錢塘으로부터 교서膠西의 태수로 옮겨와서 배와 노의 편안함을 버리고 수레와 말의 수고로움을 따르며, 조각한 담의 아름다움을 버리고 떡갈나무 서까래로 만든 오두막에 거처하여 몸만 가리며, 아름다운 호수와 의 구경거리를 등지고 뽕나무와 삼이 자라는 들로 왔다.
처음 부임하던 때에 이 지방은 해마다 연이어 흉년이 들어서, 도적이 들에 가득하고 옥송獄訟이 매우 많았으며 주방이 궁핍하여 날마다 구기자와 국화만을 먹고 있으니, 사람들은 진실로 내가 즐겁지 못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지 1년에 얼굴에 살이 오르고 흰 머리털이 다시 검어지니, 나는 이 지방의 순박한 풍속을 즐거워하고, 관리와 백성들도 나의 졸렬함을 편안히 여겨서였다.
이에 원포園圃(채전)를 만들고 동헌의 뜰과 집을 깨끗이 청소하였으며, 안구安丘고밀高密의 나무를 베어다가 무너지고 부서진 것을 보수하여 그런대로 완전하게 하는 계책을 하였고, 또 원포園圃의 북쪽에 을 따라 축조한 오래된 를 보수하여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서 때때로 사람들과 함께 이 에 올라가서 마음을 펴고 뜻을 풀곤 하였다.
남쪽으로 마이산馬耳山상산常山을 바라보면, 의 모습이 나왔다 없어졌다 숨었다 나타났다 해서 가까운 듯하다가 다시 먼 듯하니, 어쩌면 여기에 은군자隱君子가 있는가 보다.
그 동쪽은 노산盧山이니 나라 사람 노오盧敖가 따라 은둔한 곳이요, 서쪽으로 목릉穆陵을 바라보니 우뚝하여 성곽과 같은데 스승 상보尙父제 환공齊 桓公유열遺烈이 아직도 남아 있으며, 북쪽으로 유수濰水를 굽어보고 서글피 탄식하면서 회음후淮陰侯(한신韓信)의 을 생각하고 제대로 끝마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다.
가 높은데도 편안하고 깊은데도 밝으며,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였다.
함박눈 내리는 아침과 시원한 바람이 불고 밝은 달이 비추는 저녁에, 내 일찍이 이 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도 일찍이 나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원포園圃의 푸성귀를 채취하고 못의 물고기를 잡으며, 수수로 술을 빚고 껍질을 벗긴 곡식을 씻어 밥을 지어 먹으면서 말하기를 “즐겁다, 내 놀이여!”라고 하였다.
이때에 나의 아우 자유子由가 마침 제남濟南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는 를 짓고 또 이 초연대超然臺라 이름하여, ‘내가 가는 곳마다 즐거워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 바로 물건의 밖에서 노니는 것’임을 나타내었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앞에서는 초연한 뜻을 설명하고 뒷단락에서는 일을 사실대로 서술하였으니, 해의解意서사敍事을 겸하였다.”


역주
역주1 超然臺記 : 이 글에 대하여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13권에 “東坡가 熙寧 8년(1075) 11월에 園圃의 북쪽에 있는 오래된 臺를 보수하고 臺 위에 올라 조망하였는데, 子由(蘇轍)가 이 臺의 이름을 ‘超然臺’라 하고 〈超然臺賦〉를 지으니, 東坡公이 〈超然臺記〉를 지었다.”라고 보인다.
역주2 彼遊於物之內 而不遊於物之外 : 이것은 《莊子》 〈大宗師〉의 “저들은 이 세상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孔子)는 이 세상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다.[彼遊方之外者也 而丘遊方之內者也]”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물건의 안에서 노닌다.[遊於物之內]”는 것은 외물의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뜻이고, “물건의 밖에서 노닌다.[遊於物之外]”는 것은 외물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아감을 의미한다.
역주3 余自錢塘 移守膠西 : 錢塘은 杭州(지금의 浙江省 杭州)를 이르고, 膠西는 지금의 山東省 高密市 일대로, 이 지역은 宋나라 때에 密州에 속해 있었다. 東坡는 39세 되던 熙寧 7년(1074) 9월에 杭州通判에서 知密州事로 승진되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4 安丘高密 : 모두 당시의 縣 이름인데, 安丘縣은 지금의 山東省 濰縣에 있었고 高密縣은 지금의 高密市와 膠縣 일대이다.
역주5 馬耳常山 : 모두 山의 이름으로 密州의 남쪽에 있다.
역주6 其東則盧山 秦人盧敖之所從遁也 : 盧山은 지금의 江西省 九江市 남쪽에 있는 산으로 안개와 폭포로 유명하다. 盧敖는 東坡가 지은 〈盧山五咏 盧敖洞〉 詩에 스스로 注하기를 “圖經에 ‘盧敖는 秦나라 博士였는데 이 산으로 피난하여 마침내 道를 얻었다.’라고 한다.” 하였다. 圖經은 어떠한 책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흔히 그림 등을 붙여 설명하는 地理誌 같은 책을 범연히 칭한다.
역주7 西望穆陵……猶有存者 : 穆陵은 穆陵關으로 지금의 山東省 臨胊 동남쪽 大峴山에 있다. 尙父는 周나라의 창업공신인 呂尙 즉 姜太公으로, 周 武王이 존경하는 뜻으로 尙父라고 칭하였으며 呂望으로도 불린다. 殷나라 말기 난세를 피하여 渭水에서 낚시질하다가 周 文王인 姬昌을 만나 國師로 기용되어 周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文王이 죽고 武王이 즉위하자 8백 명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殷나라의 紂王을 공격하여 牧野의 一戰으로 통일천하를 이룩하고 齊나라에 봉해졌다. 兵法書인 《六韜》와 《三略》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齊 桓公은 이름이 小白이고 春秋時代 五霸 가운데 첫 번째 霸者이다. 형인 襄公이 無知에게 시해당하자 莒나라에서 입국하여 즉위하였다. 政敵이었던 管仲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周나라 왕실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처음으로 패업을 이루었다.
역주8 北俯濰水……思淮陰之功而弔其不終 : 濰水는 山東省 莒縣에서 발원하여 동북쪽으로 흘러 黃海로 들어가는 강의 이름이다. 淮陰은 淮陰侯 韓信을 가리키며, ‘淮陰侯의 功’이란 韓信이 齊나라를 점령할 적에 項羽의 부하 龍且와 濰水에서 격전을 벌여 이들을 섬멸한 공을 이른다.
韓信은 齊나라를 공격하다가 齊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온 楚나라 장수 龍且와 濰水에서 대치하였는데, 미리 상류를 가죽 부대로 막아놓고 강을 건너 싸움을 벌이다가 후퇴하여 龍且의 대군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일거에 막아두었던 물길을 터뜨려 혼란에 빠진 龍且의 대군을 섬멸하고 齊나라를 평정하였다.
漢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韓信은 楚王으로 봉해졌으나 뒤에 淮陰侯로 강등되자, 이를 불평하고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삼족이 멸하는 화를 입었는데, ‘弔其不終’은 이를 말한 것이다.
역주9 余弟子由適在濟南……且名其臺曰超然 : 濟南은 濟州의 치소로 지금의 山東省 濟南市이다. 子由는 蘇轍의 字로 이때 蘇轍이 濟州의 掌書記로 근무하였다. 超然臺라고 이름하게 된 내력은 蘇轍의 〈超然臺賦〉 序에 “《老子》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궁궐에 있더라도 편안히 거처하여 초연하다.’라고 하였으니, 시험 삼아 超然臺라고 이름함이 어떻겠는가? 인하여 賦를 짓는다.[老子曰 雖有榮觀 燕處超然 嘗試以超然命之 可乎 因爲之賦]”라고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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