象犀珠玉怪珍之物
은 有悅於人之耳目
이로되 而不適於用
하며 金石草木絲麻
는 有適於用
이로되 而用之則弊
하고 取之則竭
하나니
悅於人之耳目而適於用
하며 用之而不弊
하고 取之而不竭
하야 賢不肖之所得
이 各因其才
하고 하야 才分不同
이나 而求無不獲者
는 惟書乎
인저
自
공자孔子聖人
으로도 其學
이 必始於觀書
하니 當是時
하야 惟
하고 하고 하고 而
하니
士之生於是時
하야 得見
者 蓋無幾
하니 其學
이 可謂難矣
로되
而皆習於禮樂하고 深於道德하야 非後世君子所及이니라
自진秦, 漢以來로 作者益衆하고 紙與字畫이 日趨於簡便하야 而書益多하야 世莫不有라 然이나 學者益以苟簡은 何哉오
予猶及見老儒先生이 自言 其少時에 欲求사기史記, 한서漢書而不可得이요 幸而得之하면 皆手自한서書하야 日夜誦讀하야 惟恐不及이러니
近歲市人이 轉相摹刻하야 諸子百家之書 日傳萬紙라
學者之於書에 多且易致如此하니 其文詞學術이 當倍蓰於昔人이로되 而後生科擧之士 皆束書不觀하고 遊談無根은 此又何也오
予友이공택李公擇이 少時에 讀書於여산廬山오로봉五老峯下백석암白石菴之僧舍러니
이공택公擇旣去에 而山中之人이 思之하야 指其所居하야 爲이공택李氏山房하니 藏書凡九千餘卷이라
이공택公擇이 旣已涉其流하고 探其源하며 採剝其華實하고 而咀嚼其膏味하야 以爲己有하야
將以遺來者하야 供其無窮之求하야 而各足其才分之所當得이라
是以로 不藏於家하고 而藏於其故所居之僧舍하니 此는 仁者之心也라
予旣衰且病하야 無所用於世하니 惟得數年之閒하야 盡讀其所未見之書요 而여산廬山은 固所願遊而不得者니 蓋將老焉이어든 盡發이공택公擇之藏하야拾其餘棄以自補면 庶有益乎인저
而이공택公擇이 求予文以爲記어늘 乃爲一言하야 使來者로 知昔之君子見書之難하고 而今之學者有書而不讀이 爲可惜也하노라
08. 이씨산방李氏山房의 장서藏書에 대한 기문記文
제목은 본래 작으나 글의 뜻이 특별히 방달放達하고 원대하니, 이렇게 하여야 오만하고 잘난 체하지 않을 수 있다.
상아象牙와 서각犀角과 주옥珠玉과 진귀한 물건은 사람의 이목耳目을 기쁘게 하지만 쓰기에 적당하지 않고, 금석金石과 초목草木과 생사生絲와 마포麻布와 오곡五穀과 육재六材는 쓰기에 적당하지만 쓰면 해지고 취하면 다 없어진다.
그런데 사람의 이목耳目을 즐겁게 하면서도 쓰기에 적당하고 써도 해지지 않으며 취하여도 다하지 않아, 현명한 자와 불초한 자의 얻는 바가 각기 그 재능에 따르고 인자仁者와 지자智者의 소견이 각기 그 분수에 따라서, 재분才分이 똑같지 않더라도 구함에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는 것은 오직 서책書冊일 것이다.
공자孔子는 성인聖人이셨는데도 그 배움이 반드시 서책을 봄에서 시작하셨으니, 이때를 당하여 오직 주周나라의 주하사 노담柱下史 老聃이 서책이 많았고, 한선자韓宣子가 노魯나라에 간 뒤에야 역상易象과 《노춘추魯春秋》를 보았고, 계찰季札이 상국上國으로 빙문聘問한 뒤에야 《시경詩經》의 풍風․아雅․송頌을 얻어 들었고, 초楚나라에는 좌사左史인 의상倚相만이 《삼분三墳》․《오전五典》․《팔색八色》․《구구九丘》를 읽었다.
선비 중에 이때에 태어나서 육경六經을 본 자가 몇 명이 안 되었으니, 그 배움이 어렵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런데도 모두 예악禮樂에 익숙하고 도덕道德에 심오하여 후세의 군자君子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진秦․한시대漢時代 이후로는 작자作者가 더욱 많아지고 종이와 글자의 획이 날로 간편해져 서책이 더욱 많아져서 세상에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도, 배우는 자가 더욱 구차해지고 간략해짐은 어째서인가?
나도 오히려 노유선생老儒先生들이 “젊었을 적에는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를 구하려 해도 얻지 못하였고, 다행히 얻으면 모두 손수 직접 써서 밤낮으로 외고 읽어 행여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라고 직접 말씀하는 것을 보았었다.
근세에는 상인商人들이 돌려가며 서로 모각模刻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책이 하루에도 만 장이나 전해진다.
배우는 자들이 서책에 대하여 많고 또 구하기 쉬움이 이와 같으니, 그 문사文詞와 학술이 옛사람보다 마땅히 배가 되고 다섯 배가 되어야 할 터인데, 과거 보는 후생後生의 선비들이 모두 서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으며 근거 없는 것을 이리저리 말하니, 이는 또 어째서인가?
나의 벗인 이공택李公擇(이상李常)이 젊었을 적에 여산廬山의 오로봉五老峰 아래 백석암白石菴의 승방僧房에서 책을 읽었다.
이공택李公擇이 떠나고 나서 산중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그가 거처하던 곳을 가리켜 ‘이씨산방李氏山房’이라 하였는데, 장서藏書가 모두 9천여 권이었다.
이공택李公擇은 이미 그 책 속의 내용을 섭렵하고 근원을 탐구하였으며, 꽃과 열매를 채집하고 기름진 맛을 씹어 음미하여 자신의 소유로 삼았다.
그리하여 문장에 드러내고 행사에 나타내어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그러나 책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고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이공택李公擇은 장차 이것을 후생들에게 물려주어서 그들의 무궁한 요구에 제공하여, 각기 재분才分의 얻은 바를 충족시켜 주려 하였다.
이 때문에 자기 집에 보관하지 않고 옛날 거처하던 승방僧房에 보관하였으니, 이는 인자仁者의 마음이다.
나는 이미 노쇠하고 또 병들어 세상에 쓰일 수 없으니, 행여 몇 년의 시간을 얻어서 아직 보지 못한 책을 다 읽었으면 하며, 여산廬山은 진실로 유람하기를 원하였으나 가보지 못한 곳이니, 장차 치사致仕하고는 이공택李公擇의 장서들을 모두 꺼내어 그가 버린 것들을 주워서 스스로 보탠다면 행여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이공택李公擇이 나에게 글을 지어 이 사실을 기록해줄 것을 부탁하니, 이에 나는 한마디 말을 하여, 후생들로 하여금 옛날 군자君子들은 책을 보는 것이 어려웠고 지금의 배우는 자들은 책이 있어도 읽지 않는 것이 애석한 일임을 알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