借漏以發明道術하니 吾所以謂소장공蘇長公仙於文者也로라
이 以創物之智
로 聞於天下
하야 作蓮華漏
하니 世服其精
이라
凡公所臨엔 必爲之하야 今서주州郡에 往往而在하니 雖有巧者라도 莫敢損益이어늘 而서주徐州獨用瞽人위박衛朴所造하야 廢法而任意하야 有壺而無箭이라
自以無目而廢天下之視하야 使守者伺其滿이라가 則決之而更注하니 人莫不笑之라
國子博士傅君석裼은 公之外曾孫이니 得其法爲詳이라
人之所信者는 手足耳目也니 目識多寡하고 手知重輕이라
然이나 人未有以手量而目計者하야 必付之於度量與權衡하나니 豈不自信而信物이리오
故
로 天地之寒暑
와 日月之晦明
과 라도 而不能逃於三尺之箭
과 五斗之缾(甁)
하야 雖疾雷霾風雨雪晝晦
라도 而遲速有度
하야 不加虧贏
이라
使凡爲吏者 如缾之受水 不過其量하고 如水之浮箭이 不失其平하며 如箭之升降也 視時之上下하야 降不爲辱하고 升不爲榮이면 則民將靡然心服하야 而寄我以死生矣리라
按누우재樓迂齋曰 동파옹坡翁이 最長於物理上推到義理精微處하야 妙於形容이요 而引歸吏身上하니 尤佳라
누漏(물시계)를 빌어서 도술道術을 발명하였으니, 내가 이 때문에 소장공蘇長公을 일러 문장의 신선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 용도각직학사故 龍圖閣直學士 예부시랑 연공禮部侍郞 燕公 숙肅이 물건을 창조하는 지혜로 천하에 알려져서 연화누蓮華漏를 만드니, 세상 사람들이 그 정교함에 탄복하였다.
무릇 공公이 부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이것을 만들어서 지금 주州․군郡들에 곳곳마다 남아 있으니, 비록 솜씨가 좋은 자가 있어도 감히 줄이고 더하지 못하였는데, 서주徐州에서는 유독 맹인인 위박衛朴이 만든 것을 사용하여, 〈물시계를 제작하는〉 법을 폐기하고 자기 뜻대로 만들어서 물병(항아리)만 있고 시간을 가리키는 바늘이 없었다.
맹인은 자신이 눈이 없기 때문에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보지 못한다고 여겨서 물병을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다리고 있다가 물이 차면 물을 터주고 다시 주입하게 하니, 사람들이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국자박사 부군國子博士 傅君 석裼은 공公의 외증손인데, 연화누蓮華漏를 제작하는 법法을 자세히 터득하였다.
그래서 이 고을의 통판通判이 되었을 적에 처음으로 다시 만들고 나에게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사람이 믿는 것은 손과 발과 귀와 눈인데, 눈은 많고 적음을 알고 손은 무겁고 가벼움을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손으로 헤아리고 눈으로 계산하는 자가 있지 않아, 반드시 도度와 양量과 저울에게 맡기니, 어찌하여 자신을 믿지 않고 물건을 믿는가?
이는 감정이 없고 아집이 없는 뒤에야 만물의 실정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의 춥고 더움과 해와 달의 어둡고 밝음과 3십8만7천 리의 밖에 버티고 있는 곤륜산崑崙山도 이 세 자의 시곗바늘과 다섯 말들이 물병의 물을 피할 수 없어서, 비록 빠른 우레와 흙비 섞인 바람과 함박눈과 캄캄한 낮이라도 더디고 빠른 것이 일정한 도수가 있어서, 더 모자라지도 않고 더 남지도 않는다.
그러니 만일 모든 관리들이 물병이 물을 받는 것이 그 양量을 넘지 않는 것과 같고, 물이 시곗바늘을 띄우는 것이 그 평평함을 잃지 않는 것과 같고, 시곗바늘이 오르내리는 것이 시간의 오르내림을 보는 것과 같이 해서, 내려가도(좌천되어도) 욕되게 여기지 않고 올라가도 영화롭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장차 모두 쏠려 진심으로 복종해서 자신의 목숨을 맡길(바칠) 것이다.
살펴보건대, 누우재樓迂齋(누방婁昉)가 말하기를 “동파옹東坡翁은 물건의 이치에서 미루어 의리의 정미한 곳으로 가는 데 매우 뛰어나 형용을 묘하게 하였고, 또 관리에게로 귀결시켰으니 더욱 빼어나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