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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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曲而鬯이라
春秋之所深譏 聖人之所哀傷而不忍言者 三이니
夫子傷之하사 而思其所以至此之由
其言 尤爲深且遠也하시니라
且夫蒯聵之得罪於靈公하니 逐之可也어니와 逐之而立其子 是召亂之道也
使輒上之不得從王父之言하고 下之不得從父之令者 靈公也
書曰 晉趙鞅 帥師하야 納衛世子蒯聵于戚이라하니 蒯聵之不去世子者 是靈公不得乎逐之之道
靈公 何以不得乎逐之之道
逐之而立其子也일새라
魯桓公 이어늘 而陷於一婦人之手하니 夫子以爲文姜之不足譏 而傷乎桓公制之不以漸也
書曰 公與夫人姜氏遂如齊라하니 言其禍自公作也니라
段之禍 生於愛하니 鄭莊公之愛其弟也 足以殺之耳
이라하시니 孰知夫舜之愛其弟之深而鄭莊公賊之也리오
當太叔之據京城, 取廩延하야 以爲己邑하야는 雖舜復生이라도 不能全兄弟之好
書曰 鄭伯克段于鄢이라하고 而不曰 鄭伯殺其弟段이라하니 以爲當斯時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殺之而已矣
夫婦, 父子, 兄弟之親 天下之至情也어늘 而相殘之禍 至如此하니 夫豈一日之故哉리오
穀梁曰 克 能也 能殺也 不言殺 見段之有徒衆也
不稱弟하고 不稱公子 賤段而甚鄭伯也
遠也 猶曰 取之其母之懷中하야 而殺之云爾 甚之也
然則爲鄭伯 宜奈何
緩追逸賊 親親之道也라하니라
嗚呼
以兄弟之親으로 至交兵而戰이면 固親親之道 絶已久矣 雖緩追逸賊이나 而其存者幾何리오
曰 於斯時也 雖聖人이라도 亦殺之而已矣라하노라
然而聖人 固不使至此也
公羊傳曰 母欲立之어늘 己殺之하니 如不與而已矣라하고 而又區區於하니 是何思之不遠也
左氏 以爲段不弟故 不稱弟 如二君故 曰克이요 稱鄭伯 譏失敎라하니 求聖人之意컨대 若左氏 可以有取焉이로다


01. 정백鄭伯 땅에서 이긴 것에 대한 논 은공論 隱公 원년元年
곡진하면서도 통창하다.
춘추春秋》에서 깊이 비판한 것과 성인聖人(공자孔子)이 슬퍼하고 가슴 아프게 여기시어 차마 말씀하지 못한 것이 세 가지이다.
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 세자 괴외蒯聵나라의 땅에 들여보내자 나라 국하國夏나라 석만고石曼姑가 군대를 거느리고 땅을 포위하자 부자간父子間의 은혜가 끊겼고, 노 환공魯 桓公부인 강씨夫人 姜氏와 함께 마침내 나라에 가자 부부간夫婦間가 상실되었고, 정백鄭伯 땅에서 싸워 이기자 형제간兄弟間가 없어졌으니, 이 세 가지는 천하天下에 크게 슬픈 일이다.
부자夫子께서 이것을 서글퍼하셔서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을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더욱 깊고 또 원대하신 것이다.
괴외蒯聵가 아버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었으니 그를 쫓아내는 것은 괜찮지만, 그를 쫓아내고 그의 자식인 을 세운 것은 을 초래하는 길이었다.
으로 하여금 위로는 할아버지의 말을 따를 수 없고 아래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영공靈公이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 세자世子괴외蒯聵 땅에 들여보냈다.”라고 하였으니, 괴외蒯聵에게서 세자世子라는 명칭을 제거하지 않은 것은 영공靈公이 자식을 쫓아내는 방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이다.
영공靈公은 어찌하여 자식을 쫓아내는 방법을 제대로 얻지 못하였는가?
괴외蒯聵를 쫓아내고 그의 자식을 세웠기 때문이다.
노 환공魯 桓公천승지국千乘之國의 군주인데 한 부인夫人(문강文姜)의 손에 빠졌으니, 부자夫子께서는 문강文姜은 굳이 비판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셨고, 환공桓公이 아내를 점진적으로 제재하지 못한 것을 서글퍼하셨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부인 강씨夫人 姜氏와 함께 마침내 나라에 갔다.”라고 하였으니, 환공桓公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태숙 단太叔 段정 장공鄭 莊公이 아우를 너무 사랑한 데서 생겼으니, 장공莊公이 아우를 사랑한 것은 다만 그를 죽게 만들었을 뿐이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임금이 유비有庳에 봉하시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오게 하였는데 정사에는 미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셨으니, 임금은 아우를 깊이 사랑하셨고 정 장공鄭 莊公은 아우를 해친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태숙 단太叔 段경성京城을 점거하고 늠연廩延을 차지하여 자신의 고을로 삼을 때를 당해서는 비록 임금이 다시 나오시더라도 형제간의 우애를 온전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정백鄭伯 땅에서 이겼다.”라고 쓰고, “정백鄭伯이 아우 을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때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그를 죽였을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부부夫婦부자父子형제兄弟의 친함은 천하天下의 지극한 인데, 서로 해치는 화가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 이틀에 갑자기 생긴 연고이겠는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이르기를 “은 능함이니, 능히 을 죽였다는 뜻이니, 죽임을 말하지 않은 것은 에게 병력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요,
을 아우라고 칭하지 않고 공자公子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하게 여기고 정백鄭伯을 심하게 여긴 것이요,
은 먼 곳이니, 이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아우를 취하여 죽였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정백鄭伯을 심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정백鄭伯은 마땅히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도망하는 ()을 느슨히 추격하는 것이 친척을 친애하는 방도이다.”라고 하였다.
아!
친한 형제간이 병기를 들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진실로 친척을 친애하는 도리가 이미 오래전에 끊긴 것이니, 비록 도망하는 적을 느슨히 추격하더라도 친애하는 도리가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 말하기를 “이때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아우를 죽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진실로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아우를 세우고자 했는데 자기가 그 아우를 죽게 하였으니, 이것은 아우에게 땅을 떼어주었지만 떼어주지 않은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하고, 또 나라를 차지하고서 국외에 있으면 죽임을 당한 지명()을 책에 기록하고, 나라를 차지하고도 국내에 있으면 그 지명을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에 구구하게 얽매였으니, 어찌 생각함이 그리도 멀지 못한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이 아우 노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라고 칭하지 않았고, 의 세력이 강성하여 임금이 둘인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이라고 말하였고, 정백鄭伯이라고 칭한 것은 아우를 잘못 가르침을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뜻을 찾아보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같다면 취할 점이 있다고 하겠다.


역주
역주1 鄭伯克段于鄢 隱元年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本集에는 제목이 〈論鄭伯克段于鄢〉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은 《春秋》의 세 가지 기사를 논하였는데, 隱公 원년 “여름 5월에 鄭伯이 段을 鄢에서 싸워 이겼다.[夏五月 鄭伯克段于鄢]”라는 기사에 대한 의논이 중심이 되고 있으므로 이로써 제목을 삼은 듯하다.
역주2 晉趙鞅帥師……而父子之恩絶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定公 14년부터 哀公 3년 사이에 보인다.
趙鞅은 趙簡子로 당시 晉나라의 국정을 담당한 卿이었으며, 國夏는 齊나라의 대부이고 石曼姑는 衛나라의 대부였다.
蒯聵는 衛나라 靈公의 世子인데 계모인 南子가 음란한 짓을 자행하자, 魯 定公 14년(B.C. 496, 《史記》에는 497년으로 되어 있음)에 南子를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靈公의 노여움을 사서 宋나라를 거쳐 晉나라로 망명하였다.
魯 哀公 2년(B.C. 493)에 靈公이 죽자 衛나라에서는 蒯聵의 아들 輒을 임금으로 세우니, 이가 바로 出公이다.
이해에 趙鞅이 蒯聵를 戚 땅으로 들여보냈는데, 이듬해에 衛나라의 石曼姑와 齊나라의 國夏가 戚 땅을 포위하였다. 이에 蒯聵는 戚 땅에 있지 못하고 宿 땅에 머물다가 哀公 16년에 마침내 아들 出公을 쫓아내고 衛나라의 임금(莊公)이 되었다. 莊公인 蒯聵와 出公인 輒이 부자지간으로 오랜 기간 임금의 지위를 놓고 다투었으므로 ‘父子之恩絶’이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3 公與夫人姜氏遂如齊 而夫婦之道喪 : 公은 魯 桓公(B.C. 711~B.C. 694)으로 이름은 軌이며 惠公의 아들인데 형인 隱公을 시해하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姜氏는 齊 襄公의 이복동생인 文姜으로 桓公의 夫人이다.
文姜은 魯나라로 시집오기 전부터 襄公과 私通하고 있었는데, 桓公 18년에 桓公이 濼 땅에서 襄公과 회합할 적에 동행하였다가 함께 齊나라에 가서 다시 襄公과 私通하였다. 이를 알아차린 桓公이 文姜을 꾸짖자, 襄公은 公子 彭生을 시켜 桓公을 살해하였다. 그러므로 ‘夫婦之道喪’이라고 말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桓公 18년》
역주4 鄭伯……而兄弟之義亡 : 鄭伯 段은 鄭 莊公(B.C. 757~B.C. 701)으로 武公의 아들이며 이름은 寤生이다. 段은 莊公의 동복아우로 太叔 또는 共叔으로 불렸다. 어머니 武姜은 莊公이 태어날 적에 난산으로 고생하여 莊公을 미워하고 段을 편애하여 武公에게 段을 후계자로 세울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武公이 허락하지 않았다.
莊公이 즉위하자, 武姜은 段을 큰 고을에 봉해줄 것을 간청하니, 段을 京 땅에 봉하고 京城太叔이라 칭하였다. 段은 본래 용맹이 뛰어나고 활쏘기 등 무예가 출중하였으므로 鄭나라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니, 段은 더욱 교만해져서 서쪽과 북쪽에 있는 두 고을을 멋대로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이어서 廩延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莊公과의 불화가 심해지자, 莊公의 신하들이 段을 제거할 것을 간언하였다.
段이 마침내 자신의 성곽을 보수하고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획책하고 도성을 기습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이때 武姜이 내응하여 성문을 열어주기로 약속하였다. 隱公 원년(B.C. 722)에 莊公이 段의 반란을 미리 알고 大夫 子封에게 명하여 戰車 200乘을 거느리고 京 땅을 선제공격하게 하니, 京 땅 백성들이 段을 배반하였다. 段이 鄢 땅으로 들어가 저항하자, 莊公은 鄢 땅을 공격하여 마침내 段을 죽였다. 그러므로 ‘兄弟之義亡’이라고 말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隱公 원년》
역주5 千乘之君 : 千乘之國의 군주로 제후국의 임금을 이른다. 乘은 兵車 1乘으로 여기에는 甲士 3명, 步兵 72명, 취사병 25명, 軍馬 4필이 딸렸는데, 天子國은 萬乘, 諸侯國은 千乘을 보유하였다.
역주6 孟子曰……不及以政 : 象은 舜임금의 이복아우로 舜임금이 帝位에 오르기 전에 舜임금을 해치려고 하였으나, 舜임금은 끝까지 그를 사랑하여 有庳의 군주로 봉해주었다. 有庳는 地名인데, 朱子의 《孟子集註》에 “혹자는 ‘현재의 道州 鼻亭이 바로 有庳의 지역이다.’라고 한다.”라고 注하였다.
‘使之源源而來 不及以政’은 《孟子》 〈萬章 上〉에 보인다. 萬章이 孟子에게 “象이 날마다 舜임금을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았는데, 舜이 즉위하여 天子가 되셔서는 그를 죽이지 않고 추방한 것은 어째서입니까?”라고 묻자, 孟子는 “그를 봉해 주셨는데, 혹자가 ‘추방했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하셨다.
萬章은 舜임금이 죄를 지은 딴 사람은 처벌하면서 자기 아우를 봉해준 것이 불공평함을 말하고, 다시 “象이 지극히 不仁하였는데도 그를 有庳에 봉해 주셨으니, 有庳의 백성들은 무슨 죄입니까.”라고 항의성 질문을 하였다.
이에 孟子는 “象이 그 나라에서 정사를 하지 못하게 하고, 天子가 관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대신 다스리게 하고 그 세금만을 象에게 바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추방했다.’고 말하는 것이니, 象이 어찌 저 백성들에게 포악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舜임금은 항상 象을 만나보고자 하셨으므로 끊임없이 오게 하셨다. ‘朝貢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데 정사로 有庳의 군주를 접견했다.’고 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象不得有爲於其國 天子使吏 治其國而納其貢稅焉 故謂之放 豈得暴彼民哉 雖然欲常常而見之 故源源而來 不及貢 以政接于有庳 此之謂也]”라고 대답하셨다.
이에 대해 朱子의 《孟子集註》에 “源源은 물이 서로 이어지는 것처럼 계속하는 것이다. 來는 와서 조회함을 이른다. 朝貢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데 정사로 有庳의 군주를 접견했다는 것은 제후들이 朝貢하는 시기에 미치기를 기다리지 않고 정사로써 有庳의 군주를 접견함을 이르니, 이것은 아마도 옛 《書經》의 말인 듯한데, 孟子께서 이것을 인용해서 끊임없이 오게 한 뜻을 증명하여 친애하는 마음이 끝없음이 이와 같음을 증명하신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그리하여 ‘欲常常而見之 故源源而來 不及貢 以政接于有庳’를 “舜임금이 항상 그를 만나보고자 하였으므로 끊임없이 오게 하셨으니, 朝貢할 시기가 되지 않았는데 정사로 有庳의 군주를 접견했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蘇軾은 ‘貢’자를 빼고 ‘不及以政’으로 바로 연결하여 “정사에는 미치지 못하게 했다.”라고 해석한 것이다.
역주7 當國內外之言 : 《春秋公羊傳》에 “段은 어떤 사람인가? 鄭伯의 아우이다. 어찌하여 아우라고 칭하지 않았는가? 나라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齊나라 사람들이 無知를 죽였을 적에 어찌하여 죽임을 당한 지명을 쓰지 않았는가? 國內(齊나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에 있으면 비록 나라를 차지하였더라도 그 지명을 책에 기록하지 않고, 나라를 차지하지 않았으면 또한 국외에 있더라도 그 지명을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段者何 鄭伯之弟也 何以不稱弟 當國也 其地何 當國也 齊人殺無知 何以不地 在內也 在內 雖當國 不地也 不當國 雖在外 亦不地也]”라고 하여, 《春秋》에 鄢 땅을 쓴 것은 太叔 段이 나라를 차지하고 국외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蘇軾은 이러한 말을 모두 구구한 의논이라고 비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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