且夫蒯聵之得罪於靈公하니 逐之可也어니와 逐之而立其子는 是召亂之道也라
使輒上之不得從王父之言하고 下之不得從父之令者는 靈公也라
故로 書曰 晉趙鞅이 帥師하야 納衛世子蒯聵于戚이라하니 蒯聵之不去世子者는 是靈公不得乎逐之之道니
魯桓公
은 이어늘 而陷於一婦人之手
하니 夫子以爲文姜之不足譏
요 而傷乎桓公制之不以漸也
라
故로 書曰 公與夫人姜氏遂如齊라하니 言其禍自公作也니라
段之禍는 生於愛하니 鄭莊公之愛其弟也는 足以殺之耳라
이라하시니 孰知夫舜之愛其弟之深而鄭莊公賊之也
리오
當太叔之據京城, 取廩延하야 以爲己邑하야는 雖舜復生이라도 不能全兄弟之好라
故로 書曰 鄭伯克段于鄢이라하고 而不曰 鄭伯殺其弟段이라하니 以爲當斯時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殺之而已矣라
夫婦, 父子, 兄弟之親은 天下之至情也어늘 而相殘之禍 至如此하니 夫豈一日之故哉리오
穀梁曰 克은 能也니 能殺也니 不言殺은 見段之有徒衆也요
鄢은 遠也니 猶曰 取之其母之懷中하야 而殺之云爾니 甚之也라
以兄弟之親으로 至交兵而戰이면 固親親之道 絶已久矣니 雖緩追逸賊이나 而其存者幾何리오
故로 曰 於斯時也엔 雖聖人이라도 亦殺之而已矣라하노라
公羊傳曰 母欲立之
어늘 己殺之
하니 如不與而已矣
라하고 而又區區於
하니 是何思之不遠也
오
左氏는 以爲段不弟故로 不稱弟요 如二君故로 曰克이요 稱鄭伯은 譏失敎라하니 求聖人之意컨대 若左氏면 可以有取焉이로다
01. 정백鄭伯이 단段을 언鄢 땅에서 이긴 것에 대한 논 은공論 隱公 원년元年
《춘추春秋》에서 깊이 비판한 것과 성인聖人(공자孔子)이 슬퍼하고 가슴 아프게 여기시어 차마 말씀하지 못한 것이 세 가지이다.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위衛나라 세자 괴외蒯聵를 위衛나라의 척戚 땅에 들여보내자 제齊나라 국하國夏와 위衛나라 석만고石曼姑가 군대를 거느리고 척戚 땅을 포위하자 부자간父子間의 은혜가 끊겼고, 노 환공魯 桓公이 부인 강씨夫人 姜氏와 함께 마침내 제齊나라에 가자 부부간夫婦間의 도道가 상실되었고, 정백鄭伯이 단段을 언鄢 땅에서 싸워 이기자 형제간兄弟間의 의義가 없어졌으니, 이 세 가지는 천하天下에 크게 슬픈 일이다.
부자夫子께서 이것을 서글퍼하셔서 이 지경에 이른 까닭을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더욱 깊고 또 원대하신 것이다.
또 괴외蒯聵가 아버지 영공靈公에게 죄를 얻었으니 그를 쫓아내는 것은 괜찮지만, 그를 쫓아내고 그의 자식인 첩輒을 세운 것은 난亂을 초래하는 길이었다.
첩輒으로 하여금 위로는 할아버지의 말을 따를 수 없고 아래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를 수 없게 만든 것은 바로 영공靈公이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진晉나라 조앙趙鞅이 군대를 거느리고 위衛나라 세자世子인 괴외蒯聵를 척戚 땅에 들여보냈다.”라고 하였으니, 괴외蒯聵에게서 세자世子라는 명칭을 제거하지 않은 것은 영공靈公이 자식을 쫓아내는 방법을 제대로 얻지 못해서이다.
영공靈公은 어찌하여 자식을 쫓아내는 방법을 제대로 얻지 못하였는가?
괴외蒯聵를 쫓아내고 그의 자식을 세웠기 때문이다.
노 환공魯 桓公은 천승지국千乘之國의 군주인데 한 부인夫人(문강文姜)의 손에 빠졌으니, 부자夫子께서는 문강文姜은 굳이 비판할 가치가 없다고 여기셨고, 환공桓公이 아내를 점진적으로 제재하지 못한 것을 서글퍼하셨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쓰기를 “공公이 부인 강씨夫人 姜氏와 함께 마침내 제齊나라에 갔다.”라고 하였으니, 화禍가 환공桓公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말한 것이다.
태숙 단太叔 段의 화禍는 정 장공鄭 莊公이 아우를 너무 사랑한 데서 생겼으니, 장공莊公이 아우를 사랑한 것은 다만 그를 죽게 만들었을 뿐이다.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순舜임금이 상象을 유비有庳에 봉하시고 그로 하여금 끊임없이 오게 하였는데 정사에는 미치지 않게 하였다.”라고 하셨으니, 순舜임금은 아우를 깊이 사랑하셨고 정 장공鄭 莊公은 아우를 해친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태숙 단太叔 段이 경성京城을 점거하고 늠연廩延을 차지하여 자신의 고을로 삼을 때를 당해서는 비록 순舜임금이 다시 나오시더라도 형제간의 우애를 온전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 “정백鄭伯이 단段을 언鄢 땅에서 이겼다.”라고 쓰고, “정백鄭伯이 아우 단段을 죽였다.”라고 쓰지 않은 것이니, 이러한 때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그를 죽였을 뿐이라고 여긴 것이다.
부부夫婦와 부자父子와 형제兄弟의 친함은 천하天下의 지극한 정情인데, 서로 해치는 화가 이와 같음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하루 이틀에 갑자기 생긴 연고이겠는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 이르기를 “극克은 능함이니, 능히 단段을 죽였다는 뜻이니, 죽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단段에게 병력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요,
단段을 아우라고 칭하지 않고 공자公子라고 칭하지 않은 것은 단段을 천賤하게 여기고 정백鄭伯을 심하게 여긴 것이요,
언鄢은 먼 곳이니, 이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아우를 취하여 죽였다.’고 말한 것과 같으니, 정백鄭伯을 심하게 여긴 것이다.
그렇다면 정백鄭伯은 마땅히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
도망하는 적敵(단段)을 느슨히 추격하는 것이 친척을 친애하는 방도이다.”라고 하였다.
친한 형제간이 병기를 들고 싸우는 지경에 이르렀다면 진실로 친척을 친애하는 도리가 이미 오래전에 끊긴 것이니, 비록 도망하는 적을 느슨히 추격하더라도 친애하는 도리가 얼마나 남아 있겠는가?
그러므로 내 말하기를 “이때에는 비록 성인聖人이라도 아우를 죽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성인聖人은 진실로 이 지경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어머니가 아우를 세우고자 했는데 자기가 그 아우를 죽게 하였으니, 이것은 아우에게 땅을 떼어주었지만 떼어주지 않은 것과 같을 뿐이다.”라고 하고, 또 나라를 차지하고서 국외에 있으면 죽임을 당한 지명(언鄢)을 책에 기록하고, 나라를 차지하고도 국내에 있으면 그 지명을 책에 기록하지 않는다는 말에 구구하게 얽매였으니, 어찌 생각함이 그리도 멀지 못한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단段이 아우 노릇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弟’라고 칭하지 않았고, 단段의 세력이 강성하여 임금이 둘인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극克’이라고 말하였고, 정백鄭伯이라고 칭한 것은 아우를 잘못 가르침을 비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성인聖人의 뜻을 찾아보건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같다면 취할 점이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