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十有一月己巳朔
에 宋公
이 及楚人
으로 戰于泓
하야 이라하니 春秋書戰
이 未有若此之嚴而盡也
하니라
이요 宋
은 先代之後
로 於周
에 爲客
하야 天子有事
면 膰焉
하고 有喪
이면 拜焉
하야 非列國諸侯之所敢敵也
어늘
而曰及楚人戰于泓이라하니 楚는 蠻夷之國이요 人은 微者之稱이라
以天子之上公으로 而當夷狄之微者하야 至於敗績하니 宋公之罪를 蓋可見矣어늘
宋襄公은 非獨行仁義而不終者也요 以不仁之資로 盜仁者之名爾라
夫捨一牛
는 於德
에 未有所損益者
어늘 而
하시니 所謂
이니 三代之所共也
니라
君子는 殺一牛之不忍이어늘 而宋公은 戕一國君을 若犬豕然하니 此而忍爲之면 天下에 孰有不忍者耶리오
人能紾其兄之臂以取食
하고 而能忍饑於
者
는 天下知其不情也
리라
이로되 이어든 況用人於夷鬼以求霸
하고 而謂之
可乎
아
使鄫子有罪而討之
인댄 雖聲之諸侯而
라도 天下不以爲過
리라
襄公은 以諸侯爲可以名得하고 王莽은 以天下爲可以文取也하니 其得喪小大는 不同이나 其不能欺天下는 則同也니라
라하니 襄公
이 行王者之師
면 猶足以當桓文之師
어늘 一戰之餘
에 救死扶傷不暇
하니 此獨妄庸耳
라
이어늘 襄公
은 有一
로되 不能用
하니 豈可同日而語哉
아
自古로 失道之君이 如是者多矣로되 死而論定은 未有如宋襄公之欺於後世者也니라
천고千古의 남다른 안목이 있는 의논이요, 또 본래 말이 정당하다.
《춘추春秋》에 이르기를 “노魯나라 희공僖公 22년 겨울 11월 기사삭己巳朔에 송공宋公이 초楚나라 사람과 홍수泓水에서 싸워서 송宋나라 군대가 대패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춘추春秋》에서 전쟁을 쓴 것이 이와 같이 엄격하고 지극한 경우는 있지 않다.
송공宋公은 천자天子의 상공上公이고 송宋나라는 선대先代(선왕조先王朝)의 후손後孫으로 주周나라에게는 빈객賓客이 되어서, 천자天子가 제사祭祀가 있으면 제사고기를 보내고 상喪이 있으면 절하여, 열국列國의 제후諸侯들이 감히 대등하게 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춘추春秋》에 “초楚나라 사람과 홍수泓水에서 싸웠다.”라고 썼으니, ‘초楚나라’는 이적夷狄의 나라이고 ‘사람’은 미천한 자의 칭호이다.
천자天子의 상공上公으로서 이적夷狄의 미천한 자와 대등하게 나열되어 패적敗績에 이르렀으니, 송공宋公의 죄罪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이르기를 “문왕文王의 전쟁도 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칭찬하였으니, 배우는 자들이 이것을 의심하므로 내가 분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다만 인의仁義를 행하다가 마치지 못한 자가 아니요, 불인不仁한 자질로 인자仁者의 이름을 도둑질하였다.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당하堂下를 지나가자, “그 소는 어디로 가는가?”라고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장차 이 소를 잡아서 그 피로 종의 틈을 바르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 벌벌 떨면서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소 한 마리를 놓아주는 것이 덕德에 있어서 줄어들거나 더함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맹자孟子는 이것을 가지고 선왕宣王이 왕도王道를 행할 수 있다고 인정해주었으니, 이른바 〈선왕先王이〉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어진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어진 정사政事를 했다는 것이니, 이는 삼대시대三代時代에 공통된 것이었다.
그런데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증자鄫子를 사로잡아 그를 죽여서 차수次睢의 사社에 희생으로 사용하였다.
군자는 한 마리 소를 죽이는 것도 차마 못하는데,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한 나라의 군주를 죽이기를 개와 돼지를 죽이듯이 쉽게 하였으니, 이것을 차마 한다면 천하에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할 일이 있겠는가?
양공襄公은 홍수泓水의 전쟁에서 몸과 나라가 똑같이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부상당한 사람을 거듭 상해하지 않고 반백이 된 자를 사로잡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제후諸侯들을 속이고자 하였다.
자기 형의 팔뚝을 비틀어 음식을 빼앗아 먹으면서 술과 밥이 있는데도 먹지 않고 청렴을 지킨다며 굶주림을 참는 자가 있으면, 천하 사람들은 이것이 실정實情이 아님을 안다.
환공桓公과 문공文公의 군대는 망한 나라를 보존시켜 주고 끊어진 대를 이어주었는데도 중니仲尼의 문하門下에 끼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생사람을 오랑캐 귀신의 제사에 희생으로 사용하여 패자霸者가 되기를 구하면서 이것을 왕자王者의 군대라고 말하는 것이 되겠는가?
만일 증자鄫子가 죄가 있어서 토벌했다면 비록 이것을 제후들에게 알리고 사社에서 죽였더라도 천하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자신의 감정 때문에 군대를 일으켰다면,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진후晉侯를 사로잡고도 오히려 놓아주었는데, 하물며 감히 이것을 〈제사 지낼 만한 대상이 아닌〉 어둡고 음란한 귀신에게 사용한단 말인가?
어리석은 내가 살펴보건대 송宋나라 양공襄公은 왕망王莽의 부류이다.
양공襄公은 제후諸侯들을 인자仁者라는 명성으로 얻을 수 있다고 여겼고, 왕망王莽은 천하天下를 문식文飾으로 취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 그 득실의 크고 작음은 똑같지 않으나 천하를 속이지 못한 것은 똑같았다.
‘양공襄公이 상대방이 전열戰列을 이루지 못했을 적에 북을 쳐서 공격하지 않은 것’이 양공襄公의 포악함을 덜 수 없고, ‘왕망王莽이 유자孺子를 안고서 운 것’이 왕망王莽이 찬탈한 죄를 덮을 수가 없으니, 만약 왕망王莽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하나의 송宋나라 양공襄公이었을 것이요, 양공襄公이 뜻을 얻었더라면 또한 하나의 왕망王莽이었을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를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잘못되더라도 패자霸者는 될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양공襄公이 왕자王者의 군사를 행했더라면 그래도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의 군대를 당해낼 수 있었을 것인데, 한 번 싸운 뒤에 죽어가는 병졸을 구원하고 부상당한 사람을 부축하기에도 겨를이 없었으니, 이것은 다만 망령되고 용렬한 짓일 뿐이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은 관중管仲과 자범子犯을 얻어서 흥하였는데, 양공襄公은 자어子魚 한 사람이 있었으나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똑같이 논할 수 있겠는가?
예로부터 도道를 잃은 군주로서 이와 같은 자들이 많았으나, 죽은 뒤에 의논이 정해진 자로는 송宋나라 양공襄公처럼 후세를 속인 자는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