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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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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8. 환산桓山 유람에 대한 기문記文
曠達이라
광달曠達하다.
二年正月己亥晦 春服旣成이어늘 從二三子하야 遊於泗之上이라
원풍元豐 2년 정월 기해일己亥日 그믐날에 봄옷이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두서너 사람을 데리고 사수泗水 가에서 노닐었다.
登桓山하야 入石室하야 使道士戴日祥으로하고하고 曰 噫嘻悲夫
환산桓山에 올라 석실石室에 들어가서 도사道士대일상戴日祥으로 하여금 뇌씨雷氏의 거문고를 타고 〈이상조履霜操〉의 남은 음조音調를 읊게 하고, 말하기를 “아! 슬프다.
니라
이것은 나라 사마 환퇴司馬 桓魋의 묘이다.”라고 하였다.
或曰
혹자가 물었다.
鼓琴於墓 禮歟
에서 거문고를 타는 것이 입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曰 禮也니라
이다.
계무자季武子증점曾點이 그의 에 기대어 노래하였다.
중니仲尼(공자孔子)는 해와 달처럼 훌륭한 분인데도 환퇴桓魋공자孔子를 훼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죽음에 대비하여 석곽石椁을 만들면서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옛날의 어리석은 사람이다.
余將弔其藏이나 而其骨毛爪齒 旣已化爲飛塵하고 蕩爲冷風矣어든 而況於椁乎
내 장차 그의 무덤에 조문하려 하나 그의 뼈와 털과 손톱과 이빨이 이미 변하여 날아가는 먼지가 되고 모두 사라져 차가운 바람이 되었는데, 하물며 석곽石椁에 있어서이겠는가?
況於從死之臣妾
더구나 그를 따라 죽은 신첩臣妾반함飯含한 패물과 에 있어서이겠는가?
使魋而無知也인댄 余雖鼓琴而歌라도 可也 使魋而有知也인댄 聞余鼓琴而歌하고 知哀樂之不可常 리니 其愚豈不少瘳乎
만일 환퇴桓魋가 죽어 영혼이 없어서 아는 것이 없다면 내가 비록 그의 에서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더라도 괜찮을 것이요, 만일 환퇴桓魋가 영혼이 있어서 아는 것이 있다면 내가 거문고를 타고 노래하는 것을 듣고서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일정할 수 없다는 것과 물건의 변화(죽음)가 신속하다는 것을 알 것이니, 그 어리석음이 어찌 조금 나아지지 않겠는가?”
二三子喟然而歎하고
이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크게 탄식하였다.
乃歌曰 桓山之上 維石嵯峨兮 司馬之惡 與石不磨兮로다
나는 이에 노래하기를 “환산桓山의 위에 돌이 우뚝하니, 사마 환퇴司馬 桓魋의 죄악이 저 돌과 함께 없어지지 않으리라.
桓山之下 維水瀰瀰兮 司馬之藏 與水皆逝兮로다하고 歌闋而去하다
환산桓山의 아래에 물이 넘실넘실 흐르니, 사마 환퇴司馬 桓魋의 무덤이 저 물과 함께 가버렸도다.”라고 하고는 노래를 마치고 떠났다.
나를 따라 유람한 자는 여덟 사람이니, 필중손畢仲孫서환舒煥구창조寇昌朝왕적王適왕휼王遹왕이王肄와 나의 아들 서환舒煥의 아들 언거彦擧였다.
역주
역주1 遊桓山記 : 이 글에 대하여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 18권에 “東坡가 元豐 2년(1079) 정월 그믐날에 畢仲孫․舒煥․寇昌朝․王適․王遹․王肄․舒彦擧와 아들 邁와 함께 泗水 가에서 노닐었는데, 桓山에 올라 石室에 들어가서 道士 戴日祥으로 하여금 雷氏의 거문고를 타게 하고,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을 韻으로 하여 〈遊桓山記〉를 지었다.”라고 보인다.
이때 東坡는 知徐州事로 재임 중이었다. 桓山은 지금 江蘇省 銅山縣 동북쪽 27里에 떨어져 있는데, 산 아래에 춘추시대 宋나라 司馬 桓魋의 묘가 있어서 魋山이라고도 불린다. ‘春水滿四澤 夏雲多奇峰’은 陶淵明이 四時를 읊은 五言絶句詩 가운데 앞의 두 句로, “봄물은 사방 못에 가득하고,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는 뜻이다.
역주2 元豐 : 神宗의 연호로 1078년부터 1085년까지 총 8년간이다.
역주3 雷氏之琴 : 唐나라 때 蜀 지방의 명문인 雷氏世家의 雷威가 제작한 거문고로 雷琴이라고도 칭하는데, 宋나라 사람들이 귀하게 여겼다.
역주4 履霜之遺音 : 履霜은 琴曲인 〈履霜操〉를 이른다. 이 곡은 周나라 尹吉甫의 아들 伯奇가 계모의 중상모략으로 아버지에게 쫓겨난 다음, 마름잎과 연잎으로 옷을 해 입고 아가위를 따먹고 아침마다 서리 위를 배회하면서 아버지에게 쫓겨난 것을 슬퍼하고, 이 곡을 지어 날마다 타다가 결국 河水에 몸을 던져 죽었다 한다.
역주5 宋司馬桓魋之墓 : 司馬는 춘추시대 병권을 관장하는 관직을 이르는데, 漢나라의 太尉, 조선의 兵曹判書와 같다. 桓魋는 춘추시대 宋 景公 때의 卿으로 성질이 사나웠으며, 반란을 도모하다가 토벌을 당해 曹나라로 망명하고, 衛나라와 吳나라를 전전하다가 죽임을 당하여 丘輿(桓山)에 장사 지냈는데,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哀公 14년에 자세히 보인다. 桓魋는 孔子를 죽이려 하여 더욱 惡人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역주6 季武子之喪 曾點倚其門而歌 :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下〉에 “季武子가 병이 위독하였는데, 蟜固가 〈입고 있던〉 齊衰服을 벗지 않고 들어가 만나보고 말하기를 ‘이 道가 장차 없어지려 합니다. 士는 오직 公門(궁문)에서만 齊衰服을 벗는 것입니다.’라고 하니, 季武子가 말하기를 ‘좋지 않은가? 君子는 하찮은 失禮를 표출해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가 죽자, 曾點이 그의 문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季武子寢疾 蟜固不說齊衰而入見 曰 斯道也將亡矣 士唯公門說齊衰 武子曰 不亦善乎 君子表微 及其喪也 曾點倚其門而歌]”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陳澔는 《禮記集說》에서 “季武子는 魯나라 大夫 季孫夙이고, 蟜固는 사람의 성명이다. 曾點은 字가 晳이니, 曾子의 아버지이다. 季武子가 병이 위독할 적에 蟜固가 마침 齊衰의 喪服이 있었는데 凶服(喪服)을 입은 채로 〈들어가〉 문병하고, 또 말하기를 ‘大夫의 문에서는 喪服을 벗어서는 안 되고, 오직 君主의 문에서만 벗는 것이다. 이 禮가 장차 없어지려 하니, 내가 喪服을 입고 온 것은 장차 없어지려 하는 이 禮를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季武子가 내심 불쾌하였으나 겉으로는 그 말을 좋게 여기는 척하며 말하기를 ‘失禮 중에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다 알 수 있으나, 失禮 중에 하찮은 것은 오직 君子만이 표출하여 밝힐 수 있다.’라고 하였다.
季武子는 魯나라 大夫로서 정권을 잡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높이고 두려워하는 대상이었다. 蟜固가 이렇게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을 바꾸고자 해서 禮에 의거하여 행한 것이니, 季武子가 비록 이에 대해 유감이 있었으나 죄를 줄 수 없었다. 曾點이 그의 문에 기대어 노래한 것은 禮가 아니니, 이 또한 狂者의 한 단면일 것이다. 기록한 자는 蟜固가 禮를 보존함을 좋게 여기고 曾點이 禮를 무시한 행동을 비판한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그러나 東坡는 曾點이 문에 기대어 노래한 것은 季武子가 나라의 권력을 전횡한 것을 미워한 것이므로 禮에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긴 것이다.
역주7 仲尼日月也 而魋以爲可得而毁也 : 이 내용은 《論語》 〈子張〉에 “叔孫武叔이 仲尼를 헐뜯자, 子貢이 말하였다. ‘그러지 말라. 仲尼는 훼방할 수 없으니, 他人의 어진 자는 丘陵과 같아 오히려 넘을 수 있지만 仲尼는 해와 달과 같아 넘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비록 스스로 끊고자 하나 어찌 해와 달에 손상이 되겠는가. 다만 자신의 분수를 알지 못함을 보일 뿐이다.’[叔孫武叔毁仲尼 子貢曰 無以爲也 仲尼不可毁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絶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라고 보인다.
桓魋는 孔子를 훼방했을 뿐만 아니라 孔子를 살해하려고까지 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史記》 〈宋微子世家〉에 “景公 25년에 孔子께서 宋나라를 지나가실 적에, 宋나라 司馬 桓魋가 孔子를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자, 孔子께서 微服 차림으로 지나가셨다.[二十五年 孔子過宋 宋司馬桓魋惡之 欲殺孔子 孔子微服去]”라고 보인다.
또 〈孔子世家〉에도 “孔子가 曹나라를 떠나 宋나라로 가셨는데,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禮를 익히고 있었다. 宋나라 司馬 桓魋가 孔子를 죽이려고 하여 그 나무를 뽑아버리자, 孔子께서 그 자리를 떠나셨다. 제자들이 서둘러 떠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孔子께서 이르시기를 ‘하늘이 나에게 德을 주셨으니, 桓魋가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셨다.[孔子去曹適宋 與弟子習禮大樹下 宋司馬桓魋欲殺孔子 拔其樹 孔子去 弟子曰 可以速矣 孔子曰 天生德於予 桓魋其如予何]”라고 보인다.
역주8 死爲石椁 三年不成 : 石椁은 돌로 만든 外棺(덧널)을 이른다.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上〉에 “옛날 夫子(孔子)께서 宋나라에 계실 적에 桓司馬(桓魋)가 스스로 石椁을 만들었는데 3년이 되어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夫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사치스럽게 하는 것은 죽어서 빨리 썩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셨으니, 죽으면 빨리 썩고자 한다는 것은 桓司馬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다.[昔者 夫子居於宋 見桓司馬自爲石椁 三年而不成 夫子曰 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 死之欲速朽 爲桓司馬 言之也]”라고 보인다.
역주9 飯含之貝玉 : 飯含은 殮襲할 적에 亡者의 입에 구슬과 씻은 쌀을 물리는 일을 이른다. 貝玉으로 飯含을 하는 것은 지극히 사치한 것이다.
역주10 物化之無日也 : 物化는 바로 死亡을 이른다. 《莊子》 〈刻意〉에 “聖人은 살아있을 적에는 자연에 맡겨 행동하고 죽으면 만물의 변화를 따른다.[聖人之生也天行 其死也物化]”라고 보인다. 無日은 당장에 이름을 이른다.
역주11 畢仲孫舒煥寇昌朝王適王遹王肄軾之子邁 煥之子彦擧 : 畢仲孫과 寇昌朝와 王肄는 미상이다. 舒煥은 자가 堯文으로 벼슬이 熙州通判에 이르고 熙寧 10년(1077)에 徐州教授로 있었으며, 彦擧는 그의 아들로 재주가 있었다.
王適과 王遹은 兄弟間으로, 王適은 자가 子立이고 越州 臨城 사람인데 蘇轍의 사위이며, 아우 王遹는 자가 子敏인데, 모두 東坡를 존경하고 따랐다. 東坡가 烏臺詩案으로 죄를 얻어 湖州에서 京師로 압송될 적에 친척들과 친구들이 모두 놀라 흩어졌으나, 이들 형제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南都까지 전송하였다.
邁는 東坡의 장자 蘇邁(1059~1119)로 자가 維康이며 蘇軾의 전처 王弗의 소생으로 眉山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은 饒州德興尉와 房州軍事推官, 河間縣令을 역임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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