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之詩不入詩家品題로되 而其論詩處는 興味自遠하니라
予嘗論書
하야 以謂
은 蕭散簡遠
하야 妙在筆畫
왕희지之外
러니
天下翕然以爲宗師나 而종요鍾, 왕희지王왕희지之法이 益微라호라
至于詩
하야도 亦然
하니 과 과 이 蓋亦至矣
러니 而
以英瑋絶世之姿
로 凌跨百代
하니 古今詩人盡廢
라
이태백李,
두자미杜之後
에 詩人繼作
하니 雖間有遠韻
이나 而才不逮意
요 獨
이 發纖穠於簡古
하고 寄至味於澹泊
하야 非餘
두자미子所及也
니라
당唐末
에 이로되 而詩文高雅
하야 猶有承平之遺風
이라
其論詩曰 梅止於酸하고 鹽止於鹹하니 飮食은 不可無鹽梅나 而其美는 常在鹹酸之外라하니라
蓋自列其詩之有得於文字之表者
하고 恨當時不識其妙
하니 予三復其言而悲之
하노라
予嘗聞前輩誦其詩하고 每得佳句妙語하면 反覆數四라야 乃識其所謂하니 信乎표성表聖之言이여
하야 得窺其家集
이라 而
황자사子思篤行高志
하고 爲吏有異材
는 見於墓誌詳矣
일새 予不復論
하고 獨評其詩如此
하노라
공公(동파東坡)의 시詩는 시가詩家의 품제品題에 들지 못하였으나, 시詩를 논한 곳은 흥미興味가 절로 원대하다.
내 일찍이 서법書法을 논하여 이르기를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은 자연스럽고 간고簡古하고 유원幽遠하여 묘함이 필획筆畫의 밖에 있었는데,
당唐나라의 안진경顔眞卿과 유공권柳公權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금의 필법筆法을 집대성하여 모두 발휘해서 서법의 변화를 지극히 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모두 종사宗師로 여겼으나,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법法은 더욱 쇠미해졌다.”라고 하였다.
시詩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니, 소무蘇武와 이릉李陵의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조식曹植과 유정劉楨의 자득함과 도연명陶淵明과 사영운謝靈運의 초연함이 지극하였는데, 이태백李太白(이백李白)과 두자미杜子美(두보杜甫)가 영특하고 아름다워 세상에 뛰어난 자질로 백대百代를 능가하니, 고금의 시인詩人들이 모두 빛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위魏․진시대晉時代 이래로 세속을 뛰어넘는 높은 풍조도 조금씩 쇠퇴하였다.
이태백李太白과 두자미杜子美 이후에 시인들이 뒤이어 나오니, 비록 간혹 원대한 음운音韻이 있었으나 재주가 뜻에 미치지 못하였고, 오직 위응물韋應物과 유종원柳宗元이 섬세함과 농후함을 간고簡古함에서 드러내고 지극한 맛을 담박함에 부쳐서 다른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었다.
당唐나라 말기에 사공도司空圖가 병란의 사이에 기구하였으나, 시문詩文이 고아하여 여전히 태평성대의 유풍이 있었다.
그가 시詩를 논하여 말하기를 “매실은 맛이 실 뿐이고 소금은 맛이 짤 뿐이니, 음식에는 소금과 매실이 없을 수 없으나 그 진정한 맛은 항상 짠맛과 신맛 밖에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시詩 가운데 문자의 밖에서 얻은 것이 있는 24사운四韻의 시詩를 나열하고 당시 사람들이 그 묘미를 알지 못하는 것을 한하였으니, 나는 그의 시詩를 세 번 반복하여 읽으면서 슬퍼하노라.
민중閩中 사람 황자사黃子思(황효선黃孝先)는 경력慶曆과 황우皇祐 연간에 문장에 능한 자라고 이름났다.
내 일찍이 선배들이 그의 시詩를 외는 소리를 듣고, 매양 아름다운 시구詩句와 묘한 시어詩語를 얻으면 서너 번 반복하고서야 비로소 시의 내용을 알았으니, 표성表聖(사공도司空圖)의 말이 진실로 옳다.
진정한 맛이 짠맛과 신맛 밖에 있어서 한 사람이 선창先唱하면 세 사람이 감탄할 수 있는 것이다.
내 이미 그의 아들 기도幾道(황호겸黃好謙)와 손자 사시師是(황식黃寔)와 교유하여 그 집안의 문집을 얻어 보았는데, 황자사黃子思가 행실이 돈독하고 뜻이 높았으며 관리가 되어서 특이한 재주가 있었던 것은 그의 묘지명墓誌銘에 자세히 보이므로 다시 논하지 않고, 나는 오직 그의 시詩를 평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