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看此等書하면 長公據几하야 隨手寫出者로되 却自疎宕而深眇하니라
軾聞足下名 久矣 又於相識處 往往見所作詩文하니 雖不多 亦足以髣髴其爲人矣
尋常不通書問하니 怠慢之罪 猶可闊略이어니와 及足下斬然在疚에도 亦不能以一字奉慰하고 舍弟子由至하야 先蒙惠書로되 又復懶不卽答이라
頑鈍廢禮 一至於此어늘 而足下終不棄絶하고 遞中再辱手書하야 待遇益隆하니 覽之 面熱汗下也로라
足下才高識明하야 不應輕許與人이리니 得非用黃魯直, 秦太虛輩語하야 眞以爲然耶
不肖 爲人所憎이어늘 而二子獨喜見譽하야 하니 未易詰其所以然者
以二子爲妄이면 則不可 遂欲以移之衆口 又大不可也
少年時 讀書作文 專爲應擧而已
旣及進士第 貪得不已하야 又擧制策하니 其實何所有리오마는 而其科號爲直言極諫이라 每紛然誦說古今하고 考論是非하야 以應其名耳
人苦不自知하야 旣以此得하니 因以爲實能之
譊譊至今하야 坐此得罪幾死하니
이니 眞可笑也
이나 世人 遂以軾爲欲立異同 則過矣
妄論利害하고 攙說得失 此正制科人習氣
譬之候蟲時鳥 自鳴自已하니 何足爲損益이리오
每怪時人待軾過重이어늘 而足下又復稱說如此하니 愈非其實이라
得罪以來 深自閉塞하야 扁舟草屨 放浪山水間하야 與樵漁雜處하야 往往爲醉人所推罵로되 輒自喜漸不爲人識이라
平生親友 無一字見及하고 有書與之라도 亦不答하야 自幸庶幾免矣러니
足下又復創相推與하니 甚非所望이라
讁居無事 黙自觀省하야 回視三十年以來所爲하니 多其病者
足下所見 皆故我 非今我也 無乃聞其聲하고 不考其情하야 取其華而遺其實乎
抑將又有取於此也
此事 非相見이면 不能盡이라
自得罪後 不敢作文字하니 此書雖非文이나 然信筆書意하야 不覺累幅하니 亦不須示人이니
必喩此意어다


12. 이단숙李端叔에게 답한 글
이러한 편지를 보면 장공長公이 책상에 앉아서 손 가는 대로 써낸 것인데도, 진실로 소탕疎宕하고 매우 묘하다.
내가 족하足下의 명성을 들은 지가 오래되었고, 또 서로 잘 아는 곳에서 왕왕 당신이 지은 시문詩文을 보았으니, 비록 많이 보지는 않았으나 또한 사람됨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편지를 통해 문안하지 않았으니 나의 태만한 죄는 그래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족하足下가 상중에서 매우 애통해할 적에도 한 글자를 받들어 위로하지 못하였고, 사제 자유舍弟 子由()가 왔을 적에 먼저 그대의 편지를 받았으면서도 또다시 게을러서 즉시 답하지 못했습니다.
미련하고 우둔하여 를 폐한 것이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족하足下는 나를 끝내 버리고 않고 체중遞中(우편郵便)으로 다시 손수 쓴 편지를 보내주어서 나를 더욱 융숭하게 대우해주시니, 편지를 봄에 얼굴이 뜨거워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립니다.
족하足下는 재주가 높고 식견이 밝아서 응당 남을 가볍게 허여하지 않을 터인데, 저를 이토록 융숭히 대우함은 황로직黃魯直(황정견黃庭堅)과 진태허秦太虛(진관秦觀) 등이 칭찬하는 말을 따라서 참으로 그렇다고 여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초한 저는 남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데, 저 두 사람은 유독 나를 좋아하고 칭찬하여 마치 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창촉昌歜양조羊棗를 기호하듯이 하니, 그 이유를 쉽게 따질 수가 없습니다.
두 사람을 망령되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침내 이것을 세상 사람의 입에 옮기고자 한다면 이는 더더욱 불가합니다.
내가 소년시절에 책을 읽고 문장을 지은 것은 오로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이미 진사에 급제한 뒤에도 끊임없이 얻기를 탐하여 또다시 제책制策에 급제하였으니, 그 실제가 무엇이 있겠습니까마는, 이 과거科擧직언극간直言極諫이라고 칭하므로 매양 분분히 고금古今의 일을 외워 말하며 옳고 그른 것을 상고하고 논해서, 직언극간直言極諫이라는 이름에 부응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괴롭게도 자신을 알지 못해서 이미 이런 명목으로 급제하였으니, 인하여 실제로 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시끄럽게 떠들어서 이 때문에 죄를 얻어 거의 죽을 뻔하였습니다.
이른바 “나라 포로가 구설로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니, 참으로 가소롭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소식蘇軾이 다른 뜻을 세우고자 한다.”고 말하는 것은 지나칩니다.
내가 함부로 이해를 논하고 득실을 이것저것 말하는 것은 바로 제과制科에 급제한 사람들의 습관입니다.
비유하면 철따라 우는 벌레와 철따라 우는 새가 스스로 울다가 스스로 그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해롭고 유익할 것이 있겠습니까?
나는 항상 세상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게 중하게 대하는 것을 괴이하게 여겼는데 족하足下께서 또다시 나를 이와 같이 칭찬하니, 이는 더더욱 그 실제가 아닙니다.
나는 죄를 얻은 이래로 깊이 스스로 세상과의 소통을 막고 끊어서 일엽편주를 타거나 짚신을 신고 산수山水 사이에 방랑하여 나무꾼과 어부들과 뒤섞여 거처하면서 왕왕 취객들에게 떠밀리고 욕을 먹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남들이 점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기뻐하였습니다.
평소 친구들이 한 글자도 나에게 소식을 전한 적이 없고, 또한 편지를 보내더라도 답장을 하지 않아서 거의 를 면하게 된 것을 스스로 다행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족하足下께서 또다시 앞장서서 나를 추대하고 허여하니, 이것은 제가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나무에 혹이 있고 돌에 해달무리의 무늬가 있고 서각犀角통문通紋이 있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다 물건의 병통입니다.
나는 귀양살이하면서 일이 없을 적에 묵묵히 자신을 살펴보고 반성하여 30년 이래에 한 짓을 회고해보니, 병통인 것이 많습니다.
족하足下께서 본 것은 다 예전의 나이고 지금의 내가 아니니, 이것은 명성만 믿고 실정을 상고하지 않아서 화려함만 취하고 실제를 버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장차 또 이 병통을 취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이 일은 서로 만나보지 않으면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죄를 얻은 이후로 감히 문자를 짓지 않았는데, 이 편지가 비록 문장은 아니지만 붓 가는 대로 내 의견을 써서 나도 모르게 여러 폭이 되었으니, 또한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이 뜻을 깨달아주기 바랍니다.


역주
역주1 答李端叔書 : 이 글은 蘇軾이 李端叔과 서신만을 주고받는 사이이면서도 지성을 다하여 보낸 편지이다. 당시 蘇軾은 黃州에 있었는데, 편지에 ‘舍弟 子由가 왔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元豐 3년(1080) 5월 이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端叔은 李之儀의 字인데, 문장을 잘하였고 특히 尺牘에 뛰어났다.
역주2 如人嗜昌歜羊棗 : 昌歜은 창포의 뿌리인데, 이것으로 담근 김치를 文王이 즐겨 먹었다고 한다. 羊棗는 고욤나무 열매라고도 하고 작은 대추라고도 하는데 분명하지 않다. 《孟子》 〈盡心 下〉에 “曾子의 아버지 曾晳이 羊棗를 즐겨 먹었는데, 그가 죽은 뒤에 曾子는 차마 羊棗를 먹지 못했다.”라고 하였으며, 朱子의 注에 “羊棗는 열매가 작고 색깔이 검으며 둥그니, 또 羊矢棗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창포 뿌리로 담근 김치와 羊矢棗는 다른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유독 文王과 曾晳만이 좋아하였으므로 자신의 문장을 유독 黃庭堅과 秦觀이 좋아함에 비유한 것이다. 曾晳은 이름이 點이고 晳은 그의 字이다.
역주3 所謂齊虜以口舌得官 : 齊虜는 齊나라의 포로를 가리키는데, 옛날 포로를 노예로 삼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천시하여 齊나라의 포로라고 한 것이며, 口舌은 말을 가리키는데, 곧 특별한 功이 없고 말을 잘하여 벼슬을 얻었음을 이른다. 漢나라를 건국한 高祖 劉邦이 首都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때 齊나라 사람 婁敬이 隴西 지방으로 수자리를 살러 가다가 洛陽에 들러 高祖에게 “洛陽은 천하의 중앙이라서 德이 있으면 통치하기 쉽지만 德이 없으면 망하기도 쉽습니다. 秦나라 땅인 關中 지방은 산이 높고 황하가 띠처럼 감돌고 있어 천하의 요새이니, 이곳에 도읍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高祖가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신하들은 대부분 山東 지방 출신이었으므로 모두 洛陽이 좋다고 대답하였다. 高祖가 謀士인 張良에게 물으니, 張良은 “婁敬의 말이 옳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高祖는 그날 당장 關中에 도읍하기로 하고 이름을 長安이라 하였으며, 婁敬에게 奉春君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劉氏 姓을 하사하였다. 그후 匈奴의 冒頓(묵특)單于가 자주 변방을 침공하자, 高祖는 匈奴의 세력을 정탐하기 위하여 婁敬과 함께 여러 사람들을 匈奴에 보냈는데, 匈奴는 漢나라에서 정탐하러 올 것을 알고 나약한 군사와 쓸모없는 말만을 보여주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匈奴가 약하므로 공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婁敬만은 “이는 匈奴의 속임수이니, 절대로 공격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高祖는 婁敬이 軍의 사기를 꺾는다고 질책하며 “齊나라 노예가 구설로 벼슬을 얻고는 감히 匈奴의 군세를 과장하여 우리 軍의 사기를 저하시킨단 말인가?”라 하고, 그에게 형틀을 씌워 가두고 匈奴로 출정하였다. 그러나 高祖는 平城의 白登山에서 대패하여 포위되었다가 겨우 풀려나자, 곧바로 婁敬을 풀어주고 關內侯로 봉하여 建信侯라 하였다.
역주4 木有癭……以取姸於人 : 癭은 혹으로 나무가 상처가 나서 혹부리가 생기면 사람들이 이것을 베어다가 관상용으로 사용하며, 暈은 해달무리의 무늬로 돌에 이러한 문양이 있으면 역시 관상용 수석으로 이용된다. 犀는 물소의 뿔로 여기에 通紋이 있어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므로 그것을 비유한 것이다. 通紋은 속이 환하게 보이는 문양(무늬)을 이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