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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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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자첨子瞻계자季子 在哀公十年이라
以爲其救之亡 僅十三年爾 계자季子之亡이어늘 何以不諫고하니라
予獨謂 합려闔廬旣已殺왕료王僚而自立한대 逃而去하야 終身焉不入之市하니계자季子已絶人世也久矣
춘추좌씨전춘추좌씨전所稱계자季子云云 妄也
大較춘추좌씨전춘추좌씨전 多浮誇하니 焉知其非以訛춘추좌씨전訛也리오
자첨子瞻 求其說而不得하야계자季子且不死라하니 則又過矣니라
以讓國聞於諸侯하니 則非童子矣
我請退以爲子名하리니 務德而安民하라하고 乃還하니라
이나 其卒 不書於춘추春秋
자서子胥호되 不聽하니오왕之亡形 成矣
하니 方其救也 去之亡 十三年耳어늘 而謂계자季子不知 可乎
且帥師救이라가 不戰而去之하야 以爲敵國名하니계자季子之於 蓋亦少專矣
之明年자서子胥하니 계자季子知國之必亡이어늘 而終無一言於부차夫差 知言之無益也니라
부차자서子胥합려闔廬어늘부차夫差殺之 如皁隷하니 豈獨難於계자季子
烏(嗚)乎悲夫
吾是以부차夫差之不道 至於使계자季子不敢言也로라
소자蘇子
강좌江左諸人 好談자방子房, 계찰季札之賢 有以也夫인저
可與知者論이요 難與俗人言也
연주래계자찬延州來季子贊하니
棄國如遺하야 委蛻而行이라
古之眞人 有化無死로다


09. 연주래 계자延州來 季子에 대한
자첨子瞻이 살펴보기에 계자季子(계찰季札)가 나라를 구원한 일이 노 애공魯 哀公 10년(B.C. 485)에 있었다.
그러므로 자첨子瞻이 “계자季子나라를 구원한 것이 나라가 망한 때와 겨우 13년 차이가 날 뿐인데, 계자季子나라가 망할 줄을 알면서 어찌하여 오왕 부차吳王 夫差에게 간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홀로 생각하건대, 합려闔廬왕료王僚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계자季子가 도성을 떠나 도망하여 종신토록 나라 도읍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니, 계자季子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 세상을 끊은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계자季子가 이리이리 했다.’고 기록한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대체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부황하고 과장된 말이 많으니, 잘못된 말을 가지고 잘못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자첨子瞻이 그 내용을 알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는 “계자季子가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말했으니, 이는 더욱 잘못된 것이다.
노 양공魯 襄公 12년(B.C. 561)에 오자 수몽吳子 壽夢이 죽으니, 연주래 계자延州來 季子는 그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나라를 사양함으로써 제후諸侯들에게 알려졌으니,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애공哀公 10년 겨울에 이르러 나라 자기子期나라를 정벌하자, 계자季子나라를 구원하였는데, 계자季子자기子期에게 이르기를 “두 나라 군주君主을 힘쓰지 않고 힘으로 제후諸侯들을 다투니,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내 청컨대 물러나서 그대에게 승리했다는 명성을 만들어줄 것이니, 그대는 에 힘쓰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하고는 마침내 돌아갔다.
이때는 수몽壽夢이 죽은 지 77년이었는데, 계자季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천 리 멀리 출정하였으니, 계자季子는 어찌 그리도 장수하고 건강하였는가?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춘추春秋》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애공哀公 원년(B.C. 494)에 오왕 부차吳王 夫差나라를 부초夫椒에서 패퇴시키자, 월왕 구천越王 句踐대부 문종大夫 文種으로 하여금 나라 태재 백비太宰 伯嚭를 통하여 나라에게 화친을 청하니, 오왕吳王이 이를 허락하였다.
자서子胥가 이것을 간하였으나 오왕吳王이 듣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나라가 멸망할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계자季子나라에서 열국列國의 음악을 보고는 백 년 전에 그들 나라의 흥망성쇠를 미리 점쳐 알았으니, 그가 나라를 구원한 것이 나라가 멸망한 때와 13년 차이가 날 뿐인데, 계자季子나라가 망할 줄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합려闔廬왕료王僚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을 적에 말하기를 “계자季子가 오더라도 나를 폐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계자季子나라 사람들에게 믿어진 것이고, 그의 말이 그 나라에서 행해진 것이다.
또 군대를 거느리고 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싸우지 않고 떠나와서 적국에게 승리했다는 명예를 이루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계자季子나라에서 또한 다소 전횡을 한 것이다.
계자季子나라를 구원한 다음 해에 자서子胥가 죽었으니, 계자季子나라가 반드시 망할 줄을 알았을 터인데, 끝내 부차夫差에게 한마디 간언諫言도 하지 않았던 것은, 간언諫言을 해도 무익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서子胥합려闔廬패자霸者로 만들었는데 부차夫差자서子胥를 죽이기를 노예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유독 계자季子를 죽이는 것만을 어렵게 여겼겠는가?
아! 슬프다.
나는 이 때문에 부차夫差의 부도덕함이 계자季子로 하여금 감히 간언諫言하지 못하게 한 줄을 아는 것이다.
이에 나(소자蘇子)는 말한다.
연주래 계자延州來 季子장자방張子房은 모두 죽지 않은 자이다.
강좌江左(강동江東)의 여러 사람들이 자방子房계찰季札의 어짊을 말하기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와 논할 수 있고 속인俗人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
연주래계자찬延州來季子贊〉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태백泰伯이 선생(계자季子)에게 모였도다.
헌신짝 버리듯이 나라를 버리고 떠나갔네.
가만히 앉아서 《춘추春秋》를 헤아려보니, 거의 5분의 2를 지냈도다.
옛날의 진인眞人할 뿐 죽지는 않는다네.


역주
역주1 延州來季子贊 : 이 글의 저작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주2 魯襄公十二年 吳子壽夢卒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12년에 보인다. 壽夢은 吳나라 임금 乘의 호이다.
역주3 延州來季子 : 季札을 가리킨 것으로, 延州는 延陵이고 來는 來州로 모두 吳나라의 地名인데 여기에 봉해졌으므로 延州來 季子라 한 것이며, 延陵季子로도 약칭하였다. 季札에 대한 주석은 본서 24권 〈李氏山房藏書記〉에 보인다.
역주4 至哀公十年冬……乃還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哀公 10년에 보인다. 子期는 楚나라 장수 鬪成然의 字이다.
역주5 時去壽夢卒……季子何其壽而康也 : 壽夢이 죽은 해인 襄公 12년(B.C. 561)은 季子가 陳나라를 구원한 해인 哀公 10년(B.C. 485)으로부터 77년 전이고, 壽夢이 죽은 해에 季子가 나라를 양보하였다면 이때 나이가 적어도 15, 6세는 되었을 것이니, 哀公 10년이면 季子의 나이가 90여 세가 되었을 것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哀公之元年……則吳之亡形成矣 :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哀公 元年에 자세히 보인다. 吳王 夫差는 아버지 闔閭가 越王 句踐에게 패전하고 싸움터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자, 吳王이 되어 섶나무를 깔고 자면서 복수심을 불태우고 국력을 키워 越王 句踐과 싸워 대패시키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太宰嚭는 吳나라의 간신 太宰 伯嚭를 이르는데, 楚나라 伯州犁의 손자로 吳나라에 망명 와서 夫差의 신임을 얻어 太宰가 되었다.
子胥는 伍員의 字로 吳나라의 대신이었는데, 이때 越나라를 멸망시키지 않으면 뒤에 吳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諫하였으나, 夫差는 伯嚭의 말을 듣고 越王 句踐과 화의를 맺었다가 뒤에 越王 句踐에게 패해 나라가 멸망하였다.
역주7 季子觀樂於魯 知列國之廢興於百年之前 : 季札이 上國인 魯나라에 聘問 와서 魯나라에 있던 周나라의 樂舞를 다 보고 또 列國의 흥망성쇠를 미리 평하였는바,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襄公 29년(B.C. 544)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魯나라에서 그를 위해 《詩經》의 〈邶風〉․〈鄘風〉․〈衛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고도 심원합니다. 근심하면서도 괴로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에 衛나라 康叔과 武公의 덕이 이와 같았다고 하니, 이 詩는 아마도 〈衛風〉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그를 위해 〈王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습니다. 근심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니, 이는 아마도 周나라가 東遷한 뒤의 詩인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鄭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습니다만, 그 가사에 煩碎함이 너무 심하여 백성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니, 이 나라는 아마도 다른 나라보다 먼저 멸망할 것 같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齊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습니다. 聲音이 성대하여 大國의 풍도가 있어 東海 제후의 모범이 될 만하니, 이는 아마도 姜太公의 나라의 詩인 것 같습니다. 나라의 앞날을 限量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豳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습니다. 관대함이여. 즐거워하되 지나치지 않으니, 이는 아마도 周公이 東征에서 돌아와 지은 詩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秦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이를 일러 夏聲이라 하니, 능히 夏聲을 낸다면 그 聲音이 성대합니다. 성대함이 지극하니, 아마도 周나라의 舊樂인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魏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아름답습니다. 그 소리의 부침이 구성짐이여. 그 가사가 거칠면서도 婉曲하고 그 政令이 험난하면서도 행하기가 쉬우니, 德으로써 이를 보조하였다면 밝은 임금이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唐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생각이 깊습니다. 이는 아마도 陶唐氏 유민들의 詩인 듯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 근심(사려)이 이처럼 深遠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를 위해 〈陳風〉을 노래하게 하자, 季札은 ‘나라에 君主가 없으니 어찌 오래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鄶風〉 이하의 노래에 대해서는 평론하지 않았다.[歌邶鄘衛 曰 美哉淵乎 憂而不困者也 吾聞衛康叔武公之德如是 是其衛風乎 爲之歌王 曰 美哉 思而不懼 其周之東乎 爲之歌鄭 曰 美哉 其細已甚 民弗堪也 是其先亡乎 爲之歌齊 曰 美哉 泱泱乎大風也哉 表東海者 其太公乎 國未可量也 爲之歌豳 曰美哉 蕩乎 樂而不淫 其周公之東乎 爲之歌秦 曰 此之謂夏聲 夫能夏則大 大之至也 其周之舊乎 爲之歌魏 曰 美哉 渢渢乎 大而婉 險而易行 以德輔此 則明主也 爲之歌唐 曰 思深哉 其有陶唐氏之遺民乎 不然 何憂之遠也 非令德之後 誰能若是 爲之歌陳 曰 國無主 其能久乎 自鄶以下無譏焉]”라고 보인다. 그 후 그의 豫言은 모두 적중하였다.
역주8 闔廬之自立也……而言行於其國也 : 季札은 吳王 壽夢의 네 아들 중 막내였는데, 壽夢의 國喪을 마친 다음 國人들이 季子에게 왕위를 넘기려 하였으나, 季札이 시골로 도망을 갔으므로 어쩔 수 없이 장자 諸樊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들 형제들은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줌으로써 결국 季札이 왕위를 이을 수 있도록 서로 약속하여, 諸樊이 죽자 둘째 餘祭가 왕위를 이었으며, 餘祭가 죽자 셋째 餘昧가 왕위를 이었다. 餘昧가 죽자 國人들이 季札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고 하였으나, 季札이 다시 도망갔으므로 어쩔 수 없이 餘昧의 아들 僚가 吳王의 자리에 앉았다.
이에 諸樊의 아들 公子 光이 불만을 품고 吳王 僚 13년(B.C. 514)에 그를 시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闔閭이다. 이 때문에 闔閭가 ‘季子가 오더라도 나를 폐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史記 吳太伯世家》
역주9 延州來季子張子房 皆不死者也 : 張子房은 張良(?~B.C. 168)으로 子房은 그의 字이고 시호는 文成이다. 뛰어난 智略으로 漢 高祖인 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여 그 공이 으뜸이었으나 高祖가 내리는 3만 戶의 봉지를 사양하여 작은 고을인 留侯로 봉해졌으며, 말년에는 온갖 富貴와 權力을 마다하고, 神仙術을 배운다며 淸貧하고 한가하게 소일하였다. 그러므로 東坡는 왕위를 사양한 季子와 張子房을 ‘모두 죽지 않은 자’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10 泰伯之德 鍾於先生 : 泰伯은 太伯으로도 표기한다. 周 太王(古公亶父)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泰伯이 長子이고 仲雍이 둘째이고 막내가 季歷이었다.
太王 때에 商나라가 점차 쇠퇴해지고 周나라는 날로 강대해지자, 太王은 商나라를 치고자 하였으나 泰伯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 季歷이 아들 昌을 낳았는데 聖德이 있자, 太王은 마침내 王位를 季歷에게 전하여 昌에게 미치게 하고자 하였다. 泰伯은 이것을 알고 곧 아우 仲雍과 함께 荊蠻으로 도망하였다.
荊蠻 사람들은 泰伯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천여 호가 넘게 귀의해 와서 그를 받드니, 뒤에 이를 바탕으로 吳나라가 건국되었다. 《史記 吳太伯世家》
季札은 泰伯의 후예이므로 泰伯의 德이 季子에게 모였다고 한 것이다.
역주11 坐閱春秋 幾五之二 : 春秋時代는 B.C. 768년부터 B.C. 476년까지 약 300년이나, 孔子가 《春秋》에 기록한 기간은 242년에 지나지 않으므로, 東坡는 季子가 그 5분의 2인 90여 년을 살았다고 보아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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