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로 以爲其救진陳也는 去오吳之亡이 僅十三年爾니 계자季子知오吳之亡이어늘 何以不諫고하니라
予獨謂 합려闔廬旣已殺왕료王僚而自立한대 逃而去하야 終身焉不入오吳之市하니 蓋계자季子已絶人世也久矣라
춘추좌씨전左춘추좌씨전傳所稱계자季子云云은 妄也라
大較춘추좌씨전左춘추좌씨전傳은 多浮誇하니 焉知其非以訛춘추좌씨전傳訛也리오
자첨子瞻이 求其說而不得하야 謂계자季子且不死라하니 則又過矣니라
我請退以爲子名하리니 務德而安民하라하고 乃還하니라
자서子胥諫호되 不聽하니 則오왕吳之亡形이 成矣라
하니 方其救
진陳也 去
오吳之亡
이 十三年耳
어늘 而謂
계자季子不知 可乎
아
且帥師救진陳이라가 不戰而去之하야 以爲敵國名하니 則계자季子之於오吳에 蓋亦少專矣라
救진陳之明年에 而자서子胥死하니 계자季子知國之必亡이어늘 而終無一言於부차夫差는 知言之無益也니라
부차夫자서子胥以합려闔廬霸어늘 而부차夫差殺之를 如皁隷하니 豈獨難於계자季子乎아
吾是以로 知부차夫差之不道 至於使계자季子不敢言也로라
강좌江左諸人이 好談자방子房, 계찰季札之賢은 有以也夫인저
자첨子瞻이 살펴보기에 계자季子(계찰季札)가 진陳나라를 구원한 일이 노 애공魯 哀公 10년(B.C. 485)에 있었다.
그러므로 자첨子瞻이 “계자季子가 진陳나라를 구원한 것이 오吳나라가 망한 때와 겨우 13년 차이가 날 뿐인데, 계자季子는 오吳나라가 망할 줄을 알면서 어찌하여 오왕 부차吳王 夫差에게 간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홀로 생각하건대, 합려闔廬가 왕료王僚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자, 계자季子가 도성을 떠나 도망하여 종신토록 오吳나라 도읍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니, 계자季子는 이미 오래 전에 인간 세상을 끊은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계자季子가 이리이리 했다.’고 기록한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
대체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부황하고 과장된 말이 많으니, 잘못된 말을 가지고 잘못됨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자첨子瞻이 그 내용을 알려 하였으나 얻지 못하고는 “계자季子가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말했으니, 이는 더욱 잘못된 것이다.
노 양공魯 襄公 12년(B.C. 561)에 오자 수몽吳子 壽夢이 죽으니, 연주래 계자延州來 季子는 그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나라를 사양함으로써 제후諸侯들에게 알려졌으니,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애공哀公 10년 겨울에 이르러 초楚나라 자기子期가 진陳나라를 정벌하자, 계자季子가 진陳나라를 구원하였는데, 계자季子가 자기子期에게 이르기를 “두 나라 군주君主가 덕德을 힘쓰지 않고 힘으로 제후諸侯들을 다투니,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는가?
내 청컨대 물러나서 그대에게 승리했다는 명성을 만들어줄 것이니, 그대는 덕德에 힘쓰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하고는 마침내 돌아갔다.
이때는 수몽壽夢이 죽은 지 77년이었는데, 계자季子가 군대를 거느리고 천 리 멀리 출정하였으니, 계자季子는 어찌 그리도 장수하고 건강하였는가?
그러나 그가 죽은 것이 《춘추春秋》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애공哀公 원년(B.C. 494)에 오왕 부차吳王 夫差가 월越나라를 부초夫椒에서 패퇴시키자, 월왕 구천越王 句踐이 대부 문종大夫 文種으로 하여금 오吳나라 태재 백비太宰 伯嚭를 통하여 오吳나라에게 화친을 청하니, 오왕吳王이 이를 허락하였다.
자서子胥가 이것을 간하였으나 오왕吳王이 듣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오吳나라가 멸망할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계자季子가 노魯나라에서 열국列國의 음악을 보고는 백 년 전에 그들 나라의 흥망성쇠를 미리 점쳐 알았으니, 그가 진陳나라를 구원한 것이 오吳나라가 멸망한 때와 13년 차이가 날 뿐인데, 계자季子가 오吳나라가 망할 줄을 몰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합려闔廬가 왕료王僚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했을 적에 말하기를 “계자季子가 오더라도 나를 폐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계자季子의 덕德이 오吳나라 사람들에게 믿어진 것이고, 그의 말이 그 나라에서 행해진 것이다.
또 군대를 거느리고 진陳나라를 구원하러 갔다가 싸우지 않고 떠나와서 적국에게 승리했다는 명예를 이루게 하였으니, 그렇다면 계자季子가 오吳나라에서 또한 다소 전횡을 한 것이다.
계자季子가 진陳나라를 구원한 다음 해에 자서子胥가 죽었으니, 계자季子는 오吳나라가 반드시 망할 줄을 알았을 터인데, 끝내 부차夫差에게 한마디 간언諫言도 하지 않았던 것은, 간언諫言을 해도 무익할 줄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서子胥가 합려闔廬를 패자霸者로 만들었는데 부차夫差가 자서子胥를 죽이기를 노예와 같이 하였으니, 어찌 유독 계자季子를 죽이는 것만을 어렵게 여겼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 부차夫差의 부도덕함이 계자季子로 하여금 감히 간언諫言하지 못하게 한 줄을 아는 것이다.
연주래 계자延州來 季子와 장자방張子房은 모두 죽지 않은 자이다.
강좌江左(강동江東)의 여러 사람들이 자방子房과 계찰季札의 어짊을 말하기 좋아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는 진리를 아는 자와 논할 수 있고 속인俗人과는 더불어 말하기 어렵다.
〈연주래계자찬延州來季子贊〉을 지으니, 다음과 같다.
태백泰伯의 덕德이 선생(계자季子)에게 모였도다.
가만히 앉아서 《춘추春秋》를 헤아려보니, 거의 5분의 2를 지냈도다.
옛날의 진인眞人은 화化할 뿐 죽지는 않는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