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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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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勤上人之詩 必不足傳이로되 而長公 却於歐公之交上 作一烟波議論하니라
翟公大書其門曰 一死一生 乃知交情이요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이라하니 世以爲口實이라
이나 余嘗薄其爲人하야 以爲客則陋矣어니와 而公之所以待客者 獨不爲小哉아호라
好士하야 爲天下第一이라
士有一言中於道 不遠千里而求之하야 甚於士之求公이라
以故 盡致天下豪傑하야 自庸衆人으로 以顯於世者 固多矣
士之負公者 亦時有之 蓋嘗慨然太息하야 以人之難知 爲好士者之戒하니
意公之於士 自是小倦이러니
할새 予往見之호니 則猶論士之賢者하야 惟恐其不聞於世也하고
至於負己者하야는 則曰 是罪在我 非其過라하니라
翟公之客 負之於死生貴賤之間이요 而公之士 叛公於瞬息俄頃之際어늘 翟公 罪客이로되 而公罪己하야 與士益厚하니 賢於古人 遠矣
公不喜佛老로되 其徒有治詩書하고 學仁義之說者 必引而進之
佛者惠勤 從公遊三十餘年하니 公嘗稱之하야 爲聰明才智有學問者 尤長於詩
公薨于汝陰이어늘 予哭之于其室하고 其後見之 語及於公이면 未嘗不涕泣也
固無求於世 而公 又非有德於勤者 其所以涕泣不忘 豈爲利也哉리오
予然後 益知勤之賢하니 使其得列於士大夫之間하야 而從事於功名이면 其不負公也審矣리라
할새 出其詩若干篇하야 求予文以傳於世하니
予以爲 詩 非待文而傳者也어니와 若其爲人之大略 則非斯文이면 莫之傳也라하노라


07. 《전당근상인시집錢塘勤上人詩集》의
근상인勤上人는 반드시 세상에 전할 만하지 못하였으나, 장공長公이 다만 구양공歐陽公과의 교유에서 한 연파烟波(아름다운 경치)의 의논을 만들어낸 것이다.
옛날에 책공翟公정위廷尉에서 파직되자 빈객들이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등용되자 빈객들이 다시 찾아오려고 하였다.
책공翟公은 그의 문에 크게 써 붙이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귀는 을 알 수 있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사귀는 이 나타난다.’고 하니, 세상에서는 이것을 화젯거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책공翟公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겨, ‘빈객들은 누추하지만 책공翟公이 빈객을 대우한 것도 어찌 덕량德量이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고 태자태사故 太子太師구양공歐陽公이 선비를 좋아하여 세상의 제일이 되었다.
선비 중에 한마디 말이라도 에 맞는 것이 있으면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서 선비들이 을 찾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호걸들을 모두 초치하여, 용렬한 중인衆人으로부터 세상에 드러난 자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많았다.
그러나 때로는 을 저버린 선비도 있으니, 은 일찍이 개연慨然히 크게 한숨을 쉬면서 사람을 알기 어렵다는 것으로 선비를 좋아하는 자들의 경계로 삼았었다.
나는 이 선비에 대하여 이후로는 다소 싫증을 낼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물러나 영수潁水 가에서 한가롭게 지내실 적에 찾아가 뵈니, 여전히 어진 선비들을 논하여 행여 그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자신을 저버린 자에 이르러는 말씀하기를 “이는 책임이 나에게 있고, 그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책공翟公문객門客들은 책공翟公사생死生귀천貴賤의 사이에서 저버렸고, 의 선비들은 을 눈 깜짝할 사이에서 배반하였는데, 책공翟公문객門客들을 탓하였으나 은 자신에게 죄를 돌려 선비들과 더욱 돈독하였으니, 옛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무리 중에 시서詩書를 전공하고 인의仁義의 말을 배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끌어 나오게 하였다.
불자佛者혜근惠勤을 따라 교유한 지 30여 년이었는데, 은 일찍이 그를 “총명하고 재주 있으며 학문이 있는 자요, 특히 를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여음汝陰에서 별세하였는데 나는 혜근惠勤의 방으로 찾아가 하였고, 그 후 혜근惠勤을 만나 볼 때마다 말이 에게 미치면 혜근惠勤은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혜근惠勤은 진실로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고, 은 또 혜근惠勤에게 은덕을 베푼 적이 있지 않았으니, 그가 눈물을 흘리며 을 잊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익 때문이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더욱 혜근惠勤의 어짊을 알았으니, 가령 그가 사대부士大夫의 사이에 서서 공명功名에 종사하였다면 을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희령熙寧 7년(1074)에 내가 전당錢塘으로부터 고밀高密로 부임하려 할 적에, 혜근惠勤이 자신이 지은 약간 편을 내어놓고 나에게 서문序文을 구하여 세상에 전하려 하였다.
내 생각하건대 ‘서문序文을 기다려 전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사람됨의 대략으로 말하면 이 글이 아니면 전할 수 없다.’고 여긴다.


역주
역주1 錢塘勤上人詩集序 : 王文誥의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 의하면 이 글은 熙寧 7년(1074)에 쓰여졌다. 錢塘은 杭州를 이르며 勤上人은 東坡의 벗인 惠勤 승려를 이른다. 惠勤은 본래 歐陽脩를 사사하였는데 東坡와 알게 된 뒤에 文字之交를 맺었다.
《東坡志林》에 “처음 내가 歐陽公을 알지 못했을 적에 이미 그의 詩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뒤에 자주 歐陽公을 뵈면서 惠勤의 사람됨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惠勤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였는데, 熙寧 4년 辛亥에 杭州로 부임한 지 한 달이 되기 전인 섣달 그믐날에 惠勤을 孤山 아래에서 만나보았으니, 이때 내가 지은 詩에 이른바 ‘외로운 산에 외로이 떨어져서 누구를 그리워하는가? 道人은 道가 있으니, 마음이 외롭지 않아라.’라는 구절이 이것을 읊은 것이다. 다음해 윤7월에 歐陽公이 돌아가시자 惠勤 또한 孤山 아래에 은거하고 다시는 나다니지 않았다.[始余未識歐公 則已見其詩矣 其後屢見公 得勤之爲人 然猶未識勤也 熙寧四年辛亥 到官不及月 以臘日見勤于孤山下 則余詩所謂 孤山孤絶誰肯慮 道人有道心不孤者也 其明年閏七月 公薨于汝陽 而勤亦退老于孤山下 不復出游矣]”라고 보인다.
熙寧 7년 東坡가 杭州通判에서 知密州事로 부임할 적에 惠勤이 자신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기를 요구하므로 지은 것이다.
역주2 昔翟公罷廷尉……交情乃見 : 翟公은 前漢 武帝 때 문신으로 邽縣(지금의 陝西省 渭南市) 사람인데 이름은 자세하지 않다. 武帝 元光 연간에 廷尉 벼슬에 올랐는데, 廷尉는 漢나라 관직 가운데 高位職인 九卿의 하나로 法律을 담당하였다.
이 내용은 《史記》 〈汲鄭列傳〉에 “汲黯과 鄭當時의 어짊으로도 권세가 있으면 빈객이 열 배가 되고 권세가 없으면 빈객이 없어지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이겠는가. 下邽의 翟公에 대하여 전하는 말이 있다.
처음 翟公이 廷尉가 되었을 적에는 빈객들이 문전에 넘쳐났으나 廷尉에서 파직되자 빈객들이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어 문밖에 참새 그물을 칠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 후 다시 등용되자 빈객들이 다시 찾아오려고 하였다.
이에 翟公은 그의 문에 크게 써 붙이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귀는 정을 알 수 있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사귀는 정이 나타난다.’라고 하였다.[夫以汲鄭之賢 有勢則賓客十倍 無勢則否 况衆人乎 下邽翟公有言 始翟公爲廷尉 賓客闐門 及廢 門外可設雀羅 翟公復爲廷尉 賓客欲往 翟公乃大署其門曰 一死一生 乃知交情 一貧一富 乃知交態 一貴一賤 交情乃見]”라고 보인다.
역주3 故太子太師歐陽公 : 歐陽脩는 熙寧 4년(1071)에 太子少師로 致仕하고 다음해에 죽었는데, 곧바로 太子太師로 추증되었다.
역주4 其退老於潁水之上 : 潁水는 淮河의 가장 큰 지류로 安徽省 서북부와 河南省 동부에 걸쳐 흐른다. 歐陽脩는 致仕하고 潁州(지금의 安徽省 阜陽縣)에서 여생을 보냈다.
역주5 熙寧七年……將赴高密 : 高密은 密州로 지금의 山東省에 있었다. 東坡는 熙寧 7년에 杭州通判에서 知密州事로 임명되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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