勤上人之詩는 必不足傳이로되 而長公이 却於歐公之交上에 作一烟波議論하니라
翟公大書其門曰 一死一生에 乃知交情이요 一貧一富에 乃知交態요 一貴一賤에 交情乃見이라하니 世以爲口實이라
然이나 余嘗薄其爲人하야 以爲客則陋矣어니와 而公之所以待客者는 獨不爲小哉아호라
士有一言中於道면 不遠千里而求之하야 甚於士之求公이라
以故로 盡致天下豪傑하야 自庸衆人으로 以顯於世者히 固多矣나
士之負公者 亦時有之라 蓋嘗慨然太息하야 以人之難知로 爲好士者之戒하니
而
할새 予往見之
호니 則猶論士之賢者
하야 惟恐其不聞於世也
하고
至於負己者하야는 則曰 是罪在我요 非其過라하니라
翟公之客은 負之於死生貴賤之間이요 而公之士는 叛公於瞬息俄頃之際어늘 翟公은 罪客이로되 而公罪己하야 與士益厚하니 賢於古人이 遠矣라
公不喜佛老로되 其徒有治詩書하고 學仁義之說者면 必引而進之라
佛者惠勤이 從公遊三十餘年하니 公嘗稱之하야 爲聰明才智有學問者요 尤長於詩라
公薨于汝陰이어늘 予哭之于其室하고 其後見之에 語及於公이면 未嘗不涕泣也라
勤은 固無求於世요 而公은 又非有德於勤者니 其所以涕泣不忘이 豈爲利也哉리오
予然後에 益知勤之賢하니 使其得列於士大夫之間하야 而從事於功名이면 其不負公也審矣리라
予以爲 詩는 非待文而傳者也어니와 若其爲人之大略은 則非斯文이면 莫之傳也라하노라
근상인勤上人의 시詩는 반드시 세상에 전할 만하지 못하였으나, 장공長公이 다만 구양공歐陽公과의 교유에서 한 연파烟波(아름다운 경치)의 의논을 만들어낸 것이다.
옛날에 책공翟公이 정위廷尉에서 파직되자 빈객들이 한 사람도 찾아오는 자가 없었는데, 그 후 다시 등용되자 빈객들이 다시 찾아오려고 하였다.
책공翟公은 그의 문에 크게 써 붙이기를 ‘한 번 죽고 한 번 삶에 사귀는 정情을 알 수 있고, 한 번 가난하고 한 번 부유함에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한 번 귀하고 한 번 천함에 사귀는 정情이 나타난다.’고 하니, 세상에서는 이것을 화젯거리로 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찍이 책공翟公의 사람됨을 박하게 여겨, ‘빈객들은 누추하지만 책공翟公이 빈객을 대우한 것도 어찌 덕량德量이 작은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였다.
고 태자태사故 太子太師인 구양공歐陽公이 선비를 좋아하여 세상의 제일이 되었다.
선비 중에 한마디 말이라도 도道에 맞는 것이 있으면 천 리를 멀다 않고 찾아가서 선비들이 공公을 찾는 것보다도 더 심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의 호걸들을 모두 초치하여, 용렬한 중인衆人으로부터 세상에 드러난 자에 이르기까지 진실로 많았다.
그러나 때로는 공公을 저버린 선비도 있으니, 공公은 일찍이 개연慨然히 크게 한숨을 쉬면서 사람을 알기 어렵다는 것으로 선비를 좋아하는 자들의 경계로 삼았었다.
나는 공公이 선비에 대하여 이후로는 다소 싫증을 낼 것이라고 여겼었는데,
물러나 영수潁水 가에서 한가롭게 지내실 적에 찾아가 뵈니, 여전히 어진 선비들을 논하여 행여 그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까 염려하였고,
자신을 저버린 자에 이르러는 말씀하기를 “이는 책임이 나에게 있고, 그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책공翟公의 문객門客들은 책공翟公을 사생死生과 귀천貴賤의 사이에서 저버렸고, 공公의 선비들은 공公을 눈 깜짝할 사이에서 배반하였는데, 책공翟公은 문객門客들을 탓하였으나 공公은 자신에게 죄를 돌려 선비들과 더욱 돈독하였으니, 옛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공公은 불佛․노老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무리 중에 시서詩書를 전공하고 인의仁義의 말을 배우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이끌어 나오게 하였다.
불자佛者인 혜근惠勤은 공公을 따라 교유한 지 30여 년이었는데, 공公은 일찍이 그를 “총명하고 재주 있으며 학문이 있는 자요, 특히 시詩를 잘 한다.”고 칭찬하였다.
공公이 여음汝陰에서 별세하였는데 나는 혜근惠勤의 방으로 찾아가 곡哭하였고, 그 후 혜근惠勤을 만나 볼 때마다 말이 공公에게 미치면 혜근惠勤은 일찍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혜근惠勤은 진실로 세상에 바라는 것이 없고, 공公은 또 혜근惠勤에게 은덕을 베푼 적이 있지 않았으니, 그가 눈물을 흘리며 공公을 잊지 못하는 것이 어찌 이익 때문이겠는가?
나는 그런 뒤에야 더욱 혜근惠勤의 어짊을 알았으니, 가령 그가 사대부士大夫의 사이에 서서 공명功名에 종사하였다면 공公을 저버리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다.
희령熙寧 7년(1074)에 내가 전당錢塘으로부터 고밀高密로 부임하려 할 적에, 혜근惠勤이 자신이 지은 시詩 약간 편을 내어놓고 나에게 서문序文을 구하여 세상에 전하려 하였다.
내 생각하건대 ‘시詩는 서문序文을 기다려 전해지는 것이 아니지만, 그 사람됨의 대략으로 말하면 이 글이 아니면 전할 수 없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