蘇公이 以繁而曲으로 爲守하고 以簡而直으로 爲決勝하니 未盡兵之情하니라
嘗讀
하야 得軍旅
러니 其後
에 讀
하야 又得管子所以變周之制
로라
故로 其爲法이 要以不可敗而已러니 至於桓文하야는 非決勝이면 無以定霸라
故로 其法이 在必勝하니 繁而曲者는 所以爲不可敗也요 簡而直者는 所以爲必勝也니라
萬之有二千하고 二千之有五百하야 其數奇而不齊하니 唯其奇而不齊라 是以로 知其繁且曲也로라
使天度而無奇면 則千載之日을 雖婦人孺子라도 皆可以坐而計언마는 唯其奇而不齊라 是故로 巧曆도 有所不能盡也니라
夫以萬二千五百人으로 而均之八陣之中이면 宜其有奇而不齊者라
是以
로 多爲之曲折
하야 以盡其數
하고 以極其變
하야 하야 各有條理
라
故로 三代之興에 治其兵農軍賦호되 皆數十百年而後에 得志於天下하니라
自周之亡
으로 秦漢陣法
이 不復三代
러니 其後
에 하고 以爲可用以取天下
라
然이나 相持數歲에 魏人不敢決戰하고 而孔明亦卒無尺寸之功하니 豈八陣者는 先王所以爲不可敗요 而非以逐利爭勝者邪리오
三分其國하야 以爲三軍호되 五人爲軌하야 軌有長하고 十軌爲里하야 里有司하고 四里爲連하야 連有長하고 十連爲鄕하야 鄕有鄕良人하고 五鄕一帥하야 萬人而爲一軍하니라
하야 三軍三萬人
이 如貫繩
하고 如畫棊局
하야 疏暢洞達
하니 雖有智者
라도 無所施其巧
라
故로 其法令簡一하고 而民有餘力하야 以致其死하니라
昔者에 嘗讀左氏春秋하고 以爲丘明이 最好兵法이라호라
蓋三代之制 至於列國
하야도 猶有存者
는 以區區之鄭
으로 而
이 見於其書
일새라
及至管仲相桓公
하야 南伐楚
하고 北伐孤竹
하고 하야 威震天下
로되 而其軍壘陣法
이 不少槪見者
는 何哉
오
蓋管仲이 欲以歲月服天下라 故로 變古司馬法하야 而爲是簡略速勝之兵이라
後
에 할새 이 敎夫差以三萬人
으로 壓晉壘而陣
호되 百人爲行
하고 百行爲陣
하야 陣皆徹行
하야 無有隱蔽
하고 援桴而鼓之
하야 勇怯盡應
하야 三軍皆譁
한대
晉師大駭하야 卒以得志하니 由此觀之컨대 不簡而直이면 不可以決勝이라
深惟後世不達繁簡之宜하야 以取敗亡하니 而三代什伍之數와 與管子所以治齊之兵者를 雖不可盡用이나 而其近於繁而曲者로 以之固守하고 近於簡而直者로 以之決戰이면 則庶乎其不可敗요 而有所必勝矣리라
소공蘇公은 군제軍制 가운데 내용이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자세)한 것을 수비하는 방법으로 여기고, 간결하여 분명하고 알기 쉬운 것을 결승하는 방법으로 여겼으니, 병법兵法의 실정을 다하지 못하였다.
내가 일찍이 《주관周官》과 《사마법司馬法》을 읽고서 군려軍旅(군대軍隊)에 있어 십오什伍의 수數를 알았는데, 그 뒤에 관이오管夷吾(관중管仲)의 책을 읽고서 또 《관자管子》가 주周나라의 제도를 변경한 것임을 알았다.
왕자王者의 군대는 부득이하여 출동하고, 적을 이기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군대를 운용하는 방법이 요컨대 적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음에 있을 뿐인데, 제 환공齊 桓公과 진 문공晉 文公에 이르러서는 승리를 결단하지 않으면 패업霸業을 이룩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방법이 필승必勝에 있었으니, 군제軍制 가운데 내용이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한 것은 적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게 하려는 것이요, 간결하여 분명한 것은 필승을 하려는 것이었다.
주周나라의 군제軍制는 12,500명을 1군軍으로 삼았다.
1만에 2천이 있는 것과 2천에 5백이 있는 것은 그 숫자가 남아서 똑 고르지 않으니, 오직 남아서 똑 고르지 않기 때문에 그 번다하고 위곡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하늘의 도수度數인 360을 12방위에 똑같이 배열하여 한 방위가 30을 얻는 것은 이것이 그 바른 수(정수正數)이고, 5일에 4분의 1이라는 것은 이것이 그 남는 수(기수奇數)이다.
만일 하늘의 도수度數에 이 남는 수가 없다면 천 년의 날짜를 비록 부인과 어린아이라도 앉아서 계산할 수 있겠지만, 남아서 똑 고르지 않기 때문에 역법曆法에 공교로운 자도 다 알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章과 회會, 통統과 원元을 만들어서 그 수를 다하고 그 변화를 지극히 한 것이다.
《사마법司馬法》에 이르기를 “5명을 오伍로 만들고, 5오伍를 양兩으로 만들고, 12,500명을 1군軍으로 만든다.”라고 하였는데, 250명 중에서 10분의 3을 취하여 기병奇兵(유격대)으로 만들고, 나머지 10분의 7을 정병正兵으로 만들어서 4기奇와 4정正의 8진陣이 생겨난다.
12,500명을 가지고 8진陣의 가운데에 똑 고르게 배합한다면 여기에 남는 것이 있어 똑 고르지 않음이 당연하다.
이 때문에 많은 곡절을 만들어서 그 수를 다하고 그 변화를 다하여 서로 연결되고 엉켜 있어서 각각 조리가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대三代가 흥성했을 적에 병兵과 농農, 군軍과 부賦를 다스렸으나 모두 수십 년 내지 혹은 백 년이 지난 뒤에야 뜻을 얻어 천하天下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周나라가 망한 이후로 진秦․한漢의 진법陣法은 삼대三代의 제도를 회복하지 못했는데, 그 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이 홀로 남겨진 제도를 알고서 이것을 이용하여 천하天下를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촉한蜀漢과 위魏의 양군兩軍이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하면서, 위魏나라 사람들은 감히 결전하지 못하였고 제갈공명諸葛孔明 또한 끝내 한 치, 한 자의 공도 세우지 못했으니, 아마도 8진陣은 선왕先王께서 적敵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게 한 것이요, 이익을 좇고 승리를 다투게 한 것은 아니었는가 보다.
그런데 관중管仲이 군대를 통제한 것으로 말하면 분명하여 알기 쉽다고 이를 수 있다.
나라를 셋으로 나누어서 삼군三軍을 만들었는데, 5명을 궤軌로 하여 궤軌에는 장長을 두고, 10궤軌를 이里로 하여 이里에는 사司를 두고, 4리里를 연連으로 하여 연連에는 장長을 두고, 10련連을 향鄕으로 하여 향鄕에는 향량인鄕良人을 두고, 5향鄕을 1수帥로 하여 1만 인萬 人을 1군軍으로 편제하였다.
그리하여 환공桓公은 이 가운데 한 군軍를 거느리고 고자高子와 국자國子는 두 군軍을 거느려서 삼군三軍의 3만 명이 마치 끈으로 꿴 것과 같고 바둑판을 그린 것과 같아서, 소창疏暢하고 통달하여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그 공교로운 계책을 쓸 수 없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법령이 간결하고 한결같으며 백성들이 여력이 있어서 사력을 다 바쳤던 것이다.
옛날 내가 일찍이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읽고 ‘좌구명左丘明이 가장 병법兵法을 좋아하였다.’라고 생각하였다.
삼대三代의 제도가 열국列國에 이르러서도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은 하찮은 정鄭나라의 어리진魚麗陣과 아진鵞陣․관진鸛陣이 이 책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남쪽으로 초楚나라를 정벌하고 북쪽으로 고죽국孤竹國을 정벌하고 제후諸侯들을 규합하여 위엄이 천하를 진동하였으나, 그 군루軍壘와 진법陣法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아마도 관중管仲이 1년 또는 몇 달 안에 천하를 복종시키고자 해서 옛날 《사마법司馬法》을 변경하여 이처럼 간결하고 속전속결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었던 듯하다.
그 뒤에 오吳나라와 진晉나라가 황지黃池에서 맹주盟主의 자리를 놓고 다툴 적에 왕손웅王孫雄이 오왕 부차吳王 夫差에게 3만 명을 거느리고 진군晉軍의 보루를 압박하여 진陣을 치되, 100명을 1행行으로 만들고 100행行을 1진陣으로 만들어서 진陣이 모두 행行으로 통하여 은폐되는 바가 없게 하고, 북채를 당겨 북을 쳐서 용감한 병사와 겁쟁이 병사가 모두 싸움에 응하게 하여 삼군三軍이 모두 시끄럽게 떠들며 기세를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진晉나라 군대가 크게 놀라서 오吳나라가 끝내 뜻을 얻어 승리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건대 군제軍制가 간결하고 분명하지 않다면 승리를 결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깊이 생각하건대, 후세에서는 번다하고 간결한 군제軍制의 마땅함을 알지 못해서 패망을 취하였으니, 삼대三代의 십오什伍의 숫자와 관자管子(관중管仲)가 제齊나라의 군대를 다스린 것을 비록 다 따를 수는 없으나, 번다繁多하여 위곡委曲함에 가까운 제도를 가지고 굳게 나라를 지키고, 간결하여 분명함에 가까운 제도를 가지고 결전을 한다면, 거의 상대방이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을 것이요, 반드시 승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