間按
소씨蘇氏兄弟議論文章
이 自
서한西漢以來
로 當爲天仙
이나 獨於敍事處
에 不得
法門
이라
此碑記는 乃사마공행장公應制者니 較사마공행장公所爲사마공행장司馬公사마공행장狀하면 似不能盡所欲言然하야 사마공행장行文特略矣니라
에 朝廷淸明
하고 하니 民安其生
하야 風俗一變
이라
異時薄夫鄙人이 皆洗心易德하야 務爲忠厚하고 人人自重하야 恥言人過하니라
중국中國無事
하야 四夷稽首請命
이로되 惟
이 叛服不常
하야 懷毒自疑
하야數入爲寇
어늘
上命諸將
하사 按兵不戰
하야 示以形勢
러니 不數月
에 生致
대수령大首領闕下
하며 하며 而
서강西羌이 以其族萬人
으로 來降
하니라
凡上所欲
은 不求而獲
하고 而其所惡
는 不麾而去
하니 天下曉然知天意與上合
하야 庶幾復見至治之成
하야 家給人足
하고 刑措不用
하야 如
間也
하니라
或以問臣軾호되 上與太皇太后 安所施設而及此오 臣軾對曰
今
이 躬信順以先天下
하시고 而用
사마공司馬公하야 以致天下士
하야 應是
矣
시니라
曰
사마공公以文章名於世
하고 而以忠義自結人主
하니 朝廷知之
는 可也
어니와 四方之人
이 何自知之
며 士大夫知之
는 可也
어니와 農商走卒
이 何自知之
며 中國知之
는 可也
어니와 이 何自知之
오
方其
에 하고 하야 其與民相忘也久矣
로되 而名震天下
하야 如雷霆
하고 如河漢
하야 如家至而日見之
라
聞其名者는 雖愚無知 如婦人孺子하고 勇悍難化 如軍伍夷狄이요 以至於姦邪小人으로 雖惡其害己하야 仇而疾之者라도 莫不斂衽變色하야 咨嗟太息하고 或至於流涕也하니라
에 하니 民知其與公善也
하고 所在
에 數千人
이 聚而號呼於
사마승상馬首曰 寄謝
사마승상司馬丞相하라
愼毋去朝廷하고 厚自愛하야 以活百姓이라하니 如是者 蓋千餘里不絶이라
至경사京師하야 聞士大夫言호니 公初入朝에 民擁其馬하야 至不得行이요 衛士見公하고 擎跽流涕者 不可勝數어늘 公懼而歸낙양洛이라하니라
요遼人, 서하夏人이 遣使入朝하고 與吾使至虜中者면 虜必問사마공公起居하고 而요遼人은 勅其邊吏하야 曰 中國에 相사마공司馬矣니 愼毋生事開邊隙하라하니라
其後에 公薨하니 경사京師之民이 罷市而往弔하고粥衣以致奠하고 巷哭以過車者 蓋以千萬數하니라
조첨瞻等旣還에 皆言民哭公哀甚하야 如哭其私親하고 四方來會葬者 蓋數萬人이라하고
匹夫而能動天은 亦必有道矣니 非至誠一德이면 其孰能使之리오
예기記曰 惟天下之至誠이라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이면 則能盡人之性이요
或以千金與人而人不喜로되 或以一言使人而人死之者는 誠與不誠故也요 稽天之潦 不能終朝로되 而一綫(線)之溜 可以達石者는 一與不一故也라
誠而一은 古之聖人이 不能加毫末於此矣어든 而況公乎아
故로 臣論公之德이 至於感人心, 動天地하야 巍巍如此하고 而蔽之以二言하면 曰誠, 曰一이라하노라
公
은 諱
광光이요 字君實
이요 其先
은 人
이니 之後
라
王之裔孫
이 始葬今
섬주陝州夏縣涑水鄕
하니 子孫因家焉
이라
曾祖諱
정政은 以五代衰亂
이라하야 不仕
러니 贈
태자태보太子太保하고 祖諱
현炫은 擧進士試
하야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終於
부평현령令이러니 贈
태자태부太子太傅하고 考諱
지池는 間名臣
으로 終於兵部
비서성교서랑郞中, 天章閣待制
러니 贈
태자태보太師溫國公
하니라
曾祖妣薛氏와 祖妣皇甫氏와 妣聶氏는 皆封온국태부인溫國太夫人하니라
公始以
로 事
인종황제仁宗皇帝하야 至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하고 知
간원諫院이러니 하니라
事
영종황제英宗皇帝하야 爲諫議大夫龍圖閣直學士
하야 과 라
事
신종황제神宗皇帝하야 爲
한림학사翰林學士,
어사중승御史中丞이러니 하고
及
이라하니 公首言其害
하야 以身爭之
하니 當時士大夫不附
왕안석安石하야 言新法不便者
는 皆倚公爲重
이라
帝以公爲
추밀부사樞密副使호되 公以言不行
이라하야 不受命
한대 乃
하고 遂以留司御史臺及
제거숭복궁提擧崇福宮으로 退居于
낙양洛이 十有五年
하니라
方議取士擇
수령守令감사監司以養民
하야 期於富而敎之
하야 凜凜嚮至治矣
러니 而公臥病
하야 以
하니 享年六十八
이라
二聖이 皆臨其喪하야 哭之哀甚하시고 輟視朝하니라
贈太師溫國公하고 襚以一品禮服하고 諡曰문정文正이라하고 官其親屬十人하니라
公娶
장씨張氏하니 之女
로 封
청하군군淸河郡君이러니 先公卒
하야 追封
온국부인溫國夫人하니라
子三人이니 동童, 당唐은 皆早亡하고 강康은 今爲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이요 孫二人은 식植, 환桓이니 皆승봉랑承奉郞이라
以원우元祐二年正月辛酉에 葬于섬주陝之夏縣涑水南原之조촌晁村하니
上以御篆으로 表其墓道하야 曰忠淸粹德之碑라하시고 而其文을 以命臣軾하시니라
臣
이 蓋嘗爲公
이러니 而端明殿學士
이 取以志其墓矣
라
議者徒見上與太신종황제皇太后進公之速과 用公之盡하고 而不知신종황제神宗皇帝知公之深也라
自士庶人으로 至于卿大夫히 相與爲賓師朋友하야 道足以相信이로되 而權不足以相休戚이면 然猶同己則親之하고 異己則疏之하야
未有聞過而喜하고 受誨而不怒者也어든 而況於君臣之間乎아
書數十上
하야 皆盡言不諱
하니 蓋自敵以下
로 所不能堪
이로되 而先帝安受之
하사 非特不怒而已
요 乃欲以爲
하시고 하시니 不深知公
이면 而能如是乎
아
二聖之知公也는 知之於旣同이요 而先帝之知公也는 知之於方異라
昔
에 寢疾
에 告其子
曰
이 專制
하남河南十四年矣
라
諸將
이 皆莫能敵
이요 惟
이 可以制之
일새 我故不貴
하고 留以遺汝
라하고
而唐太
고종宗亦謂
고종高宗호되 汝於
에 無恩
일새 我今責出之
하니 汝當授以
복야僕射라하고 乃出
이적勣爲
첩주도독都督하니라
夫齊神武, 唐太宗은 雖未足以比隆先帝요 而紹宗與이적勣도 亦非公之流라 然이나 古之人君이 所以爲其子孫長計遠慮者 類皆如此하야 寧其身不受知人之名이언정 而使其子로 專享得賢之利하니 先帝知公如此로되 而卒不盡用은 安知其意不出於此乎아
此장공長公所以於此에 獨感慨嗚咽하야 而盡所云也니라
당형천唐荊川曰 장강長江一瀉萬里에 而波瀾曲折이 自有姸姿하니 眞文人之豪也니라
내 근간에 살펴보건대, 소씨蘇氏 형제의 의논과 문장이 서한西漢 이래로 마땅히 하늘의 신선神仙이 될 것이나 유독 서사敍事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의 법문法門을 얻지 못하였다.
나는 이 때문에 두 공公이 지은 여러 신도비神道碑와 행장行狀 등의 글은 많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이 비기碑記는 바로 공公이 황제의 명命에 응하여 지은 것이니, 공公이 지은 〈사마공행장司馬公行狀〉에 비하면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듯하여 문장을 쓴 것이 특별히 소략하다.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에 조정朝廷이 깨끗하고 온갖 법도(정사)가 때로 펴지니,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여겨 풍속이 한 번 크게 변하였다.
예전에 각박하고 비루했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깨끗이 씻고 심덕心德을 바꾸어 되도록 충후忠厚해지고자 하고, 사람들마다 언행言行을 삼가서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중국中國이 무사하여 사방 오랑캐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명命을 청하였는데, 오직 서강西羌과 서하西夏 사람들이 배반했다 복종했다 하는 것이 무상해서 독기毒氣를 품고 스스로 의심하여 자주 침입해서 노략질을 하였다.
성상聖上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시어 군대를 주둔하고 싸우지 않으면서 형세(위엄)를 보여주었는데,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대수령大首領인 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을 대궐 아래로 사로잡아 데려왔고, 서하西夏 사람 십수만이 경원涇原을 침략하여 진융성鎭戎城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5일이 되도록 소득이 없자 하룻저녁에 도망해 갔으며, 서강西羌의 올정성연兀征聲延이 부족 만 명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황하黃河가 처음에 조촌曹村으로 터져서 영평靈平에 제방을 쌓았으나, 다시 소오小吳로 터져서 5년 동안 멋대로 흘러 삭방朔方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금년 가을에는 장맛비가 한 달이 넘게 내렸으나 황하가 크게 범람하지 않았고, 겨울이 되자 물이 땅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서 옛날 우禹임금 때의 자취(황하의 물길)를 다시 회복할 형세가 있었다.
그리하여 무릇 성상聖上께서 바라시는 바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고, 성상聖上께서 싫어하시는 바는 손을 저어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떠나가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하늘의 뜻이 성상聖上과 부합함을 분명히 알고는 행여 지극한 정치가 이루어져서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며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아니하여 함평咸平과 경덕景德 연간과 같음을 다시 볼까 기대하였다.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신 소식臣 蘇軾에게 묻기를 “성상聖上과 태황태후께서 무슨 일을 시행하셨기에 여기에 이른 것입니까?”라고 하기에, 신 소식臣 蘇軾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역周易》 대유괘 상구大有卦 上九 효사爻辭에 ‘하늘이 도와주어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도와주는 것은 순함이요(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자이고) 사람이 도와주는 것은 성실함이니(성실한 자이니), 성실함을 이행하고 순함을 생각하고 또 어진 이를 높인다.
이 때문에 하늘이 도와주어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런데 지금 두 성상聖上께서 몸소 성실함과 순함으로 천하天下에 솔선하시고, 사마공司馬公을 등용하고 천하天下의 선비들을 초치하시어 이 세 가지 덕德에 응하신 것이다.
또 신臣의 입장에서 보건대, 공公은 인인仁人이시니 하늘이 도우시는 것이다.”
“공公은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충의忠義로써 스스로 인주人主와 깊은 지우知遇를 맺었으니, 조정에서 사마공司馬公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방의 사람들이 어떻게 알며, 사대부士大夫가 이것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농인農人과 상인商人과 달려가는 병졸兵卒들이 어떻게 알며, 중국에서 이것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공公이 막 물러나서 낙양洛陽에 거주할 적에 보잘것없음이 안자顔子가 누항陋巷에 있는 것과 같고, 초췌함이 굴원屈原이 못가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과 서로 잊은 지 오래되었으나, 그의 이름이 천하天下에 진동하여 우레와 같고 하한河漢(은하銀河)과 같아서 마치 집집마다 찾아가 날마다 보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공公의 이름을 들은 자들은 아녀자와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자와 병사兵士와 이적夷狄처럼 용맹하고 사나워서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싫어하여 공公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간사姦邪한 소인小人에 이르기까지도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변하여 한숨을 쉬고 크게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원풍元豐 말년에 신臣이 등주登州로부터 조정으로 들어올 적에 8개의 주州를 지나 경사京師(개봉開封)에 왔는데, 백성들은 내가 공公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는 곳곳마다 수천 명이 모여 말머리에서 고함치기를 ‘사마승상司馬丞相에게 제발 저희들의 말을 전해주시오.
부디 조정을 떠나지 말고 크게 몸을 아껴서(건강을 유지하여) 백성들을 살려주시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이 천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경사京師에 이르러 사대부士大夫들의 말을 들어보니, ‘공公이 처음 조정으로 들어올 적에 백성들이 그의 말 머리를 에워싸서 길을 갈 수 없을 지경이었고, 호위병 중에 공公을 보고 엎드려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자, 공公은 두려워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요遼(거란契丹)나라 사람과 서하西夏 사람들이 사신을 보내와 조회하거나 우리 사신이 오랑캐 땅에 가면 오랑캐들은 반드시 공公의 기거起居(안부安否)를 물었고, 요遼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변방 관리에게 명하기를 ‘중국에서 사마공司馬公을 정승으로 삼았으니, 부디 사단을 내어 변방의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 후 공公이 별세하자, 경사京師의 백성들이 시장市場을 파하고 와서 조문하고 옷을 팔아 제전祭奠을 바쳤으며, 골목에서 곡哭하면서 수레 앞을 지나가는 자가 천 명,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성상聖上께서 호부시랑 조첨戶部侍郞 趙瞻과 내시성 압반內侍省 押班인 풍종도馮宗道에게 명하시어 그의 상喪을 호위하여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게 하였는데,
조첨趙瞻 등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백성들이 공公의 상喪에 통곡하기를 매우 서글피 해서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父母의 상에 곡하듯이 하였고, 사방에서 와서 회장會葬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남嶺南의 봉주封州에서는 부로父老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제물을 바쳤고, 또 불사佛事를 일으켜서 공公을 축원祝願하는 자들은 그 말이 매우 서글펐으며,
자기 손과 이마에 향을 태워서 공公을 장송葬送한 자들이 모두 백여 명이었고, 공公의 상像을 그려서 공公을 제사하는 경우는 천하 사람들이 거의 그러하였다.’라고 하니,
필부로서 하늘을 감동시키려면 반드시 방법이 있어야 하니, 지극한 성실과 한결같은 덕德이 아니면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자기의 성性을 다할 수 있으니, 자기의 성性을 다하면 남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남의 성性을 다하면 물건의 성性을 다할 수 있고, 물건의 성性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고 하였다.
《서경書經》에는 이르기를 ‘이윤伊尹이 몸소 탕湯임금과 함께 한결같은 덕德을 소유하여 능히 천심天心에 합당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덕德이 한결같으면 동動함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덕德이 잡되면 동動함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혹은 천금千金을 남에게 주어도 그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데, 혹은 한마디 말로써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이 죽음을 바치는 것은 성실함과 성실하지 못함 때문이요, 하늘에까지 이르는 홍수가 하루아침을 마치지 못하는데 한 올의 실오라기와 같은 낙숫물이 돌을 뚫을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음과 한결같지 못함 때문이다.
성실함과 한결같음은 옛 성인聖人이 여기에 털끝만큼도 더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공公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므로 신臣은 공公의 덕德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천지天地를 감동시켜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음을 논論하고, 이를 두 글자로 축약하여 말하면 바로 ‘성誠’과 ‘일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공公은 휘諱가 광光이고 자字가 군실君實이며 선대先代는 하내河內 사람이니, 진晉나라 안평헌왕 부安平獻王 孚의 후손이다.
왕王의 먼 후손인 정동대장군 양征東大將軍 陽이 처음으로 지금 섬주陝州의 하현 속수향夏縣 涑水鄕에 장례하니, 자손이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다.
증조 휘曾祖 諱 정政은 오대시대五代時代가 쇠하고 혼란하다 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였고, 조고 휘祖考 諱 현炫은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요주耀州의 부평현령富平縣令에 이르렀는데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추증하였고, 선고 휘先考 諱 지池는 보원寶元과 경력慶曆 연간의 명신으로 벼슬이 병부낭중 천장각대제兵部郞中 天章閣待制에 이르렀는데 태사 온국공太師 溫國公을 추증하였다.
증조비 설씨曾祖妣 薛氏와 조비 황보씨祖妣 皇甫氏와 선비 섭씨先妣 聶氏는 모두 온국태부인溫國太夫人에 봉해졌다.
공公이 처음 진사시進士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인종황제仁宗皇帝를 섬겨서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에 이르고 간원諫院을 맡았는데, 처음으로 큰 의논을 내어 종자宗子를 세워 후사를 삼아서 종묘宗廟를 편안히 할 것을 청하자, 재상 한기宰相 韓琦 등이 공公의 말씀을 따라 마침내 대계大計를 결정하였다.
공公은 영종황제英宗皇帝를 섬겨서 간의대부 용도각직학사諫議大夫 龍圖閣直學士가 되어, 섬서陝西 지방에서 의용군義勇軍의 손등에 자자하여 군인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병폐가 되는 것과 내시內侍인 임수충任守忠이 간악하여 백성들에게 좀벌레가 되는 것을 논해서 그를 목 베어 천하天下에 사죄할 것을 청하니, 임수충任守忠이 끝내 이 때문에 죽었다.
공公은 또 복안의왕濮安懿王을 마땅히 ‘선왕조先王朝에서 기친期親의 존속尊屬을 봉封하고 추증한 고사故事’를 따를 것을 논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公은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섬겨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서융西戎의 부장部將인 외명산嵬名山이 횡산橫山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려 하자, 공公은 받아들여서는 안 됨을 지극히 논하여 ‘후일 반드시 변방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과연 그러하였고,
황제께 존호尊號를 받지 말 것을 권하여 마침내 만세萬世의 법法이 되었다.
왕안석王安石이 정승이 되어 처음으로 청묘법靑苗法과 조역법助役法과 농전수리農田水利의 제도를 시행하고서 이것을 신법新法이라 하였는데, 공公이 먼저 그 폐해를 말씀하여 직접 간쟁諫爭하니, 당시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왕안석王安石을 따르지 아니하여 신법新法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공公에게 의지하여 중重함으로 삼았다.
황제께서 공公을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삼았으나, 공公이 자신의 말씀이 행해지지 않는다 하여 명을 받지 않자, 마침내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임명하여 나가 영흥군永興軍을 맡게 하였고, 마침내 유사 어사대留司 御史臺 및 제거숭복궁提擧崇福宮이라는 벼슬로 물러나서 낙양洛陽에 거주한 것이 15년이었다.
성상聖上(철종哲宗)께서 즉위하시고 태황태후께서 섭정하시게 되자, 공公을 일으켜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삼았다가 정의대부正議大夫로 승진시키고 마침내 좌복야左僕射로 승진시켰다.
공公은 첫 번째로 다시 조서詔書를 바꾸어서 언로言路를 열고 간사한 자와 정직한 자를 분별하여 그중에 심한 자 10여 명을 승진시키거나 물리쳤으며, 곧바로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시역법市易法과 여러 도道에서 새로 시행하던 염철다법鹽鐵茶法을 파하였고, 최후에는 마침내 조역법助役法과 청묘법靑苗法을 파하였다.
공公은 막 선비를 선발할 것을 의논하고 수령守令과 감사監司를 잘 선택하여 백성들을 잘 길러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가르칠 것을 기약하여 늠름凜凜하게 지치至治를 향하게 되었는데, 공公이 병들어 원우 원년元祐 元年 9월 병진일丙辰日 초하루에 관위官位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8세였다.
태황태후께서 부음을 듣고 애통해하셨고, 성상聖上께서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시어 마지않았다.
이때 명당明堂에 제사하였는데, 제례祭禮가 이루어졌으나 축하하지 않았다.
두 성상聖上께서 모두 그의 상喪에 납시어 몹시 슬프게 곡하셨고 조회 보는 것을 중지하였다.
태사 온국공太師 溫國公을 추증하고 일품一品의 예복禮服을 수의襚衣로 내리고 시호諡號를 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그 친속親屬 열 명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공公은 장씨張氏에게 장가드니, 예부상서 장존禮部尙書 張存의 따님이었는데, 청하군군淸河郡君에 봉해졌으나 공公보다 먼저 별세하여 온국부인溫國夫人에 봉해졌다.
아들은 세 사람인데 동童과 당唐은 모두 일찍 죽었고, 강康은 지금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있으며, 손자 두 사람은 식植과 환桓인데 모두 승봉랑承奉郞이다.
원우元祐 2년 정월 신유일辛酉日에 섬주陝州의 하현 속수향夏縣 涑水鄕 남쪽 언덕의 조촌晁村에 장례하니,
성상聖上께서 어필의 전서篆書로 묘도墓道에 표하기를 ‘충청수덕지비忠淸粹德之碑’라 하시고, 비문을 신 소식臣 蘇軾에게 명命하여 짓게 하셨다.
신臣은 일찍이 공公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단명전학사 범진端明殿學士 范鎭이 행장을 취하여 공公의 묘지문墓誌文을 썼다.
그러므로 그 자세한 내용은 다시 나타내지 않고 다만 그 대개만을 논한다.
의논하는 자들은 한갓 성상聖上과 태황태후께서 공公을 신속히 등용하시고 공公의 말씀을 극진히 따르신 것만 보고,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공公을 깊이 아신 것은 알지 못한다.
사서인士庶人으로부터 경대부卿大夫에 이르기까지, 빈사賓師가 되고 붕우朋友가 되어서 도道가 충분히 서로 믿을 수 있어도 권세가 서로 상대방을 좋게 하고 슬프게 할 수 없을 경우, 오히려 의견을 자기와 함께하면 친하고 자기와 달리하면 소원해진다.
그리하여 자기 허물을 듣고도 기뻐하며, 가르쳐주는 말을 받아들이고 노여워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데, 하물며 군주와 신하의 사이에 있어서이겠는가?
희령熙寧 연간에 조정의 정사政事가 공公이 말씀한 것과 하나도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공公이 수십 번 글을 올려 모두 다 말씀하고 숨기지 않았으니, 신분이 대등한 이하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선제先帝(신종神宗)께서 공公의 말씀을 편안히 받아들이셔서 비단 노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요 도리어 좌우左右의 보필輔弼하는 신하로 삼고자 하셨으며, 심지어는 공公이 지은 책의 서문을 써서 이것을 이영각邇英閣에서 읽기까지 하셨으니, 공公을 깊이 알지 못하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두 성상聖上께서 공公을 아신 것은 의견이 같은 때에 아신 것이고, 선제先帝께서 공公을 아신 것은 의견이 한창 다를 때에 아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臣은 선제先帝께서 하기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옛날 북제北齊의 신무황제神武皇帝가 병환이 깊어지자, 그의 아들인 세종世宗에게 고하기를 “후경侯景이라는 사람이 하남河南 지방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한 것이 14년이다.
여러 장수들 중에 아무도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고 오직 모용소종慕容紹宗만이 그를 제재할 수 있기에 내가 일부러 그 사람(모용소종慕容紹宗)을 귀하게 대우하지 않고 남겨두어서 너에게 물려준다.”라고 하였다.
당 태종唐 太宗 또한 아들인 고종高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적李勣에게 은혜가 없기에 내가 이제 이적李勣을 견책하여 외지로 내보낼 것이니, 너는 마땅히 그에게 복야僕射를 제수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적李勣을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내보냈다.
북제 신무황제北齊 神武皇帝와 당 태종唐 太宗은 비록 선제先帝께 높음을 견줄 수 없고 모용소종慕容紹宗과 이적李勣 또한 공公의 부류가 아니지만, 옛날 군주君主들이 자손子孫을 위하여 장구하게 계책하고 원대하게 사려한 것이 대체로 모두 이와 같아서, 차라리 자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나쁜 이름을 받을지언정, 자손들로 하여금 어진 신하를 얻는 이익을 오로지 누리게 하였으니, 선제先帝께서 공公을 아신 것이 이와 같은데도 끝내 다 쓰시지 않은 것은 어찌 그 뜻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신臣은 이 일을 서술하고 나서 손을 땅에 짚고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명시銘詩를 짓는다.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성자聖子께서 천명天命을 받으시니 요堯임금의 처음과 같고,
신모神母께서 명령하심은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셨다.
성군聖君과 신모神母께서는 누구를 정승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없으시니, 누가 나(황제)를 좌우에서 보필할까?
백성들이 스스로 정승을 선택하면 내가 그에게 정승 자리를 주겠다.
공公이 서쪽에서 오니, 말 한 마리에 동자 둘뿐이었다.
수만 명이 에워싸서 마치 목마른 자들이 샘물에 달려가듯이 하였다.
누가 공公을 보지 않았으리오마는 나보다 앞선 사람이 없다.
두 성상聖上께서는 자신을 잊고서 오직 공公을 등용하시니,
공公 또한 아집이 없어서 오직 백성을 생각하였도다.
사마공司馬公을 정승으로 삼았으니, 너는 길에서 물건을 팔라.
이미 군실君實(사마광司馬光)을 등용하였으니, 내가 뒤에 서고 자네가 앞에 서서 이 좋은 시기를 잃지 말자.”라고 하였다.
공公은 기린과 봉황과 같아서 사납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니,
깃 달린 짐승과 털 달린 짐승이 모두 조회하고 영웅도 교활한 자도 모두 복종하였다.
정사政事를 한 지 1년 동안에 질병으로 있은 것이 절반이었으나,
공적功績이 많으니 백 년 동안 백성들이 그리워하도다.
공公을 이견이 있을 적에 알아보았고 미천할 적에 알아보았으니,
공公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신고神考(신종神宗)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천자天子께서 만세萬歲를 누리심에 사방 오랑캐들이 와서 함께한다.
청묘淸廟에 제사하니, 이것은 신고神考의 공功이로다.
신종神宗이 장공長公을 안 것이 또한 깊었으나 미처 등용하지 못하니, 이성二聖이 금련촉金蓮燭을 철거하여 한림원翰林院으로 돌려보낼 적에 장공長公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장공長公이 이 글에서 유독 감개하고 오열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것이다.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장강長江이 일사천리로 달려감에 파란과 곡절이 저절로 아름다운 자태가 있는 법이니, 참으로 문인文人 중에 호걸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