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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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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사마온공司馬溫公신도비神道碑
間按蘇氏兄弟議論文章 自西漢以來 當爲天仙이나 獨於敍事處 不得法門이라
내 근간에 살펴보건대, 소씨蘇氏 형제의 의논과 문장이 서한西漢 이래로 마땅히 하늘의 신선神仙이 될 것이나 유독 서사敍事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의 법문法門을 얻지 못하였다.
余故於兩公所爲諸神道碑行狀等文 不多錄이로라
나는 이 때문에 두 이 지은 여러 신도비神道碑행장行狀 등의 글은 많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此碑記 乃公應制者 較公所爲司馬公狀하면 似不能盡所欲言然하야 行文特略矣니라

비기碑記는 바로 이 황제의 에 응하여 지은 것이니, 이 지은 〈사마공행장司馬公行狀〉에 비하면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 듯하여 문장을 쓴 것이 특별히 소략하다.
朝廷淸明하고 하니 民安其生하야 風俗一變이라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신 지 3년에 조정朝廷이 깨끗하고 온갖 법도(정사)가 때로 펴지니,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여겨 풍속이 한 번 크게 변하였다.
異時薄夫鄙人 皆洗心易德하야 務爲忠厚하고 人人自重하야 恥言人過하니라
예전에 각박하고 비루했던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깨끗이 씻고 심덕心德을 바꾸어 되도록 충후忠厚해지고자 하고, 사람들마다 언행言行을 삼가서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中國無事하야 四夷稽首請命이로되 叛服不常하야 懷毒自疑하야數入爲寇어늘
중국中國이 무사하여 사방 오랑캐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을 청하였는데, 오직 서강西羌서하西夏 사람들이 배반했다 복종했다 하는 것이 무상해서 독기毒氣를 품고 스스로 의심하여 자주 침입해서 노략질을 하였다.
上命諸將하사 按兵不戰하야 示以形勢러니 不數月 生致大首領闕下하며 하며 而西羌 以其族萬人으로 來降하니라
성상聖上께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하시어 군대를 주둔하고 싸우지 않으면서 형세(위엄)를 보여주었는데, 몇 개월이 되지 않아 대수령大首領귀장청의결鬼章靑宜結을 대궐 아래로 사로잡아 데려왔고, 서하西夏 사람 십수만이 경원涇原을 침략하여 진융성鎭戎城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5일이 되도록 소득이 없자 하룻저녁에 도망해 갔으며, 서강西羌올정성연兀征聲延이 부족 만 명을 이끌고 항복해 왔다.
황하黃河가 처음에 조촌曹村으로 터져서 영평靈平에 제방을 쌓았으나, 다시 소오小吳로 터져서 5년 동안 멋대로 흘러 삭방朔方 지방이 소란하였는데, 금년 가을에는 장맛비가 한 달이 넘게 내렸으나 황하가 크게 범람하지 않았고, 겨울이 되자 물이 땅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서 옛날 임금 때의 자취(황하의 물길)를 다시 회복할 형세가 있었다.
凡上所欲 不求而獲하고 而其所惡 不麾而去하니 天下曉然知天意與上合하야 庶幾復見至治之成하야 家給人足하고 刑措不用하야間也하니라
그리하여 무릇 성상聖上께서 바라시는 바는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어지고, 성상聖上께서 싫어하시는 바는 손을 저어 물리치지 않아도 저절로 떠나가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하늘의 뜻이 성상聖上과 부합함을 분명히 알고는 행여 지극한 정치가 이루어져서 집집마다 사람마다 풍족하며 형벌을 버려두고 쓰지 아니하여 함평咸平경덕景德 연간과 같음을 다시 볼까 기대하였다.
或以問臣軾호되 上與太皇太后 安所施設而及此 臣軾對曰
혹자가 이것을 가지고 신 소식臣 蘇軾에게 묻기를 “성상聖上과 태황태후께서 무슨 일을 시행하셨기에 여기에 이른 것입니까?”라고 하기에, 신 소식臣 蘇軾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주역周易대유괘 상구大有卦 上九 효사爻辭에 ‘하늘이 도와주어 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이 도와주는 것은 순함이요(천리天理에 순응하는 자이고) 사람이 도와주는 것은 성실함이니(성실한 자이니), 성실함을 이행하고 순함을 생각하고 또 어진 이를 높인다.
是以 自天祐之하야 吉無不利라하시니라
이 때문에 하늘이 도와주어 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躬信順以先天下하시고 而用司馬公하야 以致天下士하야 應是시니라
그런데 지금 두 성상聖上께서 몸소 성실함과 순함으로 천하天下에 솔선하시고, 사마공司馬公을 등용하고 천하天下의 선비들을 초치하시어 이 세 가지 에 응하신 것이다.
且以臣觀之컨대 仁人也 天相之矣시니라
의 입장에서 보건대, 인인仁人이시니 하늘이 도우시는 것이다.”
何以知其然也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가?”
曰 公以文章名於世하고 而以忠義自結人主하니 朝廷知之 可也어니와 四方之人 何自知之 士大夫知之 可也어니와 農商走卒 何自知之 中國知之 可也어니와 何自知之
문장文章으로 세상에 이름났고 충의忠義로써 스스로 인주人主와 깊은 지우知遇를 맺었으니, 조정에서 사마공司馬公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방의 사람들이 어떻게 알며, 사대부士大夫가 이것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농인農人상인商人과 달려가는 병졸兵卒들이 어떻게 알며, 중국에서 이것을 아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구이九夷팔만八蠻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方其 하고 하야 其與民相忘也久矣로되 而名震天下하야 如雷霆하고 如河漢하야 如家至而日見之
이 막 물러나서 낙양洛陽에 거주할 적에 보잘것없음이 안자顔子누항陋巷에 있는 것과 같고, 초췌함이 굴원屈原이 못가에 있는 것과 같아서 백성들과 서로 잊은 지 오래되었으나, 그의 이름이 천하天下에 진동하여 우레와 같고 하한河漢(은하銀河)과 같아서 마치 집집마다 찾아가 날마다 보는 듯하였다.
聞其名者 雖愚無知 如婦人孺子하고 勇悍難化 如軍伍夷狄이요 以至於姦邪小人으로 雖惡其害己하야 仇而疾之者라도 莫不斂衽變色하야 咨嗟太息하고 或至於流涕也하니라
그리하여 의 이름을 들은 자들은 아녀자와 어린아이처럼 어리석고 무지한 자와 병사兵士이적夷狄처럼 용맹하고 사나워서 교화하기 어려운 자들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싫어하여 을 원수로 여기고 미워하는 간사姦邪소인小人에 이르기까지도 옷깃을 여미고 얼굴빛을 변하여 한숨을 쉬고 크게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혹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하니 民知其與公善也하고 所在 數千人 聚而號呼於馬首曰 寄謝司馬丞相하라
원풍元豐 말년에 등주登州로부터 조정으로 들어올 적에 8개의 를 지나 경사京師(개봉開封)에 왔는데, 백성들은 내가 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는 곳곳마다 수천 명이 모여 말머리에서 고함치기를 ‘사마승상司馬丞相에게 제발 저희들의 말을 전해주시오.
愼毋去朝廷하고 厚自愛하야 以活百姓이라하니 如是者 蓋千餘里不絶이라
부디 조정을 떠나지 말고 크게 몸을 아껴서(건강을 유지하여) 백성들을 살려주시오.’라고 하였는데, 이와 같은 것이 천여 리에 끊이지 않았다.
至京師하야 聞士大夫言호니 公初入朝 民擁其馬하야 至不得行이요 衛士見公하고 擎跽流涕者 不可勝數어늘 公懼而歸洛이라하니라
경사京師에 이르러 사대부士大夫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 처음 조정으로 들어올 적에 백성들이 그의 말 머리를 에워싸서 길을 갈 수 없을 지경이었고, 호위병 중에 을 보고 엎드려 절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가 이루 셀 수 없이 많자, 은 두려워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遼人, 夏人 遣使入朝하고 與吾使至虜中者 虜必問公起居하고 而遼人 勅其邊吏하야 曰 中國 相司馬矣 愼毋生事開邊隙하라하니라
그리고 (거란契丹)나라 사람과 서하西夏 사람들이 사신을 보내와 조회하거나 우리 사신이 오랑캐 땅에 가면 오랑캐들은 반드시 기거起居(안부安否)를 물었고, 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변방 관리에게 명하기를 ‘중국에서 사마공司馬公을 정승으로 삼았으니, 부디 사단을 내어 변방의 분쟁을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其後 公薨하니 京師之民 罷市而往弔하고粥衣以致奠하고 巷哭以過車者 蓋以千萬數하니라
그 후 이 별세하자, 경사京師의 백성들이 시장市場을 파하고 와서 조문하고 옷을 팔아 제전祭奠을 바쳤으며, 골목에서 하면서 수레 앞을 지나가는 자가 천 명,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上命 하야 護其喪歸葬이러니
성상聖上께서 호부시랑 조첨戶部侍郞 趙瞻내시성 압반內侍省 押班풍종도馮宗道에게 명하시어 그의 을 호위하여 고향에 돌아가 장례하게 하였는데,
瞻等旣還 皆言民哭公哀甚하야 如哭其私親하고 四方來會葬者 蓋數萬人이라하고
조첨趙瞻 등이 돌아와 모두 말하기를 ‘백성들이 에 통곡하기를 매우 서글피 해서 마치 자기를 낳아준 부모父母의 상에 곡하듯이 하였고, 사방에서 와서 회장會葬한 자가 수만 명이었다.’라고 하였다.
父老相率致祭하고 者 其詞尤哀하며
그리고 ‘영남嶺南봉주封州에서는 부로父老들이 서로 이끌고 와서 제물을 바쳤고, 또 불사佛事를 일으켜서 축원祝願하는 자들은 그 말이 매우 서글펐으며,
凡百餘人이요 而畫像以祠公者 天下皆是也라하니
자기 손과 이마에 향을 태워서 장송葬送한 자들이 모두 백여 명이었고, 을 그려서 을 제사하는 경우는 천하 사람들이 거의 그러하였다.’라고 하니,
此豈人力也哉리오
이것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겠는가?
天相之也시니라
이는 하늘이 도우신 것이다.
匹夫而能動天 亦必有道矣 非至誠一德이면 其孰能使之리오
필부로서 하늘을 감동시키려면 반드시 방법이 있어야 하니, 지극한 성실과 한결같은 이 아니면 그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記曰 惟天下之至誠이라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이면 則能盡人之性이요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오직 천하天下에 지극히 성실한 사람이라야 자기의 을 다할 수 있으니, 자기의 을 다하면 남의 을 다할 수 있고,
남의 을 다하면 물건의 을 다할 수 있고, 물건의 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化育을 도울 수 있다.’고 하였다.
서경書經》에는 이르기를 ‘이윤伊尹이 몸소 임금과 함께 한결같은 을 소유하여 능히 천심天心에 합당하였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이 한결같으면 함에 길하지 않음이 없고, 이 잡되면 함에 흉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하였다.
或以千金與人而人不喜로되 或以一言使人而人死之者 誠與不誠故也 稽天之潦 不能終朝로되 而一綫(線)之溜 可以達石者 一與不一故也
혹은 천금千金을 남에게 주어도 그 사람이 기뻐하지 않는데, 혹은 한마디 말로써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이 죽음을 바치는 것은 성실함과 성실하지 못함 때문이요, 하늘에까지 이르는 홍수가 하루아침을 마치지 못하는데 한 올의 실오라기와 같은 낙숫물이 돌을 뚫을 수 있는 것은 한결같음과 한결같지 못함 때문이다.
誠而一 古之聖人 不能加毫末於此矣어든 而況公乎
성실함과 한결같음은 옛 성인聖人이 여기에 털끝만큼도 더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에 있어서이겠는가?
臣論公之德 至於感人心, 動天地하야 巍巍如此하고 而蔽之以二言하면 曰誠, 曰一이라하노라
그러므로 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천지天地를 감동시켜서 높고 높음이 이와 같음을 하고, 이를 두 글자로 축약하여 말하면 바로 ‘’과 ‘’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諱光이요 字君實이요 其先 이니 之後
이고 군실君實이며 선대先代하내河內 사람이니, 나라 안평헌왕 부安平獻王 孚의 후손이다.
王之裔孫 始葬今陝州夏縣涑水鄕하니 子孫因家焉이라
의 먼 후손인 정동대장군 양征東大將軍 陽이 처음으로 지금 섬주陝州하현 속수향夏縣 涑水鄕에 장례하니, 자손이 인하여 여기에 살게 되었다.
曾祖諱政 以五代衰亂이라하야 不仕러니 贈太子太保하고 祖諱炫 擧進士試하야 秘書省校書郞으로 終於이러니 贈太子太傅하고 考諱池 間名臣으로 終於兵部郞中, 天章閣待制러니 贈太師溫國公하니라
증조 휘曾祖 諱 오대시대五代時代가 쇠하고 혼란하다 하여 벼슬하지 않았는데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추증하였고, 조고 휘祖考 諱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요주耀州부평현령富平縣令에 이르렀는데 태자태부太子太傅를 추증하였고, 선고 휘先考 諱 보원寶元경력慶曆 연간의 명신으로 벼슬이 병부낭중 천장각대제兵部郞中 天章閣待制에 이르렀는데 태사 온국공太師 溫國公을 추증하였다.
曾祖妣薛氏 祖妣皇甫氏 妣聶氏 皆封溫國太夫人하니라
증조비 설씨曾祖妣 薛氏조비 황보씨祖妣 皇甫氏선비 섭씨先妣 聶氏는 모두 온국태부인溫國太夫人에 봉해졌다.
公始以 事仁宗皇帝하야 至天章閣待制하고 知諫院이러니 하니라
이 처음 진사시進士試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인종황제仁宗皇帝를 섬겨서 천장각대제天章閣待制에 이르고 간원諫院을 맡았는데, 처음으로 큰 의논을 내어 종자宗子를 세워 후사를 삼아서 종묘宗廟를 편안히 할 것을 청하자, 재상 한기宰相 韓琦 등이 의 말씀을 따라 마침내 대계大計를 결정하였다.
事英宗皇帝하야 爲諫議大夫龍圖閣直學士하야
영종황제英宗皇帝를 섬겨서 간의대부 용도각직학사諫議大夫 龍圖閣直學士가 되어, 섬서陝西 지방에서 의용군義勇軍의 손등에 자자하여 군인으로 만들어서 백성들의 병폐가 되는 것과 내시內侍임수충任守忠이 간악하여 백성들에게 좀벌레가 되는 것을 논해서 그를 목 베어 천하天下에 사죄할 것을 청하니, 임수충任守忠이 끝내 이 때문에 죽었다.
하니 天下(義)[韙]之하니라
은 또 복안의왕濮安懿王을 마땅히 ‘선왕조先王朝에서 기친期親존속尊屬하고 추증한 고사故事’를 따를 것을 논하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신종황제神宗皇帝를 섬겨서 한림학사翰林學士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서융西戎부장部將외명산嵬名山횡산橫山의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려 하자, 은 받아들여서는 안 됨을 지극히 논하여 ‘후일 반드시 변방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결국 과연 그러하였고,
황제께 존호尊號를 받지 말 것을 권하여 마침내 만세萬世이 되었다.
이라하니 公首言其害하야 以身爭之하니 當時士大夫不附安石하야 言新法不便者 皆倚公爲重이라
왕안석王安石이 정승이 되어 처음으로 청묘법靑苗法조역법助役法농전수리農田水利의 제도를 시행하고서 이것을 신법新法이라 하였는데, 이 먼저 그 폐해를 말씀하여 직접 간쟁諫爭하니, 당시 사대부士大夫들 중에 왕안석王安石을 따르지 아니하여 신법新法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에게 의지하여 함으로 삼았다.
帝以公爲樞密副使호되 公以言不行이라하야 不受命한대하고 遂以留司御史臺及提擧崇福宮으로 退居于洛 十有五年하니라
황제께서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삼았으나, 이 자신의 말씀이 행해지지 않는다 하여 명을 받지 않자, 마침내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로 임명하여 나가 영흥군永興軍을 맡게 하였고, 마침내 유사 어사대留司 御史臺제거숭복궁提擧崇福宮이라는 벼슬로 물러나서 낙양洛陽에 거주한 것이 15년이었다.
성상聖上(철종哲宗)께서 즉위하시고 태황태후께서 섭정하시게 되자, 을 일으켜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삼았다가 정의대부正議大夫로 승진시키고 마침내 좌복야左僕射로 승진시켰다.
은 첫 번째로 다시 조서詔書를 바꾸어서 언로言路를 열고 간사한 자와 정직한 자를 분별하여 그중에 심한 자 10여 명을 승진시키거나 물리쳤으며, 곧바로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시역법市易法과 여러 에서 새로 시행하던 염철다법鹽鐵茶法을 파하였고, 최후에는 마침내 조역법助役法청묘법靑苗法을 파하였다.
方議取士擇守令監司以養民하야 期於富而敎之하야 凜凜嚮至治矣러니 而公臥病하야하니 享年六十八이라
은 막 선비를 선발할 것을 의논하고 수령守令감사監司를 잘 선택하여 백성들을 잘 길러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가르칠 것을 기약하여 늠름凜凜하게 지치至治를 향하게 되었는데, 이 병들어 원우 원년元祐 元年 9월 병진일丙辰日 초하루에 관위官位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8세였다.
太皇太后聞之慟하시고 上亦感涕不已하시니
태황태후께서 부음을 듣고 애통해하셨고, 성상聖上께서도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시어 마지않았다.
이때 명당明堂에 제사하였는데, 제례祭禮가 이루어졌으나 축하하지 않았다.
二聖 皆臨其喪하야 哭之哀甚하시고 輟視朝하니라
성상聖上께서 모두 그의 에 납시어 몹시 슬프게 곡하셨고 조회 보는 것을 중지하였다.
贈太師溫國公하고 襚以一品禮服하고 諡曰文正이라하고 官其親屬十人하니라
태사 온국공太師 溫國公을 추증하고 일품一品예복禮服수의襚衣로 내리고 시호諡號문정文正이라 하였으며, 그 친속親屬 열 명에게 벼슬을 내리셨다.
公娶張氏하니 之女 封淸河郡君이러니 先公卒하야 追封溫國夫人하니라
장씨張氏에게 장가드니, 예부상서 장존禮部尙書 張存의 따님이었는데, 청하군군淸河郡君에 봉해졌으나 보다 먼저 별세하여 온국부인溫國夫人에 봉해졌다.
子三人이니 童, 唐 皆早亡하고 今爲秘書省校書郞이요 孫二人 植, 桓이니 皆承奉郞이라
아들은 세 사람인데 은 모두 일찍 죽었고, 은 지금 비서성교서랑秘書省校書郞으로 있으며, 손자 두 사람은 인데 모두 승봉랑承奉郞이다.
以元祐二年正月辛酉 葬于陝之夏縣涑水南原之晁村하니
원우元祐 2년 정월 신유일辛酉日섬주陝州하현 속수향夏縣 涑水鄕 남쪽 언덕의 조촌晁村에 장례하니,
上以御篆으로 表其墓道하야 曰忠淸粹德之碑라하시고 而其文 以命臣軾하시니라
성상聖上께서 어필의 전서篆書묘도墓道에 표하기를 ‘충청수덕지비忠淸粹德之碑’라 하시고, 비문을 신 소식臣 蘇軾에게 하여 짓게 하셨다.
蓋嘗爲公이러니 而端明殿學士 取以志其墓矣
은 일찍이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단명전학사 범진端明殿學士 范鎭이 행장을 취하여 묘지문墓誌文을 썼다.
其詳 不復再見하고 而獨論其大槩하노라
그러므로 그 자세한 내용은 다시 나타내지 않고 다만 그 대개만을 논한다.
議者徒見上與太皇太后進公之速 用公之盡하고 而不知神宗皇帝知公之深也
의논하는 자들은 한갓 성상聖上과 태황태후께서 을 신속히 등용하시고 의 말씀을 극진히 따르신 것만 보고,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을 깊이 아신 것은 알지 못한다.
自士庶人으로 至于卿大夫 相與爲賓師朋友하야 道足以相信이로되 而權不足以相休戚이면 然猶同己則親之하고 異己則疏之하야
사서인士庶人으로부터 경대부卿大夫에 이르기까지, 빈사賓師가 되고 붕우朋友가 되어서 가 충분히 서로 믿을 수 있어도 권세가 서로 상대방을 좋게 하고 슬프게 할 수 없을 경우, 오히려 의견을 자기와 함께하면 친하고 자기와 달리하면 소원해진다.
未有聞過而喜하고 受誨而不怒者也어든 而況於君臣之間乎
그리하여 자기 허물을 듣고도 기뻐하며, 가르쳐주는 말을 받아들이고 노여워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데, 하물며 군주와 신하의 사이에 있어서이겠는가?
하야 朝廷政事 與公所言으로 無一不相違者
희령熙寧 연간에 조정의 정사政事이 말씀한 것과 하나도 서로 위배되지 않는 것이 없었다.
書數十上하야 皆盡言不諱하니 蓋自敵以下 所不能堪이로되 而先帝安受之하사 非特不怒而已 乃欲以爲하시고 하시니 不深知公이면 而能如是乎
이 수십 번 글을 올려 모두 다 말씀하고 숨기지 않았으니, 신분이 대등한 이하로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선제先帝(신종神宗)께서 의 말씀을 편안히 받아들이셔서 비단 노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요 도리어 좌우左右보필輔弼하는 신하로 삼고자 하셨으며, 심지어는 이 지은 책의 서문을 써서 이것을 이영각邇英閣에서 읽기까지 하셨으니, 을 깊이 알지 못하고서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二聖之知公也 知之於旣同이요 而先帝之知公也 知之於方異
성상聖上께서 을 아신 것은 의견이 같은 때에 아신 것이고, 선제先帝께서 을 아신 것은 의견이 한창 다를 때에 아신 것이다.
臣以先帝爲難하노라
그러므로 선제先帝께서 하기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寢疾 告其子 專制河南十四年矣
옛날 북제北齊신무황제神武皇帝가 병환이 깊어지자, 그의 아들인 세종世宗에게 고하기를 “후경侯景이라는 사람이 하남河南 지방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한 것이 14년이다.
諸將 皆莫能敵이요 可以制之일새 我故不貴하고 留以遺汝라하고
여러 장수들 중에 아무도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고 오직 모용소종慕容紹宗만이 그를 제재할 수 있기에 내가 일부러 그 사람(모용소종慕容紹宗)을 귀하게 대우하지 않고 남겨두어서 너에게 물려준다.”라고 하였다.
而唐太宗亦謂高宗호되 汝於 無恩일새 我今責出之하니 汝當授以僕射라하고 乃出勣爲都督하니라
당 태종唐 太宗 또한 아들인 고종高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적李勣에게 은혜가 없기에 내가 이제 이적李勣을 견책하여 외지로 내보낼 것이니, 너는 마땅히 그에게 복야僕射를 제수해야 한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이적李勣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내보냈다.
夫齊神武, 唐太宗 雖未足以比隆先帝 而紹宗與勣 亦非公之流이나 古之人君 所以爲其子孫長計遠慮者 類皆如此하야 寧其身不受知人之名이언정 而使其子 專享得賢之利하니 先帝知公如此로되 而卒不盡用 安知其意不出於此乎
북제 신무황제北齊 神武皇帝당 태종唐 太宗은 비록 선제先帝께 높음을 견줄 수 없고 모용소종慕容紹宗이적李勣 또한 의 부류가 아니지만, 옛날 군주君主들이 자손子孫을 위하여 장구하게 계책하고 원대하게 사려한 것이 대체로 모두 이와 같아서, 차라리 자신이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나쁜 이름을 받을지언정, 자손들로 하여금 어진 신하를 얻는 이익을 오로지 누리게 하였으니, 선제先帝께서 을 아신 것이 이와 같은데도 끝내 다 쓰시지 않은 것은 어찌 그 뜻이 여기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臣旣書其事하고 乃拜手稽首而作詩하니
은 이 일을 서술하고 나서 손을 땅에 짚고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명시銘詩를 짓는다.
於皇上帝 子惠我民하시니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니,
孰堪顧天
누가 돌아보는 천명天命을 감당할까?
惟聖與仁이라
바로 성인聖人인자仁者만이 할 수 있다.
성자聖子께서 천명天命을 받으시니 임금의 처음과 같고,
匪亟匪徐로다
신모神母께서 명령하심은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으셨다.
聖神無心하니
성군聖君신모神母께서는 누구를 정승으로 삼으려는 마음이 없으시니, 누가 나(황제)를 좌우에서 보필할까?
백성들이 스스로 정승을 선택하면 내가 그에게 정승 자리를 주겠다.
其相維何
그 정승은 누구인가?
太師溫公이라
태사 온공太師 溫公이었다.
公來自西하니 一馬二童이라
이 서쪽에서 오니, 말 한 마리에 동자 둘뿐이었다.
萬人環之하야 如渴赴泉이라
수만 명이 에워싸서 마치 목마른 자들이 샘물에 달려가듯이 하였다.
孰不見公이리오마는 莫如我先이라
누가 을 보지 않았으리오마는 나보다 앞선 사람이 없다.
二聖忘己하야 惟公是式하시니
성상聖上께서는 자신을 잊고서 오직 을 등용하시니,
公亦無我하야 惟民是度이라
또한 아집이 없어서 오직 백성을 생각하였도다.
民曰樂哉인저
백성들이 말하기를 “즐겁도다.
旣相司馬하니 爾賈于途하라
사마공司馬公을 정승으로 삼았으니, 너는 길에서 물건을 팔라.
我耕于野호리라
나는 들에서 밭을 갈겠다.” 하였고,
士曰時哉로다
선비들은 말하기를 “좋은 시기가 왔도다.
旣用君實하니 我後子先하야 時不可失이로다
이미 군실君實(사마광司馬光)을 등용하였으니, 내가 뒤에 서고 자네가 앞에 서서 이 좋은 시기를 잃지 말자.”라고 하였다.
公如麟凰하야 不鷙不搏하니
은 기린과 봉황과 같아서 사납지도 않고 공격하지도 않으니,
羽毛畢朝하고 雄狡率服이라
깃 달린 짐승과 털 달린 짐승이 모두 조회하고 영웅도 교활한 자도 모두 복종하였다.
爲政一年 疾病半之로되
정사政事를 한 지 1년 동안에 질병으로 있은 것이 절반이었으나,
功則多矣하니 百年之思로다
공적功績이 많으니 백 년 동안 백성들이 그리워하도다.
知公于異하고 識公于微하시니
을 이견이 있을 적에 알아보았고 미천할 적에 알아보았으니,
匪公之思 로다
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신고神考(신종神宗)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天子萬年 四夷來同이라
천자天子께서 만세萬歲를 누리심에 사방 오랑캐들이 와서 함께한다.
청묘淸廟에 제사하니, 이것은 신고神考이로다.
神宗之知長公亦深이나 而不及用하니
신종神宗장공長公을 안 것이 또한 깊었으나 미처 등용하지 못하니, 이성二聖금련촉金蓮燭을 철거하여 한림원翰林院으로 돌려보낼 적에 장공長公에게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此長公所以於此 獨感慨嗚咽하야 而盡所云也니라
이 때문에 장공長公이 이 글에서 유독 감개하고 오열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한 것이다.
唐荊川曰 長江一瀉萬里 而波瀾曲折 自有姸姿하니 眞文人之豪也니라
당형천唐荊川이 말하기를 “장강長江이 일사천리로 달려감에 파란과 곡절이 저절로 아름다운 자태가 있는 법이니, 참으로 문인文人 중에 호걸이다.”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司馬溫公神道碑 : 이 글은 元祐 3년(1088) 정월에 쓰였다. 司馬溫公은 司馬光(1019~1086)으로 字가 君實이고 號가 迂夫인데 北宋의 名相이다. 죽은 뒤 溫國公에 봉해졌으므로 司馬溫公이라고 불렸다. 寶元 원년(1038)에 진사에 급제하고 翰林學士, 御史中丞 등 중앙 요직을 역임하였다. 神宗이 王安石을 발탁하여 新法을 단행하자, 이에 반대하여 樞密副使를 사퇴하고 熙寧 3년(1070)에 외직으로 나갔다가 哲宗 元祐 원년(1086)에 입조하여 재상이 되었는데, 《資治通鑑》의 편찬자로 더욱 유명하다. 神道碑는 죽은 이의 平生의 事迹을 기록하여 묘소 앞이나 길거리에 세우는 비석을 이른다.
역주2 太史公 : 司馬遷을 이른다. 司馬遷은 字가 子長이며 前漢時代 左馮翊 夏陽(지금의 陝西省 韓城縣) 사람이다. 《史記》의 저자로 중국 역사학의 鼻祖로 칭해지며, 記事文의 典範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3 上卽位之三年 : 宋 哲宗의 元祐 3년(1088)을 이른다.
역주4 百揆時敍 : 이 말은 《書經》 〈虞書 舜典〉에 “百揆(冢宰)에 앉히시니, 百揆(온갖 政事)가 때로 펴졌다.[納于百揆 百揆時敍]”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의 《書經集傳》에 “時敍는 때로 펴짐이니, 左氏의 이른바 ‘일을 폐함이 없다.’는 것이다.[時敍 以時而敍 左氏所謂無廢事也]”라고 注하였다.
역주5 西羌夏人 : 《唐宋八大家文鈔 校注集評》에는 西羌族이 건국한 西夏라고 해석하였으며, 또 西夏族이 西羌族의 한 갈래이기 때문에 西夏를 西羌으로 쓰는 경우도 있으나, 여기서는 鬼章靑宜結과 兀征聲延을 언급한 아래 글로 보아 분리해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西羌은 吐蕃(티베트)을 이른다.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건국된 吐蕃은 唐나라 때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9세기 중순에 내부 혼란으로 멸망하고 여러 부족들이 각축하게 되었다. 宋나라 때에 이르러 唃厮囉(곡시라)의 부족이 가장 강성하였으므로, 宋나라에서는 그를 平西王으로 봉하였다.
唃厮囉가 죽고 吐蕃은 다시 분열되었는데, 唃厮囉의 셋째 아들인 董氊이 세력을 점점 확대하자, 宋나라에서는 그에게 保順軍節度使를 제수하여 회유하였다. 이후 董氊은 宋나라의 신하를 자처하며 宋나라를 도와 西夏와 싸워 공을 세웠으며, 끝까지 宋나라와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여 결국 武威郡王으로 봉해져 吐蕃의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元祐 원년(1086)에 董氊이 죽고 그의 양자였던 阿里骨이 뒤를 이어 즉위하여 宋나라로부터 군주로 봉해졌으나, 鬼章, 溫溪心 등 강성한 족장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에 阿里骨은 西夏와 密約하여 宋나라를 침범하였으나 패배하고는 다시 宋나라에 사죄하고 국교를 회복하였다.
夏人은 西夏를 이른다. 西夏는 중국 북서부의 甘肅省과 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이 세운 왕조인데 건국 이래로 宋나라에 복종하였으나, 1038년 元昊가 등장하여 皇帝國임을 선포하고 국호를 大夏(송나라에서는 西夏로 칭함)라고 칭하였다.
역주6 鬼章靑宜結 : 吐蕃의 여러 족장 가운데 한 명이다. 神宗 熙寧 6년(1073)에 王韶가 熙河를 평정할 적에 鬼章靑宜結이 河州의 踏白城을 침략하였는데, 神宗이 招撫하여 그를 刺史로 삼았다. 그러나 元祐 원년에 다시 배반하자, 8월에 鬼章靑宜結을 사로잡아 京師로 호송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방면하였다. 東坡가 사로잡은 鬼章靑宜結을 처리하는 방안을 논한 〈因擒鬼章論西羌夏人事宜箚子〉가 본서 1권에 있다.
熙河는 지금의 甘肅省 臨洮 지역이다. 王韶는 神宗 때의 文臣으로 西夏와 羌族 등의 外夷들을 평정할 것을 주장하는 平戎策을 올려 神宗의 嘉納을 받고, 熙河에서 오랑캐들을 몇 차례 공격하여 승리한 다음 그 공로로 벼슬이 樞密副使에 이르렀다. 《宋史 王韶傳》
역주7 夏人十數萬……一夕遁去 : 哲宗 元祐 2년(1087)에 西夏가 涇原路의 鎭戎軍을 침범하였으나, 劉昌祚가 거느린 涇原路의 군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鎭戎軍은 지금의 寧夏自治區와 陝西省 일대 高原 지대에 있던 軍으로 당시 西夏와의 국경 지역이다. 宋나라는 郡 대신 軍을 설치하였다.
역주8 兀征聲延 : 吐蕃의 여러 족장 가운데 한 명으로 이들 부족이 邈川(지금의 靑海省 樂都) 동쪽 경계에 거주하였는데, 鬼章靑宜結이 사로잡혔다는 말을 듣고 宋나라 군대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부족을 이끌고 宋나라에 귀순하였다.
역주9 黃河始決曹村……朔方騷然 : 이 내용은 《宋史》 〈河渠志 二〉에 “熙寧 4년 7월 辛卯日 北京에 새로 쌓은 제4, 제5 제방이 터져서, 館陶와 永濟渠, 淸陽 이북 지방이 물에 잠기자, 茂則을 파견하여 역마를 타고 다니면서 감시하게 하였다. 이해 8월에 황하가 澶州 曹村으로 범람하였다. 10월에 衛州의 王供으로 범람하니, 이때 새로 쌓은 제방이 모두 여섯이었으나 그 가운데 두 개가 터졌다.……
元豐 원년(1078) 4월 丙寅日에 터진 제방을 막고 조칙을 내려 曹村의 제방을 靈平으로 개명하였다.……元豐 3년 7월에 澶州 孫村에서 陳埽와 大吳, 小吳의 埽가 터지니, 外監丞司에게 조칙을 내려 서둘러 수리하여 범람을 막게 하였다. 元豐 4년 4월에 小吳의 埽가 다시 크게 붕괴되어 황하의 물이 澶州로부터 御河로 흘러 들어가 恩州가 몹시 위태로워졌다.[熙寧四年七月辛卯 北京新堤第四第五埽決 漂溺館陶永濟淸陽以北 遣茂則乘驛相視 八月 河溢澶州曹村 十月 溢衛州王供 時新堤凡六埽 而決者二……元豐元年四月丙寅 決口塞 詔改曹村埽曰靈平……三年七月 澶州孫村 陳埽及大吳小吳埽決 詔外監丞司速修閉……四年四月 小吳埽復大決 自澶注入御河 恩州危甚]”라고 보인다. 埽는 제방을 가리킨다.
역주10 今歲之秋……復禹舊迹之勢 : 이 내용 또한 《宋史》 〈河渠志 二〉에 “대체로 熙寧 연간 초기에는 오로지 黃河의 물길을 동쪽으로 흐르게 하려 하여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막았으나, 元豐 연간 이후에 黃河의 제방이 터져 북쪽으로 흐르는 것을 보고는, 의논하는 자들이 비로소 禹임금 때의 黃河의 물길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大抵熙寧初 專欲導東流 閉北流 元豐以後 因河決而北 議者始欲復禹故迹]”라고 보인다.
禹임금 때의 黃河의 물길은 《書經》 〈夏書 禹貢〉에 기재되어 있는 황하의 물길을 가리키는데, 대체로 지금의 河南省 滎澤을 경유하여 동북으로 흘러 陽武, 延津, 滑縣, 河北省 大名을 지나 나뉘어 九道河(아홉 개의 물길)를 이루었다가 天津에 이르러 물길이 하나로 모여 발해로 들어간다.
역주11 咸平景德 : 모두 宋 眞宗의 연호이다. 咸平은 998년부터 1003년까지이고, 景德은 1004년부터 1007년까지이다.
역주12 在易大有上九……吉無不利 : 大有上九는 《周易》 大有卦의 上九 爻辭라는 뜻이다. 여기에 “上九는 하늘로부터 도우므로 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上九自天祐之 吉无不利]”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程子는 《易傳》에서 “上九는 卦의 終에 있어서 지위가 없는 자리에 처했으니, 이는 大有가 지극하면서도 그 소유함을 자처하지 않는 것이다. 離의 위에 처함은 밝음이 지극한 것이니, 지극히 밝기에 그 소유함을 자처하지 아니하여 지나치게 지극함에 이르지 않은 것이다. 소유함이 지극하더라도 자처하지 않으면 盈滿의 재앙이 없으니, 이치에 순응하는 자이다.
五가 孚信인데 그 위를 밟고 있음은 誠信을 이행하는 뜻이 되고, 五가 文明한 德이 있는데 上이 뜻을 낮추어 그에게 응함은, 賢者를 높이고 善을 숭상하는 뜻이 된다. 그 대처함이 이와 같으면 吉한 道가 지극한 것이니, 스스로 마땅히 福慶을 누려 하늘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다. 행실이 天道에 순응하여 하늘의 도움을 얻었다. 그러므로 가는 곳마다 모두 吉하여 이롭지 않은 바가 없는 것이다.[上九在卦之終 居无位之地 是大有之極而不居其有者也 處離之上 明之極也 唯至明 所以不居其有 不至於過極也 有極而不處 則无盈滿之災 能順乎理者也 五之孚信而履其上 爲蹈履誠信之義 五有文明之德 上能降志以應之 爲尙賢崇善之義 其處如此 吉道之至也 自當享其福慶 自天祐之 行順乎天而獲天祐 故所往皆吉 无所不利也]”라고 주석하였다.
大有卦(䷍)는 火를 상징하는 離와 天을 상징하는 乾이 모여서 이루어졌으므로 上九爻가 離의 위에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3 孔子曰……吉無不利 : 이 내용은 《周易》 〈繫辭傳 上〉의 11章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14 二聖 : 哲宗과 英宗의 妃인 宣仁聖烈高皇后를 이른다. 이때 神宗이 죽고 어린 哲宗이 즉위하자, 宣仁聖烈高皇后가 수렴청정하였으므로 二聖이라 말한 것이다.
역주15 三德 : 위의 《周易》 〈繫辭傳 上〉에서 孔子께서 말씀하신 履信, 思順, 尙賢의 세 가지 德을 이른다.
역주16 九夷八蠻 : 九夷는 고대 중국의 동쪽에 있던 아홉 종족의 이민족을 가리키며, 八蠻은 고대 중국의 남쪽에 있던 여덟 종족의 이민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중국 주변의 이민족 모두를 가리킨 것이다.
역주17 退居於洛 : 神宗 즉위 후 王安石이 정권을 잡고 新法을 강행하였는데, 이에 반대하던 司馬光은 자신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熙寧 4년(1071)에 洛陽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역주18 眇然如顔子之在陋巷 : 顔子는 孔子의 제자 顔回를 이르고, 陋巷은 누추한 시골의 골목이다. 이 내용은 《論語》 〈雍也〉에 “어질다, 顔回여! 한 대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음료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顔回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顔回여![賢哉回也 一簞食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보인다.
역주19 纍然如屈原之在陂澤 : 纍然은 초췌한 모습이며, 屈原은 전국시대 楚나라의 忠臣으로 이름이 平인데 字로 더 알려졌는바, 《楚辭》의 저자이다. 간신들에게 미움을 받고 湘江으로 쫓겨났다가, 깨끗한 몸을 혼탁한 세상에 더럽힐 수 없다며 汨羅水에 빠져 죽었다.
이 내용은 屈原이 지은 《楚辭》의 〈漁父辭〉에 “屈原이 쫓겨나 江潭에서 노닐고 못가에서 거닐면서 시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形容이 말라빠져 생기가 없었다.[屈原旣放 游於江潭 行吟澤畔 顔色憔悴 形容枯槁]”라고 보인다.
역주20 元豐之末 : 元豐은 宋 神宗의 연호로 1078년부터 1085년까지이다.
역주21 臣自登州入朝……以至京師 : 蘇軾은 元豐 3년에 烏臺詩案으로 黃州로 유배갔었는데, 元豐 7년에 유배가 풀리고 汝州團練副使로 常州에 거주하다가 元豐 8년 6월에 朝奉郞에 복직되어 知登州事에 임명되었고, 10월에 登州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禮部郎中으로 소환되었다가, 12월에 起居舍人으로 영전하였다.
登州는 宋代의 州의 이름인데 지금의 山東省 蓬萊縣 일대이다. 八州는 登州로부터 都城인 開封에 이르는 경로의 8개 고을로 萊州, 濰州, 靑州, 東平府, 濟州, 濮州, 仁興府, 開封府를 이른다.
역주22 戶部侍郞趙瞻 : 戶部侍郞은 국가의 財政과 民政을 관장하는 戶部의 次官으로 장관인 戶部尙書를 보좌한다. 趙瞻(1019~1090)은 字가 大觀으로 鳳翔 盩厔(지금의 陝西省 周至) 사람으로 仁宗 慶曆 6년(1046) 進士로 출사하여 처음 孟州司戶參軍에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외직을 거쳤으며, 神宗 때에 開封府判官을 거쳐 哲宗 때에 戶部侍郞을 역임하고 同知樞密院事에 올랐다. 《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23 內侍省押班馮宗道 : 內侍省은 皇宮의 內務와 侍奉하는 업무와 皇帝의 조칙을 宣傳하는 업무를 관장하는 기관이다. 押班은 환관들을 통솔하는 관원으로 宋나라 때에는 통상 勳戚이나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환관을 임명하였다. 馮宗道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역주24 嶺南封州 : 嶺南은 大庾嶺․始安嶺․臨賀嶺․桂陽嶺․揭陽嶺의 五嶺 以南을 이르는바, 지금의 廣東省, 廣西省 일대이다. 封州는 宋代 州의 하나로 治所는 지금의 廣東省 封川縣에 있었다. 이는 司馬光의 죽음을, 都城에서 매우 먼 僻地에서도 애도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역주25 且作佛事 以薦公 : 道場을 만들어서 司馬光의 영혼이 極樂世界로 가도록 祝願함을 이른다.
역주26 炷薌(香)於手頂 以送公葬者 : 薌은 香으로 침향목이나 단향목으로 만든 향료를 이른다. 고대에는 손이나 정수리에 향료를 놓아 살을 태우는 고통을 통해 神佛에게 경건한 정성을 표하는 경우가 많았는바, 司馬光의 죽음에 최대한의 경건한 정성을 보인 것이다.
역주27 記曰……則可以贊天地之化育矣 : 이 내용은 《禮記》 〈中庸〉에 그대로 보이는데, 朱子의 《中庸集註》에 “天下의 至誠은 聖人의 德의 성실함이 천하에 더할 수 없음을 이른다. 그 性을 다한다는 것은 德이 성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人慾의 사사로움이 없어 자신에게 있는 天命을 살피고 행해서, 크고 작음과 精하고 거칢이 털끝만큼도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사람과 물건의 性은 또한 나의 性인데, 다만 부여받은 바의 形氣가 똑같지 않기 때문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능히 다한다는 것은 앎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함이 마땅하지 않음이 없음을 이른다. 贊은 助와 같다.[天下至誠 謂聖人之德之實 天下莫能加也 盡其性者 德無不實 故無人欲之私 而天命之在我者 察之由之 巨細精粗無毫髮之不盡也 人物之性 亦我之性 但以所賦形氣不同而有異耳 能盡之者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 贊猶助也]”라고 注하였다.
역주28 書曰……動罔不凶 : 이 내용은 《書經》 〈商書 咸有一德〉에 그대로 보이는데, 蔡沈의 集傳에 “一德은 純一한 德으로 잡되지 않고 쉬지 않는 뜻이니, 곧 上文에 이른바 ‘떳떳한 德’이란 것이다. 享은 마땅함이다.……二三이면 잡된 것이다. 德이 純一하면 가는 곳마다 吉하지 않음이 없고, 德이 잡되면 가는 곳마다 凶하지 않음이 없다.[一德 純一之德 不雜不息之義 卽上文所謂常德也 享當也……二三則雜矣 德之純則無往而不吉 德之雜則無往而不凶]”라고 注하였다. 二三은 마음이 이랬다 저랬다 하여 한결같지 못함을 이른다.
역주29 河內 : 지금의 河南省 武陵縣이다.
역주30 晉安平獻王孚 : 安平獻王 司馬孚(180~272)는 字가 叔達인데, 司馬懿의 아우로 魏나라 때에 太傅의 벼슬에 올랐으며, 晉나라 때에 安平王에 봉해지고 獻은 시호이다.
역주31 征東大將軍陽 : 司馬陽은 司馬孚의 후손으로 征東大將軍을 지냈으며, 죽은 뒤에 安邑 瀾洄曲에 장례하였는데, 後魏(北魏) 때에 安邑을 나누어 夏縣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司馬氏가 夏縣 사람이 된 것이다.
역주32 耀州富平縣 : 지금의 陝西省에 속해 있었다.
역주33 寶元慶曆 : 宋 仁宗의 연호로 寶元은 1038년부터 1040년까지이고, 慶曆은 1041년부터 1048년까지이다.
역주34 進士甲科 : 宋代의 과거제도는 進士科에 甲科, 乙科의 두 종류가 있었는데, 司馬光은 仁宗 寶元 원년(1038)에 進士 甲科에 급제하였다.
역주35 始發大議……遂定大計 : 仁宗이 후사가 없자, 司馬光이 마땅히 宗子를 후사로 세워야 한다고 상소하니, 재상 韓琦가 이를 받아들여 仁宗의 형인 濮安懿王 趙允讓의 아들 趙曙를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하여 趙曙가 仁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니, 바로 英宗(재위 1063~1067)이다. 英宗은 太宗 趙光義의 증손이다.
역주36 論陝西刺義勇爲民患 : 英宗 연간에 西夏의 군대가 변방을 침입하자, 당시 재상으로 있던 韓琦는 병력이 부족할까 염려하여 陝西省에서 20만의 의용군을 모집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민심이 크게 동요되었다.
이때 간관으로 있던 司馬光은, 이 조치가 병제의 근간을 흔들고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는 失政이라고 극력 반대하였다. 처음 英宗 治平 원년(1064) 11월에 司馬光은 〈乞罷陝西義勇書〉를 올려 의용군의 모집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자주 그 잘못을 힘써 말하였다.
‘刺義勇’은 宋代에는 군대를 모집함에 있어 禁軍과 廂軍은 반드시 얼굴에 자자하여 병사임을 표시하였고, 정규군이 아닌 義勇軍은 얼굴이 아니라 손등에 자자하였는데, 이를 말한 것이다.
역주37 及內侍任守忠姦蠹……竟以譴死 : 內侍 任守忠이 농간을 부려 國事를 그르치자, 英宗 治平 원년 7월에 司馬光이 〈論任守忠十大罪乞正典刑〉의 상소문을 올리니, 英宗이 司馬光의 뜻을 가납하여 任守忠을 蘄州에 위리안치시켰는데, 任守忠은 끝내 이곳에서 죽었다.
역주38 論濮安懿王 當準先朝封贈期親尊屬故事 : 英宗이 즉위한 다음 해에 조칙을 내려 生父인 濮安懿王의 崇封 문제를 의논하면서 韓琦, 歐陽脩 등의 의논을 받아들여 濮安懿王을 皇考라 칭하고자 하였다.
이에 司馬光은 范純仁, 王珪 등과 함께 “濮安懿王은 비록 폐하께 天性의 親함과 길러준 은혜가 있으나 폐하께서 천자의 지위에 앉아 면류관을 쓰고 四海의 富를 차지하여 자손만대에 길이 계승하게 된 것은 모두 先帝(仁宗)의 덕입니다. 마땅히 先王朝에서 期親尊屬을 封贈하는 故事에 의준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상소하여, 仁宗을 皇考라 부르고 濮安懿王을 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주39 西戎部將嵬名山……已而果然 : 治平 4년(1067)에 淸澗城의 种諤(충악)이 ‘西夏의 2대 임금인 諒祚의 失政으로 민심이 이반되어, 橫山 일대의 백성들이 그 수령 嵬名山을 중심으로 宋나라에 귀순할 뜻이 있음’을 보고하고, 이들의 뜻을 받아들여 西夏를 공격할 것을 주청하였다.
司馬光이 상소하여 이것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새로 즉위한 神宗이 전략적 요충지인 橫山의 수복에 큰 관심을 보여 司馬光의 주장을 물리치고, 이해 10월 군대를 출동시켜 綏州로 진격해서 橫山 일부의 땅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宋나라는 西夏와의 講和가 깨져 西夏軍이 변경을 자주 침략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橫山은 지금의 陝西省 米脂縣의 서북쪽에 있는 산악지대로 본래 중국의 영토였으나, 宋나라와 西夏의 몇 차례의 전쟁 끝에 慶曆 4년(1044) 講和하면서 모두 西夏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역주40 勸帝不受尊號 遂爲萬世法 : 熙寧 원년(1068)에 여러 신하들이 神宗의 尊號를 올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이때 司馬光이 상소하여 神宗에게 이를 받아들이지 말 것을 청하자, 神宗이 司馬光의 주장을 받아들여 尊號를 거절하였다. 이에 후세가 이를 따라 법으로 삼았다. 尊號는 신하들이 황제에게 올리는 美稱으로 예컨대 ‘神聖文武’와 같은 따위이다.
역주41 王安石爲相……謂之新法 : 王安石(1021~1086)은 문인이자 정치가로, 唐宋八大家 중의 한 사람이다. 字는 介甫이고 號는 半山이며 만년에 荊國公에 봉해졌기 때문에 荊公이라고 칭한다. 神宗의 전폭적인 信任 아래 부국강병을 위해 新法을 시행하였으나 많은 폐해를 남겼다. 그는 神宗 熙寧 2년(1069)에 參知政事에 임명되었으며, 熙寧 3년 12월에 재상이 되어 靑苗法, 助役法, 農田水利法 등의 新法을 실시하였다. 이에 司馬光은 王安石의 新法에 극력 반대하여 반대당(舊法黨)의 영수가 되었다.
靑苗法은 매년 곡식이 익기 전에 常平倉과 廣惠倉으로 하여금 어려운 백성들에게 錢穀을 대여하였다가, 곡식이 익은 뒤에 이식을 붙여 본색과 함께 갚게 하는 제도이다.
助役法은 백성들이 부역 대신 인부를 살 돈을 바치는 제도로, 宋나라는 원래 백성들에게 매년 20일간의 부역을 시키고 이것을 差役이라 칭하였으나, 新法은 司農寺에서 모든 호구에게 助役錢을 내고 差役을 면제하게 하였다.
農田水利法은 各路에 提擧常平司를 두어 수리사업을 관할하게 하고, 또 水利權을 개방하여 백성들 중에 관개시설이나 제방을 쌓아 농사에 이용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提擧常平司에서 비용을 빌려주어 공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규모의 수리사업을 여러 州가 협력하여 진행하도록 하여 농토를 확장하고 생산량을 늘리고자 한 법이다.
역주42 以爲端明殿學士 出知永興軍 : 熙寧 3년(1070) 2월에 神宗은 司馬光을 樞密副使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자, 동년 9월에 翰林學士의 직위를 거두고 端明殿學士로 삼아 永興軍을 맡게 하였다. 端明殿學士는 宋代의 殿閣學士 가운데 하나로 일종의 명예직이다. 永興軍은 永興軍路로 지금의 陝西省 西部와 河南省 東部 일대를 이르며, 路는 지금의 省과 같다.
역주43 上卽位 太皇太后攝政 : 上은 哲宗을 이르고, 太皇太后는 英宗의 妃인 宣仁聖烈高皇后를 이른다. 元豐 8년(1085)에 哲宗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太皇太后인 宣仁聖烈高皇后가 수렴청정하였다.
역주44 公爲門下侍郞……遂遷左僕射 : 門下侍郞은 門下侍郞同平章事로 中書侍郞同平章事와 함께 唐나라와 宋나라 때의 재상의 칭호이다. 正議大夫는 文散階에 있어 ‘正4품 上’의 品階를 이르고, 左僕射는 左丞相과 같다. 僕射는 원래 主任 혹은 領班이란 뜻인데, 唐나라와 宋나라 때에는 尙書省의 首長을 左右僕射라고 칭하였다.
역주45 公首更詔書……進退其甚者十餘人 : 司馬光이 元豐 8년 3월 30일에 〈乞開言路箚子〉를 올려 言路를 열고 간사한 자와 정직한 자를 분별하여 黜陟시킬 것을 청하자, 황제는 呂公著를 右僕射에, 范純仁을 同知樞密院에 임명하고 蔡確을 知陳州事로, 章惇을 知汝州事로 좌천시켰다.
역주46 旋罷保甲……最後遂罷助役靑苗 : 保甲, 保馬, 市易, 助役, 靑苗는 모두 王安石에 의해 시행된 新法으로 哲宗 즉위 후에 司馬光에 의해 차례로 폐기되었으며, 여러 路에서 새로 시행되고 있던 소금과 철과 차에 대한 규제도 모두 폐기되었다.
保甲法은 農民兵制로의 전환을 전제로 한 兵制인데, 10호를 保, 50호를 大保, 10大保를 都保라 하고 각각 正과 副의 長을 두어 조직화한 다음, 평상시에는 연대하여 지방의 치안을 맡게 하고 농한기에는 군사 훈련을 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게 한 제도이다.
保馬法은 軍馬의 확보를 위하여 희망하는 농민에게 1戶당 한 필이나 두 필의 말을 국가에서 주어 기르게 하여 平時에는 農耕에 이용하다가 戰時에는 徵發하던 制度이다.
市易法은 豪商들로부터 영세 상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요한 도시에 市易務를 설치하여, 영세 상인이 팔지 못한 상품을 사주거나 또는 이를 저당으로 하여 연 2割의 이자로 자금을 융통해주는 제도인데, 熙寧 5년(1072)에 실시하여 元豐 8년에 폐지되었다.
역주47 元祐元年九月丙辰朔 薨于位 : 元祐 원년은 1086년이다. 司馬光은 정승에 임명된 지 8개월 만에 별세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薨은 원래 제후왕의 죽음을 이르는데, 후대에는 大臣의 죽음을 이르게 되었다.
역주48 方祀明堂 禮成不賀 : 明堂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司馬光의 부음이 전해지자, 皇帝가 제사를 끝내고 司馬光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기 위해 여러 신하들의 慶賀를 받지 않은 것이다. 明堂은 고대에 제왕이 政敎를 베풀던 곳으로 朝會, 祭祀, 慶賞, 選士, 養老, 敎學 등의 典禮를 이곳에서 행하였다.
역주49 禮部尙書存 : 張存은 字가 誠之로 冀州(지금의 河北省 冀顯) 사람이다. 進士로 출사하여 吏部侍郞으로 치사하였는데, 뒤에 禮部尙書의 직함을 받았다.
역주50 行狀 : 원래 사람의 品行이나 事迹을 가리키는 말이나 뒤에 文體의 하나가 되었는데, 亡者의 官職, 家系, 歷官, 行績, 功績 등을 기록한 글이다. 行狀은 亡者 자신이 평소에 지어두었다가 자손에게 전하기도 하며, 王命에 따라 문장에 능한 관인이 작성하거나, 亡者의 자손의 청탁에 따라 친구나 명성 있는 文人이 작성하기도 하였는데, 諡號, 碑銘, 墓誌銘의 토대가 된다.
역주51 范鎭 : 字가 景仁으로 시호는 忠文이며, 華陽(지금 四川省 成都) 사람이다. 進士로 출사하여 翰林學士, 判太常寺 등을 지냈으며, 哲宗 때에 端明殿學士가 되고 蜀郡公에 봉해졌다. 王安石의 신법을 반대하는 등 司馬光과 정견이 일치하였으며 교분이 매우 깊어 司馬光의 墓誌銘을 지었다. 저서에 《正言》, 《范蜀公集》 등이 있다.
역주52 熙寧 : 宋 神宗의 연호로 1068년부터 1077년까지이다.
역주53 左右輔弼之臣 : 《尙書大傳》 〈虞夏傳〉에 “옛날 天子에게는 반드시 四隣이 있었으니, 천자의 앞에 있는 자를 疑라 하고, 뒤에 있는 자를 丞이라 하고, 좌측에 있는 자를 輔라 하고, 우측에 있는 자를 弼이라 한다.[古者 天子必有四隣 前曰疑 後曰丞 左曰輔 右曰弼]”라고 보이는데, 뒤에는 인신하여 재상을 輔弼이라고 칭하였다.
역주54 至爲敍其所著書 讀之於邇英閣 : 神宗은 司馬光이 편찬한 《資治通鑑》의 序文을 지었으며, 邇英閣에서 일일이 批閱하였다. 邇英閣은 仁宗 때에 지어진 누각인데 황제가 이곳에서 독서하거나 經筵을 열었다.
역주55 齊神武皇帝 : 齊는 南北朝時代의 北齊를 이른다. 神武皇帝는 高歡으로 東魏의 승상이었는데 孝莊帝가 시해되자 孝武帝를 옹립했다가 다시 孝靜帝를 세우는 등 정권을 전단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文宣帝 高洋이 東魏의 孝靜帝에게 선양받아 北齊를 세우자, 神武帝로 추존되었다.
東魏는 北魏가 분열하여 건국된 나라로 北魏의 洛陽으로부터 동쪽 지역을 영토로 하였다. 北魏의 孝武帝가 승상 高歡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한 다음, 洛陽에서 관중의 長安으로 도주하여 關西大都督 宇文泰에게 의지하자, 高歡이 鄴에서 孝靜帝를 옹립하여 東魏를 건국하였으며, 宇文泰는 長安에서 孝武帝를 독살하고 文帝를 옹립하여 西魏를 건국하였다.
역주56 世宗 : 高歡의 맏아들인 高澄으로 文宣帝 高洋의 형이다. 아버지를 이어 東魏의 승상이 되어 齊王에 봉해졌으나 암살되었다. 高洋이 北齊를 세우자 文襄帝로 추존되었는데 世宗은 그의 廟號이다.
역주57 侯景 : 字가 萬景으로 본래 北魏의 수비병 출신이었는데, 東魏의 高歡 휘하에서 공을 세워 장수가 되고 河南大行臺에 임명되었다. 高歡이 죽자 東魏를 배반하고 자신의 임지인 河南를 들어 梁나라에 귀순하려다가, 慕容紹宗에게 패하여 하남을 빼앗기고 휘하의 군대만을 이끌고 梁나라로 망명하였다. 뒤에 梁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선양을 받아 建康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漢나라를 세웠으나, 荊州刺史 蕭繹이 보낸 王僧辯에게 패하여 사망하였다.
역주58 慕容紹宗 : 원래 北魏의 승상 爾朱兆의 長史였는데, 爾朱兆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高歡에게 토벌되어 스스로 목매 죽자, 高歡의 휘하로 들어가 한미하게 지냈다. 그러나 뒤에 高澄에게 발탁되어 장수가 되고 侯景의 군대를 대파하여 河南 땅을 수비하였다.
역주59 李勣 : 唐나라 太宗과 高宗 때의 명장으로 字가 懋功이며 曹州 離狐 사람이다. 본명이 徐世勣이었는데, 高祖 李淵에게 李氏 姓을 하사받아 李世勣이 되었다가 太宗 李世民의 이름을 휘하여 李勣이 되었다. 唐나라 건국 초기에 河北과 河南을 정벌하였으며, 太宗 즉위 후에 돌궐을 정벌하고 高宗 때에 고구려를 정벌하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웠으며, 高宗 때에 尙書左僕射에 올랐다.
역주60 疊州 : 唐나라 때의 州의 이름으로 지금의 甘肅省 迭部縣 일대이다.
역주61 聖子受命 如堯之初 : 哲宗이 10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堯帝 또한 11세에 帝位에 올랐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裴駰이 지은 《史記集解》에 “皇甫謐이 이르기를 ‘堯帝는 甲申年에 출생하였는데 甲辰年에 帝位에 올랐다.’ 하였다.[皇甫謐曰 堯以甲申歲生 甲辰卽帝位]”라고 보이는바, 甲辰年은 堯帝가 11세 되는 해이다.
역주62 神母詔之 : 神母는 宣仁聖烈高皇后를 이른다.
역주63 孰左右之 : 左右는 보필함을 이르는바, 바로 재상의 임무이다.
역주64 民自擇相 我與授之 : 백성들이 스스로 司馬光을 승상으로 선택하자 그를 승상에 임명하였다는 의미로, 司馬光이 민심을 얻고 있음과 皇帝가 능히 민심에 순응함을 말한 것이다.
역주65 神考是懷 : 神考는 先皇帝 神宗을 이른다. 神宗이 司馬光의 재능을 알아보고 아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6 薦于淸廟 神考之功 : 淸廟는 皇帝가 先祖를 제사하는 곳을 이른다. 황제가 선대의 황제에게 제사를 올릴 적에 當代의 功臣을 배향하는데, 이때 司馬光을 神宗의 사당에 배향하였다.
역주67 觀長公於二聖之撤金蓮燭……則得之矣 : 金蓮燭은 金으로 만든 연꽃 모양의 촛대를 이른다.
이 내용은 〈蘇文忠公本傳〉에 “蘇軾이 일찍이 禁中에서 숙직할 적에 便殿에서 召對하였는데, 宣仁皇后가 蘇軾에게 말씀하기를 ‘卿의 벼슬이 대번에 여기에 이른 것은 바로 先帝(神宗)의 뜻이다. 先帝께서 매번 卿의 문장을 읽을 때마다 반드시 감탄하시기를 「奇才로다! 奇才로다!」 하셨는데, 다만 미처 卿을 등용하지 못하셨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蘇軾이 이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失聲痛哭을 하자, 宣仁皇后와 哲宗도 함께 눈물을 떨구었고, 좌우 측근들도 모두 감격하여 울었다. 宣仁皇后는 얼마 후 蘇軾을 자리에 앉도록 명하여 茶를 대접하고 御前에 있는 金蓮 촛불을 거두어 하사하여 院으로 돌려보냈다.”라고 보인다.
東坡는 元祐 원년(1086) 8월에 翰林學士 知制誥에 제수되었고, 元祐 4년 3월에 외직을 자청하여 知杭州事로 나갔으므로, 이 일은 이 사이에 있었던 것이다. 〈蘇文忠公本傳〉은 본서 1권에 보인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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