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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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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16. 가조봉賈朝奉에게 사례한
此必賈公過臨老蘇墓 而長公陳謝者리라
이는 반드시 가공賈公노소老蘇(소순蘇洵)의 묘를 지나다가 참배하자 장공長公이 사례한 것일 것이다
自蜀徂京 幾四千里 携孥去國 蓋二十年이니이다
에서부터 서울(개봉開封)까지가 거의 4천 리이고, 처자식을 데리고 도성을 떠난 지가 20년이 되었습니다.
側聞 已中梁柱하니 하고 酹以隻鷄 誰副이리오
엎드려 들으니, 선친의 묘소에 심어놓은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이미 들보와 기둥감이 되었다 하니, 누가 무덤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부질없이 동상董相의 능을 바라보며, 술을 따라놓고 한 마리 닭을 올리면서 교공橋公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宦游歲晩 坐念涕流
벼슬길에 헤매다가 노년이 되니, 가만히 앉아서 이것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未報不貲之恩하니 敢懷盍歸之意리오
군주의 크나큰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돌아가겠다는 뜻을 품겠습니까?
묘소에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을 금하지 못하여 장차 옹문주雍門周의 슬픔이 있을까 항상 두려워하였고, 봄이 되어 비와 이슬이 내리면 부질없이 태항산太行山에서 목을 늘이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豈謂通判某官 政先慈孝하고 義篤友朋하야 首隆學校之師儒하고 次訪閭里之耆舊리오
그런데 통판 모관通判 某官께서 정사政事자효慈孝를 먼저 하고 의리義理붕우朋友간을 돈독하게 하시어, 맨 먼저 학교의 스승과 학자들을 높이시고 다음으로는 향리의 원로들을 방문하실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自嗟來暮하야 不聞하고 尙意神交 特致하시니
늦게 와서 큰 염교뿌리를 뽑아놓는 경계를 듣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탄식하였고, 뜻을 높여 정신으로 사귐에 특별히 생추生芻을 올리셨습니다.
父老感嘆하고 光華니이다
부로父老들이 감탄하고 상재桑梓에 광채가 납니다.
으로 莫克垂洟於墓道 니이다
제가 심의深衣를 입고 연관練冠을 쓴 채 묘도墓道에서 눈물을 떨구지는 못하였으나, 옛날에는 저고리도 없다가 이제는 바지를 입으니 지금도 염숙도廉叔度를 노래한 민요에 고무됩니다.
仰佩之深 力占難盡이니이다
우러러 가슴속에 되새기는 마음이 깊어서 힘써 입으로 다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역주
역주1 謝賈朝奉啓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右軾啓’라는 3字가 있다. 朝奉은 관직 명칭이다. 賈朝奉의 身元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역주2 松楸 : 소나무와 가래나무인데, 주로 묘소 주변에 심었으므로 인신하여 先塋을 이르기도 한다.
역주3 過而下馬 空瞻董相之陵 : 董相은 前漢 武帝 때의 학자인 董仲舒(B.C. 176~B.C. 104)를 이르며, 陵은 그의 무덤을 이른다. 그는 처음 江都王의 相이 되었고 뒤에 膠西王의 相이 되었으므로 董相으로 불렸다. 董仲舒는 信都國 廣川縣 사람으로 漢나라 초기 유학이 쇠퇴하였을 적에 道家를 물리치고, 武帝에게 상주하여 유교를 國敎로 정하게 하였으며, 《春秋》에 밝아 《春秋繁露》를 지었다. 董仲舒의 묘소가 長安城의 동남쪽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가면 모두 말에서 내렸으므로 下馬陵이라 하였다.
역주4 橋公之約 : 橋公은 後漢 때 太尉 橋玄을 높여 칭한 것이다. 《三國志》 〈武帝記〉에 “建安 7년(202) 봄 정월에 曹操가 浚儀에 이르러 睢陽城의 해자를 수리하고 사람을 보내 橋玄을 太牢의 禮로 제사하였다.”라고 하였는데, 그 注에 “橋玄이 그의 벗 曹操에게 ‘내가 죽은 뒤 그대가 혹시 내 무덤 앞을 지나가게 되거든 술 한 말과 닭 한 마리를 내 무덤에 차려놓게. 그렇지 않으면 그대가 탄 수레가 세 번을 굴러가기 전에 배가 아프더라도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말했다.”라고 하였다, 武帝는 曹操의 시호이며, 太牢는 소와 돼지와 양 각 1마리씩을 잡아 올리는 성대한 祭需이다.
역주5 樵牧不禁 行有雍門之悲 : 樵牧은 樵童 牧夫를 가리키며, 雍門은 雍門周를 이른다. 戰國時代 사람으로 字는 子周인데 거문고로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명인이었다. 齊나라의 公子인 孟嘗君(田文)이 그를 불러 거문고를 타게 하면서 “자네가 나도 울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雍門周는 거문고로 슬픈 곡조를 타면서 孟嘗君의 死後를 노래하기를 “千秋萬歲後에 묘지에 가시나무가 자라고 여우와 토끼가 굴을 파며, 樵童과 牧夫들이 무덤 위를 오가며 노래하면 길 가던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서글퍼하며 ‘귀하신 孟嘗君이 어쩌다가 죽어 이 지경이 되었는가?’라고 하리라.”고 하니, 孟嘗君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이 내용은 桓譚의 《新論》에 보인다.
역주6 雨露旣濡 空引太行之望 : 雨露는 비와 이슬로, 봄에 비와 이슬이 내리면 옛날 孝子들은 행여 父母가 다시 살아오실까 해서 그리워하였으며, 太行之望은 太行山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본 고사로 고향의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한다. 唐나라의 狄仁傑이 幷州參軍으로 있을 적에 그의 어버이는 河陽에 있었다. 狄仁傑은 太行山에 올라가 河陽 방면의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자, 좌우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의 어버이가 저 흰 구름 아래 계신다.”라고 하고는 서글픈 얼굴로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구름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新唐書 狄仁傑列傳》
역주7 拔薤之規 : 拔薤는 염교뿌리를 뽑는 것이며, 規는 경계하여 타이르는 것으로, 이는 지방장관이 청렴결백하여 豪族을 제압하고 백성을 보살펴 선정을 베풂을 이른다. 後漢의 龐參이 漢陽太守로 부임하여 高士인 任棠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任棠이 아무 말 없이 염교뿌리 하나와 물 한 사발을 문 앞에 놓고는 손자 아이를 업고 엎드려 있었다. 龐參이 한참 동안 그 의미를 생각하다가 ‘맑은 물처럼 청렴하고, 힘 있는 자들을 억누르기를 마치 염교뿌리를 뽑듯이 과감하게 하고, 손자 아이처럼 약한 백성들을 돌보아주라는 뜻’임을 깨닫고는 돌아가서 그대로 실천하였다. 《後漢書 龐參列傳》
역주8 生芻之奠 : 生芻는 새로 벤 풀로, 죽은 이에게 올리는 祭物을 뜻한다. 後漢 때 名士인 徐穉가 郭泰의 母親喪에 조문하러 갔다가 生芻 한 다발을 놓아두고 떠났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後漢書 徐穉傳》
역주9 桑梓 : 뽕나무와 가래나무로, 이 나무는 집 주변에 즐겨 심기 때문에, 인신하여 고향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역주10 深衣練冠 : 深衣는 고대에 諸侯와 大夫, 士가 집에서 편히 거처할 적에 입던 옷인데 후대에는 선비들의 평상복이 되었다. 練冠은 흰 비단으로 만든 관을 이르는데, 小祥 뒤에 착용하였다.
역주11 昔襦今袴 尙能鼓舞於民謠 : 後漢의 廉范의 고사이다. 본서 卷8 〈謝賜對衣金帶馬表 二〉의 주3) 참조.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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