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蜀徂京이 幾四千里요 携孥去國이 蓋二十年이니이다
豈謂通判某官이 政先慈孝하고 義篤友朋하야 首隆學校之師儒하고 次訪閭里之耆舊리오
이는 반드시 가공賈公이 노소老蘇(소순蘇洵)의 묘를 지나다가 참배하자 장공長公이 사례한 것일 것이다
촉蜀에서부터 서울(개봉開封)까지가 거의 4천 리이고, 처자식을 데리고 도성을 떠난 지가 20년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들으니, 선친의 묘소에 심어놓은 소나무와 가래나무가 이미 들보와 기둥감이 되었다 하니, 누가 무덤 앞을 지나다가 말에서 내려 부질없이 동상董相의 능을 바라보며, 술을 따라놓고 한 마리 닭을 올리면서 교공橋公과의 약속을 지키겠습니까?
벼슬길에 헤매다가 노년이 되니, 가만히 앉아서 이것을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군주의 크나큰 은혜를 보답하지 못하니, 어찌 감히 돌아가겠다는 뜻을 품겠습니까?
묘소에 나무꾼과 목동의 출입을 금하지 못하여 장차 옹문주雍門周의 슬픔이 있을까 항상 두려워하였고, 봄이 되어 비와 이슬이 내리면 부질없이 태항산太行山에서 목을 늘이고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통판 모관通判 某官께서 정사政事는 자효慈孝를 먼저 하고 의리義理는 붕우朋友간을 돈독하게 하시어, 맨 먼저 학교의 스승과 학자들을 높이시고 다음으로는 향리의 원로들을 방문하실 줄 어찌 생각했겠습니까?
늦게 와서 큰 염교뿌리를 뽑아놓는 경계를 듣지 못한 것을 스스로 탄식하였고, 뜻을 높여 정신으로 사귐에 특별히 생추生芻의 전奠을 올리셨습니다.
부로父老들이 감탄하고 상재桑梓에 광채가 납니다.
제가 심의深衣를 입고 연관練冠을 쓴 채 묘도墓道에서 눈물을 떨구지는 못하였으나, 옛날에는 저고리도 없다가 이제는 바지를 입으니 지금도 염숙도廉叔度를 노래한 민요에 고무됩니다.
우러러 가슴속에 되새기는 마음이 깊어서 힘써 입으로 다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