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니 有疾
에 召其宗老而屬之曰 祭我
에 必以芰
하라
唐柳宗元이 非之曰 屈子以禮之末로 忍絶其父將死之言이로다
子木은 楚卿之賢者也니 夫豈不知爲人子之道에 事死如事生이리오
夫死生之際
는 聖人嚴之
하야 하며 하야도 不敢不勉
하니 其於死生之變
에 亦重矣
라
父子平日之言은 可以恩掩義어니와 至於死生至嚴之際하야는 豈容以私害公乎아
夫數君子之言이 或主社稷하고 或勤於道德하고 或訓其子孫하야 雖所趣不同이나 然皆篤於大義하야 不私其躬也如此하니라
今赫赫楚國
에 之賢
이 聞於諸侯
어늘 身爲正卿
하야 死不在民
하고 而口腹是憂
하면 其爲陋亦甚矣
라
使子木行之하야 國人誦之하고 太史書之하면 天下後世 不知夫子之賢하고 而唯陋是聞하리니 子木이 其忍爲此乎아
然이나 禮之所謂思其所樂, 思其所嗜는 此言人子追思之道也라
하시고 는 皆人子之情
에 自然也
니 豈待父母之命耶
리오
今薦芰之事가 若出於子면 則可어니와 自其父命이면 則爲陋耳니
若以柳子之言爲然이면 是는 曾元은 爲孝子요 而童子는 顧禮之末하야 易簀於病革之中이니 爲不仁之甚也니라
范宣子盟而撫之曰 事吳를 敢不如事主리잇고호되 猶視러니 欒懷子曰 主苟終에 所不嗣事於齊者면 有如河라한대 乃瞑하니라
范宣子는 知事吳爲忠於主하고 而不知報齊以成夫子憂國之美가 其爲忠則大矣하니라
굴도屈到가 세모난 마름을 좋아하였는데 병이 심해지자, 그 종로宗老(가로家老)를 불러서 부탁하기를 “내가 죽거든 나를 제사할 적에 반드시 세모난 마름을 쓰라.”고 하였다.
그가 죽은 지 기년期年이 되어 소상小祥에 제사할 적에 종로宗老가 장차 세모난 마름을 올리려고 하자, 굴건屈建이 이것을 제거하라고 명하였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아버지의 명령을 어겼으나 도道에 맞는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당唐나라의 유종원柳宗元은 이것을 비판하기를 “굴자屈子(굴건屈建)가 예禮의 지엽적인 것을 가지고 아버지가 장차 죽으려 할 적에 내린 유언을 차마 끊어버렸도다.
또 예禮에는 ‘재계齋戒하는 날에 부모님이 좋아하시던 바를 생각하고 기호하던 바를 생각한다.’는 내용이 있으니, 자목子木(굴건屈建)이 세모난 마름을 제사상에서 제거한 것이 어찌 자식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자목子木은 초楚나라의 어진 경卿이었는데, 그가 어찌 자식 된 도리에 죽은 분(아버지)을 섬기기를 살아 계신 분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해야 함을 몰랐겠는가?
더구나 자기 아버지가 장차 죽을 적에 간곡하게 당부한 말씀을 버리고 따르지 않았으니, 이것은 인정에 차마 못하는 바이다.
이는 반드시 여기에 차마 할 수 없는 것이 크게 있어서 그 정을 빼앗았던 것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즈음은 성인聖人이 매우 엄격하게 여겨서 노침路寢에서 죽되 부인婦人의 손에서는 죽지 않으며, 갓끈을 매고 수족을 열어 보이는 등의 작은 일에 이르러서도 감히 태만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그 죽고 사는 변고에 있어서 또한 중한 것이다.
부자간에 평소의 말은 은혜로써 공의公義를 가릴 수 있으나, 죽고 사는 지극히 엄격한 즈음에 이르러서는 어찌 사사로운 정을 가지고 공의公義를 해칠 수 있겠는가?
증자曾子가 병환이 있자 “군자君子가 도道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세 가지가 있다.”라고 말씀하셨고, 맹희자孟僖子가 죽을 적에 그 아들들로 하여금 중니仲尼에게서 예禮를 배우게 하였고, 관중管仲이 병이 위독하자 위공威公(환공桓公)에게 권하여 세 명의 소인을 제거하게 하였다.
이 몇 군자君子들의 말씀은 혹은 사직社稷을 위주하고 혹은 도덕道德을 힘쓰고 혹은 그 자손子孫들을 훈계하여 비록 나아간 바가 똑같지 않았으나, 모두 대의大義에 돈독하여 자기의 몸을 사사로이 돌보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이제 혁혁한 초楚나라에 약오씨若敖氏의 어짊이 제후諸侯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정경正卿이 되어서 죽을 적에 관심이 백성들에게 있지 않고 입과 배를 걱정하였다면, 그 누추함이 매우 심한 것이다.
만일 자목子木이 자기 아버지의 명령을 실행하여 국민들이 이것을 외고 태사太史가 이것을 역사책에 썼다면, 천하天下와 후세 사람들이 부자夫子(굴도屈到)의 어짊은 알지 못하고 오직 누추한 것만 알려졌을 것이니, 자목子木이 어찌 차마 이런 것을 그대로 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차마 하지 못함이 크게 있어서 그 정을 빼앗았던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기禮記》에 이른바 “부모님의 좋아하시던 바를 생각하고 기호하시던 바를 생각한다.”는 것은, 인자人子가 부모를 추후에 생각하는 도리를 말한 것이다.
증석曾晳이 양조羊棗를 좋아하였는데, 증자曾子가 차마 양조羊棗를 먹지 못하셨고, 아버지가 죽으면 아버지의 책을 읽지 못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어머니의 기물을 잡지 못하는 것은 모두 인자人子의 정에 자연스러운 것이니, 어찌 부모의 명령을 기다리겠는가?
지금 세모난 마름을 올리는 일이 만일 아들에게서 나왔다면 괜찮지만, 아버지의 유명遺命에서 나왔다면 누추함이 되는 것이다.
어찌 마시고 먹는 음식 때문에 아버지의 막대한 누추함을 이룰 수 있겠는가?
증자曾子가 병환이 위독할 적에 증원曾元이 대자리를 바꾸는 것을 어렵게 여기자, 증자曾子가 말씀하시기를 “군자君子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으로써 하고, 소인小人들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식姑息으로써 한다.”라고 하셨다.
만약 유자柳子의 말을 옳다고 한다면 증원曾元이 효자孝子가 되고, 동자童子는 예禮의 지엽적인 것을 돌아보아서 병환이 심한 가운데 대자리를 바꾸게 한 것이니, 심한 불인不仁이 되는 것이다.
중항언中行偃이 죽었을 적에 눈을 뜨고 있어서 반함飯含할 수가 없었다.
범선자范宣子가 맹세하면서 시신을 어루만지고 말하기를 “아들 오吳를 섬기기를 감히 주主(중항언中行偃)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그대로 눈을 뜨고 있었는데, 난회자欒懷子가 말하기를 “주主가 만일 별세하신 뒤에 제가 맹세하건대 제齊나라에 대한 토벌을 계속하지 않는다면 하수河水의 신神이 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제야 눈을 감았다.
범선자范宣子는 아들 오吳를 섬기는 것이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이라는 것만 알았고, 제齊나라에 보복하여 대부大夫가 나라를 걱정하는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큰 충성이 됨을 알지 못하였다.
옛사람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가지고 아름다운 병病(고통이 없는 병病)과 약석藥石에 비유하여 말하기를 “약석藥石은 오히려 나를 살게 할 수 있지만, 병의 아름다운 것은 그 해독害毒이 더욱 많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관찰하면 유자柳子가 굴도屈到를 사랑한 것은 병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요,
자목子木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것은 약석藥石이 되는 것이다.
“이 글은 단락마다 뜻을 거두어 맺었으니, 한유韓愈의 〈휘변諱辨〉의 체재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