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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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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1. 비용을 절감해야 한다
子瞻 論節財處甚工이나 而所擧郊之賞 與夫宮觀使及都水監數者 蓋冗員之一耳 子瞻 必有忌諱하야 而未盡之說이리라
자첨子瞻이 재물을 절약할 것을 논한 부분이 매우 공교로우나, 여기에서 거론한 교제郊祭에 내리는 궁관사宮觀使도수감都水監 등의 몇 가지는 용원冗員(용관冗官)의 한 가지일 뿐이니, 자첨子瞻이 반드시 기휘忌諱하여 다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을 것이다.
夫天下 未嘗無財也
천하天下에는 일찍이 재물이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昔周之興 어늘 當其受命하야 四方之君長 交至於其廷하고 軍旅四出하야 以征伐不義之諸侯로되 而未嘗患無財하니이다
옛날 나라가 일어났을 적에 문왕文王무왕武王의 나라는 넓이가 100에 불과했는데도 천명天命을 받을 때를 당해서 사방의 군주와 추장酋長들이 서로 조정에 이르렀고, 군대가 사방으로 출동하여 의롭지 못한 제후들을 정벌하였으나 일찍이 재물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方此之時하야 하며 取於民者 이로되 而財有餘러니 及其衰也하야는 內食千里之租하고 外收이로되 而不足於用하니 由此觀之하면 夫財豈有多少哉잇가
이때를 당하여 관문과 시장에 세금이 없었고 택량澤梁의 출입을 금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에게 취하는 것이 10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재물이 넉넉하였는데, 나라가 쇠망할 때에 이르러는 안으로 1천 리의 조세를 받고 밖으로 1천 800개 나라의 공물을 거두어들였으나 재용이 부족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재물이 어찌 많고 적음이 있겠습니까?
人君之於天下 俯己以就人이면 則易爲功이요 仰人以援己 則難爲力이라
군주가 천하天下에 대하여 자기 몸을 낮추어 남을 따르면 을 이루기 쉽고, 남에게 의지하여 자기를 돕게 하면 힘을 쓰기 어렵습니다.
是故 廣取以給用 不如節用以廉取之爲易也
이 때문에 널리 취하여 재용을 공급하는 것이 재용을 절약하여 적게 취하는 것의 쉬움만 못합니다.
臣請得以小民之家而推之호리이다
은 청컨대 백성들의 집안을 가지고 미루어 논해보겠습니다.
夫民 方其窮困時 所望 不過
백성들이 한창 곤궁할 때에는 바라는 바가 10의 재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計其衣食之費 妻子之奉하면 出入於十金之中하야 寬然而有餘라가
그래서 입고 먹는 비용과 처자를 양육하는 비용을 계산해보면 10의 범위 안에서 조금 넘거나 조금 부족한데, 이것을 조절하여 넉넉하고 여유가 있게 생활합니다.
及其一旦稍稍蓄聚하야 衣食旣足이면 則心意之欲 日以漸廣하야 所入 益衆이나 而所欲 益以不給하니 不知罪其用之不節하고 而以爲求之未至也
그러다가 점점 재물을 축적해서 하루아침에 의식이 풍족해지면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점점 커져서 수입이 더 많아졌는데도 바라는 바는 더욱 충족되지 못하니, 재용을 절약하지 않은 것을 탓할 줄 모르고 수입원을 찾아내는 것이 지극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是以 富而愈貪하야 求愈多而財愈不供하니
이 때문에 부유할수록 더욱 탐하여 더욱 많이 수입원을 찾아내지만 재물은 더욱 제대로 공급되지 못합니다.
此其爲惑 未可以知其所終也하니 盍亦反其始而思之리오
그리하여 그 미혹됨이 그칠 줄을 모르니, 어찌 처음을 돌이켜서 생각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夫嚮者 豈能寒而不衣하고 飢而不食乎잇가
지난번이라고 해서 어찌 추워도 옷을 입지 않고 굶주려도 밥을 먹지 않았겠습니까?
今天下汲汲乎以財之不足爲病者 何以異此리잇고
지금 천하天下가 급급하게 재물이 부족한 것을 병통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습니까?
國家創業之初 四方割據하야 中國之地至狹也
우리 나라가 창업하던 초기에 사방에 군웅群雄들이 할거하여 중국中國의 땅이 매우 좁았습니다.
이나 歲歲出師하야 以誅討僭亂之國하야 하고 하고하니 其費用之衆 又百倍於今 可知也
그러나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참람하고 혼란한 나라들을 토벌하여 남쪽으로는 형초荊楚를 취하고 서쪽으로는 파촉巴蜀을 평정하고 동쪽으로는 병로幷潞를 항복시켰으니, 비용이 또 지금보다 100배나 많이 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나 天下之士 未嘗思其始하고 而(喘喘)[惴惴]焉患今世之不足하니 則亦甚惑矣니이다
그런데 지금 천하天下의 선비들이 일찍이 우리나라의 초기를 생각하지 않고 두려워하면서 세상에 재물이 부족함을 근심하고 있으니, 매우 미혹된 것입니다.
夫爲國 有三計하니 有萬世之計하고 有一時之計하고 有不終月之計하니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세 가지 계책이 있으니, 만세萬世의 장구한 계책이 있고 일시적인 계책이 있고 한 달을 마치지 못하는 짧은 계책이 있습니다.
古者 三年耕이면 必有一年之蓄하니 以三十年之通計 則可以九年無飢也하야 歲之所入 足用而有餘
옛날에 3년 동안 경작하면 반드시 1년의 저축이 있었으니, 30년을 통틀어 계산하면 9년 동안 굶주림이 없을 수 있어서, 한 해의 수입이 충분히 쓰고 남았습니다.
是以 九年之蓄 常間(閑)而無用하야 卒有水旱之變 盜賊之憂 則官可以自辦하야 而民不知하니이다
이 때문에 9년의 저축이 항상 한가로워(무사無事하여) 쓸 곳이 없어서, 갑자기 홍수와 가뭄의 천재지변과 도적의 근심이 있으면 관청에서 스스로 재정을 마련하여 백성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如此者 天不能使之災하고 地不能使之貧하고 四夷盜賊 不能使之困하니 此萬世之計也니이다
이와 같이 대비하는 자들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리지 못하고 땅이 가난하게 하지 못하고 사이四夷와 도적들이 곤궁하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만세의 장구한 계책입니다.
而其不能者 一歲之入 纔足以爲一歲之出하고 天下之産 僅足以供天下之用하야 其平居 雖不至於虐取其民이나 而有急이면 則不免於厚賦
그런데 이렇게 대비하지 못하는 자들은 1년의 수입으로 겨우 1년의 지출을 할 수 있고 천하天下의 물산으로 겨우 천하天下의 쓰임에 공급할 수 있어서, 평소에 비록 포학하게 백성들에게서 취하지는 않으나 위급하게 되면 세금을 무겁게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其國 可靜而不可動이요 可逸而不可勞 此亦一時之計也니이다
그러므로 이런 나라는 안정安靜하게 할 수는 있으나 분발하게 할 수는 없고, 편안하게 할 수는 있으나 수고롭게 할 수는 없으니, 이는 일시적인 계책입니다.
至於最下而無謀者하야는 量出以爲入하고 用之不給이면 則取之益多
최하로 계책이 없는 경우에 이르러서는 지출을 헤아려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재용이 넉넉하지 못하면 더욱 많이 취합니다.
天下晏然하야 無大患難이로되 而盡用衰世苟且之法하니 不知有急이면 則將何以加之리오
천하天下가 편안하여 큰 환난이 없는데도 쇠망한 세상의 구차한 법을 모두 사용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 만일 위급한 일이 있게 되면 장차 어떻게 세금을 더 올릴 수 있겠습니까?
此所謂不終月之計也니이다
이것이 이른바 한 달을 마치지 못하는 짧은 계책이라는 것입니다.
今天下之利 莫不盡取하고 山陵林麓 莫不有禁하야 關有征하고 市有租하고 鹽鐵有榷하고 酒有課하고 茶有算하니 則凡衰世苟且之法 莫不盡用矣니이다
지금 천하天下의 이익을 모두 취하지 않음이 없고 산릉山陵임록林麓에 출입을 금지하지 않는 곳이 없어서 관문에는 세금이 있고 시장에는 조세가 있고 소금과 철을 전매專賣하고 술에도 세금이 부과되고 에도 부과되는 세금이 있으니, 무릇 쇠망한 세상의 구차한 법을 지금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譬之於人하면 其少壯之時 豐健勇武然後 可以望其無疾하야 以至於壽考어늘 今未五六十 而衰老之候 具見而無遺하야 若八九十者 將何以待其後耶잇가
사람에게 비유하면 젊고 건장할 적에 몸이 풍만하고 건강하고 용맹하여야 병이 없이 장수長壽에 이르기를 바랄 수 있는데, 지금 5, 6십세가 되기도 전에 노쇠한 징후가 남김없이 모두 나타나서 8, 9십세를 산 자와 같다면 장차 어떻게 후일을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이나 天下之人 方且窮思竭慮하야 以廣求利之門하고
그러나 지금 천하天下 사람들이 막 사려를 다 짜내어 이익을 추구하는 방도를 넓히고 있으며,
且人而不思하야 則以爲費用 不可復省이라하니
또 사람들이 깊이 생각하지 못하여 이르기를 “비용을 다시 줄일 수 없다.”고 하니,
使天下而無鹽鐵酒茗之稅 將不爲國乎잇가
만일 천하天下에 소금과 철과 술과 차에 대한 세금이 없다면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단 말입니까?
臣有以知其不然也하노이다
은 그렇지 않음을 압니다.
天下之費 固有去之甚易而無損하고 存之甚難而無益者矣
천하天下의 비용에는 진실로 매우 쉽게 제거해도 손해가 없는 것이 있고, 매우 신중히 생각하여 남겨두어도 유익함이 없는 것이 있습니다.
臣不能盡知일새 請擧其所聞하오니 而其餘 可以類求焉이리이다
은 절대로 이것을 다 알 수 없기에 우선 들은 바를 거론하니, 나머지는 유추하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夫無益之費 名重而實輕하니 以不急之實 而被之以莫大之名이라 是以 疑而不敢去하니이다
유익함이 없는 비용은 명목은 중요하나 실제는 가벼우니, 불요불급한 실제에 막대한 명칭을 붙이기 때문에 의심하면서도 감히 제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三歲而郊하고 郊而赦하고 赦而賞하니 有不得已者 天下吏士 數日而待賜하니 誠不可以卒去어니와
3년마다 교제郊祭를 지내고 교제郊祭를 지내면 사면하고 사면하면 을 내리니 이는 현관縣官(천자天子)이 폐지할 수 없는 것이요, 천하天下의 관리와 군사들이 날짜를 손꼽아 헤아리면서 하사품을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진실로 갑자기 제거할 수 없는 것입니다.
至於大吏하야는 所謂으로 與縣官同其憂樂者 此豈亦不得已而有所畏耶잇가
그러나 높은 관리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군주의 고굉股肱이목耳目으로 천자天子와 근심과 즐거움을 함께 하는 자들이니, 이들에게 하사품을 내리는 것을 또한 어찌 꺼릴 것이 있어서 폐지하지 못하겠습니까?
天子有어늘 今又飾하야 而爲之祠하니 固已過矣 又使大臣으로 以使領之하야 歲給以巨萬計하니 此何爲者也잇고
천자天子는 일곱 사당이 있는데 지금 또 도관道觀사원寺院을 아름답게 꾸며서 제사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이미 지나치고, 게다가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이것을 맡아 관리하게 하여 해마다 공급되는 비용이 거만巨萬으로 헤아려지니, 이것은 무엇하는 일입니까?
天下之吏 爲不少矣 將患未得其人이니
천하天下의 관리가 적지 않으니, 장차 적임자를 얻지 못함을 걱정해야 합니다.
苟得其人이면 則凡民之利 莫不備擧 而其患 莫不盡去리이다
진실로 적임자를 얻는다면 백성들에게 이로운 모든 일을 골고루 거행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요, 병폐를 다 제거하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今河水爲患이어늘 不使濱河州郡之吏 親視其災하야 而責之以救災之術하고 顧爲하니 夫四方之水患 豈其一人 坐籌於京師하야 而盡其利害리오
지금 황하가 범람하여 폐해가 되고 있는데, 황하 가에 있는 주군州郡의 관리로 하여금 직접 그 재해災害를 시찰하여 구제할 방책을 책임지게 하지 않고 도리어 도수감都水監을 만들었으니, 사방의 수해를 어찌 도수감都水監 한 사람이 경사京師에 앉아서 이해利害를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天下有 足矣어늘 今江淮之間 又有하야 祿賜之厚하고 徒兵之衆하니 其爲費 豈勝計哉리잇가
천하天下전운사轉運使 한 명이 있으면 충분한데, 지금 강회江淮의 사이에 또다시 발운사發運使를 두어서 녹봉과 하사품이 매우 많고 이들에게 딸린 하인과 병사가 많으니, 그 비용을 어찌 이루 다 계산할 수 있겠습니까?
蓋嘗聞之호니 里有蓄馬者 患牧人欺之而盜其芻菽也하야 又使一人焉으로 爲之이러니 廐長立而馬益癯라하니이다
이 일찍이 들으니 “마을에 말을 기르는 자가 있었는데 목자牧者가 자신을 속이고 꼴과 콩을 도둑질할까 염려해서 또다시 한 사람에게 구장廐長을 시켜 목자牧者를 감시하게 하였는데, 구장廐長이 생기자 말이 더욱 병들었다.”고 합니다.
今爲政 不求其本하고 而治其末하니 自是而推之天下하면 無益之費 不爲不多矣리이다
지금 정사를 다스림에 근본을 찾지 않고 지엽적인 것만 다스리니, 이것을 가지고 천하天下에 미루어보면 유익하지 않은 비용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臣以爲凡若此者 日求而去之 自毫釐以往으로 莫不有益하리니 惟無輕其毫釐而積之 則天下庶乎少息也리이다
은 생각하건대 무릇 이와 같은 것들을 날마다 찾아내어 제거한다면 털끝만큼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유익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오직 그 털끝만 한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축적한다면 천하天下 백성들이 거의 다소 편안히 쉴 것입니다.
역주
역주1 省費用 : 이 글은 〈策別 厚貨財〉 두 편 가운데 첫 번째 편으로 본래의 제목은 〈策別 厚貨財 一〉이다. 本集에는 편 머리에 ‘厚貨財者 其別有二 一曰省費用’의 13字가 있다. 蘇軾의 〈策別〉은 모두 네 종류로 첫 번째가 〈課百官〉, 두 번째가 〈安萬民〉, 세 번째가 〈厚貨財〉, 네 번째가 〈訓兵旅〉로 모두 총 17편인데, 〈厚貨財〉는 모두 2편이다.
仁宗 嘉祐 6년(1061)에 蘇軾은 制科에 응시하여 당시에 만연돼 있는 사회 병폐를 해결하기 위한 策 25편(〈策略〉 5편, 〈策別〉 17편, 〈策斷〉 3편)을 지어 仁宗에게 올렸었다.
역주2 文王武王之國 不過百里 : 옛날 天子國은 넓이가 천 리이고 제후국 가운데 公과 侯의 큰 나라는 100리, 伯은 70리, 子와 男은 50리였다.
《孟子》 〈公孫丑 上〉에 “湯王은 70리를 가지고 왕자가 되셨고, 文王은 100리를 가지고 왕자가 되셨다.[湯以七十里 文王以百里]”라고 보인다.
《論語》 〈泰伯〉에 孔子께서 “天下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소유하시고도 복종하여 殷나라를 섬기셨으니, 周나라 文王의 德은 지극한 德이라고 이를 만하다.[三分天下 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라고 말씀하셨으나 이는 당시 제후들 가운데 文王에게 귀의한 자가 天下의 3분의 2이고 殷나라 紂王에게 소속된 제후가 天下의 3분의 1이었음을 말씀한 것이지, 文王의 나라가 실제로 天下의 3분의 2를 차지할 만큼 컸던 것은 아니다.
武王이 800명의 제후들과 盟津에서 모여 殷나라를 정벌한 때에는 周나라의 영토는 100리에 지나지 않았다가 뒤에 天子가 되고서 천 리의 영토를 보유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關市無征 而山澤不禁 : 關은 관문이고 市는 시장이며 征은 세금을 징수함을 이른다. 澤은 澤梁으로 못과 돌다리 사이에 통발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魚梁을 이르는바, 백성들이 산에 들어가 땔나무를 하고 澤梁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는 것을 국가에서 금지하지 않았음을 이른다.
역주4 不過什一 : 什一은 농민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租稅로 바침을 이른다. 周나라 文王과 武王 때에는 井田法을 시행하였는데, 900畒의 田地를 井자 모양으로 9등분하여 구역마다 100畒가 되게 한 다음 중앙에 있는 한 구역을 公田이라 하고 나머지 여덟 구역을 私田이라 하였는데, 여덟 명의 농부가 公田을 함께 경작하고 公田의 수입을 조세로 바쳤다. 그리하여 이것을 9분의 1 稅法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公田 안에는 여덟 농부의 농막이 있어 모두 20畒를 점유하므로 실제의 조세는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므로 什一이라 한 것이다.
역주5 千八百國之貢 : 《禮記》 〈王制〉에 “무릇 四海의 안에는 9州가 있으며 州는 넓이[方] 천 리이니, 州에 100리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것이 30개이고 70리의 나라가 60개이고 50리의 나라가 120개였으니, 모두 210개국이었다.
〈諸侯를 봉할 적에〉 名山과 大澤을 가지고 封하지 않고 그 나머지는 附庸國과 閒田을 만들었으니, 8州에 州마다 210개국이 있었다.
天子國의 縣 안에는 넓이[方] 100리의 나라가 9개였고 70리의 나라가 21개였으며 50리의 나라가 63개였으니, 모두 93개국이었다. 名山과 大澤을 하사해주지 않았고, 그 나머지를 士의 祿으로 삼아서 閒田으로 삼았다.
무릇 9州에 1천 773개국이 있으니, 天子의 元士와 諸侯의 附庸國은 여기에 들어있지 않다.[凡四海之內 九州 州方千里 州建百里之國三十 七十里之國六十 五十里之國百有二十 凡二百一十國 名山大澤不以封 其餘以爲附庸閒田 八州 州二百一十國 天子之縣內 方百里之國九 七十里之國二十有一 五十里之國 六十有三 凡九十三國 名山大澤不以朌 其餘以祿士 以爲閒田 凡九州 千七百七十三國 天子之元士 諸侯之附庸 不與]”라고 보인다.
1천 800개국은 1천 773을 成數로 만든 것이며, 이들 諸侯國은 모두 조공을 바쳤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6 十金之資 : 10金은 金 10근으로 그다지 많지 않은 재물이다. 당시의 金은 오늘날의 정제된 黃金이 아니고 黃銅을 지칭하였다.
역주7 南取荊楚 : 宋나라는 五代十國時代의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天下를 통일하였는데, 건국 초기에는 아직 몇 개의 나라들이 臣服하지 않고 割據하고 있었다. 荊楚는 南平으로 荊南에 도읍하여 荊南이라고도 칭하였는데, 당시 高繼冲이 割據하고 있었다.
五代十國은 唐․宋代 사이에 중국을 할거한 나라들로 五代는 後梁(朱全忠), 後唐(李存勖), 後晉(石敬瑭), 後漢(劉知遠), 後周(郭威)를 이르며, 十國은 前蜀(王建)과 後蜀(孟知祥), 吳(楊行密), 楚(馬殷), 閩(王審知), 吳越(錢鏐), 南漢(劉隱), 北漢(劉旻), 荊南(高季興), 南唐(李昇)을 이른다.
역주8 西平巴蜀 : 巴蜀은 지금의 四川省 일대인데 당시 後蜀의 군주 孟昶이 割據하고 있었다. 巴蜀은 경내에 巴郡과 蜀郡이 있었으므로 이렇게 지칭한 것인데, 巴郡은 지금의 重慶이고 蜀郡은 成都와 그 인근 지역이다.
역주9 東下幷潞 : 幷潞는 幷州와 潞州로 지금의 山西省 太原과 長治 일대인데 당시 北漢의 군주 劉繼元이 割據하고 있었다.
역주10 縣官 : 朝廷 또는 州縣의 官長을 이르나, 여기서는 天子의 뜻으로 쓰였다.
역주11 股肱(고굉)耳目 : 股肱은 사람의 팔과 다리로 大臣을 비유하며, 耳目은 귀와 눈으로 옛날 御史大夫(司憲府), 諫官(司諫院) 등을 이른다. 그러므로 이들을 股肱之臣, 耳目之官이라고 칭한 것이다.
역주12 七廟 : 《禮記》 〈王制〉에 “天子는 7廟이니 3昭․3穆과 太祖의 사당을 합하여 7개이고, 諸侯는 5廟이니 2昭․2穆과 太祖의 사당을 합하여 5개이다.[天子七廟 三昭三穆 與大祖之廟而七 諸侯五廟 二昭二穆 與大祖之廟而五]”라고 보인다.
이에 대해 朱子는 “우선 諸侯의 사당을 가설하여 밝히건대, 《周禮》에 나라의 神位를 세울 적에 宗廟가 왼쪽에 있었으니, 다섯 사당이 모두 公宮의 동남쪽에 있었다.
그 제도는 孫毓이 이르기를 ‘밖에 都宮을 만들어 太祖가 북쪽에 있고 2昭와 2穆이 차례로 남쪽에 있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太祖의 사당에는 처음 봉한 君主가 모셔져 있으며, 昭의 북쪽 사당에는 2세 君主가 있고 穆의 북쪽 사당에는 3세 君主가 있고 昭의 남쪽 사당에는 4세 君主가 있고 穆의 남쪽 사당에는 5세 君主가 있으니, 사당은 모두 남향을 하고 각각 門․堂․室․正寢이 있고 담장이 사방을 둘러싼다.
太祖의 사당은 백세토록 옮기지 않고, 그 나머지 네 사당은 6세가 지난 뒤에 한 번 代가 바뀌면 한 번 옮기니, 옮길 적에 새 神主를 그 반열의 남쪽 사당에 祔廟하고 남쪽 사당의 神主를 북쪽 사당에 옮기며 북쪽 사당에 親이 다하면 그 神主를 太廟의 서쪽 夾室에 옮기니, 이것을 祧(遞遷)라 이른다.
무릇 사당의 神主는 본 사당의 방 안에 있을 적에는 모두 동향을 하고 太廟의 방 안에서 祫祭를 지내게 되면 오직 太廟는 동향을 하여 본래대로 있어서 가장 높은 지위가 되고, 여러 昭로서 여기에 들어온 神主는 북쪽 창문 아래에 진열하여 남향을 하고 여러 穆으로 여기에 들어온 神主는 남쪽 창문 아래에 진열하여 북향을 하니, 남향을 한 것은 밝은 곳을 향함을 취하였기 때문에 昭라 이르고, 북향을 한 것은 깊고 먼 것을 취하였기 때문에 穆이라 이른 것이다. 여러 사당의 진열은 왼쪽은 昭가 되고 오른쪽은 穆이 되며, 祫祭의 위치는 북쪽은 昭가 되고 남쪽은 穆이 된다.……
(天子의 제도에 있어서는) 唐堯의 文祖와 虞舜의 神宗과 殷나라의 七世의 三宗은 그 자세한 것을 지금 상고할 수가 없고, 오직 周나라 제도만 그나마 말할 수 있다. 그러나 漢나라 학자들의 기록이 또한 이미 똑같지가 않다. 后稷이 처음 봉해졌고 文王과 武王이 天命을 받아 王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 사당을 허물지 아니하여 어버이의 사당과 더불어 넷이 되어서 7廟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여러 학자들의 설이요, 3昭와 3穆이 太祖의 사당과 더불어 7廟가 되고 文王과 武王은 宗이 되어서 이 숫자 가운데에 들어있지 않다고 한 것은 劉歆의 說이다. 비록 그 숫자는 똑같지 않으나 그 위치와 옮기는 차례는 또한 마땅히 諸侯의 사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러 학자들의 설과 같다면, 武王이 처음 天下를 소유하였을 적에는 后稷이 太祖가 되어서 組紺이 昭의 북쪽 사당에 있고 太王이 穆의 북쪽 사당에 있고 王季가 昭의 남쪽 사당에 있고 文王이 穆의 남쪽 사당에 있어서 아직 다섯 사당이 되었을 뿐이요, 成王 때에 이르면 組紺을 祧(체천)하고 王季를 옮기고서 武王을 祔廟하고, 康王 때에 이르면 太王을 祧하고 文王을 옮기고서 成王을 祔廟하고, 昭王 때에 이르면 王季를 祧하고 武王을 옮기고서 康王을 祔廟했을 것이니, 이로부터 이상은 또한 모두 우선 다섯 사당이 되고 祧한 神主는 太祖의 사당에 보관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穆王 때에 이르면 文王이 親이 다하여 마땅히 祧하여야 하나 功이 있어서 마땅히 높여야 하기 때문에 별도로 한 사당을 서북쪽에 세워서 이것을 文世室이라 이르니, 이에 成王을 옮기고서 昭王을 祔廟하여 여섯 사당이 되었을 것이요, 共王 때에 이르면 武王이 親이 다하여 마땅히 祧하여야 하나 또한 功이 있어서 마땅히 높여야 하기 때문에 별도로 한 사당을 동북쪽에 세워서 武世室이라 일렀을 것이니, 이에 康王을 옮기고 穆王을 祔廟하여 일곱 사당이 되었을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는 穆의 祧한 神主를 文世室에 보관하고 昭의 祧한 神主를 武世室에 보관하여 다시는 太廟에 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劉歆의 설과 같다면 周나라는 武王이 殷나라를 이긴 뒤로부터 두 사당을 2昭와 2穆의 위에 더하여 高圉와 亞圉를 제사하기를 예전과 같이 하고 체천하여 懿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文世室을 3穆의 위에 세우고 孝王 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武世室을 3昭의 위에 세웠을 것이니, 이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라고 해설하였다.
殷나라의 三宗은 太宗인 太甲, 中宗인 太戊, 高宗인 武丁을 이른다. 周나라 왕실의 계통을 살펴보면 太祖인 后稷(棄) 이후 9세에 高圉․亞圉․公叔鉏․古公亶父(太王)․季歷(王季)․文王․武王․成王․康王․昭王․穆王․共王․懿王․孝王․夷王으로 이어진다. 文世室과 武世室은 文王과 武王을 각각 제사하는 廟室이다.
역주13 老佛之宮 : 道敎의 道觀과 佛敎의 寺院을 이른다. 老는 老子를 이르는데, 道敎에서는 老子를 敎祖로 높이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역주14 都水監 : 江河와 저수지 등의 灌漑와 제방의 수리와 보존 등 水利에 관한 업무를 주관하는 부서이다. 秦․漢 때부터 있었는데, 宋나라에서는 仁宗 嘉祐 3년(1058)에 三司河渠司를 폐지하고 國都인 開封에 都水監을 설치하여 全國의 河渠에 관련된 업무를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宋史 仁宗紀》
역주15 轉運使 : 唐나라 때에 처음 설치한 지방 관직인데 宋代에도 인습하여 각 路에 두어 군수품 및 부세로 거둔 稅穀의 운송을 관장하게 하였다. 軍務를 맡은 安撫使와 司法을 맡은 提點刑獄과 함께 監司로 통칭되었다.
역주16 發運 : 發運使를 이른다. 宋 太宗 淳化 4년(993)에 처음 설치하여 江淮 등 6路의 漕運을 총괄하게 하였다.
역주17 廐長 : 마구간의 우두머리란 뜻으로 牧者를 감시하는 관장을 둔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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