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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3)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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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가의賈誼에 대한
細觀此文하면 子瞻高於賈生一格하니라
이 글을 자세히 보면 자첨子瞻가생賈生(가의賈誼)보다 한 격이 높다.
非才之難이요 所以自用者實難이라
뛰어난 재주를 간직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재주를 잘 활용하는 것이 실로 어려운 것이다.
惜乎
애석하다.
賈生 王者之佐로되 而不能自用其才也
가생賈生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를 가졌으나 스스로 그 재주를 잘 활용하지 못하였다.
夫君子之所取者遠이면 則必有所待 所就者大 則必有所忍이니 古之賢人 皆有可致之才로되 而卒不能行其萬一者 未必皆其時君之罪 或者 其自取也니라
군자가 취하고자 하는 것이 원대하면 반드시 기다리는 바가 있어야 하고,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크면 반드시 참는 바가 있어야 하니, 옛날 현인들이 모두 이룰 수 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끝내 만에 하나도 실행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모두 그 군주의 책임만은 아니고 혹은 스스로 취한 것이다.
愚觀賈生之論컨대 如其所言이면 雖三代라도 何以遠過리오
내가 가생賈生을 살펴보건대,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라도 어찌 이보다 크게 뛰어나겠는가?
得君如漢文이로되 猶且以不用死하니 然則是天下無堯舜이면 終不可以有所爲耶
가생賈生한 문제漢 文帝와 같이 훌륭한 군주를 얻고도 쓰이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렇다면 천하에 이 없다면 끝내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단 말인가?
仲尼 聖人이사되 歷試於天下하야 苟非大無道之國이면 皆欲勉彊扶持하야 庶幾一日得行其道하시니라
중니仲尼성인聖人이신데도 천하를 차례로 시험하시어 만일 크게 무도한 나라가 아니면 모두 힘써 부지해서 행여 단 하루라도 그 를 행하고자 하셨다.
하시니 君子之欲得其君 如此其勤也하며
그리하여 장차 나라에 가려 하실 적에 먼저 자하子夏를 보내고 다시 염유冉有를 보내셨으니, 군자가 그 군주를 얻고자 함이 이와 같이 간곡한 것이다.
孟子去齊 三宿而後出晝어시늘 猶曰
맹자孟子나라를 떠나실 적에 3일 밤을 유숙한 뒤에 땅을 나가시면서도 말씀하시기를
라하시니
“왕이 행여 나를 부르시기를 바란다.”라고 하였으니,
군자가 그 군주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것이 이와 같이 후하며, 공손추公孫丑가 묻기를 “선생님은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자, 맹자孟子는 말씀하시기를 “지금 천하에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而吾何爲不豫리오하시니 君子之愛其身 如此其至也
내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군자가 자기 몸을 아끼는 것이 이와 같이 지극한 것이다.
夫如此而不用然後 知天下之果不足與有爲하야 而可以無憾矣
이와 같이 하는데도 쓰이지 않은 뒤에야, 천하에 과연 함께 훌륭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유감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若賈生者 非漢文之不用生이요 生之不能用漢文也니라
그렇다면 가생賈生과 같은 자는 한 문제漢 文帝가생賈生을 등용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가생賈生한 문제漢 文帝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강후 주발絳侯 周勃은 직접 천자天子의 옥새를 잡아서 문제文帝에게 주었고, 관영灌嬰은 수십 만의 병력을 연합하여 유씨劉氏여씨呂氏의 자웅을 결정지었으며, 이들은 또 모두 고제高帝의 옛 장수였으니, 군신간에 서로 의기투합하는 친분이 어찌 다만 부자간의 골육骨肉수족手足과 같을 뿐이었겠는가?
賈生 洛陽之少年으로 欲使其一朝之間 盡棄其舊하고 而謀其新하니 亦已難矣
그런데 가생賈生낙양洛陽의 소년으로, 군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옛 것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게 하였으니, 또한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爲賈生者 上得其君하고 下得其大臣하야 如絳, 灌之屬 優游浸漬而深交之하야 使天子不疑하고 大臣不忌 然後 擧天下而惟吾之所欲爲런들 不過十年하야 可以得志리니
가생賈生을 위한 좋은 계책으로는, 위로는 군주의 신임을 얻고 아래로는 대신들의 마음을 얻어서, 강후絳侯관영灌嬰 같은 무리들을 오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무젖어들 듯 깊이 사귀어서, 천자天子로 하여금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 대신들로 하여금 자기를 꺼리지 않게 해야 하니, 그런 뒤에 온 천하를 들어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였다면 10년이 넘지 않아 뜻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安有立談之間 而遽爲人痛哭哉리오
어찌 잠시 서서 말하는 사이에 대번에 남을 위하여 통곡한단 말인가?
그가 상강湘江을 지나다가 를 지어서 굴원屈原을 조문한 것을 보면, 비분강개하고 울적해하고 번민해서 아득히 멀리 떠나갈 뜻이 있었는데, 그 뒤에 끝내 스스로 서글퍼하여 통곡하다가 요절하였으니, 이 또한 곤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자이다.
夫謀之一不見用 安知終不復用也리오
자신의 계책이 한 번 쓰이지 못했다 하여 끝내 다시 쓰이지 못할 줄을 어찌 알겠는가?
不知黙黙以待其變하고 而自殘至此하니 嗚呼
묵묵히 변화를 기다릴 줄을 모르고 스스로 몸을 해쳐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아!
賈生 志大而量小하고 才有餘而識不足也니라
가생賈生은 뜻이 크나 국량이 적고 재주가 유여하나 지식이 부족하였다.
古之人 有高世之才 必有遺俗之累
옛날 사람들은 세상에 뛰어난 재주가 있으면 반드시 세속을 버리는 잘못이 있었다.
是故 非聰明睿哲不惑之主 則不能全其用이라
이 때문에 총명聰明하고 지혜가 밝아서 미혹되지 않는 군주가 아니면 인재를 온전하게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고금에 부견苻堅이 초야에서 왕맹王猛을 얻어서 하루아침에 옛 신하들을 다 배척하여 버리고 왕맹王猛과 함께 천하를 도모했음을 칭송하고 있으니, 부견苻堅이 필부로서 대략 천하의 절반을 소유했던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愚深悲賈生之志
나는 가생賈生의 뜻을 몹시 슬퍼한다.
備論之하야 亦使人君으로 得如賈誼之臣이면 則知其有狷介之操하야 一不見用이면 則憂傷病沮하야 不能復振이요 而爲賈生者 亦愼其所發哉인저
그러므로 자세히 논하여 군주로 하여금 가의賈誼와 같은 신하를 얻으면 이런 사람은 꼿꼿한 지조가 있어서 한 번 등용되지 않으면 근심하고 슬퍼하고 저상沮喪되어서 다시 떨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하고, 또 가생賈生이 된 자는 또한 그 발하는 바를 삼갈 줄을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唐荊川曰
당형천唐荊川이 말하였다.
不能深交絳, 灌 不知黙黙自待 本是兩柱子로되 而文字渾融하야 不見蹤跡하니라
강후絳侯관영灌嬰을 깊이 사귀지 못한 것과 묵묵히 스스로 기다리지 못했다는 것이 본래의 두 기둥(갈래)인데, 문자가 혼연히 융해돼서 그 자취를 볼 수 없다.
王遵巖曰

왕준암王遵巖(왕신중王愼中)이 말하였다.
謂賈生不能用漢文 直是說得賈生倒로되 而文字翻覆變幻하야 無限煙波하니라
가생賈生한 문제漢 文帝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가생賈生을 나무란 것이나, 문자가 번복飜覆하고 변환變幻하여 무한한 연파煙波가 있다.”
역주
역주1 賈誼論 : 이 글은 젊은 시절의 작품이다. 賈誼(B.C. 200~B.C. 168)는 西漢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洛陽 사람이다.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였으며, 20세에 文帝에게 발탁되어 博士가 되었다가 太中大夫로 승진되었다. 文帝는 그가 재상의 재목임을 알아보고 公卿으로 삼아 正朔과 服色을 고치고 법률을 제정하며 禮樂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周勃과 灌嬰 등 당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의논을 쓰지 못하고 長沙王太傅로 좌천시켰는데, 賈誼는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역주2 將之荊……申之以冉有 : 荊은 楚나라를 이른다. 이 내용은 《禮記》 〈檀弓 上〉에 “옛날에 夫子께서 魯나라 司寇의 지위를 잃으시고 장차 楚나라로 가시려 할 적에 먼저 子夏를 보내시고 또 거듭 冉有를 보내셨다. 나는 이 때문에 지위를 잃으면 빨리 가난해지고자 하지 않음을 알았다.[昔者 夫子失魯司寇 將之荊 蓋先之以子夏 又申之以冉有 以斯 知不欲速貧也]”라고 보인다. 공자는 定公 14년(B. C. 496)에 魯나라의 司寇職을 잃고 6년 뒤에 楚나라로 가셨다.
역주3 孟子去齊……王其庶幾召我 : 晝은 齊나라의 邑名이고, 왕은 齊 宣王이다. 孟子가 齊나라를 떠나가실 적에 尹士라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王이 湯․武와 같은 聖君이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왔다면 이것은 지혜가 밝지 못한 것이요,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왔다면 이것은 은택을 요구한 것이다. 천 리 먼 길을 와서 王을 만나보고 뜻이 맞지 않으므로 떠나가되 사흘을 유숙한 뒤에 晝 땅을 나갔으니, 어찌 이리도 오랫동안 체류한단 말인가? 나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노라.”
高子가 이 말을 아뢰자, 孟子는 말씀하시기를 “尹士가 어찌 나를 알겠는가? 천 리 먼 길을 와서 王을 만나봄은 내가 하고자 한 것이니, 뜻이 맞지 않으므로 떠나감이 어찌 내가 원하는 바이겠는가? 내 부득이해서였다. 내가 사흘을 유숙한 뒤에 晝 땅을 출발하였으나 내 마음에 오히려 빠르다고 여겼다. 나는 王이 행여 고치시기를 바라노니, 王이 만일 고치신다면 반드시 나의 발길을 돌리게 하셨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尹士는 이 말씀을 듣고 “나는 진실로 小人이다.”라고 잘못을 뉘우쳤다. 《孟子 公孫丑 下》
역주4 公孫丑問曰……而吾何爲不豫 : 저본의 公孫丑는 充虞의 잘못이다. 이 글이 《孟子》 〈公孫丑 下〉에 있어서 착각한 듯하다.
孟子께서 齊나라를 떠나실 적에 充虞가 도중에서 묻기를 “夫子께서 기쁘지 않은 기색이 계신 듯합니다. 지난날 제가 夫子께 듣자오니, ‘君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5백 년에 반드시 王者가 나오니, 그 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유명한 자가 있다. 周나라 이래로 7백여 년이 되었으니, 年數를 가지고 보면 지났고 시기로 살펴보면 지금이 알맞은 시기이다. 하늘이 천하를 平治하고자 하지 않으시는 것이니, 만일 천하를 平治하고자 하신다면 지금 세상을 당하여 나를 버려두고(나 말고) 그 누가 하겠는가? 내 어찌하여 기뻐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孟子 公孫丑 下》
역주5 夫絳侯……又皆高帝之舊將 : 絳侯는 周勃의 봉호이다. 그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독실하여 漢 高祖에게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高祖는 죽기 직전에 呂后에게 陳平을 등용하되 周勃로 돕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太尉가 되어 軍權을 잡았는데, 뒤에 呂后가 정권을 독단하자 승상 陳平과 서로 친하게 지내며 기회를 노렸다. 그러다가 呂后가 죽고 呂后의 一族인 呂祿과 呂産 등이 반란을 획책하자, 陳平과 협력하여 이들을 주륙한 다음 代王 劉恒을 옹립하니, 이가 바로 文帝이다.
灌嬰은 睢陽 사람으로 본래 고향에서 비단 장사를 하다가 高祖를 따라 천하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潁陰侯로 봉해졌다. 齊王이 呂氏를 타도하기 위해 거병하자, 그는 진압군의 지휘를 맡아 출병하였으나, 이미 周勃 등과 모의해서 呂氏를 타도하고자 하였으므로, 당시 滎陽에 주둔하고 있던 齊王에게 자신들이 呂氏를 타도할 것이란 암시를 주어 싸우지 않고 齊王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에 군대를 거느리고 周勃과 陳平을 도와 呂氏들을 주벌하고 文帝를 세우는 데 일조하였다.
역주6 觀其過湘……至于夭絶 : 文帝의 총애를 받던 賈誼는 개혁정책을 추진하다가 周勃과 灌嬰 등 당시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長沙王太傅로 좌천되었다. 부임하러 가는 길에 湘江을 건너다가 한 편의 賦를 지어 屈原을 조문하고 자신의 처지를 가탁하여 속세를 떠날 뜻을 은연중에 내비치니, 이 글이 〈弔屈原賦〉이다.
賈誼는 다시 文帝의 부름을 받아 宣室에서 알현하고 귀신의 근본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하니, 文帝가 감탄하고 평소 학문을 좋아하는 둘째 아들 梁懷王의 太傅로 삼았다. 그러나 몇 년 뒤에 梁懷王이 말을 타다가 떨어져 죽자, 왕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자책하다가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史記 屈原賈生列傳》 참고로 그가 지은 〈弔屈原賦〉는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은혜를 공손히 받들어 長沙에 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해 듣건대 ‘屈原이 스스로 汨羅水에 빠져죽었다.’ 하였다. 나아가 흐르는 瀟湘江에 의탁하여 공경히 先生을 조문하노라. 罔極한 세상을 만나 마침내 그 몸을 잃었으니, 아! 애처로워라,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났도다.
난새와 봉황새는 몸을 숨기고 올빼미는 활개를 치며, 못난 자들이 존귀해지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으며, 聖賢이 거꾸로 끌려 다니고 方正한 자가 倒置되었도다. 卞隨와 伯夷를 混濁하다 이르며, 盜蹠과 莊蹻를 청렴하다 이르도다. 莫邪를 무디다 하며 납칼을 날카롭다 하도다. 아! 뜻을 얻지 못하고 선생이 무고히 화를 당함이여.
周나라의 寶鼎을 굴려버리고 康瓠를 보배로 삼았도다. 파리한 소를 멍에하여 타고 절름거리는 나귀를 驂馬로 삼으니, 驥馬는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를 끌도다. 章甫冠을 신에 깔았으니 그 조짐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아! 先生이여. 홀로 이 허물에 걸렸도다. 다음과 같이 고하노라.
어쩔 수 없다. 나라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음이여! 내 홀로 답답하니 그 누구에게 말할까. 봉황새가 훨훨 높이 날아감이여! 진실로 스스로 몸을 이끌어 멀리 떠나가도다. 九淵에 깊이 숨어 있는 神龍이여! 못 속에 잠겨 스스로 珍重히 하도다. 교달과 水獺을 피해 숨어 삶이여! 어찌 새우와 거머리와 지렁이를 따르리오. 聖人의 神德을 귀중히 여김은 濁世를 멀리하여 스스로 선하게 해서이니, 가령 麒麟을 옭아매어 묶어놓을진댄 어찌 犬羊과 다르겠는가. 紛紛히 이런 허물에 걸림이여! 또한 夫子의 탓이로다.
九州를 지나 그 군주를 살펴볼 것이니, 하필 이 도읍을 그리워하겠는가. 봉황이 천 길 높이 낢이여! 덕이 빛나는 곳을 보아 내려앉도다. 細德(不德)의 험하고 미미함을 보고는 멀리 나래를 쳐 떠나도다. 저 심상한 도랑이여! 어찌 배를 삼킬 만한 고기를 용납하겠는가. 강호를 가로지르는 鱣魚와 고래도 진실로 장차 땅강아지와 개미에게 제재를 당하리로다. [恭承嘉惠兮 竢罪長沙 仄聞屈原兮 自湛汨羅 造托湘流兮 敬弔先生 遭世罔極兮 迺殞厥身 烏虖哀哉兮 逢時不祥 鸞鳳伏竄兮 鴟鴞翶翔 闒茸尊顯兮 讒諛得志 賢聖逆曳兮 方正倒植 謂隨夷溷兮 謂跖蹻廉 莫邪爲鈍兮 鉛刀爲銛 于嗟黙黙生之亡故兮 斡棄周鼎 寶康瓠兮 騰駕罷牛 驂蹇驢兮 驥垂兩耳 服鹽車兮 章甫薦屨 漸不可久兮 嗟苦先生 獨離此咎兮 誶曰 已矣 國其莫吾知兮 子獨壹鬱其誰語 鳳縹縹其高逝兮 夫固自引而遠去 襲九淵之神龍兮 沕淵潛以自珍 偭蟂獺以隱處兮 夫豈從蝦與蛭螾 所貴聖之神德兮 遠濁世而自臧 使麒麟可係而羈兮 豈云異夫犬羊 般紛紛其離此郵(尤)兮 亦夫子之故也 歷九州而相其君兮 何必懷此都也 鳳凰翔于千仞兮 覽德輝而下之 見細德之險微兮 遙增擊而去之 彼尋常之汙瀆兮 豈容呑舟之魚 橫江湖之鱣鯨兮 固將制於螻螘]”
역주7 古今稱苻堅得王猛于草茅之中……其以此哉 : 苻堅은 남북조시대 前秦의 3대 황제(재위 357~385)이다. 苻堅이 재위할 적에 前秦은 北朝 중에 가장 강성하여 중국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였다.
王猛은 字가 景略이며, 東晉 明帝 太寧 3년(325)에 青州 北海郡 劇縣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삼태기를 짜서 팔며 살았으나 명민하여 학문과 병법을 두루 익혔다. 장성하자 큰 뜻을 품어 세속의 평판에 연연해하지 않고 華陰山에 은거하며 飛翔할 때를 기다렸다.
東晉의 大將軍 桓溫이 찾아오자 베옷을 입고 이(蝨)를 잡으면서 천하의 일을 막힘없이 논하니, 이것을 기이하게 여긴 桓溫이 자신을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前秦의 황제 苻堅이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예의를 극진히 갖추고 청하자, 마침내 출사하고 재상이 되어 前秦을 당대에 가장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3)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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