或告之曰 日之狀은 如銅槃이라한대 扣槃而得其聲하고 他日聞鐘에 以爲日也라하고
或告之曰 日之光은 如燭이라한대 捫燭而得其形하고 他日揣籥에 以爲日也라하니라
日之與鐘籥이 亦遠矣로되 而眇者不知其異는 以其未嘗見而求之人也일새니라
道之難見也는 甚於日하고 而人之未達也엔 無以異於眇라
達者告之에 雖有巧譬善導라도 亦無以過於槃與燭也라
自槃而之鐘하고 自燭而之籥하야 轉而相之에 豈有旣乎아
故로 世之言道者 或卽其所見而名之하고 或莫之見而意之는 皆求道之過也니라
南方에 多沒人은 日與水居也일새니 七歲而能涉하고 十歲而能浮하고 十五而能沒矣라
必將有得於水之道者리니 日與水居면 則十五而得其道요 生不識水면 則雖壯이나 見舟而畏之라
故로 北方之勇者 問於沒人하야 而求其所以沒하고 以其言試之河하면 未有不溺者也라
昔者
에 以
한대 士雜學而不志於道
러니 今也
에 以經術取士
한대 士知求道而不務學
이라
공公이 문장文章을 가지고 사람을 점화點化하는 것이 마치 불가佛家에서 참선參禪하여 묘리妙理를 터득하는 것과 같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자가 해(태양)를 알지 못하고서 눈이 있는 자에게 물어보았다.
혹자가 그에게 고하기를 “해의 모양은 구리 쟁반과 같다.”고 하자, 장님은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듣고는 후일 종소리를 듣자 이것이 해라고 여겼다.
혹자가 그에게 고하기를 “해의 빛은 촛불과 같다.”고 하니, 장님은 촛불을 만져 그 모습을 알고는 후일에 피리를 더듬어 보고서 이것을 해라고 여겼다.
해와 종과 피리는 매우 다른데도 장님이 그 다름을 알지 못한 것은 자신이 일찍이 보지 못하고 남에게서 구하였기(얻어들었기) 때문이다.
도道를 보기 어려움은 해보다도 더 심하고, 사람들이 도道를 통달하지 못했을 적에는 장님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통달한 자가 그에게 도道를 일러줄 적에 비록 훌륭한 비유와 인도함이 있더라도 해를 쟁반과 촛불로 표현한 것보다 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쟁반에서 종으로 가고 촛불에서 피리로 가서 전전하여 서로 헤아려봄에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 도道를 말하는 자들이 혹은 자기가 본 것에 나아가서 명명命名하고, 혹은 보지도 못하고서 짐작으로 말하는 것은 모두 도道를 구하기를 잘못하는 것이다.
도道는 이르게[치致] 할 수는 있어도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손무孫武가 말하기를 “전쟁을 잘하는 자는 사람(적)을 유인하여 오게 하고 사람에게 끌려가지 않는다.”라고 하였고,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여러 공인工人들이 물건을 만드는 공장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루고, 군자君子가 배워서 그 도道를 이르게 한다.”라고 하셨으니,
구하지 않는데도 저절로 오는 것이 이것이 치致가 되는 것이다.
남방南方에 잠수부가 많은 것은 남쪽 사람들은 날마다 물과 함께 살기 때문이니, 일곱 살이 되면 물을 건너고, 열 살이 되면 물 위에 뜨고, 열다섯 살이 되면 잠수할 수 있게 된다.
저 잠수하는 것이 어찌 구차히(우연히) 그렇게 될 수 있겠는가?
반드시 장차 물의 도道를 터득해야 할 것이니, 날마다 물과 함께 살면 열다섯 살에 물의 도道를 터득하고, 태어나면서부터 물을 알지 못하면 장성하더라도 배를 보면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방北方의 용감한 자가 잠수부에게 물어서 잠수하는 방법을 찾고(알아내고) 그 말을 따라 황하에 가서 시험해보면 익사하지 않는 자가 있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무릇 배우지 않고서 도道를 구하기를 힘쓰는 것은 모두 북방北方 사람들이 잠수하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옛날에 성률聲律(음률音律)로 선비를 뽑자 선비들이 이것저것 배우고 도道에는 뜻을 두지 않았는데, 지금에는 경학經學으로 선비들을 뽑자 선비들이 도道를 구할 줄은 알지만 배움에 힘쓰지 않는다.
발해渤海의 오군 언률吳君 彦律(오관吳琯)은 학문에 뜻을 둔 자인데, 지금 막 예부禮部에 천거되기를 구하므로 내가 〈일유日喩〉를 지어서 그에게 고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