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秋之時에 忠信之道闕하야 大國無厭에 而小國屢叛하야 朝戰而夕盟하고 朝盟而夕會하니 夫子蓋厭之矣라
觀周之盛時
에 所制朝覲, 會同之禮 各有遠近之差
하야 遠不至於疎而相忘
하고 近不至於數而相瀆
이러니 春秋之際
엔 何其亂也
오
故로 曰 春秋之盟은 無信盟也요 春秋之會는 無義會也라하니라
雖然이나 紛紛者天下皆是也니 夫子將譏之인댄 而以爲不可以勝譏之也라
春秋之書會 多矣나 書其所會하고 而不書其所以會하니 書其所以會는 桓之稷과 襄之澶淵而已矣라
宋督之亂에 諸侯將討之어늘 桓公平之하니 不義孰甚焉이리오
宋之災에 諸侯之大夫會하야 以謀歸其財러니 旣而요 無歸하니 不信孰甚焉이리오
皆諸侯之大夫어늘 而書曰 某人某人會于澶淵은 宋災故라하니 尤之也요 不書魯大夫는 諱之也라하니라
且夫見隣國之災하고 匍匐而救之者는 仁人君子之心也요 旣言而忘之하고 旣約而背之는 委巷小人之事也라
故로 書其始之爲君子仁人之心하니 而後에 可以見後之爲委巷小人之事니라
且春秋에 爲女子之不得其所而死라하니 區區焉爲人之死하야 錄之면 是何夫子之志不廣也오
澶淵之會에 中國不侵夷狄하고 夷狄不入中國하야 無侵伐八年하니 善之也니 晉趙武, 楚屈建之力也라하니
如穀梁之說인댄 宋之盟은 可謂善矣어늘 其不曰息兵故는 何也오
03. 전연澶淵에서 회맹한 것은 송宋나라 화재 때문이라는 데 대한 논 양공論 襄公 30년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충신忠信의 도道가 무너져서 강대국의 요구가 끊임없자 약소국들이 자주 배반하여, 아침에 싸우고는 저녁에 맹약을 하고 아침에 맹약하고는 저녁에 또다시 회합을 하였으니, 부자夫子(공자孔子)께서 아마도 이것을 싫어하셨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주周나라의 전성기에 대종백大宗伯이 제정한 조근朝覲하고 회동會同하는 예禮에는 각각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어서 멀어도 너무 뜸하여 서로 잊음에 이르지 않고 가까워도 너무 잦아서 서로 번거로움에 이르지 않았는데, 춘추시대에는 어쩌면 이리도 혼란하였는가?
그러므로 “춘추시대의 맹약은 진실한 맹약이 없고, 춘추시대의 회합은 의로운 회합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분紛紛한 자들이 모두 그러하였으니, 부자夫子께서는 장차 이것을 비판하려 하면 이루 다 비판할 수가 없다고 여기셨다.
《춘추春秋》 환공桓公 2년에 “직稷 땅에서 회합한 것은 송宋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쓴 것과 양공襄公 30년에 “전연澶淵에서 회맹한 것은 송宋나라 화재 때문이었다.”라고 쓴 것은 모두 깊이 비판하고 간절히 책망하신 것이다.
《춘추春秋》에 회합을 쓴 것이 많으나 회합한 사실만 썼고 회합하게 된 이유를 쓰지 않았으니, 회합하게 된 이유를 쓴 것은 환공桓公 때의 직稷 땅에서의 회합과 양공襄公 때의 전연澶淵에서의 회합뿐이다.
송宋나라 독督의 난리에 제후諸侯들이 장차 그를 토벌하려 하였는데 환공桓公이 이것을 화해시켰으니, 의義롭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그리고 송宋나라의 화재에 제후諸侯의 대부大夫들이 모여서 재물을 보낼 것을 모의하였는데 결국 재물을 보내지 않았으니, 신의信義가 없음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심하게 의義롭지 못하고 심하게 신의信義가 없는 경우가 아니면 《춘추春秋》의 비판이 여기에 이르지 않았다.
〈회합會合에 모인 자가〉 모두 제후국諸侯國의 대부大夫들인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경문經文에 ‘모인某人, 모인某人이 전연澶淵에서 회합한 것은 송宋나라 화재 때문이다.’라고 표기한 것은 그들을 허물한 것이요, 노魯나라 대부大夫라고 쓰지 않은 것은 기휘忌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웃 나라의 화재를 보고 급히 달려가서 구원하는 것은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의 마음이요, 말해놓고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약속해놓고서 배반하는 것은 위항委巷에 사는 소인小人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인인仁人과 군자君子의 마음이었음을 표기한 뒤에 나중에는 위항委巷에 사는 소인小人들의 일이 됨을 나타낸 것이다.
《춘추春秋》의 뜻이 이처럼 명백한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이르기를 “회합에는 회합한 내용을 말한 적이 없는데, 여기서 회합한 내용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백희伯姬가 죽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여자女子가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죽은 것을 위해 썼다.”라고 표기하였으니, 여자女子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은 것을 위해 《춘추春秋》에서 구구하게 그의 죽음을 기록하였다면, 어찌 그리도 부자夫子의 마음이 넓지 못한 것인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이르기를 “화재가 난 연고를 말하지 않으면 백희伯姬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가 없어서이다.
전연澶淵의 모임으로 중국中國이 이적夷狄을 침략하지 않고 이적夷狄이 중국中國으로 쳐들어오지 않아서 8년이나 침벌侵伐이 없게 된 것을 《춘추春秋》에서 좋게 여긴 것이니, 이것은 진晉나라 조무趙武와 초楚나라 굴건屈建의 공덕이다.”라고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내용과 같다면 송宋나라의 회맹會盟은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병란을 중지시키게 한 연고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그렇다면 좌씨左氏가 《춘추春秋》의 올바른 뜻을 이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