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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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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春秋之時 忠信之道闕하야 大國無厭 而小國屢叛하야 朝戰而夕盟하고 朝盟而夕會하니 夫子蓋厭之矣
觀周之盛時 所制朝覲, 會同之禮 各有遠近之差하야 遠不至於疎而相忘하고 近不至於數而相瀆이러니 春秋之際 何其亂也
曰 春秋之盟 無信盟也 春秋之會 無義會也라하니라
雖然이나 紛紛者天下皆是也 夫子將譏之인댄 而以爲不可以勝譏之也
擇其甚者而譏焉하시니
春秋之書會 多矣 書其所會하고 而不書其所以會하니 書其所以會 桓之稷 襄之澶淵而已矣
宋督之亂 諸侯將討之어늘 桓公平之하니 不義孰甚焉이리오
宋之災 諸侯之大夫會하야 以謀歸其財러니 旣而 無歸하니 不信孰甚焉이리오
非不義不信之甚이면 春秋之譏 不至於此也
左氏之論 得其正矣니라
皆諸侯之大夫어늘 而書曰 某人某人會于澶淵 宋災故라하니 尤之也 不書魯大夫 諱之也라하니라
且夫見隣國之災하고 匍匐而救之者 仁人君子之心也 旣言而忘之하고 旣約而背之 委巷小人之事也
書其始之爲君子仁人之心하니 而後 可以見後之爲委巷小人之事니라
錄伯姬也라하니라
且春秋 爲女子之不得其所而死라하니 區區焉爲人之死하야 錄之 是何夫子之志不廣也
澶淵之會 中國不侵夷狄하고 夷狄不入中國하야 無侵伐八年하니 善之也 晉趙武, 楚屈建之力也라하니
如穀梁之說인댄 宋之盟 可謂善矣어늘 其不曰息兵故 何也
嗚呼
左氏得其正矣로다


03. 전연澶淵에서 회맹한 것은 나라 화재 때문이라는 데 대한 논 양공論 襄公 30년
춘추시대春秋時代충신忠信가 무너져서 강대국의 요구가 끊임없자 약소국들이 자주 배반하여, 아침에 싸우고는 저녁에 맹약을 하고 아침에 맹약하고는 저녁에 또다시 회합을 하였으니, 부자夫子(공자孔子)께서 아마도 이것을 싫어하셨을 것이다.
살펴보건대 나라의 전성기에 대종백大宗伯이 제정한 조근朝覲하고 회동會同하는 에는 각각 멀고 가까운 차별이 있어서 멀어도 너무 뜸하여 서로 잊음에 이르지 않고 가까워도 너무 잦아서 서로 번거로움에 이르지 않았는데, 춘추시대에는 어쩌면 이리도 혼란하였는가?
그러므로 “춘추시대의 맹약은 진실한 맹약이 없고, 춘추시대의 회합은 의로운 회합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분紛紛한 자들이 모두 그러하였으니, 부자夫子께서는 장차 이것을 비판하려 하면 이루 다 비판할 수가 없다고 여기셨다.
그러므로 심한 것을 가려서 비판하신 것이다.
춘추春秋환공桓公 2년에 “ 땅에서 회합한 것은 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키기 위해서였다.”라고 쓴 것과 양공襄公 30년에 “전연澶淵에서 회맹한 것은 나라 화재 때문이었다.”라고 쓴 것은 모두 깊이 비판하고 간절히 책망하신 것이다.
춘추春秋》에 회합을 쓴 것이 많으나 회합한 사실만 썼고 회합하게 된 이유를 쓰지 않았으니, 회합하게 된 이유를 쓴 것은 환공桓公 때의 땅에서의 회합과 양공襄公 때의 전연澶淵에서의 회합뿐이다.
나라 의 난리에 제후諸侯들이 장차 그를 토벌하려 하였는데 환공桓公이 이것을 화해시켰으니, 롭지 못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그리고 나라의 화재에 제후諸侯대부大夫들이 모여서 재물을 보낼 것을 모의하였는데 결국 재물을 보내지 않았으니, 신의信義가 없음이 무엇이 이보다 더 심하겠는가?
심하게 롭지 못하고 심하게 신의信義가 없는 경우가 아니면 《춘추春秋》의 비판이 여기에 이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좌씨左氏의 의논이 옳은 것이다.
회합會合에 모인 자가〉 모두 제후국諸侯國대부大夫들인데,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경문經文에 ‘모인某人, 모인某人전연澶淵에서 회합한 것은 나라 화재 때문이다.’라고 표기한 것은 그들을 허물한 것이요, 나라 대부大夫라고 쓰지 않은 것은 기휘忌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웃 나라의 화재를 보고 급히 달려가서 구원하는 것은 인인仁人군자君子의 마음이요, 말해놓고서 그것을 잊어버리고 약속해놓고서 배반하는 것은 위항委巷에 사는 소인小人들의 일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인인仁人군자君子의 마음이었음을 표기한 뒤에 나중에는 위항委巷에 사는 소인小人들의 일이 됨을 나타낸 것이다.
춘추春秋》의 뜻이 이처럼 명백한데,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이르기를 “회합에는 회합한 내용을 말한 적이 없는데, 여기서 회합한 내용을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백희伯姬가 죽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여자女子가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죽은 것을 위해 썼다.”라고 표기하였으니, 여자女子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은 것을 위해 《춘추春秋》에서 구구하게 그의 죽음을 기록하였다면, 어찌 그리도 부자夫子의 마음이 넓지 못한 것인가?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이르기를 “화재가 난 연고를 말하지 않으면 백희伯姬가 훌륭하다는 사실을 나타낼 수가 없어서이다.
전연澶淵의 모임으로 중국中國이적夷狄을 침략하지 않고 이적夷狄중국中國으로 쳐들어오지 않아서 8년이나 침벌侵伐이 없게 된 것을 《춘추春秋》에서 좋게 여긴 것이니, 이것은 나라 조무趙武나라 굴건屈建의 공덕이다.”라고 하였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내용과 같다면 나라의 회맹會盟은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병란을 중지시키게 한 연고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아!
그렇다면 좌씨左氏가 《춘추春秋》의 올바른 뜻을 이해한 것이다.


역주
역주1 會于澶淵宋災故 襄三十年 : 이 글은 東坡가 젊은 시절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本集에는 제목이 〈論會于澶淵宋災故〉으로 되어 있다. 이 제목은 《春秋》 襄公 30년의 경문을 인용한 것인데, 蘇軾은 《春秋》에 이 글을 표기한 목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고, 아울러 《春秋公羊傳》과 《春秋穀梁傳》의 해설이 잘못되었음을 논하고 있다.
역주2 大宗伯 : 국가의 모든 禮儀를 관장하는 관리로 朝鮮朝의 禮曹判書가 여기에 해당된다. ‘宗’은 宗廟를 뜻하고 ‘伯’은 우두머리로, 《周禮》 〈春官 大宗伯〉에 보인다.
역주3 桓二年 會于稷以成宋亂 : 《春秋》 桓公 2년에 “3월에 桓公이 齊侯․陳侯․鄭伯과 稷에서 회합한 것은 宋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키기 위해서였다.[三月 公會齊侯陳侯鄭伯于稷 以成宋亂]”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杜預의 《春秋左氏經傳集解》에는 “成은 平定이다. 宋나라에 군주를 시해하는 난리가 있었기 때문에 회합하여 평정시키고자 한 것이다. 稷은 宋나라 땅이다.”라고 해석하였으며, 《春秋左氏傳》에는 “魯 桓公이 제후들과 稷에서 회합하여, 군주를 시해한 역적을 제거해서 宋나라의 난리를 평정시킬 것을 상의하였으나 뇌물 때문에 도리어 그를 도와 華氏의 政權을 세워주었다.”라고 해설하였다. 蘇軾 또한 이러한 입장을 취하여 “깊이 비판하고 간절히 책망하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華氏는 華父 督을 가리킨다. 《春秋》 桓公 2년에 “春王 正月 戊申日에 宋나라 督이 그 군주인 與夷(殤公)와 大夫 孔父를 시해하였다.”라고 표기하였다.
이에 대해 《春秋左氏傳》에 “宋나라 華父 督이 일찍이 孔父의 아내를 길에서 만나 눈여겨보고 말하기를 ‘아름답고도 요염하다.’ 하였는데, 2년 봄에 宋나라 督이 孔氏를 공격하여 孔父를 죽이고 그 아내를 빼앗았다. 이에 殤公이 노여워하니, 督은 두려워하여 마침내 殤公을 시해하였다. 君子가 이르기를 ‘督은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은 뒤에 실제로 행동하여 악행을 저질렀다. 그러므로 먼저 그 군주를 시해한 것을 쓴 것이다.’[宋華父督見孔父之妻于路 目逆而送之曰 美而艶 二年春 宋督攻孔氏 殺孔父而取其妻 公怒 督懼 遂弑殤公 君子以督爲有無君之心而後動於惡 故先書弑其君]”라고 하였다.
孔父는 孔父嘉로 孔子의 선조이며, 君子는 孔子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魯 桓公은 제후들과 회합하여 宋나라의 督을 토벌하려 하였으나 뒤에 宋나라로부터 큰 솥을 뇌물로 받고 宋나라의 난리를 평정하려 한 약속을 저버렸다. 여기의 평정은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해서 평정하는 것이 아니고, 화합하여 진정시킴을 이른다.
역주4 襄三十年 會于澶淵宋災故 : 《春秋》 襄公 30년에 “晉人齊人宋人衛人鄭人曹人莒人邾人滕人薛人杞人小邾人會于澶淵 宋災故”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杜預는 《春秋左氏經傳集解》에서 “모든 會合에 그 일을 말한 적이 없는데, 여기에 ‘宋나라의 화재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宋나라 사람들이 私慾을 억제하지도 않고 자책하지도 않고서 회합에 나와서 재물을 요구한 것을 미워한 것이다.”라고 注하였다.
《春秋左氏傳》에는 “宋나라가 화재를 당한 일로 제후의 대부들이 모여 宋나라에 재물을 보내줄 것을 상의하였다. 겨울 10월에 魯나라의 叔孫豹가 晉나라의 趙武, 齊나라의 公孫蠆, 宋나라의 向戌(상수), 衛나라의 北宮佗, 鄭나라의 罕虎 및 小邾의 대부와 澶淵에서 회합하였으나, 회합이 끝난 뒤에 宋나라에 재물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회합에 참여한 卿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君子가 이르기를 ‘信義(約信)는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春秋》에 澶淵의 회합에 참여한 卿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人’이라고 쓴 것은 信義를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후의 上卿으로서 회합하고도 信義를 지키지 않아서 영예로운 이름을 모두 버렸으니, 信義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이와 같다.……經에 ‘某人, 某人이 澶淵에서 회합한 것은 宋나라 화재 때문이다.’라고 표기한 것은 그들을 허물한 것이요, 魯나라 大夫라고 쓰지 않은 것은 諱한 것이다.”라고 해설하였는데, 蘇軾 또한 이러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역주5 公羊傳曰……錄伯姬也 : 伯姬는 魯 宣公의 딸로 宋나라 共公에게 시집가서 夫人이 되었으나 시집간 지 6년 만에 共公이 죽자 34년 동안 홀로 살았다. 共公의 夫人이었으므로 共姬라고도 칭한다. 宋나라의 화재 때에 자신의 거소에 불이 붙자, 주변 사람들이 모두 피할 것을 청하였으나 伯姬는 ‘夫人의 도리는 保姆가 없이는 밤에 堂을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고, 保姆가 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불에 타 죽었다.
《春秋》 襄公 30년에 “5월 甲午日에 宋나라에 화재가 발생하였는데, 宋나라 伯姬가 죽었다.[五月甲午宋災 宋伯姬卒]”라고 보인다. 《春秋公羊傳》에는 伯姬가 법도를 지키기 위해 화재를 피하지 않고 죽은 것을 어질게 여겼다. 그러므로 《春秋》 襄公 30년의 마지막 기사에 ‘晉人齊人宋人衛人鄭人曹人莒人邾人滕人薛人杞人小邾人會于澶淵 宋災故’라고 그 회합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伯姬의 어짊을 드러내고 제후들이 이를 가엾게 여긴 것이라고 해설한 것이다.
역주6 穀梁曰 不言災故……晉趙武楚屈建之力也 : 이 내용은 《春秋穀梁傳》에 그대로 보인다. 趙武(B.C. 598~B.C. 541)는 晉나라 卿으로 시호가 文子이며 趙朔의 아들인데 平公 때에 집정한 대신이었다. 屈建(?~B.C. 545)은 楚나라의 卿으로 이름이 建이며 屈到의 아들인데 康王 때에 令尹으로 있었다.
《春秋穀梁傳》의 이 내용에 대해 東晉의 徐邈은 “晉나라 趙武와 楚나라 屈建이 伯姬의 수절에 대해 감복하였다. 그러므로 그녀를 위해 병란을 그친 것이다. 생각하건대 제후들이 伯姬의 어짊을 안쓰럽게 여겼다. 그러므로 宋나라에 재물을 보내고자 澶淵의 회합을 연 것이다. 이는 서로 침공하지 않고 연이어 회합함을 말한 것이니, 그러므로 伯姬의 어짊을 아는 것이다.[晉趙武楚屈建感伯姬之節 故爲之息兵 其意以爲諸侯閔伯姬之賢 故歸宋財 爲澶淵之會 此不相侵伐 連會言之 故知爲伯姬之賢也]”라고 疏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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