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事在二月而書王二月
하고 事在三月而書王三月者
는 例也
요
至於公之始年
하야는 雖有二月三月之書
나 而又特書正月
하니
三月에 夫人孫于齊라하니 所以揭天子之正朔하야 而正諸侯之始也라
公羊傳曰 緣民臣之心이면 不可一日無君이요 緣始終之義면 一年에 不二君이요 不可曠年無君이라
定公元年에 書曰 王三月에 晉人이 執宋仲幾于京師라한대 先儒疑焉이로되 而未得其當也하니
春秋十有二公에 其得終始之正하고 而備卽位之禮者 四니 文公, 成公, 襄公, 哀公也요 攝而立하야 不得備卽位之禮者 一이니 隱公也요 先君不以其道終하야 而己不得備卽位之禮者 六이니 桓公, 莊公, 閔公, 僖公, 宣公, 昭公也요 先君不以其道終하고 而又在外者 二니 莊公, 定公也요 在外踰年而後至者 一이니 定公也라
且夫先君
이 雖在外
하야 不以其道終
이나 而未嘗有踰年而後至者
하니 則是
에 未嘗一日無君
이어늘 而
라
正月者는 正其君也니 昭公未至하고 定公未立하야 季氏當國하니 而天子之正朔을 將誰正耶아
公羊傳曰 正月者는 正卽位也니 定無正月者는 卽位後也일새니 定, 哀多微辭라한대
而何休以爲 昭公出奔하야 國當絶이요 定公不得繼體奉正이라
07. 정공定公 원년에는 어찌하여 정월이 없는가에 대한 논 정공論 定公 원년
시始와 종終을 주고받는 즈음은 《춘추春秋》에서 매우 삼가 기록하였다.
일이 없으면 수시首時를 쓰고 일이 2월에 있으면 ‘왕이월王二月’이라고 쓰고 일이 3월에 있으면 ‘왕삼월王三月’이라고 쓰니, 이것이 준례이다.
그러나 공公이 처음 즉위한 연도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월二月’과 ‘삼월三月’이라고 쓴 경우가 있으나 또 특별히 ‘정월正月’을 썼으니, 은공隱公 원년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다.
삼월三月에 공公이 주邾나라 의보儀父와 멸蔑 땅에서 맹약했다.”라고 표기하였고, 장공莊公 원년에 “춘왕정월春王正月이다.
삼월三月에 부인夫人(문강文姜)이 제齊나라로 갔다.”라고 표기하였으니, 이것은 천자天子의 정삭正朔을 게시하여 제후諸侯가 처음 즉위한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신민臣民의 마음을 따른다면 단 하루도 군주가 없을 수 없으며, 시始와 종終의 뜻을 따른다면 1년에 군주가 둘일 수가 없고 또 해를 지나도록 군주가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제후諸侯가 모두 해를 넘겨 즉위하고 정월正月이라고 쓴 것이다.
정공定公 원년에 쓰기를 “왕삼월王三月에 진晉나라 사람이 송宋나라 중기仲幾를 경사京師에서 체포했다.”라고 표기하였는데, 선유先儒들이 이것을 의심하였으나 합당한 내용을 찾지 못하였다.
《춘추春秋》에 기록된 노魯나라의 12명의 공公 가운데 종終과 시始의 바름을 얻고 즉위의 예禮를 갖춘 자는 네 명이니 문공文公․성공成公․양공襄公․애공哀公이요, 대신 세워져서 즉위의 예禮를 갖추지 못한 자가 한 명이니 은공隱公이요, 선군先君이 바른 도道로써 끝마치지(죽지) 못하여 자신이 즉위의 예禮를 갖추지 못한 자가 여섯 명이니 환공桓公․장공莊公․민공閔公․희공僖公․선공宣公․소공昭公이요, 선군先君이 바른 도道로써 끝마치지 못하고 또 밖에 있었던 자가 두 명이니 장공莊公과 정공定公이요, 나라 밖에 있다가 한 해가 지난 뒤에 온 자가 한 명이니 정공定公이다.
또 선군先君이 비록 나라 밖에 있어서 바른 도道로써 끝마치지 못했으나 일찍이 한 해가 지난 뒤에 이른 자가 있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저 《춘추春秋》의 242년 동안에 일찍이 단 하루도 군주가 없었던 적이 없는데, 정공定公 원년에 노魯나라의 국통은 정월正月부터 유월六月까지 끊어졌다가 그런 뒤에야 다시 계속되었다.
정월正月을 쓰는 것은 군주가 즉위한 것을 바로잡는 것인데, 소공昭公이 아직 이르지 못하였고 정공定公이 아직 즉위하지 못해서 계씨季氏가 국정을 담당하였으니, 천자天子의 정삭正朔을 장차 누가 바로잡겠는가?
이것이 정공定公의 원년에 정월正月이 없게 된 이유이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 이르기를 “정월正月은 즉위를 바로잡는 것인데, 정공定公에게 정월正月이 없는 것은 즉위가 정월의 뒤에 있었기 때문이니, 정공定公과 애공哀公 연간에는 《춘추春秋》의 기록 가운데에 은미한 내용이 많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하휴何休가 해석하기를 “소공昭公이 외국으로 출분出奔해서 국통이 끊어지게 되었고, 정공定公은 적장자의 지위[체體]를 계승해서 정통正統을 받들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휘諱하여 은미한 말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공昭公이 이미 죽고 정공定公이 또 즉위하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노魯나라에는 결국 군주가 없는 것이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에는 “아버지 소공昭公이 바르게 끝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아들 정공定公이 바르게 시작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정월正月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공莊公 원년에 정월正月을 쓴 것을 보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의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