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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2)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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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今國家待宗室 得如子瞻此議하면 甚善이리라
臣聞之호니 이라하니 宗室之有人 邦家之光이요 社稷之衛也니이다
周之盛時 其卿士皆이니
非王之伯叔父 則其子弟也니이다
逮至하야 天下以爲口實하고 而唐之宗室 不可以一二數 而以功名至宰相者 有하니이다
以來 累聖執謙하사 不私其親하야 幹國治民 不及宗子하야 雖有文武異才 終身不試하니이다
神宗皇帝實始慨然하사 欲出其英髦하야 與天下共之
增立敎養選擧之法하야 行之二十年 出入中外하야 漸就器使로되 而未見有卓然顯聞하야 稱先帝意者하니 豈無其人이리오
蓋朝廷未有以大聳勸之耳니이다
臣伏見호니 令畤 事親篤孝하야 內行純備하고 博學經史하야 手不釋卷하며 吏事通敏하고 文采俊麗하며 志節端亮하고 議論英發하야 體兼衆器하야 無適不宜하니이다
臣嘗見其所著述컨대 筆力雅健하고 博貫子史하니이요 니이다
使其生於幽遠이라도 猶當擢用이어든 而況近託하야 已蒙試用者乎잇가
伏望聖慈 特賜考察하사 召致館閣하야
養其高才而遂其遠業하야 以風動宗室하고 勸示海內하야 成先帝之意
不以臣人微言輕而廢其請也니이다
若後不如所擧인댄 臣甘伏朝典하리이다
謹錄奏聞하고 伏候勅旨하노이다


03. 종실 조령치宗室 趙令畤를 천거한 글
지금 나라에서 종실宗室을 대하기를 자첨子瞻의 이 의논과 같이 할 수 있다면 매우 좋을 것이다.
이 들으니,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 종자宗子는 나라의 이 된다.”라고 하였으니, 종실宗室에 훌륭한 사람이 있는 것은 나라의 영광이요 사직의 보위保衛입니다.
나라가 강성할 적에 그 경사卿士들은 모두 주공周公소공召公, 모공毛公원백原伯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의 백부와 숙부가 아니면 그 자제들이었습니다.
양한兩漢에 이르러 하간헌왕河間獻王동평왕東平王의 덕과 유흠劉歆유향劉向의 문장을 천하가 늘 입에 올려 화제로 삼았고, 나라 종실宗室 중에 이도종李道宗이효공李孝恭처럼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와 이백李白이하李賀와 같이 문장文章이 훌륭한 자를 한둘로 다 셀 수가 없으며, 공명功名으로 재상에 이른 자가 9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건륭建隆 이래로는 여러 성조聖朝에서 겸손한 마음을 간직하셔서 친척들을 사사로이 대하지 않으시어 국사國事를 주관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종자宗子(종친宗親)들에게 미치지 않아, 비록 문무文武의 뛰어난 재주가 있더라도 종신토록 등용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실로 처음으로 이것을 개탄스럽게 여기시고 종친宗親 중에 영걸들을 출사시켜 천하를 함께 다스리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종친宗親을 교육하고 선발하는 법을 더 많이 세우시고, 이것을 시행한 지 20년에 중외中外의 관직에 출입하게 하여 점점 그릇에 따라 등용하였으나, 아직까지 출중하게 드러나 이름이 알려져 선제先帝(신종神宗)의 뜻에 부응하는 자가 있지 않으니, 어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이는 조정에서 크게 분발시키고 권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엎드려 보니, 승의랑 첨서영주절도판관청공사承議郞 簽書潁州節度判官廳公事영치令畤는 어버이를 섬김에 효성이 돈독하여 집안에서의 행실이 크게 구비되었으며, 경전經傳과 역사책을 널리 배워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관리의 업무에 통달하여 밝게 알고 문채文采가 빼어나고 아름다우며, 지절志節이 단정하고 진실되고 의논이 영발英發하여, 몸에 여러 재주를 겸비해서 무슨 일을 맡기든지 적임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 일찍이 그가 저술한 것을 보니 문장이 고상하고 굳세며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를 널리 꿰뚫고 있었으니, 청묘淸廟에 올리는 같은 귀중한 그릇이요, 명당明堂을 지을 수 있는 나무와 나무 같은 좋은 재목입니다.
만일 그가 멀리 초야草野에서 출생했다 하더라도 마땅히 발탁하여 등용해야 할 것인데, 하물며 가까운 황실의 종친으로 이미 등용의 은혜를 입은 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스럽고 인자하신 폐하께서는 특별히 고찰考察하는 은전을 내리셔서 불러다가 관각館閣에 두소서.
그리하여 그의 높은 재주를 길러주고 원대한 학업을 이루게 하여, 종실宗室들을 풍동風動(분발)시키고 해내海內에 권장해 보여서 선제先帝의 뜻을 이루셔야 할 것입니다.
의 신분이 미천하고 말이 가볍다 하여 소청疏請을 버리지 마소서.
만약 뒤에 제가 천거한 것과 같지 않다면 은 기꺼이 조정의 법(처벌)을 받겠습니다.
삼가 기록하여 아뢰고 엎드려 칙지勅旨를 기다립니다.


역주
역주1 薦宗室令畤狀 : 本集에는 이 편 머리에 ‘元祐七年五月初五日 龍圖閣學士 左朝奉郞 知潁州 蘇軾狀奏’라는 25字가 있다. 趙令畤는 宋나라 황실의 종친으로 字는 德麟이다. 元祐 연간에 蘇軾이 知潁州事로 있을 적에 趙令畤는 簽書判官으로 있었는데, 蘇軾은 그의 재주를 아껴 〈趙德麟字說〉을 지어주었고 陳履常(陳師道), 歐陽叔弼(歐陽棐) 등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며 그를 위해 〈秋陽賦〉, 〈洞庭春色賦〉를 지었다.
역주2 詩曰 懷德維寧 宗子維城 : 《詩經》 〈大雅 板〉에 보이는 내용으로 懷德維寧은 德을 간직하여 人民을 편안히 하는 것이며, 宗子維城은 天子의 자제들이 국가를 수호하여 干城의 역할을 함을 이른다. 宗子는 宗親을 가리킨다.
역주3 周召毛原 : 모두 周나라 宗親으로 이들을 네 지역에 봉하여 周公․召公․毛公․原伯이라 칭하였다.
역주4 兩漢 : 前漢과 後漢으로, 前漢은 서쪽인 장안에 도읍하여 西漢이라 하고, 後漢은 동쪽인 낙양에 도읍하여 東漢이라고도 칭한다.
역주5 間平之德 歆向之文 : 間은 河間獻王을 이르고, 平은 東平王을 이른다. 歆向은 劉歆과 劉向으로 劉歆은 劉向의 아들인데 부자가 모두 文學과 經學으로 이름났다. 이들은 모두 漢나라의 宗親이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6 武略如道宗孝恭 文章如白與賀者 : 《新唐書》 〈宗室傳〉을 보면 “國朝의 종실 중에 李道宗과 李孝恭이 가장 훌륭하였다. 李道宗은 突厥을 무찌르고 吐谷渾을 패주시켰으며, 李孝恭은 江陵을 격파하여 蕭銑을 사로잡았으니 그 무공과 지략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 李白은 興元皇帝의 9세손이고 李賀는 鄭王 后의 후손으로 모두 문장이 뛰어나 《唐書》 〈文藝傳〉에 기재되었다.
역주7 九人 : 종친으로 唐나라의 정승이 된 9명을 이른다. 常山王의 손자인 李適之와 長平王의 증손인 李林甫는 玄宗 때에 정승을 지냈고, 吳王 恪의 손자인 李峴은 肅宗 때 정승이었고, 鄭惠王의 증손인 李勉은 德宗 때에 정승이었고, 鄭惠王의 4세손인 李夷簡은 憲宗 때에 정승이었고, 襄邑王의 5세손인 李程과 李石은 德宗 때에 정승이었고, 李石의 아우인 李福은 宣宗과 僖宗 때에 정승이었고, 新興王의 6세손인 李回는 武宗 때에 정승을 지냈다.
역주8 建隆 : 宋나라 太祖의 연호(960~963)이다.
역주9 承議郞簽書潁州節度判官廳公事 : 承議郞은 품계이며 簽書潁州節度判官廳公事는 知府와 함께 공문에 수결하는 낮은 관리이다.
역주10 淸廟之瑚璉 : 淸廟는 太廟 즉 宗廟를 말하며, 瑚와 璉은 모두 宗廟의 제사 때에 黍稷을 담는 祭器로 夏나라에는 四璉이 있고 殷나라에는 六瑚가 있었는데, 玉으로 장식한 귀중하고 화려한 그릇이다. 《論語》 〈公冶長〉에 공자가 子貢을 瑚璉으로 비유하였으므로 후세에는 훌륭한 인재의 비유로 쓰인다.
역주11 明堂之杞梓 : 明堂은 周나라 때 泰山에 있던 궁전 이름으로, 天子가 동쪽으로 巡守하여 諸侯들에게 조회받던 곳이며, 杞梓는 모두 좋은 재목이어서 주로 대들보감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훌륭한 인재의 비유로 쓰였다.
역주12 肺腑 : 뱃속의 폐와 장부로 가까운 친인척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2)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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