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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蘇軾(4)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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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6. 《왕정국시집王定國詩集》의
蘇長公 文不着意로되 結搆者多하니라
소장공蘇長公은 글을 유념하여 짓지 않았으나 결구結搆가 잘된 것이 많다.
태사공太史公(사마천司馬遷)이 《시경詩經》을 논하여 말하기를 “〈국풍國風〉은 여색女色을 좋아하였으나 음탕하지 않고, 〈소아小雅〉는 원망하고 비방하였으나 어지럽지 않다.”라고 하였다.
以余觀之컨대 是特識 烏覩詩之正乎
그러나 나의 입장에서 보건대 이는 태사공太史公은 다만 변풍變風변아變雅만 알았을 뿐이니, 어찌 《시경詩經》의 바름을 보았겠는가?
昔先王之澤衰然後 變風 發乎情하니 雖衰而未竭이라 是以 猶止於禮義하야 以爲賢於無所止者而已
옛날 선왕先王의 은택이 쇠퇴한 뒤에 변풍變風이 인정에서 나왔는데, 비록 선왕先王의 은택이 쇠퇴하였으나 다 없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래도 예의禮義에 그쳐서, 그치는 바가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을 뿐이다.
若夫發於(情)[性]하야 止於忠孝者 其詩 豈可同日而語哉리오
그러나 성정性情에서 나와 충효忠孝에서 그친 것으로 말하면 그 를 어찌 동일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古今詩人 衆矣로되爲首 豈非以其流落飢寒하야 終身不用이로되 而一飯未嘗忘君也歟
옛날과 지금의 시인詩人이 많지만 두자미杜子美를 으뜸으로 치는 것은, 어찌 그가 유락流落하여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종신토록 등용되지 못했으나, 한 번 밥 먹는 짧은 시간에도 일찍이 군주君主를 잊지 않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今定國 以余故得罪하야 一子死貶所하고 一子死于家하고 定國亦病幾死하니 余意其怨我甚하야 不敢以書相聞이러니
지금 왕정국王定國이 나 때문에 죄를 얻어서 바닷가로 좌천된 지 3년만에, 한 아들은 좌천된 곳에서 죽었고 한 아들은 집에서 죽었고 왕정국王定國 또한 병들어서 거의 죽게 되었으니, 나는 그가 나를 심히 원망할 것이라고 여겨서 감히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묻지 못하였다.
而定國 歸至하야 以其所作詩數百首 寄余하니 皆淸平豐融하야藹然有治世之音하야 其言 與志得道行者無異
그런데 왕정국王定國강서江西로 돌아와 영외嶺外에서 지은 수백 를 나에게 부쳐왔는데, 이 들은 모두 내용이 깨끗하고 화평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워 훌륭하게 치세治世음운音韻이 있어서, 그 내용이 뜻을 얻어 를 행한 자와 차이가 없었다.
幽憂憤歎之作 蓋亦有之矣 特恐死嶺外하야 而天子之恩 不及報하야
간혹 속으로 근심하고 분노하고 한탄한 작품도 있었지만 이는 다만 영외嶺外에서 죽어서 천자天子의 은혜를 미처 갚지 못하여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했을 뿐이었다.
이라하시니 定國 且不我怨이어든 而肯怨天乎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왕정국王定國은 나도 원망하지 않는데 하늘을 원망하려 하겠는가?
余然後 廢卷而歎하야 自恨(其)[期]人之淺也로라
나는 이 를 읽어본 뒤에야 시권詩卷을 덮고 탄식하면서 내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너무 낮은 것을 한하였다.
又念昔者 定國 하야 留十日하야 往返作詩幾百篇하니 余苦其多하고 畏其敏하고 而服其工也
또 생각하니, 옛날에 왕정국王定國이 나를 팽성彭城으로 방문하여 열흘 동안 머물 적에 오가며 를 지은 것이 수백 편이었는데, 나는 그 많음을 괴로워하고 그 민첩함을 두려워하고 그 공교함에 탄복하였다.
一日 定國 游泗水하고하야 吹笛飮酒하야 乘月而歸어늘
하루는 왕정국王定國안복 장도顔復 長道와 함께 사수泗水를 유람하고 환산桓山에 올라가서 피리를 불고 술을 마시고는 달빛을 타고 돌아왔는데,
나 또한 이때 황루黃樓 위에 술자리를 베풀어서 대접하고, 말하기를 “이태백李太白이 죽은 뒤에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없어진 지 300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今余老하야 不復作詩하고 又以病止酒하야 閉門不出이라
나는 지금 늙어서 더이상 를 짓지 못하고, 또 병 때문에 술을 끊고서 문을 닫고 밖에 나가지 않는다.
門外數步 卽大江이로되 經月不至江上하야 眊眊焉眞一老農夫也어늘
문 밖으로 몇 걸음만 나가면 바로 대강大江이 있는데도 한 달이 지나도록 강가에 나가지 못해서 흐리멍덩하여 참으로 한 늙은 농부가 되고 말았다.
而定國 詩益工하고 飮酒不衰하며 所至 窮山水之勝하야 不以厄窮衰老 改其度하니 今而後 余之所畏服於定國者 不獨其詩也로라
그런데 왕정국王定國가 더욱 공교하고 술도 여전히 잘 마시며 가는 곳마다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한껏 즐겨서, 곤궁하고 노쇠하다고 하여 그 법도를 고치지 않으니, 지금 이후로 내가 왕정국王定國에게 두려워서 복종하는 것은 다만 그 때문만이 아닐 것이다.
역주
역주1 王定國詩集序 : 이 글은 元豐 6년(1083) 12월에 쓰여졌다. 王定國은 宋나라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로, 이름이 鞏이고 定國은 그의 字이며 자호는 淸虛先生인데, 魏州(지금의 河北省 大名) 사람이다. 眞宗 때 재상을 역임한 王旦의 손자이고 工部尙書를 지낸 王素의 아들이며 張方平의 사위이기도 하다. 東坡와 절친한 사이로 東坡가 烏臺詩案으로 죄를 얻었을 적에 연좌되어 東坡는 黃州로, 王鞏은 賓州로 좌천되었다.
역주2 太史公 : 司馬遷을 이른다. 司馬遷은 字가 子長이며 前漢時代 左馮翊 夏陽(지금의 陝西省 韓城縣) 사람이다. 《史記》의 저자로 중국 사학의 鼻祖로 칭해진다.
역주3 國風好色而不淫 小雅怨誹而不亂 : 이 내용은 《史記》 〈屈原賈生列傳〉에 그대로 보인다.
역주4 變風變雅 : 《詩經》의 〈國風〉 가운데 〈周南〉과 〈召南〉을 正風, 13列國의 風을 變風이라 하며, 《詩經》의 〈小雅〉․〈大雅〉도 正小雅와 正大雅, 變小雅와 變大雅로 구분되는데, 대체로 난세의 것을 變風, 變雅라 한다. 《毛詩》의 大序에 “王道가 쇠하여 禮義가 폐지되고 政敎가 잘못되어, 나라마다 政事가 다르고 집집마다 풍속이 달라짐에 이르러 變風과 變雅가 나오게 되었다.[至于王道衰 禮義廢 政敎失 國異政 家殊俗 而變風變雅作矣]”라고 보인다.
역주5 杜子美 : 712~770. 唐나라의 저명한 詩人으로 이름은 甫이고 子美는 그의 字이며 자호는 少陵野老이다. 鞏縣(지금 河南省 鞏義市)에서 출생하였는데, 일찍이 左拾遺와 工部員外郞의 벼슬을 하였기 때문에 杜拾遺 또는 杜工部라고 칭하기도 한다. 李白과 함께 漢詩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져 李白은 詩仙, 杜甫는 詩聖으로 불리운다. 杜甫는 玄宗 天寶 14년(755) 安祿山의 난리를 만나 玄宗을 따라 成都에 가서 온갖 고생을 겪었는데, 그가 지은 詩에는 思君憂國의 내용이 많다.
역주6 貶海上三年 : 東坡는 神宗 元豐 3년(1079)에 烏臺詩案으로 御史臺의 옥에 갇혔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黃州로 좌천되었는데, 이때 王定國이 東坡와 자주 詩文을 주고받은 일 때문에 연좌되어 조정을 비판하였다는 혐의로 賓州로 좌천되었다. 賓州의 治所는 지금의 廣西省 南寧 동북쪽 賓陽縣에 있었는데, 이곳이 바다와 몇 백 리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東坡가 바닷가라고 말한 것이다.
역주7 江西 : 당시의 江南西路의 약칭이다.
역주8 嶺外 : 당시 賓州는 五嶺 이남에 있었으므로 嶺外라고 한 것이다. 五嶺은 江西, 湖南, 廣東, 廣西 등 네 省의 접경에 위치한 大庾嶺․始安嶺․臨賀嶺․桂陽嶺․揭陽嶺의 다섯 고개를 가리키며, 또는 交阯와 合浦의 경계에 있는 大庾嶺․越城嶺․萌渚嶺․都龐嶺․騎田嶺의 다섯 고개를 가리키기도 한다.
역주9 忝其父祖耳 : 王定國은 名家 출신으로 조부는 眞宗 때 재상을 역임한 王旦이고 부친은 仁宗 때 工部尙書를 지낸 王素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10 孔子曰 不怨天 不尤人 : 《論語》 〈憲問〉에 “子貢이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孔子께서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탓하지 않고, 아래로 〈人間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天理를〉 통달하노니, 나를 알아주는 것은 아마도 하늘이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라고 보인다.
역주11 過余於彭城 : 彭城은 徐州(지금의 江蘇省 徐州市)를 이른다. 東坡는 熙寧 10년(1077)부터 元豐 3년(1080)까지 知徐州事로 있었는데, 이때 百步洪 등에서 아우 子由와 顔復 등과 노닐었다. 王定國이 東坡를 방문하여 열흘 동안 종유한 것은 바로 이때인 듯하다.
역주12 顔復長道 : 顔復(1034~1090)으로 長道는 그의 字인데, 鳧繹先生으로 알려진 顔太初의 아들이다. 仁宗 嘉祐 6년(1061)에 진사로 출사하여 國子直講을 거쳐 哲宗 때에 中書舍人에 이르렀으며 詩文에 능하였다. 앞의 〈鳧繹先生詩集序〉에 보인다.
역주13 桓山 : 江蘇省 銅山縣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魋山으로도 불리는데, 산 아래에 춘추시대 宋나라 司馬 桓魋의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본서 25권에 東坡가 지은 〈遊桓山記〉가 있다.
역주14 余亦置酒黃樓上以待之……世無此樂三百年矣 : 東坡의 〈游百步洪詩敍〉에 “王定國이 나를 彭城으로 방문하여 하루는 泗水에서 작은 배를 노저어 顔長道와 함께 노닐었는데, 북쪽으로는 聖女山에 오르고 남쪽으로는 百步洪까지 내려갔다. 피리를 불고 술을 마시다가 달빛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일 때문에 갈 수가 없었으므로 〈낮에는 함께 가지 못하고〉 밤에 羽衣를 입고 黃樓 위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 서로 마주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李太白이 죽은 뒤에 세상에 이런 즐거움이 없어진 지 300년이 되었다.’라고 하였다.[王定國訪余于彭城 一日棹小舟 與顔長道游泗水 北上聖女山 南下百步洪 吹笛飮酒 乘月而歸 余時以事不得往 夜著羽衣 佇立黃樓上 相視而笑 以爲李太白死 世間無此樂三百餘年矣]”라고 보인다.
羽衣는 鶴이나 황새의 깃털로 만든 옷으로, 당시에 사람이 鶴으로 변하여 神仙이 된다는 전설이 있어 道士들이 자주 입었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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