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蘇軾(5)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범례 |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05. 표충관表忠觀에 대한
通篇 以疏爲序事之文하니 絶是史遷風旨니라
전편이 상소문上疏文으로 서사序事하는 글을 삼았으니, 틀림없이 사마천司馬遷의 풍격이다.
十年十月戊子 資政殿大(太)學士右諫議大夫하노이다
희령熙寧 10년(1077) 10월 무자일戊子日자정전태학사 우간의대부資政殿太學士 右諫議大夫 지항주군주사知杭州軍州事신 조변臣 趙抃은 아룁니다.
墳墓 及其父祖妃夫人子孫之墳者 二十有六이요者 十有一이로되 皆蕪廢不治하니 父老過之 有流涕者하니이다
고 오월국왕故 吳越國王 전씨錢氏분묘墳墓와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부인夫人, 자손子孫의 분묘로서 전당錢塘에 있는 것이 26개소이고 임안臨安에 있는 것이 11개소인데, 모두 황폐하여 다스려지지 않아서 부로父老들이 이곳을 지날 적에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고 復以八都兵으로하고 幷越州하야 以奉而自居於杭이러니 及昌以越叛 則誅昌而幷越하야 盡有浙東西之地하야
삼가 살펴보건대, 고 무숙왕故 武肅王 전류錢鏐는 처음에 지방의 병사들을 이끌고 황소黃巢를 패주시켜 명성이 강회江淮 지방에 알려졌으며, 다시 8개 의 병력으로 유한굉劉漢宏을 토벌하여 월주越州를 겸병하고 동창董昌을 받들면서 자신은 항주杭州에 거주하였는데, 동창董昌월주越州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키자, 동창董昌을 토벌하고 월주越州를 겸병하여 절동浙東절서浙西의 땅을 모두 소유하였습니다.
傳其子하고 至其孫忠顯王仁佐하야하고 而仁佐之弟忠懿王俶 又大出兵攻景하야 以迎周世宗之師러니 其後 卒以國入覲하야 三世四王 與五代 相終始하니이다
그 아들 문목왕 원관文穆王 元瓘에게 전하고, 그 손자인 충현왕 인좌忠顯王 仁佐에 이르러 마침내 이경李景의 군대를 격파하여 복주福州를 점령하였으며, 인좌仁佐의 아우 충의왕 숙忠懿王 俶이 또다시 크게 군대를 내어 이경李景을 공격하고는 후주 세종後周 世宗의 군대를 맞이하였는데, 그 후 끝내 나라를 바치고 우리 조정에 입근入覲하여 3대의 네 왕이 오대시대五代時代와 서로 시종을 같이하였습니다.
天下大亂 豪傑蜂起 러니 旣覆其族하고 延及于無辜之民하야 罔有孑遺어늘
천하가 크게 혼란하자 호걸들이 봉기하였으니, 이때에 몇 의 땅을 가지고 황제皇帝라는 이름을 도둑질한 자들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았는데, 그들은 집안을 전복시키고 화가 죄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미쳐 남은 자가 없었습니다.
而吳越 地方千里 帶甲十萬이요 鑄山煮海하고 象犀珠玉之富 甲於天下이나
그런데 오월吳越은 영토의 넓이가 천 리이고 무장한 군사가 10만 명이나 되며 산에서 구리를 주조하고 바다에서 소금을 구웠으며, 코끼리와 물소와 주옥珠玉의 풍부함이 천하에 으뜸이었는데도 끝내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아서 바치는 공물이 길에 이어졌습니다.
是以 其民 至於老死 不識兵革하고 四時嬉遊하야 歌鼓之聲 相聞하야 至于今不廢하니 其有德於斯民 甚厚니이다
이 때문에 그 백성들이 늙어 죽음에 이르도록 전쟁을 알지 못하고 사시四時에 즐겁게 놀아 노래하고 북 치는 소리가 서로 들려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그 백성들에게 은덕이 있음이 매우 두텁습니다.
황송皇宋이 천명을 받으시자, 사방에 참람하게 난을 일으킨 자들이 차례로 평정되었는데, 강남江南은 지역이 험하고 거리가 먼 것을 믿고는 우리 군대가 그들의 성 밑에 이르러 힘이 꺾이고 형세가 곤궁한 뒤에야 손을 묶고 항복하였으며, 하동河東유씨劉氏는 백 번 싸우며 죽음으로 지켜 왕사王師에 항거해서 해골이 쌓여 성이 되고 피가 흘러 못이 되어서, 천하의 힘을 다하고서야 겨우 이겼습니다.
獨吳越 不待告命하고 封府庫, 籍郡縣하야 請吏于朝하야 眎去其國 如去傳舍하니 其有功於朝廷 甚大니이다
그런데 홀로 오월吳越은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함봉하고 군현郡縣의 호구를 적어서 조정에 관리를 청하여 나라 버리기를 전사傳舍(여관방)를 떠나듯이 하였으니, 조정에 이 있음이 매우 큽니다.
옛날에 두융竇融하서河西 지방을 가지고 나라로 귀순하자, 광무제光武帝우부풍右扶風에게 조칙을 내려 그 부조父祖의 분묘를 수리하게 하고 태뢰太牢로 제사하게 하였습니다.
今錢氏功德 殆過於融이어늘 而未及百年 墳墓不治하야 行道嗟傷하니 甚非所以勸獎忠臣, 慰答民心之義也니이다
전씨錢氏의 공덕이 두융竇融보다 큰데도 백 년이 되기 전에 분묘가 다스려지지 아니하여 길 가는 사람들이 한숨 쉬며 서글퍼하니, 충신을 권장하며 민심을 위로하고 보답하는 의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願以廢佛寺曰妙因院者 爲觀하고 使錢氏之孫爲道士曰自然者 居之하야
은 원하옵건대, 용산龍山의 폐지된 불사佛寺 중에 묘인원妙因院이라는 절을 도관道觀으로 만들고 전씨錢氏의 후손 중에 도사道士가 된 자연自然이라는 자를 이곳에 거주하게 하소서.
凡墳墓之在錢塘者 以付하고 其在臨安者 以付其縣之淨土寺僧曰道微하야 歲各度其徒一人하야 使世掌之하고
그래서 전당錢塘에 있는 분묘는 자연自然에게 맡기고, 임안臨安에 있는 것은 임안현臨安縣정토사淨土寺에 있는 중 도미道微에게 맡겨서, 해마다 각각 승려 한 사람을 하여(출가시켜서) 대대로 관장하게 하소서.
籍其地之所入하야 以時修其祠宇하며 封殖其草木호되 有不治者어든 縣令丞 察之하야 甚者 易其人이면 庶幾永終不墜하야 以稱朝廷待錢氏之意리이다
그리고 그 토지의 수입을 기록하여 수시로 사우祠宇를 보수하며 초목을 봉식하도록 하되,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현령縣令이 살펴, 심한 자는 사람을 바꾸도록 한다면, 거의 영원히 실추하지 않아 조정에서 전씨錢氏를 대우하는 뜻에 걸맞게 될 것입니다.
臣抃 昧死以聞하노이다
신 조변臣 趙抃은 죽을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制曰可라하고 其妙因院 改賜名曰表忠觀이라하니라
에 “하다.”고 하시고, 묘인원妙因院을 고쳐 표충관表忠觀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銘曰
다음과 같이 한다.
하니 龍飛鳳舞하야 萃于臨安이라
천목산天目山에서 초수苕水가 나오니, 산세山勢이 나는 듯 이 춤추는 듯 임안臨安에 모였네.
篤生異人하야 絶類離群하니 奮挺大呼 從者如雲이라
정기가 모여 특이한 사람 내어서 무리 중에 뛰어나니, 떨치고 일어나 크게 고함침에 따르는 자가 구름처럼 많았네.
하늘을 우러러 강물에 맹세하니 달과 별이 어두워졌고, 강한 쇠뇌로 조수를 쏘니 강해江海가 동쪽으로 흘렀네.
殺宏誅昌하야 奄有吳越하니 이라
유한굉劉漢宏을 죽이고 동창董昌을 베어 곧바로 오월吳越 지방을 소유하니, 김권金券옥책玉冊이요 범을 그린 병부兵符와 용을 그린 깃발이었네.
하니 控引島蠻이라
거처하는 곳에 크게 축성하여 산천을 포락包絡(연락)하니, 왼쪽에는 전당강錢塘江이고 오른쪽에는 서호西湖가 있어 섬의 오랑캐들을 견제하였네.
歲時歸休하야 以燕父老하니曄如神人
세시歲時로 돌아와 쉬며 부로父老들에게 잔치를 베푸니, 신인神人처럼 빛나는 분이 옥띠를 두르고 말을 탔네.
四十一年 寅畏小心하야 厥篚相望하니 이라
41년 동안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광주리에 조공하는 물건이 이어지니, 큰 자개와 남쪽 지방에서 나오는 좋은 금이었네.
일새 하야 以待有德이러니
다섯 조정이 혼란하여 나라를 맡길 수 없기에 삼대三代의 왕이 계승하여 서로 후덕한 분 기다렸는데,
旣獲所歸하니 弗謀弗咨하고 先王之志 我維行之
이미 돌아갈 곳을 얻으니 모의하지 않고 묻지 않고 선왕의 뜻 자신이 행하였네.
天祚忠孝하야 世有爵邑하니 允文允武하야 子孫千億이라
하늘이 충효忠孝한 분 도와서 대대로 관작官爵을 소유하게 하니, 진실로 문무文武 겸전하여 자손들이 천억이나 되었네.
帝謂守臣하사되 治其祠墳하야 毋俾樵牧하야 愧我後昆하라
황제께서 이 지역을 지키는 신하에게 이르시되 그의 사당과 분묘를 다스려 여기에서 나무하고 짐승을 방목해서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라 하시었네.
龍山之陽巋焉新宮이니 匪私于錢이라 惟以勸忠이니라
용산龍山의 남쪽에 새 사당 드높이 솟으니, 전씨錢氏에게 사사로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충신을 표하려고 해서이네.
非忠無君이요 非孝無親이니 凡百有位 視此刻文하라
이 아니면 군주가 없고 가 아니면 어버이가 없으니, 모든 지위에 있는 자들은 이 새겨놓은 글을 볼지어다.
역주
역주1 表忠觀碑 : 이 글의 저작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南宋의 傅藻가 지은 《東坡紀年錄》에는 이 글의 저작 시기를 본문의 冒頭에 쓰인 熙寧 10년(1077) 10월로 보았으나, 王文誥는 《蘇文忠公詩編注集成總案》에서 “〈熙寧 10년 10월〉은 바로 碑 가운데 기재된 趙抃이 上言한 날짜이고 비문을 지은 날짜는 아니다. 《金石粹編》에 의거하면 ‘이 글이 元豐 원년(1078) 8월에 쓰였다.’ 하였으므로, 지금 여기에 덧붙여 기재하는 것이다.[此乃碑中所載趙抃上言月日 非撰文年月日也 據金石粹編 書于元豐元年八月 今附載于此]”라고 주기하였다.
역주2 熙寧 : 宋 神宗의 연호로 1068년부터 1077년까지이다.
역주3 知杭州軍州事臣抃 : 知杭州軍州事는 知杭州事로 간략히 칭하기도 하는데, 知는 知州事를 뜻하고 軍州事는 經略按撫使를 뜻하는바, 곧 知州 兼 經略按撫使의 의미이다.
抃은 趙抃(1008~1084)으로 字가 閱道이고 號가 知非子이며 衢州 西安(지금 浙江省 衢縣) 사람이다. 仁宗 景祐 원년(1034)에 進士로 출사하였으며 殿中侍御史,參知政事에 제수되어 중앙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나, 王安石을 반대하다가 외직으로 나가 여러 州의 知州事를 역임하였으며, 元豐 2년(1079) 太子少保로 致仕하였다. 《宋史》에 傳이 있다.
역주4 吳越國王錢氏 : 錢氏는 五代時代 10國 가운데 하나인 吳越國의 錢鏐와 그 자손들을 이르는데, 杭州에 도읍하였다. 吳越國은 황제를 참칭하지 않고 王이라 칭하며 중원의 통치자에게 조공을 바치고 신하의 禮를 잃지 않아 전쟁의 화를 겪지 않았으며, 錢塘江과 西湖의 치수에 힘을 쏟아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였다.
建國의 시조는 錢鏐(852~932)로 字가 具美이고 杭州 臨安 사람이다. 젊은 시절에는 無賴漢이었는데, 唐나라 말기 鄕兵에 투신하여 黃巢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杭州刺史에 임명되었다. 唐나라가 멸망하고 後梁이 서자, 太祖(朱全忠)에 의해 吳越王에 봉해졌다. 後梁이 망하고 李存勗의 後唐이 서자 입공하여 臣下의 예를 갖추어 지위를 인정받았다.
역주5 錢塘 : 고대의 縣 이름으로 지금의 杭州市이다.
역주6 臨安 : 고대의 縣 이름으로 지금의 杭州市에 통합되었다.
역주7 謹按故武肅王鏐……名聞江淮 : 武肅王은 錢鏐의 시호이다. 이 내용은 《五代史》 〈吳越世家〉에 “唐 僖宗 乾符 2년(875)에 浙西의 裨將 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石鑑鎭의 將帥 董昌이 鄕兵을 모아 이들을 토벌하였는데, 이때 錢鏐가 偏將이 되어 王郢을 격파하였다.
黃巢의 무리 수천 명이 浙東을 공격하여 노략질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臨安에 이르자, 錢鏐가 이르기를 ‘지금 鎭에 있는 兵力은 적고 도적들의 병력은 많으니, 힘으로 지키기가 어렵다. 마땅히 奇兵을 내어 기습하여야 한다.’라고 하고, 정예병 20명을 이끌고 산간 계곡에 매복하였다. 黃巢軍의 先鋒이 험한 지형을 모두 單騎로 넘어오자, 錢鏐가 매복해 있다가 쇠뇌를 쏘아 그 將帥를 죽인 다음 정예병을 이끌고 적을 유린하여 수백 명의 목을 베었다. 錢鏐는 ‘이 방법은 한 번만 쓸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적의 大軍이 이른다면 어찌 당해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군대를 이끌고 八百里로 달려가니, 八百里는 地名이다. 錢鏐는 길가의 노파에게 ‘누가 우리의 행방을 묻거든 八百里에 주둔해 있다고 말해줘라.’고 하였는데, 뒤에 노파는 黃巢의 무리에게 그대로 말해주었다. 黃巢의 무리들은 노파의 말을 듣고는 八百里가 지명임을 알지 못하고, 모두 말하기를 ‘지난번에 10여 명의 군대도 우리가 당해내지 못했는데, 하물며 8百 里에 걸쳐 주둔한 대군을 어쩌겠는가?’라고 하고,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乾符二年 浙西裨將王郢作亂 石鑑鎭將董昌 募鄕兵討賊 以鏐偏將 擊郢 破之 是時黃巢衆已數千 攻掠浙東 至臨安 鏐曰 今鎭兵少而賊兵多 難以力禦 宜出奇兵邀之 乃與勁卒二十人 伏山谷中 巢先鋒度險 皆單騎 鏐伏弩 射殺其將 巢兵亂 鏐引勁卒蹂之 斬首數百級 鏐曰 此可一用爾 若大衆至 何可敵耶 乃引兵趨八百里 八百里地名也 告道旁媪曰 後有問者 告曰 臨安兵屯八百里矣 巢衆至 聞媪語 不知其地名 皆曰 嚮十餘卒不可敵 況八百里乎 遂急引兵過]”라고 보인다.
역주8 劉漢宏 : ?~886. 唐나라 말기 武將으로 山東 兖州 사람이다. 僖宗 乾符 6년에 都統 王鐸에게 투항하여 宿州刺史가 되고 黃巢의 난에 越州觀察使가 되었다. 그러다 杭州刺史 董昌을 공격하였다가 錢鏐에게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참수되었다. 《五代史 吳越世家》
역주9 董昌 : ?~896. 唐나라 말기 武將으로 杭州 臨安 사람이다. 僖宗 乾符 2년에 浙西의 裨將 王郢이 반란을 일으키자, 백성들을 모아 鄕兵을 일으켜 石鑑鎭의 鎭將이 되어 王郢을 토벌하였다. 이후 錢鏐와 함께 黃巢의 반란군에 대항하여 杭州를 점령하고 杭州刺史가 되었으며, 越州觀察使 劉漢宏을 토벌하여 越州를 병탄하고 杭州刺史의 직위를 錢鏐에게 넘겨주었다.
董昌은 이후 唐나라 朝廷에 조공하여 隴西郡王에 봉해졌으나, 昭宗 乾寧 2년(895) 자신을 越王으로 봉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자, 반란을 일으켜 국호를 大越羅平國이라 칭하고 稱帝하였다. 그러나 錢鏐에게 토벌되고 자살하였다. 《五代史 吳越世家》
역주10 文穆王元瓘 : 元瓘은 錢鏐의 아들로 後唐 明宗 長興 3년(932)에 吳越國王에 襲封되었다. 文穆王은 元瓘의 시호이다.
역주11 破李景兵 取福州 : 李景(916~961)은 五代時代 南唐의 두 번째 군주이다. 南唐은 10국 가운데 하나인 吳나라를 李昪이 찬탈하여 세운 국가로 수도는 金陵(南京)이었다. 李景은 945년 혼란에 빠진 閩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吳越의 忠顯王 仁佐에게 패하여 福州를 내주었다. 福州는 옛 閩越王國의 땅에 설치된 州의 이름으로 지금의 福建省 福州市이다.
역주12 方是時……不可勝數 : 五代十國時代는 혼란기로, 정통을 이은 다섯 국가 외에도 작은 규모의 국가가 난립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황제를 칭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李茂貞은 鳳翔 일대를 차지하고 國號를 秦이라 하였고, 楊行密은 淮南을 차지하고 國號를 吳라 하였고, 王審知는 福建을 차지하고 國號를 閩이라 하였고, 王延政은 建州를 차지하고 國號를 殷이라 하였고, 劉守光은 幽州를 차지하고 國號를 燕이라 한 따위이다.
역주13 終不失臣節 貢獻相望於道 : 錢氏는 武肅王 錢鏐가 後梁의 朱全忠(太祖)에 의해 吳越國王에 봉해진 이래, 항상 중원을 차지한 국가들에게 스스로 신하를 칭하고 사신을 보내 후한 공물을 바쳤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貢獻은 황제에게 바치는 물품을 이른다.
역주14 皇宋受命 : 皇宋은 大宋과 같은 말로 宋나라에 대한 美稱이다. 受命은 天帝의 명을 받아 건국함을 이른다.
역주15 四方僭亂 以次削平 : 後周의 恭帝에게서 선양을 받아 宋나라를 건국한 太祖는 바로 천하통일에 착수하였는데, 建隆 원년(960)에 반란을 일으킨 昭義節度使 李筠을 親征하여 평정하였고, 建隆 4년에는 荊南을 공격하여 高繼冲의 荊州 일대를 평정하였으며, 開寶 4년(971)에는 장군 潘美로 하여금 廣州를 공격하게 하여 劉鋹의 南漢을 멸망시키고 廣東 일대를 평정하였다.
역주16 蜀江南……力屈勢窮然後束手 : 太祖 乾德 2년(964)에 王全斌에게 명하여 蜀나라를 정벌하게 해서 孟昶의 四川 일대를 평정하였으며, 開寶 7년에 曹彬과 潘美에게 명하여 江南 일대를 정벌하게 해서 李煜을 사로잡고 江南 일대를 평정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17 河東劉氏……僅乃克之 : 河東 劉氏는 五代時代 十國 가운데 하나인 北漢으로 劉嵩이 太原 일대를 거점으로 건국한 나라이다. 太祖 開寶 2년에 北漢을 정벌하기 위해 太祖가 직접 李繼勛, 曹彬 등의 장수들을 거느리고 親征하였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고 철군하였으며, 太平興國 3년(978)에 太宗이 온 국력을 기울여 직접 정벌하고서야 비로소 北漢의 군주 劉繼元의 항복을 받아 太原 일대를 평정할 수 있었다.
역주18 竇融以河西歸漢……祠以太牢 : 竇融(B.C. 16~62)은 後漢 초기의 武將으로 字가 周公이며 平陵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河西 지방에서 벼슬하였는데, 王莽 때에 河西를 점거하고 五郡大將軍이라고 칭하면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後漢의 光武帝가 天水를 점거하고 있던 隗囂와 益州를 차지하고 있던 公孫述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竇融이 河西를 가지고 光武帝에게 귀순함으로써 결정적으로 세력의 균형이 깨져 光武帝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다. 竇融은 이에 涼州牧에 제수되었으며 계속하여 光武帝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後漢의 名門이 되어, 후손들이 여러 명 列侯에 봉해졌다.
太牢는 소와 돼지와 양을 각 1마리씩 올리는 성대한 祭需이다.
역주19 龍山 : 山의 이름으로 지금 浙江省 杭縣 남쪽 5리쯤에 있다. 臥龍山 혹은 龍華山으로 불리기도 한다.
역주20 自然 : 錢氏의 후손으로 道士가 된 자의 道號인 듯하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역주21 天目之山 苕水出焉 : 天目山은 지금의 浙江省 臨安縣에 있다. 東天目과 西天目의 두 봉우리가 있는데, 정상에 각각 못이 있어 마치 한 쌍의 눈과 같다고 하여 天目이라 불린다.
苕水는 苕溪로도 불리는데, 天目山의 동쪽에서 발원한 東溪와 서쪽에서 발원한 西溪가 합류해서 小梅를 경유하여 太湖로 들어간다. 苕水 양안에 苕花가 많이 자라는데, 가을에 이 꽃들이 바람을 타고 물 위로 날리는 것이 마치 飛雪과 같다 하여 苕水로 불린다고 한다.
역주22 仰天誓江 月星晦蒙 : 錢鏐가 越州觀察使 劉漢宏과 싸울 적에 劉漢宏의 군대를 막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은밀히 渡江하려 하였으나 달빛이 너무 밝아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자 갑자기 雲霧가 일어나 사방이 캄캄해져 무사히 渡江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역주23 强弩射潮 江海爲東 : 이 내용은 《宋史》 〈河渠志〉에 “後梁 開平 연간에 武肅王 錢鏐가 방조제를 축조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候潮門 밖에 있었는데, 潮水가 밤낮으로 들이쳐 版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錢鏐가 명하여 彊弩 수백 개로 潮水의 머리를 쏘게 하고 胥山祠에 축원하니, 얼마 후에 潮水가 錢塘江을 피하여 동쪽으로 흘러 西陵에 부딪혔다.[梁開平中 錢武肅王 始築捍海塘 在候潮門外 潮水晝夜衝激 版築不就 因命彊弩數百 以射潮頭 又致禱胥山祠 旣而潮避錢塘 東擊西陵]”라고 보인다.
역주24 金券玉冊 虎符龍節 : 金券玉冊은 金書鐵卷과 같은 말로 帝王이 功臣들에게 나누어주던 契券인데, 철판에 誓詞를 쓰고 金으로 입혔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다.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공신들을 封爵하면서 처음으로 金書鐵卷을 내렸는데, 여기에 “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이 숫돌처럼 닳는다 하더라도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어, 후손에게 대대로 영화가 미치게 하리라.[使黃河如帶 泰山若礪 國以永存 爰及苗裔]”라고 誓詞를 썼다. 《史記 高祖功臣侯者年表》
虎符는 군대를 동원하는 信物인 兵符를 이른다. 구리로 범의 모양을 조각한 둥근 패를 주조한 다음 뒷면에 명문을 새겼는데, 반으로 나누어 오른쪽 반은 조정에서 보관하고, 왼쪽 반은 군대의 장수나 지방 장관에게 주어 군대를 동원할 적에 使者에게 이것을 보여주어 信物로 삼았다.
龍節은 일반적으로는 皇帝의 사신이 가지고 가는 신물로 龍을 그려 넣은 符節을 이른다. 《周禮》 〈秋官 小行人〉에 “천하에 통행하는 여섯 개의 節이 있어서 山國에는 虎節, 土國에는 人節, 澤國에는 龍節을 쓴다.[達天下之六節 山國用虎節 土國用人節 澤國用龍節 皆以金爲之]”라고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황제가 하사한 龍을 그려 넣은 깃발을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역주25 大城其居 包絡山川 : 羅城을 새로 쌓은 것을 이른다. 錢鏐는 당시 淮南節度使였던 楊行密과 蘇州를 두고 대치하였는데, 이들을 막기 위해 秦望山에서부터 錢塘江에 이르는 70여 리의 城을 새로 쌓았다. 《十國春秋》
역주26 左江右湖 : 左江은 錢塘江을 이르고, 右湖는 西湖를 이른다.
역주27 玉帶毬馬 : 이 내용은 《十國春秋》 〈吳越〉에 “後梁의 太祖가 일찍이 吳越國에서 進奏한 使臣에게 ‘錢鏐가 평소 좋아하는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사신이 ‘玉帶와 名馬를 좋아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太祖는 웃으면서 ‘진실로 영웅이로다.’라 하고, 玉帶 한 匣과 격구용 御馬 열 필을 하사하였다.[太祖嘗問吳越進奏吏曰 錢鏐平生有所好乎 吏曰 好玉帶名馬 太祖笑曰 眞英雄也 乃以玉帶一匣 打毬御馬十匹賜之]”라고 보인다.
역주28 大貝南金 : 大貝는 車渠로 큰 조개의 일종인데 크기가 수레바퀴와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며, 渠는 罔(그물)으로도 통하는바, 조개의 껍데기가 수레의 그물 모양과 같기 때문에 이름하였다고도 한다. 《書經》 〈周書 顧命〉에 “大貝와 큰 북은 西房에 있다.[大貝鼖鼓 在西房]”라고 보이는데, 蔡沈은 集傳에서 “大貝는 車渠와 같다.[大貝如車渠]”라고 注하였다.
南金은 荊州와 揚州에서 생산되는 황금으로 값이 일반 황금의 두 배가 되어 雙南金이라고도 한다. 《詩經》 〈魯頌 泮水〉에 “잘못을 깨달은 저 淮夷들이 와서 좋은 보물을 바치니, 큰 거북과 상아와 남쪽 지방에서 나는 金을 크게 바치도다.[憬彼淮夷 來獻其琛 元龜象齒 大賂南金]”라고 보이는데, 朱子의 《詩經集傳》에 “南金은 荊州와 揚州에서 생산된 金이다.[南金 荊揚之金也]”라고 注하였다.
역주29 五朝昏亂 罔堪託國 : 五朝는 五代時代의 다섯 나라인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周를 이른다. 吳越國이 五代時代 동안 독립국으로 있다가 宋나라가 건국되어 五代의 혼란기가 수습되자, 스스로 宋나라에 나라를 바쳤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0 三王相承 : 三王은 삼대에 걸쳐 계승된 錢氏의 왕들을 이른다. 吳越國은 武肅王 錢鏐가 창건하여 아들 文穆王 錢元瓘이 뒤를 이었고 손자인 忠獻王 錢弘佐(仁佐), 忠遜王 錢弘倧, 忠懿王 錢弘俶이 계속하여 뒤를 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당송팔대가문초 소식(5)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